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화신 (1)
무림의 태산북두이자 불문의 성지.
소림을 눈앞에 둔 괴뢰마는 뜻밖의 사태를 직면하고 얼떨떨해졌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무림의 경험이 풍부한 그조차 잠시 머리가 굳어졌다.
작전대로라면 그가 바깥에서 분신들과 함께 소림을 휘저을 때, 구사도가 몰래 잠입해야 한다.
하지만 소림은 이미 한바탕 수라장으로 변한 뒤였다.
-우오오오오오오!
마치 그림자를 뭉쳐 만든 듯한 시커먼 괴력난신.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되, 이목구비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견문이 넓은 괴뢰마도 처음 봤으나, 배분 높은 승려들은 괴물의 정체를 아는지 파리하게 질렸다.
“그때 없앤 게 아니었단 말인가?”
“어찌 심마가 또...!”
괴물의 정체는 불권의 심마였다.
일찍이 강엽과 염왕이 해치웠던 놈이 며칠 뒤에 다시 나타난 것.
‘...단단하군. 저 정도면 금강불괴나 다름없다.’
사대금강 둘과 십팔나한 태반이 자리를 비운 지금, 소림의 전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태.
남은 이들이 합공의 수치를 내려놓고 한꺼번에 달려들었으나 좀처럼 제압하지 못한다.
‘십팔나한이야 그렇다 쳐도, 사대금강은 심극을 쓰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밀릴 줄이야.
내심 혀를 내두르는데 전음이 고막을 때렸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에게 나쁠 건 없지.]
혼란을 틈탄다면 불권을 죽일 수 있으리라.
구사도 역시 같은 생각인지 작전대로 하겠다고 알린 뒤에 멀어졌다.
괴뢰마는 소림승들과 정체불명의 괴물이 싸우는 걸 은밀히 지켜보면서 기감을 확장했다.
그러다 이상한 것을 감지했다.
소림승 한 명이 몰래 경내를 빠져나가 산길을 통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게 아닌가?
모종의 결심을 한 듯 굳은 각오가 어린 얼굴.
‘지원군을 요청하러 가나?’
막아야 하나, 아니면 내버려둬야 하나.
괴뢰마도 섣불리 판단하지 못했다.
* * *
조심스레 이어지는 발소리.
명상을 하듯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던 적미성은 눈을 번쩍 떴다.
저 앞에 있는 죄수들이 아우성을 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참회동에 들어왔다.
“...엉? 밥 나올 때는 아닌데?”
다른 뇌옥에 갇혀 있던 털복숭이 쌍둥이 중 형이 엉덩이를 긁적이던 손으로 코를 후비적거렸다.
맞은편에 갇혀 있던 암야마독이 질색했다.
“이런, 씹. 더러운 새끼....”
“피차 더러운 건 매한가지 아니우? 댁 머리도 개기름이 좔좔 흐르는데?”
“닥쳐! 내가 더러워도...!”
“입에서 똥내도 풍기고.”
“....”
오랫동안 씻지 못해 풍기는 악취였지만 암야마독의 입을 다물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소란이 잦아들었을 무렵 가사를 걸친 젊은 소림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게 와서 송구합니다, 적 사백.”
“오랜만이다, 각정.”
멸마림의 아라한들과는 달리 적미성은 사질의 등장에도 그리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다들 진정해라. 이 녀석은 내 협력자다.”
“무종 사부님께 사사한 이대제자 각정이 삼가 여러 사숙들께 인사드립니다.”
무종은 아라한들과 같은 항렬로, 지난날 그들을 잡은 십팔나한의 수장 무각의 사제이기도 했다.
“무종의 제자라... 대사형께서 사질을 회유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갈마중의 말에 적미성이 입매를 틀어올렸다.
“이십 년 전에 마인에게 죽을 뻔한 이 녀석을 구해줬지. 사실 각정을 소림에 들여보낸 게 바로 나다.”
“예?”
“이 녀석 말고도 몇 명 보내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녀석만 본산제자가 되었지. 소림에 협력자가 있으면 소식을 알아보기 쉬울 거라 생각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개는 탁발승들이 연이 닿은 어린 고아들을 데려와서 제자로 삼았으니까.
나이가 많으면 제자로 받지 않고, 말이 안 통할 만큼 어리면 수작을 부리지 못한다. 게다가 자칫하면 이쪽의 정체가 탄로날 가능성도 있는 바.
“이 녀석이 어느 정도 운신의 자유를 얻었을 때부터 소림의 소식을 전해받았다.”
“흠, 무공은 그리 대단한 것 같진 않습니다만....”
단전이 봉인된 영향으로 기감도 살짝 둔해졌지만, 안목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태양혈의 발달과 호흡, 걸음걸이만 봐도 얼마나 강한지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법.
소림의 무승답게 어지간한 고수들보다는 고강하지만, 그래봤자 유망한 후기지수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선 훨씬 유용할지도 모르지. 이 녀석의 스승이 누군지 잊은 게냐?”
“무종이라고 하지 않았... 아!”
“무종은 무학자였다.”
무공을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학자들.
