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화신 (5)
사방이 탁 트인 광활한 개활지.
조금 전까지 있었던 광명마교의 경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태산처럼 거대한 부처만이 보인다.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이라는 건가?”
손오공이 암만 신통한 도술을 부려도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서유기의 고사가 떠오른다.
시험 삼아 경파를 날려봤지만, 부처에게 닿기도 전에 증발했다.
[소용없다는 걸 알 텐데.]
찬란한 별바다에서 전성이 꽂힌다.
[여긴 영원한 뇌옥이다. 풀어주기 전엔 빠져나갈 수 없는, 불권이 만든 참회동이지.]
물론 진짜로 영원한 건 아니다.
제아무리 불권이라 한들 영원히 심상절예를 펼칠 수는 없었으니까.
하나 갇힌 사람이 영겁의 세월에 사로잡혀 마모된다면 그것이 영원과 무엇이 다를까.
‘무량여래지망은 영원히 이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그 시간을 무량대수로 받아들인다.’
일 각이 여삼추라고 하지 않던가.
실제론 짧은 시간일지라도 삼 년처럼 느껴진다는 뜻.
여기서 수십 년이 지나도 실제로 흐른 시간은 찰나처럼 짧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낚는 부처의 그물.
“손오공이 오행산에서 오백 년 동간 갇혀 있었다고 했던가?”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본 강엽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일 년만 갇혀 있어도 답답해서 죽겠는데.”
별들이 촘촘히 박힌 별바다는 아름답긴 해도 저것만 계속 봤다간 미쳐버리겠지.
[실제로 많은 마두들이 불권의 심상절예에 당했지. 눈 깜빡 안 하고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대마두들조차 세월 앞에선 답이 없었다.]
“그래서 날 붙잡아두려고?”
한없이 세월을 늘린 심상절예.
저항할 수단이 없다면 그야말로 무적이겠지만, 강엽은 여기서 천년만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진조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라는 듯 육신을 감싼 마신갑을 통해 강렬한 기운을 발산했다.
우격다짐으로 뚫고 나간다면 엄청난 공력을 소모하겠지만, 광명마교주 역시 타격을 받을 터.
[염려 마라. 그런 식으로 붙잡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다고 네가 붙잡힐 상대도 아니고.]
잘 아는군. 강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심상절예를 박살내기 위해 공력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구구구구궁......!
마신갑의 기운이 호응, 기파가 확장하면서 일대의 공간을 뒤흔든다.
그렇게 강엽이 하늘을 향해 심검을 들어올린 순간.
[해서 본좌 또한 너를 진지하게 상대해주기로 했다.]
지금껏 강엽을 떠받치고 있던 부처의 손바닥이 그를 움켜쥐려고 손가락을 한껏 오무렸다.
아슬아슬하게 손가락 틈새를 통과하자 반장을 했던 손바닥이 뺨을 후려칠 기세로 날아온다.
움직임 자체는 파리를 쫓는 것마냥 단조로웠지만 실제 속도는 음속을 가볍게 돌파.
콰아아아아앙!
주먹과 손바닥이 맞닿았을 뿐인데 흡사 태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둔중한 충격이 울렸다.
‘혈무화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군.’
몸을 핏빛 안개로 바꾸는 능력. 그게 심상의 경공과 합쳐지면서 강엽 역시 소리보다 빠르게 빠져나왔다.
그게 아니었다면 저 한 수에 피떡이 되었겠지.
쩌적! 쩌저저저저적...!
광명마교주가 다루는 부처상의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그 안에서 황금의 신염이 흘러나온다.
[본좌는 다중 심상을 다루지 못한다. 그렇기에 불권의 심상을 본좌의 심상법과 합쳤지.]
부처는 사라지고, 황금의 신염을 몸에 두른 거신(巨神)이 나타났다.
별바다 아래엔 광활한 운해가 깔리고, 구름의 수평선 너머로는 반쯤 저문 낙조가 걸린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상아로 만든 듯한 새하얀 궁궐.
