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93화 (393/450)
  • 78화. 화신 (6)

    천지간의 가장 강력한 기운이라는 뇌기.

    심상절예 천뢰무한은 그런 뇌기를 극한까지 벼려낸 정수로, 그 뜨거움은 태양의 열기를 아득히 능가한다.

    그런 뇌기의 세례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가운데, 광명마교주의 전성이 몽상정토를 강타했다.

    [이런, 걸로...!]

    심상지경의 고수도 몇 번을 죽었을 벼락을 연달아 맞고도 버텨내는 호신강기.

    강엽은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이채를 띠었다.

    “그 몸으로 만곡광역을...?”

    저만한 거구를 다 덮을 호신강기를 일으키려면 얼마나 많은 내공이 필요할까.

    그야말로 천하의 용맥을 한 손에 움켜쥐었기에 가능한 일.

    하지만 그것도 끝이다.

    -심상법 혈라지망.

    모든 술법을 장악하는 심상법.

    강엽이 강제하는 심상의 법칙이 몽상정토와 충돌, 거칠게 반발하면서 광명마교주를 압박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마안을 개방, 몽상정토를 두루 파훼했고....

    ‘역시 용맥의 자연지기를 몽상정토에 모았다가 한꺼번에 취하는군.’

    말하자면 몽상정토가 광명마교주의 단전인 셈.

    그렇다면 몽상정토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끼아아아아아아...!

    거신의 배후를 떠받치는 광륜.

    빛의 고리가 삐거덕거리면서 혼백들 일부가 점점이 떨어져나간다.

    마신상을 밀치면서 흑룡을 베어버린 광명마교주가 노성을 토했다.

    [같잖은 수를 부리는군, 진조의 후예!]

    “틀렸어.”

    [음?]

    “이젠 내가 진조다.”

    정마안의 서로 다른 안광이 광륜에 투사, 단단히 결박된 혼백들을 강제로 깨버린다.

    술법을 파훼하는 정안과 정신에 간섭하는 마안.

    두 안법이 상승 효과를 일으키면서 혼백에 걸린 섭혼술을 깨버린 것.

    광명마교의 교도였던 혼백들에겐 통하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은 혼백들은 화들짝 놀라서 떨어져나갔다.

    ‘환신의 심상을 흡수한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는군.’

    강엽을 세뇌시켜 전인으로 삼으려다, 오히려 통한의 역습을 당해서 흡수당한 환신의 망령.

    그의 심상과 합친 정마안은 태생적인 한계를 초월하여 심상절예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광륜을 깨버리는 것도 시간문제.

    광명마교주 역시 그 점을 알고서 달려들었지만, 검붉은 마신상과 흑룡들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죽은 놈들의 심상이 주제도 모르고...!]

    콰아아아아아아!

    대검의 궤적을 따라 대기가 웅웅 진동했다. 검격을 지를 때마다 천둥음이 뒤따라온다.

    그러나 흑룡들은 목이 떨어져나갈 때마다 새로이 생겨났고, 마신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신상이 강림한 문에서 수천의 마귀 군단이 뛰쳐나오면서 고리를 만드는 게 아닌가?

    [......!]

    광명마교주조차 충격을 받고 아연해졌다.

    그가 몽상정토의 혼백들을 이용해 광륜을 만들었듯, 마신상 또한 시커먼 고리를 만들고 있었다.

    더욱 단단해진 마신상이 검격을 몸으로 막아내며 전진한다.

    쾅! 쿠앙! 콰직!

    [힘이...!]

    “예운광.”

    과거 예사란의 오라비였던 초대 교주의 본명.

    거신을 응시한 강엽이 물었다.

    “이래도 천 년의 세월을 갈음할 수 없나?”

    [......!]

    분노가 실린 검격이 대기를 가른다.

    어깨로 대검을 받아낸 마신상이 거신의 복부에 일권을 박고,

    사방의 흑룡들이 거신의 목과 허리, 사지를 물며 운신을 방해.

    마지막으로 해를 가린 일식이 신염의 힘을 빨아들여 음기로 치환, 강엽에게 전달했다.

    [...그런가.]

    광명마교주가 신음하듯 외쳤다.

    [진조가 족쇄였나. 너 스스로 최후의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그를 말소하지 않은 거였군!]

    “이젠 늦었지.”

    강엽의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강해진다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거든. 난 이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 됐다.”

    진조가 그랬듯 영원에 묶인 신세.

    천 년이 지나도,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미칠 때까지 살아가야 하는 불사의 저주.

    강엽의 본능은 진조가 사라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무의식적으로 그를 잡아뒀던 것이다.