비급의 구결에 주석을 달거나 실전된 무학을 복원하는 등 대문파에선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무종이라면 우리의 단전을 봉인한 ‘칠봉금진대법(七封禁眞大法)’도 해결할 비책을 알고 있을 터. 제자인 이 녀석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맞나?”
“예, 사부님의 거처에서 해법을 찾았습니다.”
“무종은 잘 있나?”
“본사에 쳐들어온 괴물과 싸우고 계십니다.”
“괴물?”
“어른들의 말씀으로는 방장 스님의 심마라고 합니다.”
“...!”
적미성의 표정이 전에 없이 굳어졌고, 각정의 말은 점점 빨라졌다.
“시간이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엔 괴물이 혈겁을 일으킬 테니....”
“나더러 소림을 구하라는 거냐?”
“그래도 사문이 아닙니까?”
“그 사문이 우릴 여기 가둬놨지.”
“그건...!”
“뭐, 좋다.”
흔쾌히 수락하는 적미성의 모습에 암야마독은 물론 멸마전의 아라한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워도 한 가족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군. 지금 당장 봉인을 풀 수 있나?”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각정이 미리 쟁여온 침구를 천 위에 내려놓자 아라한들이 찝찝한 얼굴로 적미성을 돌아보았다.
“저기, 대사형. 저 녀석이 실수하면 위험하지 않겠수? 잘못하다 폐인이 되기라도 하면....”
“그럼 내 운이 거기까지인 거다.”
담담히 말을 늘어놓은 적미성이 상의를 젖히자 흉터 가득한 근육질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대침을 쥔 각정의 손이 수전증에 걸린 것마냥 덜덜 떨리자 적미성이 실소하며 손을 뻗었다.
“됐다. 침은 내가 알아서 꽂지. 넌 해법의 순서만 말해라.”
“예에? 고통이 심할 겁니다! 해법을 적은 서적에서도 혈도가 갈가리 찢기는 고통이라고....”
“상관없어. 내겐 지난 세월이 더 고통스러웠다.”
각정은 희미하게 떨면서 침구를 건넸고, 적미성은 입가를 말아올렸다.
* * *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여삼추 같은 한 시진이 흘렀을 무렵, 참회동 내부에선 농밀한 기파가 넘실거렸다.
“미안하다. 너희들까지 풀어주기엔 시간이 없구나.”
“괘념치 마십시오. 그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갈마중의 물음에 적미성이 하얗게 웃었다.
온몸을 갉아먹는 고통으로 인해 식은땀이 흥건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괜찮은 것 이상이지.”
일전에 강엽에게 당한 심흔을 치유하기 위해 소림은 아껴놨던 대환단을 썼다. 불권이 염왕에게 대환단이 없다고 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심흔을 치유하고 남은 기운이 단전에 녹아들었으니까. 지금 난 귀영과 싸웠을 때보다 강하다.”
양손으로 창살을 잡는다.
만년한철로 만든 창살이 엿가락처럼 휘는 모습에 각정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적 사백...!”
“걱정 마라. 약속은 지킬 테니까. 하지만 그전에....”
터엉!
가죽이 터지듯 묵직한 소리와 함께 피화살을 뿜으며 날아가는 각정.
암벽을 맞고 쓰러진 그를 내려다본 적미성이 차가운 안광을 뿌렸다.
“네놈이 소림이 산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제때 전했다면 애초에 여기 갇히는 일도 없었겠지.”
만약 소림이 산문을 연다는 소식을 미리 접했다면 적미성의 행보도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암야마독을 포섭하겠다고 강엽에게 무리하게 싸움을 걸지는 않았겠지.
만약 그가 만전이었다면 제아무리 소림이라 한들 멸마전을 제압할 수는 없었을 터.
코와 입으로 피를 게워낸 각정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리며 부정했다.
“아, 아닙니... 쿨럭! 그건 방장 스님께서 갑자기....”
“그래, 그 늙은이가 결정했겠지. 하지만 네놈이 서둘렀다면 소식을 전했을 거 아니냐.”
어쩌면 실패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적미성이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죽기를 바랐을 수도 있겠군. 내가 없어지면 간자 노릇을 안 해도 되니까 말이다.”
“...!”
정곡을 찔린 것처럼 움찔하는 모습.
아라한들이 그 반응을 보고 살기를 피워올리는데, 적미성은 피식 웃으며 각정의 머리를 즈려밟았다.
“난 배신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나가는 것 또한 네 공로이니 특별히 용서해주마.”
“가, 감사합니....”
“네 사숙들의 봉인을 풀어라. 만약 한 명이라도 잘못된다면 너는 물론 네 사부까지 죽을 거다.”
새파랗게 질린 각정이 침을 챙기는 사이 암야마독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난?”
“넌 예외지.”
“...진심이야?”
“내가 널 도와줬음에도 넌 도망이나 쳤다. 그런 너를 어떻게 믿고 도와주겠나?”
“암만 봐도 이길 각이 안 보였으니 도망쳤지. 그래도 한때 살까지 섞은 사이인데 좀 봐주면 안 돼?”
“공짜로는 안 된다.”
“충성을 바칠게.”
