소설리스트

흡혈왕-394화 (394/450)
  • 78화. 화신 (7)

    입가로 피를 흘리는 광명마교주.

    비록 심검은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쳤지만, 그와 상관없이 목숨이 위험한 치명상이었다.

    심검에 담긴 강엽의 의념이 사지백해로 퍼져나가면서 온몸의 경맥을 조각냈던 것이다.

    초월적인 축기량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그조차 오래지 않아 끊기겠지.

    뚜두둑...!

    ‘밀려난다.’

    심검을 밀어내는 미증유의 거력. 강엽은 심검을 꽉 잡은 힘을 감지하고 털어냈지만,

    갑작스러운 빛에 휩싸인 광명마교주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출현했다.

    -오라버니....

    “...명색이 교주인데 약한 모습을 보여주긴 싫구나.”

    싸움을 이어나간들 우열을 뒤집을 방법은 없다.

    광명마교주는 그걸 알면서도, 허리를 꼿꼿이 펴며 오연한 자세로 강엽을 응시했다.

    일순 신색이 회복된 것도 같지만, 강엽은 그가 전력으로 허세를 부린다는 걸 알아봤다.

    ‘진원(眞原)을 불태우는군.’

    수명이라 할 선천지기를 소모하면서 억지로 회광반조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광명마교주도 부정하지 않았다.

    “네가 이겼다, 귀영.”

    담담히 적의 승리를 인정한다.

    전의를 불태웠던 아까 전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신이 뭘 해도 죽는 목숨이라는 걸 알자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본교의 신실한 교도들은 신인의 죽음에 슬퍼하고 노여워하며 마지막 한 사람이 목숨을 불태우리라.”

    광신으로 무장한 미치광이들이, 그들의 교주가 죽는다면 순순히 항복할 리가 만무.

    만약 그들이 옥쇄할 각오로 싸운다면 전쟁의 향방과 상관없이 피해가 커지겠지.

    광명마교주가 심검을 놓으며 말했다.

    “본좌는 항복하겠다.”

    “.......”

    설마 상대가 백기 투항할 줄이야.

    그러나 광명마교주가 천 년의 삶을 이어나간 방식을 생각하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훗날을 기약할 셈이냐?”

    전생술을 익힌 그에게 있어 죽음은 끝이 아니다.

    설령 지금의 생을 마감한다고 해도 다음 생을 통해 얼마든지 재기를 노릴 수 있을 터.

    “본좌를 떠볼 요량이라면 그만두거라.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경맥을 조각조각 끊어놓은 심상의 상처.

    심신 전반에 두루 영향을 행사한 심흔은 광명마교주의 심상까지 덩달아 파괴하고 있었다.

    “본좌에게 다음은 없다. 천 년간 살면서 수없이 죽음을 맞이했지만, 심검에 당한 건 처음이지.”

    억지로 대법을 써봤자 심상에 담긴 전생의 기억을 잊을 테니 사실상 명맥이 끊긴 셈.

    설사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전생술을 시도한들 강엽이 그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혈교와의 대전도 남은 지금, 본교와 싸우다 무림맹이 지리멸렬하면 네 계획도 차질을 빚겠지. 그러나 본좌가 항복한다면 최악은 피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네가 죽는다면 마찬가지 아닌가?”

    항복을 받아내더라도 광명마교주가 목숨을 잃는다면 광신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들은 마구 날뛰겠지.

    그러나 광명마교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내가 신명으로 막을 테니....”

    하긴 교주의 명령이라면 조금은 효과가 있을지도.

    그러나 강엽은 즉답하는 대신 어느새 자신의 좌우에 시립한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광명마교주에게 가장 큰 피해를 봤다고 해도 무방한 이들의 잔념.

    예사란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듯이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고, 불권 또한 나지막이 염불만 외운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지지하겠다는 태도에, 강엽은 도리어 냉철한 이성을 되찾고 판단을 내렸다.

    “...좋다. 대신 조건을 붙이지.”

    “말해라.”

    “항주를 비롯한 모든 점령지를 토해내고 물러나라. 그리고 석탑의 권한을 이쪽에 넘겨.”

    “...그렇군. 그만한 힘을 다루려면 단전의 공력만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심상법과 심상절예의 합일. 여러 심상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만상여의의 심상.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구명절초는 강엽 자신의 내공만으로는 펼칠 수 없는 계륵이었다.

    ‘이번엔 상황이 특수해서 쓸 수 있었지만... 기존의 내공으로는 끽해야 두 개가 한계다.’

    유익의 심상절예, ‘일월쇄태극(日月刷太極)’으로 용맥의 자연지기를 빨아들여 가까스로 유지했을 뿐.

    만약 순수한 기량만으로 만상여의를 쓰려고 했다면 전력을 드러내기도 전에 내공이 고갈되었으리라.

    그렇다고 이제 와서 축기량을 늘리기엔 이미 단전의 크기는 한계에 다다른 마당이니....

