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86화 (386/450)
  • 77화. 대전 (4)

    “맹주도 왔군.”

    항주 곳곳에서 느껴지는 기파.

    강엽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가 맹주를 위시로 한 무림맹의 최정예들이 침투했다는 걸 알았다.

    바야흐로 무림의 명운을 건 총력전의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이교의 죄인들!”

    광명마교도들이 쏘아보낸 경파.

    그에 휘말린 건물들이 산산이 박살나면서 사방으로 파편을 뿌리자 행인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종남의 장문인 송진자가 혀를 찼다.

    “무림의 싸움에 양민들이 휘말리겠군요. 일행을 좀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미타불... 동의합니다.”

    아미파의 장문인 혜성 사태도 동의했다.

    “강 시주, 우린 저들을 제압하겠소. 일이 끝나는 대로 총단으로 가지요.”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판국에 뿔뿔이 나뉘면 정작 총단에서 제대로 힘을 못 쓸 수도 있을 터.

    그러나 강엽은 흔쾌히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북쪽은 십이전대가 맡은 것 같으니....”

    “남쪽을 맡지요.”

    종남과 아미의 고수들이 빠지면서 일행이 지나친 구역에서도 싸움의 막이 올랐다.

    그때 동쪽 성문이 열리면서 군세가 쏟아졌다.

    “군사들이...!”

    “황군은 역도들을 참하라!”

    지방의 위소를 관리하는 관군이 아니다.

    황제가 있는 북경을 수호하는 정예 황군이 항주로 진군한 것.

    먼 거리를 격하고 중심부에 선 화려한 갑옷의 장군과 눈이 마주친 강엽이 미간을 좁혔다.

    “저자는...?”

    “패군일세, 강 도우!”

    옥청선자의 말에 강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결전이 코앞인데 편하게 황궁에 눌러앉을 리가 없지.’

    도독첨사는 홍가려에게 싸움이 끝난 뒤에 패군을 제거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애초에 패군은 힘을 보태기 위해 황군을 이끌고 온 것이다.

    일행의 얼굴에도 곤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아무리 패군이 광명마교의 주구라도, 황군에 손을 대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일세.”

    명분을 쥐고 있어도 황군을 학살하는 것은 역모다. 아니, 아예 손을 대서도 안 되는 일.

    그때 또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개방의 방도들은 주민들을 대피시켜라!”

    정체를 감추었던 개방의 거지들이 주민들이 환란에 휩싸이지 않도록 대피시킨 것.

    그런가 하면 천지자연의 조화도 일었다.

    -강벽환무진(强壁幻霧陣).

    서호와 전당강의 수기를 빌린 새하얀 안개.

    안개에 갇힌 황군이 당황하고, 말들이 울부짖는 광경에 패군이 경직된 표정으로 대검을 치켜든다.

    하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으면서 좌검우도로 그를 막았다.

    “낭왕...!”

    “오랜만이군, 패군.”

    일전에 북해빙궁에서 부상을 입은 낭왕이 정양을 끝내고 만전의 상태로 싸움에 임한 것.

    낭왕을 튕겨낸 패군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대검을 휘둘렀지만, 낭왕에게 닿지는 못했다.

    그 사이 황군을 격리한 진법이 완성되면서 성문의 망루 위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을 향해 눈인사를 하는 제갈의현의 모습에, 일행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먼저 가시게. 여긴 우리 셋이 맡을 테니.]

    귓가에 꽂히는 제갈의현의 전음에 강엽은 낭왕 말고 다른 사람도 있음을 확인했다.

    남루한 넝마주이를 입은 늙은 거지가 타구봉 하나로 패군의 장수들을 때려눕히고 있었다.

    ‘개방주 만리독행개 우황신.’

    정도십대고수의 일좌로,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보신경과 봉법을 익힌 절세고수였다.

    그가 광명마교의 무공을 쓰는 장수들을 때려눕히는데, 타구봉이라는 이름 그대로 개패듯 때려눕힌다.

    상대가 천하팔존이어도 저 셋이라면 능히 이길 터.

    하지만 문제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꺄아아아아악! 아악!

    “아니, 씹... 이번엔 또 뭐야?”

    광명마교의 총단이 있는 방향.

    그쪽에서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는데, 흉측하게 생긴 괴물들이 쫓고 있었다.