“그 건은 갔다 오면 다시 논하지.”
그렇게 암야마독과 사제들을 떠난 적미성은 참회동의 좌우에 갇힌 마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매를 굳히는 사마외도의 마인들.
“버러지 같은 놈들을 살려둘 필요가 있으랴.”
저들에게 먹이는 쌀알이 아깝지 않은가.
콰직! 콰악!
“흐어억!”
“사, 살려다오! 제발...!”
걸음할 때마다 마인들의 머리가 터지고, 간헐적으로 뿜어진 피가 암벽을 시뻘겋게 물들인다.
창살에 갇힌 마인들은 그저 참혹한 몰골로 죽어갈 뿐.
이윽고 팔다리가 앙상한 배불뚝이 노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비명 대신 듬성듬성 빠져나간 누런 이빨 사이로 광소를 흘렸다.
“흐흐, 사천왕의 탈을 쓴 마인이구나. 소림이 괴물을 길렀어.”
“유언은 그게 전부인가?”
“지금을 즐기거라. 네 최후는 몹시 비참할 게야.”
터엉!
한때 구천호법이었던 노인.
골통이 터진 채 허물어지는 노인을 지나친 적미성은 관절을 뚜둑 꺾으며 중얼거렸다.
“천만에. 난 살아남아 천하를 움켜쥘 거다.”
* * *
-우오오오오오!
산천초목을 강타하는 포효.
몹시 어지러운 바깥 분위기와 달리 노승은 세속을 초월한 듯 고적한 법당 안에서 엽차를 홀짝였다.
이윽고 막그릇을 내려놓은 노승이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막그릇 말일세. 노납이 처음 탁발을 나갔을 때 썼던 발우(鉢盂)라네. 보기보다 매우 튼튼해서 노납은 물론 스승님과, 그분의 스승님께서도 쓰셨지.”
의발전인(衣鉢傳人).
불가에선 스승의 가사와 발우를 물려받은 후인을 의미했다. 유일한 계승자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이걸 누구에게 물려줄지 고민했다네.”
“...그래서 정했습니까?”
천장의 허공이 이지러지면서 한 청년이 뚝 떨어졌다.
“역대 방장들이 썼던 발우라면 녹옥불장 못지 않은 신물이겠지요. 물려주지 못한다면 아쉽겠군요.”
“아, 걱정 말게. 후인은 이미 정했으니.”
“저 산에서 싸우고 있는 대사님의 사제 말입니까?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야 모를 일이지. 하나 사제의 관상 보니 요절할 상은 아니더군.”
“여든을 훌쩍 넘겼다면 지금 죽어도 호상이지요. 어지간한 범부보다 오래 살지 않았습니까.”
스르릉...!
불권의 목을 겨눈 서늘한 칼날.
살갗을 저미는 살기에도 불권은 요지부동이었다.
“부동의 평정심이라...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랬다면 그날 광명마교주와 싸웠겠는가.”
“하긴. 목숨 바쳐 우리 교주님께 그만한 타격을 입힌 대사님이 존경스럽더군요. 이대로 수명이 다하길 기다려주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겐 안 되겠습니다.”
“껄껄, 지금 죽든 며칠 있다 죽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근데 자네, 감당할 수 있겠나? 자고로 중을 죽이는 자는 지옥에 끌려가는 법이야.”
“글쎄요. 저는 죽는다 해도 교주님의 몽상정토로 갈 테니... 염라대왕과 면담하는 일은 없겠군요.”
“그런가?”
서서히 올라가는 칼날. 불권은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이 늙은 땡중을 죽이지 못하네.”
그 순간, 불권의 전신에 찬란한 금광이 치솟으면서 법당 전체를 뜨겁게 달구었다. 구사도는 물론 일대를 아우르는 무지막지한 공력 파동.
빛이 번쩍이고 충격파가 팽창한다.
“...!”
동귀어진의 징조를 눈치챈 구사도가 얼른 몸을 날렸으나, 메마른 손이 벼락처럼 팔을 붙잡았다.
-어딜 가시는가.
경악한 구사도를 향해 온몸의 살가죽이 불타고 근육만 남은 불권이 인자하게 웃었다.
-어차피 죽는다면 봉인을 풀어야지. 광명마교주는 심검을 되찾겠지만, 자네는 노납과 함께 갈 게야.
구사도 역시 전신이 불탔기에 속으로 욕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목숨을 불사르는 미친 땡중이라고.
-허허, 과거엔 그리 불렸었지. 이젠 오지 않을 그날이 그리우나... 속세의 미련을 내려놓을 때가 됐구나.
스스로를 불태우는 적멸(寂滅).
희미해진 의식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떠올랐다.
-만약 심마가 대사님과 여전히 이어졌다면, 완전히 사멸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새카만 흑포를 흩날렸던 청년이, 소림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이었다.
이 몸의 반쪽이 나타나면 함께 죽고자 했건만, 마지막까지 세상사는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늙은 승려를 밀어낸 장강의 뒷물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잘 헤쳐나갈 터이니.
‘부탁하네.’
마음속에 떠오른 이들을 향해 유언을 남기며, 늙은 승려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