    ‘환장하겠군. 전설의 자연경(自然境)이 아니고선 제대로 쓸 수 없는 심상절예라니....’

    천지의 자연지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전설의 경지. 실재하는 것조차 의심스러운 자연경이 아니면 만상여의를 오롯이 다룰 수 없다.

    하지만 강엽은 만상여의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조건이 까다롭긴 해도 제대로 쓰면 광명마교주조차 압도할 수 있는 지고한 공능. 그 진가는 단순히 복수의 심상절예를 쓰는 데만 있지 않았다.

    “...좋다. 석탑의 사용 권한을 넘겨주지. 대신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거다.”

    “물론이다.”

    그렇게 약속을 나누자 두 사람을 둘러싼 심상의 풍경이 파편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예사란과 불권의 의념 역시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엷게 웃으면서 빛에 휩싸였다.

    -강 시주.

    “방장 스님.”

    -고맙네. 그리고... 모쪼록 부탁하네.

    무엇이 고맙고 무엇을 부탁하겠다는 건지.

    불권은 뒷말을 하는 대신 푸근한 미소를 지었고, 강엽 역시 굳이 묻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받게.

    염주알처럼 작은 영롱한 조각. 강엽은 불권이 무엇을 건넸는지 알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심상 조각을 주셔도 되는 겁니까?”

    -뇌물이야. 이 늙은 땡중이 죽으면 못난 제자도 풀려날 걸세. 어쩌면 이미 풀려났을지도 모르고.

    “....”

    -잘못 키웠지. 녀석을 동정해달란 말은 않겠네. 다만... 그 아이가 잘못된 길을 간다면, 이걸로 혼을 내주게.

    “다 큰 어른을 계도한다고 이제 와서 달라질 것 같진 않습니다만...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고맙네.

    그쯤이면 족하다는 듯이 불권은 환한 빛과 함께 천장을 뚫고 승천했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있던 예사란이 빙긋 웃으며 강엽을 향해 말했다.

    -일이 끝나면 일월신교로 가보세요.

    “거기에 뭔가 있나?”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유익과 백무량이 당신을 위해 천산에 기연을 안배한 걸로 알고 있어요.

    유익과 백무량의 안배라.

    예사란의 말대로라면 일월신교에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당신은 오래전 우리가 못 다한 일을 마무리할 존재. 무운을 빕니다, 두 번째 진조여.

    “내세에선 그와 행복하십시오.”

    강엽이 경어를 쓰며 예를 갖추자 잠시 휘둥그레진 예사란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떠나기 전 강엽의 이마에 입맞춤을 한 그녀는 이내 찬란한 빛에 휩싸인 채 하늘로 올라갔다.

    누이의 승천을 지켜본 광명마교주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군.”

    그때쯤엔 심상의 정경이 완전히 깨져나가면서 두 사람 모두 전장에 돌아온 상태.

    타오르듯 붉은 낙조가 하늘을 덮은 가운데 짙은 피비린내가 사방에서 진동한다.

    “교주님...!”

    신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교도들은 패색이 짙은 광명마교주의 몰골에 비명을 지르고,

    무림맹의 무인들 역시 얼떨떨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입을 멍하니 벌렸다.

    폐허가 되어버린 총단의 정경을 둘러본 광명마교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충성스러운 교도들이여, 본좌는....”

    무언가 말하려고 한 순간.

    퍼억-!

    무채색의 거력이 광명마교주의 복부를 뚫고 지나갔다.

    * * *

    갑작스러운 암습에 광명마교의 교도들은 물론 무림맹의 무인들도 경악해서 시선을 들어올렸다.

    강엽의 눈에 차가운 기광이 감돌았다.

    “적미성...!”

    기골이 장대한 근육질의 사내.

    본래라면 소림의 참회동에 있어야 할 그가 무너진 전각 위에서 백보신권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다.

    “뭐가 문제냐, 귀영? 적을 끝장냈을 뿐인데.”

    “정말 몰라서 묻나?”

    “물론 교주가 죽는다면 저 광신도들이 미쳐 날뛰겠지. 하지만 상관없지 않나? 어차피 모조리 죽일 건데.”

    강엽과 달리 적미성은 만전이니 광명마교가 달려들어도 몰살시킬 자신이 있을 터. 그러니 저리 자신감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기껏 협상을 끝내놨더니만.”

    “네놈이 무슨 협상을 했는지 몰라도 난 동의하지 않는다. 사마외도에겐 오직 죽음뿐!”

    이빨을 드러낸 적미성이 파공성을 뿌리며 무릎 꿇은 광명마교주에게 쏘아지는 찰나.

    어디선가 나타난 피투성이 사내가 진로에 훼방을 놓으며 그를 향해 검결지를 휘둘렀다.

    손짓에 따라 일어난 웅혼한 기파. 피로 물든 일사도의 모습을 확인한 적미성이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네놈도 있었군!”

    “크윽!”

    간신히 일으킨 심검으로 적미성을 견제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적미성의 신형이 빛으로 화한 것과 동시에 일사도의 측면에서 나타나 부딪쳐왔던 것.