    사람도 있고 짐승도 있지만, 하나같이 머리에 부적을 붙인 채 사특한 기운을 풍기고 있다.

    현운 도장이 침음했다.

    “...사기인가.”

    지난날 마의와 싸운 자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강엽은 행인들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방향을 틀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음?”

    곱슬진 머리에 비녀를 꽂은 여인이 강엽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이들도 깜짝 놀랐다.

    “약선 어르신?”

    “아, 너희인가.”

    정작 약선은 놀라지 않은 눈초리.

    뒤따라온 장문인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인사를 대신한 그녀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항주의 주민들을 쫓아오는 괴물들을 지긋이 노려보는 모습.

    “얼마 전 개방이 소식을 전해왔지. 하얀 가면을 쓴 괴인이 시체들을 끌고 항주로 진입했다는 얘기였다.”

    “마의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겠군. 내가 소식을 접한 건 그 싸움 이후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 내 직접 맹주와 함께 잠입했는데... 보다시피 저 꼴이야.”

    머리에 부적을 붙인 괴물들. 한 놈이 거대한 손을 뻗어 도망치는 행인의 머리통을 터뜨렸다.

    공동 장문인 광악 진인이 분통을 터뜨렸다.

    “정말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군. 이럼 또 인원을 나누어야 할 것 같네.”

    “우리가 남겠네.”

    점창의 장문인 종현과 청성의 장문인 이송.

    백서희와 눈빛을 교환한 종현이 강엽을 향해 말했다.

    “구파의 장문인 셋이라면 능히 저 괴물들을 막아낼 수 있을 터. 자네들은 약선과 함께 앞으로 가게.”

    “...알겠습니다.”

    총단에 이르기도 전에 구파 다섯이 떨어진 셈. 그러나 일행 중 누구도 그것이 잘못됐다 말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 강엽은 종현에게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그냥 망자들이 아닙니다.”

    “그래, 내가 봐도 다르긴 하군. 부적을 붙인 꼴이 영락없이 강시야.”

    “아마 활강시일 겁니다.”

    “음?”

    “흑룡교의 활강시를 본 적 있는데 저것들과 비슷한 기운을 풍겼습니다. 광명마교가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생전의 무공을 구사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좀 심각하군.”

    그 이상의 충고는 불필요했다. 장문인들 모두 경험 많은 노강호들이니 심각성을 이해했을 터.

    남기로 한 장문인들에게 눈인사를 건넨 강엽은 일행과 함께 총단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 *

    광명마교의 총단.

    구중궁궐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대장원은 뜻밖에도 지키는 사람 없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명백히 다른 태세였지만, 일행 누구도 그 사실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대문 너머 광활한 경내엔 적들이 빼곡했으니까.

    “.......”

    단지 오와 열을 맞춘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름의 규칙과 이치에 근거해서 합격진을 만든 것.

    한눈에 보기에도 수천 명이 훌쩍 넘는 하얀 도복들이, 대마장은 물론 전각의 지붕까지 점거한 뒤.

    그 사이에서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강대한 울림을 담은 목소리가 석탑의 지붕에서 흘러나왔다.

    “환영한다, 이교의 죄인들이여.”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강엽은 그 얼굴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일사도, 그리고 북해에서 죽인 예간성과 쌍둥이처럼 닮은 미청년.

    마찬가지로 그와 닮은 남녀를 좌우에 대동한 그가 오연히 뒷짐을 진 자세로 일행을 굽어보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난 팔성자이자 신임 사사도에 오른 예곤우다. 여긴 내 형제자매인 예리환과 예진화지. 너흴 맞이하기 위해 환영식을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군.”

    강엽은 대답하는 대신 정안을 개방했다.

    항주의 성벽을 매개로 발동한 술법.

    똑같은 술법이 총단의 부지에서도 발동되면서 바닥의 판석과 전각군에서 빛의 법문들이 떠올랐다.

    “...항주의 용맥을 끌어모았군.”

    일전에 불권의 심마가 숭산의 용맥과 결합하여 강해진 것처럼, 광명마교 역시 항주의 용맥을 끌어들여 교도들에게 고루 나누어준 것이다.

    수가 많은 만큼 개개인은 초월적인 위세를 얻진 못했겠지만, 합격진을 취한다면 그 위력이 얼마나 가공할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강엽이 전음으로 자신이 알아낸 바를 전파하자 일행이 침음을 흘렸다.