    [아니, 틀렸다! 내가 널 죽일 테니까!]

    “할 수 있으면 해봐라.”

    이 순간 둘은 완전히 같은 경지에 올라섰다.

    광명마교주가 천하의 용맥을 쥐었다 한들, 유익의 심상절예에 의해 빼앗기고 있는 처지.

    ‘음양오행의 이치를 다스리는 심상절예.’

    그것이 유익의 심상절예였다. 일월성신의 운행을 심상으로 삼아 삼라만상에 간섭하는 공능.

    용맥의 자연지기는 이제 절반으로 나뉘었고, 강엽 역시 그 힘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었다.

    거기에 몽상정토의 혼백들이 해방되었고....

    -당신을 따르겠다, 귀영.

    -저 간악한 마교주를 무찔러주시오!

    -은공께 우리의 힘을 바칩니다.

    그들은 몽상정토를 나가는 대신 광명마교주에 대한 원한을 불태우면서 강엽의 체내에 모였다.

    개개인의 힘은 미미할지라도 수백, 수천이 모인다면 어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혼백들이 모일수록 다중 심상을 다루면서 입은 내상 또한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다만 강엽에게 오는 혼백들 중에 아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귀여어어어엉!

    오사도의 혼백. 강엽에게 두 번이나 죽은 그녀가 원한을 불태우며 날아들었다.

    그 옆엔 육사도의 혼백까지 있었지만....

    “귀찮다.”

    강엽이 손을 휘젓자 비명을 지르면서 사라졌다.

    [귀영...!]

    꽈드득!

    흑룡이 물어뜯어 너덜너덜해진 거신의 팔뚝이, 마신상의 손날에 잘려나간다.

    운해에 떨어진 대검이 백색 궁전을 불태우는 것을 지켜본 강엽이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언제까지 그 안에 있을 거냐?”

    [뭐...?]

    “나오지 않겠다면 끌어내주지.”

    찰나에 사라진 강엽의 신형.

    마신상의 머리 위에 오른 그가 양팔을 들어 태극을 그리자 서로 다른 심상이 겹치듯 공명했다.

    하나는 극음의 심상절예인 빙부만상,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열왕대극(熱王大極).

    일월성신의 태양.

    유익의 심상과는 별개로 습득한 극양의 심상이 극음의 심상과 충돌, 일대를 거침없이 휩쓸었다.

    반쯤 주저앉은 백색 궁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운해 또한 증발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을 부드럽게 감싼 산천초목.

    운해만 있었던 광명마교주의 심상과는 명백히 다른 정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

    “여기는....”

    -마침내 여기까지 왔군요.

    문득 옆에서 속삭이는 목소리.

    싸움도 잊고 옆을 돌아본 강엽은 긴 머리를 흩날리는 여인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설마 이렇게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예사란?”

    -그래요, 진조의 후예.

    선뜻 긍정한 여인은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호칭은 옳지 않네요. 당신은 그이의 자리를 계승한 존재. 이젠 이렇게 불러야겠죠?

    그녀가 강엽을 보며 엷게 웃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두 번째 진조.

    * * *

    강엽은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진짜 예사란이 아니나, 광명마교주가 수작을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당신은 예사란의 의념이군.”

    -네, 진짜 나는 오래전에 죽었어요. 여기 있는 나는 그녀가 남긴 잔재.

    천 년 전의 종사들.

    진조와 유익, 백무량이 그랬듯 예사란 역시 자신의 의념을 광명마교주의 몸속에 남겨둔 것이다.

    ‘아니, 그들과는 좀 다른가.’

    그녀의 의념이 존재하는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광명마교주가 당신의 영성을 뜯어갔군.”

    -놀랍군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나요?

    “자의로 남겨둔 의념이라고 보기엔 너무 약해.”

    -눈썰미가 좋은데요.

    예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대로 광명마교주... 오라비는 제 영성을 빼앗았죠.

    “당신이 그냥 빼앗길 것 같진 않은데.”

    예사란 또한 심상지경의 고수.

    당시에 막 심상지경에 올랐던 광명마교주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오라버니는 거래를 통해 손에 넣고 싶어했어요. 제가 영성을 포기한다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요.

    그러고 보니 본 기억이 있었다.

    광명마교주의 심상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과거를 엿보지 않았던가.

    그땐 결말까지 보지 못했지만, 만약 예사란이 영성을 넘겨주었다면....

    “그랬다면 진조가 알았겠지.”

    -저도 넘겨줄 생각이 없었어요.

    아무리 혈마를 죽이기 위해서라고 하나, 그녀는 오라비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후손을 남기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편이 차라리 나았어요.