“몽상정토...!”
[전에 본 적 있지. 오사도를 만나지 않았더냐.]
광명마교주와 염왕의 싸움에 휘말렸을 때 우연찮게 갔던 심상세계.
그때와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가운데, 사방에서 노래가 들려왔다.
빛으로 이루어진 인영들이 가루라의 화신을 찬송하면서 거신의 배후에서 빛의 고리를 그린다.
몽상정토의 혼백들, 그들이 만든 광륜(光輪)이 거신을 수호하면서 힘을 더한 것.
‘광명마교도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상단전의 영성이 속삭인다.
몽상정토에 끌려온 시점에서 저들은 섭혼술에 걸린 것처럼 광명마교주에게 충성을 바친 거라고.
[너는 운명의 세 별이라 불릴 만하다. 잠재력만 보면 혈마와 맞먹지. 어쩌면 능가할지도 모르겠군.]
거신이 된 광명마교주가 강엽을 굽어본다.
눈동자 없이 창백하게 번뜩이는 눈매가 강엽을 쫓은 순간, 거신의 수중을 타고 불꽃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본좌는 그조차 초월했다.]
마찬가지로 황금의 신염으로 이루어진 대검.
직감적으로 저것이 광명마교주의 심검임을 깨달은 강엽이 눈썹을 치켜떴을 때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대검이 운해를 쪼개버렸다.
‘장 단위로 말할 게 아니군.’
검격 한 번에 십 리에 달하는 운해가 갈렸다. 대검의 간합도 놀랍지만, 경파의 범위는 얼마나 초월적인가.
만약 현실에 이런 게 튀어나온다면 천하를 멸절시켜버릴 수도 있겠지.
천하의 용맥과 몽상정토의 혼백을 장악한 광명마교주에게 불가능한 일 따윈 없었다.
그야말로 지상에 강림한 현인신(現人神).
‘조문은 기대할 수 없어. 그래도 감각이 있다면 눈을 찔러보는 것도....’
상념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쿠와아아아아아!
뜨거운 섬광이 대기를 가로질렀다.
간발의 차로 피했지만 마신갑으로도 열기를 완전히 막진 못해서 피부가 익는다.
[흡혈귀의 약점은 태양. 가루라는 태양에서 태어났으며, 그렇기에 태양의 양기를 지녔지.]
이 세상 열양지기의 근원.
어쩌면 천지만물의 자연지기보다도 강할지 모르는 힘이, 거신의 대검에 모여들었다.
검격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심상절예를 뛰어넘은 만큼 정통으로 맞으면 강엽이라 해도 위험하다.
아니.
‘나라서 더 위험하지.’
삼화취정, 나아가 심상지경에 오르면서 태양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지만.
그 힘을 체내에 직접 때려박는다면 흡혈귀의 재생력이라 해도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다.
광명마교주 역시 말했다.
[이 힘이야말로 진조 그대가 바랐던 결말이다.]
강엽, 아니 그를 감싼 마신갑에 시선을 고정하면서 광명마교주가 웃음기를 띠었다.
[그대는 영생에 지친 나머지 죽음을 갈망했지. 자결을 해도, 스스로 몸을 가루로 만들어도 그대는 죽지 못했다. 마치 저승의 명부에서 스스로 이름을 지워 불사신이 된 화과산 원숭이처럼 말이다!]
저승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고 서왕모의 반도(蟠桃)를 먹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미후왕.
광명마교주는 진조를 손오공에 비유하며, 자신이야말로 그를 해방시켜줄 구원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천 년 전부터 생각했다. 그대를 죽일 수 있다면, 혈마를 못 죽일 것도 없다고.]
“...너 스스로 초대 교주라고 주장하는 거냐?”
[불권에게 듣지 못했나? 본좌는 초대를 비롯한 역대 교주들의 집합. 그들의 영성과 혼백이 대대로 이어지며 본좌에게 이어졌으니.]
산봉우리보다 거대한 신염의 권격이 대기를 가르고 머나먼 별바다 너머로 쏘아진다.