    ‘저건?’

    일전에 적미성을 상대했던 강엽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적미성은 강하긴 했어도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갇힌 동안에 깨달음이라도 얻었나?”

    어쨌든 가만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적미성의 암습 이후로 적들이 격앙되었으니까.

    “교주님을 옹위하라!”

    “더러운 이교의 죄인들이...!”

    한편 무림맹의 무인들도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앞의 적들부터 쓰러트려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함성을 지르며 도검을 휘둘렀다.

    염왕이 강엽의 옆에 오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임시처방이긴 해도 목숨에 지장은 없다. 한데 네가 하는 걸 보면 교주를 끝낼 생각은 없는 거냐?”

    “...그와 협상을 했습니다.”

    심상세계에서 광명마교주와 나눈 말을 들려주자 염왕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현 상황에선 네 판단이 최선임을 안다. 하지만 저놈이 날뛴다면 승리는 따논 당상 아니냐?”

    심상지경의 고수 한 명이 합세한다면 전력의 저울추는 급격히 기울어질 터.

    그러나 강엽의 안색은 펴질 줄 몰랐다.

    “...광명마교주에겐 아직 남은 수가 있습니다.”

    “음?”

    “그 자신은 선택하지 않을 수지만....”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는다고, 광명마교주의 곁에 모인 이들이 비수를 꺼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강엽을 제외한 모두가 예상치 못한 광경에 아찔함을 느낄 때, 이사도가 피를 흘리며 외쳤다.

    “신인이시여, 저희의 목숨을 바치오이다. 부디 대업을 이루시옵소서!”

    “쿨럭! 너희들...!”

    “저희는 죽어서도 몽상정토에서 교주님을 위한 힘이 될 테니....”

    “안 된다! 몽상정토는 이제...!”

    “교주님이 안 계시면 저희도 없나이다.”

    일사도가 적미성을 막는 사이 교주의 곁에 모인 이들이 차례차례 자결하며 힘을 보탠다.

    이내 적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무림맹의 무인들이 싸움도 멈추고 아연해할 때, 강엽은 광명마교주를 향해 쏘아졌다.

    교도들이 목숨을 바친다고 심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계속 내버려둬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교도들의 자결을 막을 것인가, 교주의 숨통을 끊어서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

    그러나 선택을 할 여지도 없이, 어느새 일어난 광명마교주가 처연한 어조로 말했다.

    “못난 교주를 위해 교도들이 희생했구나.”

    “아직 늦지 않았어. 교도들을 다 죽일 셈이냐?”

    “이미 늦었다.”

    살아남은 교도들이 있으나, 이미 과반의 숫자가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었다.

    “본좌가 항복하고자 한 것은 교도들을 살리기 위함이었느니라. 교도들이 한 명도 남지 않는다면 누굴 위해서 항복을 구걸한단 말인가?”

    쩌저적...!

    계란 껍질처럼 실금이 간 광명마교주의 피부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왔다.

    심상이 깨져나간 영향으로, 몽상정토에 수용하지 못한 힘이 그대로 분출되었던 것.

    강엽이 재빨리 심검을 쥐고 휘두르려 했으나,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에 휘청거렸다.

    ‘빌어먹을...!’

    만상여의를 쓴 여파가 이제야 나타나는 건가.

    마치 피로가 누적되어 근육이 터지듯, 그간 쌓이고 쌓인 부담이 한꺼번에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염왕이 강엽을 대신해서 거합을 가져갔으나 아슬아슬하게 못 미쳤다.

    그 역시 몸이 완전하지 않은 탓에 광명마교주가 빛으로 변하는 것을 잡지 못한 것이다.

    창백하게 굳어진 적들을 둘러본 광명마교주가, 인간의 탈을 벗은 원영신이 되어 포효했다.

    [본교가 멸망했으니 너희들 또한 이 땅에서 영영 사라져야 한다. 이 전쟁에 승자 따윈 없으리라!]

    굳이 손발을 놀릴 일도 없었다. 끓어넘치는 기운을 내뿜기만 해도 전장 전역을 흽쓸 수 있으니까.

    그렇게 광명마교주가 최후의 동귀어진을 쓰고자 태양과도 같은 열기를 쏟아낼 때였다.

    -심상절예 구현.

    누구도 생각지 못한 한 수.

    강엽도, 염왕도, 심지어 적미성도 아닌 다른 이의 심상이 광명마교주의 심장을 관통했다.

    -무극검광.

    [너는...!]

    광명마교주조차 경악했다.

    영롱하게 빛나는 극광(極光)의 심상절예.

    피투성이가 되어 심검을 휘두르는 백서희의 모습에, 광명마교주는 허탈한 감정을 담아 푸념했다.

    [어이가 없군. 혈마도, 진조도 아니고 백무량의 후손 따위가....]

    그 말을 끝으로 눈부신 빛이 번쩍이며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천 년의 세월을 버틴 사내의 덧없는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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