    거신의 형상을 한 광명마교주를 돌아보는 예사란의 눈빛에 북풍한설처럼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만약 후손을 남겼다면 오라버니에게 이용당하거나 진작에 대가 끊겼을 테니까요.

    “그럼 저놈이 어떻게 당신 영성을 빼앗았지?”

    -무덤을 파헤쳤어요.

    그건 예사란에게도 예상 밖이었다.

    -오라버니는 저보다 먼저 죽었지요. 그래서 무덤을 숨겨야겠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가 전생술(轉生術)을 통해 이전의 기억을 계승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당시엔 진조 또한 떠난 지 오래였기에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심상지경의 고수는 죽은 뒤에도 시신에 의념이 남아요. 저 같은 경우엔 더 짙게 깔려 있었지요. 가루라의 영성을 타고났으니....

    그렇게 시신에 남은 영성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의념 또한 빨려나온 것이다.

    -오라버니를 멈춰주세요. 그는 어떤 의미에선 혈마 이상으로 미쳐버린 괴물입니다.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다.”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광명마교주가 살아남는다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닐 터.

    -대가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걸 드리지요.

    예사란이 내민 손을 맞잡은 강엽은 그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따뜻한 기운을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이 진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당신을 아들처럼 여겼을 거예요.

    피가 이어지진 않았으나 진조에 의해 흡혈귀로 다시 태어났으니 부자(父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강엽이 말을 잇지 못하자 예사란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 당신은 제 자식이나 다름없어요. 이건 어미가 자식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이건....”

    -당신이 순수한 흡혈귀였다면 제 영성이 독처럼 작용했겠지만... 일월성신의 영성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가루라의 영성조차 능히 품을 겁니다.

    일월성신이나 용혈에 비하면 비할 데 없이 작았지만, 지금의 강엽에겐 엄청난 보물이었다.

    가루라의 영성이 스며든 순간 척추를 타고 전율이 내달렸다.

    ‘부족한 조각이 채워졌다.’

    음으로 치우친 몸의 성질이 균형을 되찾았다.

    물론 음양의 균형이 안 맞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오히려 흡혈귀라면 음기가 더 커야 한다.

    -당신은 진조를 초월한 존재가 될 거예요. 살기 위해 타인의 피에 의존할 필요도, 태양을 두려워해서 어둠 속에 숨을 필요도 없습니다.

    “.......”

    경지가 높아지면서 태양의 영향에선 벗어났지만, 피를 마셔야 하는 흡혈귀의 한계는 벗어나지 못했다.

    한때는 피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고 나선 반쯤 체념했다.

    한데 진조가 되고 난 이후에 그 길을 찾다니.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씁쓸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귀여어어어엉-!]

    반쯤 허물어진 거신의 심장이 볼록해지면서 산발이 된 광명마교주가 튀어나왔다.

    핏발이 선 눈으로 강엽과 그 옆에 선 예사란을 노려보면서 심상절예를 내지른다.

    재빨리 예사란의 앞을 막은 강엽이 검결지를 세웠다.

    콰직!

    하늘을 가르는 심상절예가 유리처럼 깨져나간다.

    눈을 부릅뜬 광명마교주를 향해 강엽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약해졌군.”

    “뭐...?”

    당황해서 육성을 토해내는 광명마교주의 모습에 강엽은 북해에서 만났던 일월신교주를 떠올렸다.

    신인이라 불리는 마교주들도 마지막 순간엔 평범한 인간과 진배없었다.

    “그럼 인간답게 싸워보자고.”

    아무리 혼백들이 도와주고 용맥의 자연지기를 강탈했다지만 강엽 역시 한계에 달한 상태.

    몸에 부담이 되는 심상절예들을 수습하면서 마주 달려나갔다.

    촤악! 투학!

    심검이 충돌하고, 심상의 정경이 깨져나간다.

    -아아, 신인이시여...!

    -교주님!

    거신의 배후에서 광륜을 이루었던 광명마교도의 혼백들은 이제 교주에게 스며들었다.

    교주의 심신에 새겨진 심흔을 치유하면서 승산 없는 싸움을 어떻게든 이어간다.

    예사란이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때, 그녀의 옆엔 어느덧 깡마른 노승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명마교주에게 스며든 불권의 의념이, 조용히 염불을 외우며 최후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푸각!

    광명마교주의 심검이 어깨를 스치는 사이, 강엽의 심검이 그의 가슴팍을 깊숙이 찔렀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멎으면서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

    입술 사이로 피를 흘린 광명마교가 인상을 구기며 구시렁거렸다.

    “...더럽게 아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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