[본좌야말로 예사란의 오라비이며, 유일한 가루라의 화신이니라.]
그렇게 말하는 순간, 신염의 대검에서 무지막지하게 농밀한 공력 파동이 쏟아졌다.
강엽조차 접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거력.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쪼개버릴 심상의 태동.
-......!
알아차렸을 때는 늦었다. 이미 심상절예의 검격에 운해가 끝까지 갈라진 뒤였으니까.
“...커억!”
귀가 먹먹하고 눈이 타오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강엽은 자신이 백색 궁전 깊숙이 처박혔다는 것을 알고 신음했다.
‘상처가....’
바로 재생되지 않는다.
마신갑이 보호했음에도 기혈이 들끓고 맥이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 동자료혈을 통해 들어온 열양지기가 뇌까지 헤집으며 사고를 방해한다.
[...정신 차려라!]
보다못한 진조가 더 힘을 쏟아부었지만, 재생과 파괴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죽어갈 뿐.
오장육부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강엽이 엎드린 채 피를 게워내자 거신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가련하군. 진조와 그 후계자. 그대들은 노력했지만, 천 년의 세월을 갈음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무려 천 년간 힘을 쌓은 존재.
천하의 용맥과 만인의 혼백, 천하제일인의 심상까지 손에 쥐었으니 당적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강엽은 일어섰다.
콰직!
수중의 돌부러기가 부서진다. 하얀 가루가 바람을 타고 운해 끝에 걸린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심상절예 구현.
온전치 않은 몸으로 쓰는 심상절예.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빙부만상.
얼음이 모든 것을 덮을지니.
지난날엔 심극으로밖에 못 썼지만, 유익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후엔 빙극의 심상 역시 대성했다.
과정 따윈 생략한 듯 찰나에 세상을 덮은 설원.
백색 궁전와 운해는 물론, 산처럼 거대한 거신 역시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얼음에 갇힌 나머지 불꽃을 잃고 새카맣게 꺼져간다.
[...그래봤자 시간벌이일 뿐.]
쩌억! 쩌저저적!
얼음에 균열이 일며 황금의 불꽃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이내 심상절예의 얼음이 완전히 녹아내리면서 빛을 되찾은 거신이 관절을 뚜둑 꺾었다.
[제법 괜찮은 수였다. 북해빙궁의 궁주들도 이만한 한빙지기를 다루지는 못했거늘.]
그 사이에 재생에 성공한 강엽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거신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이라면 북해에서 싸웠던 일월신교주와 다시 싸워도 수월하게 이길 수 있을 터.
한데도 광명마교주에겐 못 미치는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마신갑을 타고 진조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 역시 저놈과 같은 경지에 올라야 한다. 그래야 동일선상에 설 수 있을 터.]
심상절예와 심상법의 합일.
일찍이 진조가 오른 경지를 이룩해야만 광명마교주와 대등한 눈높이에서 싸울 수 있으리라.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잠깐, 그건....”
[후계자야,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진조는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만약 마신갑에 얼굴이 있다면 쓴웃음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넌 심상법을 짐을 불러내는 데만 쓰고 있다.]
광명마교주가 술법을 쓰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있지만, 그건 의미가 없었다. 정작 심상법인 몽상정토를 억누르진 못했는데 무슨 소용인가?
[짐은 오랫동안 죽음을 바랐다. 죽음이야말로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안식이었기에.]
진조는 오래전에 죽었다. 강엽의 안에 존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잔재일 뿐.
하나 잔재가 존재하는 시점에서 진조가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터.
[실은 네 녀석이 혈무화를 얻었을 때부터 이리 되었어야 했지. 하지만 네 녀석은 짐을 없애버릴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
진조의 말대로 이전에 혈무화를 습득했을 때, 진조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했다.
이미 강엽은 완전한 진조였다.
[제법 정들긴 했지. 네 녀석과 함께하는 여정이 즐겁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헤어져야 할 때다.]
“...꼭 그래야 하나?”
[누구나 유년기의 끝을 맞이하는 법이지. 짐 역시 혈마와 싸울 때까지는 너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세상 만사 뜻대로 되진 않는구나.]
진조가 씩 웃었다.
[하산해라, 후계자야.]
쩌저적...!
마신갑의 표면이 깨져나간다.
강엽의 안에서 진조의 존재가 흐릿해지면서, 그가 남긴 최후의 힘이 강엽에게 전해졌다.
지금껏 무의식적으로 막고 있던 둑이 깨지고, 서로 다른 두 강물이 합쳐지면서 대해를 이룬다.
심상절예와 심상법.
“...그래, 언젠가는 올 날이었지.”
장성한 제자는 스승의 문하를 떠나기 마련.
다만 지금까진 그 기일을 최대한 늦추었지만, 진조가 먼저 떠나버림으로써 미룰 수 없게 됐다.
“마지막까지 멋대로 구는 게 참 당신답군.”
여전히 진조는 증오스러운 존재였다.
그가 자신에게 한 짓, 의지와 상관없이 흡혈귀로 만든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고, 과거를 보고, 함께 싸우면서 정이 든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
강엽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그의 몸에 마신갑은 없다.
기운은 더욱 고요해져서 얼핏 전의를 잃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슬픈가 보군.]
광명마교주는 공격하지 않았다. 강엽에게 입은 심흔을 털어내느라 약간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금방 재회할 것이다. 본좌는 불결한 흡혈귀를 이 신성한 전당에 놓을 생각이 없거든.]
“아니.”
강엽이 붉은 안광을 빛내는 것과 동시에 사방의 하늘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운해고 궁전이고 할 것 없이 부서지면서, 몽상정토의 풍경에 오점을 남긴다.
“죽는 건 너다.”
[고작 그 정도 힘으로?]
강엽은 대답하는 대신 수중의 심검을 들었다.
심검이라고 해도 광명마교주의 대검과 비교하면 티끌처럼 작았다.
“한 가지는 인정하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천 년의 세월을 갈음하진 못해.”
그건 재능이나 노력과는 관련없는 세월의 영역. 강엽이 진조의 영성을 이었어도 광명마교주가 견딘 천 년의 간극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만 천 년을 견딘 게 아니다.”
손등에 새겨진 태양과 달의 문양이 빛나고, 피부와 하나가 된 용혈의 호신갑이 울부짖는다.
-심상절예 구현.
그가 이어받은 유산엔 진조가 남긴 심상도 있었다.
-만상여의(萬象如意).
심상의 파동이 동심원처럼 퍼진 순간, 저 끝에 걸린 태양이 어두워졌다.
과거 일월신교주가 보여주었던 일식.
그 현상을 깨달은 광명마교주가 멈칫할 때, 이번엔 운해가 어두워지면서 창백한 벼락이 명멸했다.
그 사이로 시커먼 사슬들이 올라오며 용의 형상을 이루어 광명마교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유익과 백무량의 심상인가! 하지만...!]
신염의 대검이 용들의 목을 추수하기 위해 휘둘러지는 찰나였다.
허공에 거대한 문이 열리면서, 검붉은 거인의 팔이 광명마교주의 안면을 강타했다.
[이건...!]
그 사실에 광명마교주가 전율하고, 강엽은 피눈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몰골로 그 광경을 노려봤다.
‘역시 한꺼번에 불러내는 건 아직....’
완성된 진조의 육신이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경혈이 찢어질 만큼 치명적인 고통.
하지만 강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흑룡들이 광명마교주의 사지를 붙잡는 사이, 문을 찢고 나타난 마신상이 그의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큭, 세 사람의 심상절예를 불러낸 거냐!]
“내 건 왜 잊나?”
[무어라?]
파지지지지지직......!
흑운 사이에서 빠직거리는 벼락이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면서 거검을 이룬다.
자성검법을 통달하면서 이룩한 심상절예.
지난날 일월신교주의 숨통을 끊은 뇌격이, 거신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