    염왕이 물었다.

    “파훼할 수 없나?”

    “어렵습니다.”

    강엽이 먼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일행이 들어오기 전부터 총단 한가운데에서 치솟은 거대한 빛기둥.

    “북해의 석탑을 여기로 옮긴 모양이군요.”

    북해에 있던 석탑은 무너졌지만, 핵심이 되는 심상의 조각은 수거할 새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흘러가는 정황을 보면 그 사이에 항주의 총단에 새로운 석탑을 만들었던 듯싶었다.

    “저 석탑이 놈들의 공력을 북돋을 겁니다.”

    “아군의 힘을 늘리고, 반대로 적들의 힘은 억제하는 것 같군.”

    “더해서 사기를 고취시키는 효과도 있는 것 같군요.”

    두 사람의 대화에 일행의 안색이 급변했다.

    아무리 일행들이 전원 고수라고 하나 작금의 상황에서 저 안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그래도 심상절예를 쓰면 무너트릴 수는 있겠지만....

    ‘지금 심상절예를 썼다간 광명마교주와 싸울 때 지장이 생겨.’

    하물며 사도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신경 쓰인다.

    팔사도가 항주에 왔다면 일사도와 괴뢰마 역시 합류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을 터.

    하지만 일행이 각오를 마치기도 전에, 저쪽에 있던 적의 수괴가 물러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선택을 못하겠다면, 강제로 환대해줄 수밖에.”

    쿠구구구구궁-!

    거센 흔들림과 함께 일행이 지나쳤던 대로 위로 진한 황금빛의 기파가 뻗어나간다.

    대로의 민가에서 하얀 도복을 입은 광명마교의 교도들이 몰려와서 일행을 포위한다.

    강엽과 염왕도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엔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가공한 은신.

    ‘술법진의 공능으로 기파를 숨겼군. 양민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위장했어.’

    정안을 전개했다면 간파했겠지만, 민가까지 눈여겨보지는 않았기에 강엽 또한 허를 찔렸다.

    아니, 이 경우엔 술법진을 숨긴 적들의 수완을 칭찬해줘야겠지.

    “뭐, 머리 굴릴 필요가 있나.”

    하후진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앞으로 나섰다.

    “여기까지 왔으면 싸우는 수밖에 없잖냐. 적들이 수작을 부릴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지당한 말씀. 이제 우리는 배수진의 한가운데 있는 셈입니다.”

    청수 또한 하후진의 말을 거들면서 사부인 현운 도장과 시선을 나누었다.

    현운 도장을 필두로 일행 모두가 병장기를 빼들고 사방을 포위한 적들을 노려봤다.

    “삼화취정의 고수만 열한 명입니다. 놈들이 암만 수가 많고 기가 드세도 이길 수 있어요.”

    조영옥이 일행을 독려하는 순간.

    [이런. 우릴 빼놓으면 섭섭한데.]

    한 줄기 전성과 함께 뒤에서 날아온 대도가 광명마교의 무리를 갈라버리고 일진광풍을 일으켰다.

    백발을 휘날리는 거구의 노인과 십수 명의 고수들이 막강한 존재감을 풍기며 광명마교를 덮친다.

    한껏 여유를 부리던 신임 사사도가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무림맹주...!”

    그러나 맹주는 그를 무시했다.

    막 합류한 강엽 일행을 향해 농담조로 물을 뿐.

    “노부가 너무 늦게 왔나?”

    “조금만 늦게 오셨다면 빈손으로 가셨을 겁니다.”

    강엽 또한 농으로 응수하며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는 적들을 지긋이 응시했다.

    그렇게 일행 모두가 적들과 충돌하기 직전.

    [각자에게 맞는 전장을 주지.]

    불현듯 광명마교주의 묵직한 전성이 귓가를 강타, 전장의 환경에 다시 한번 변화를 주었다.

    빛이 내리꽂힐 때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사라진다.

    ‘입도공월... 타인을 강제로 이동시키고 있다.’

    강엽의 술법과 양상은 다르지만 공간의 제약을 초월했다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일행 모두가 이변을 알아차렸다.

    “젠장! 이건 어떻게 해야...!”

    “사부님!”

    하후진과 청수가 사라지고,

    “제자들은 똘똘 뭉쳐 살아남아라!”

    현운 도장과 옥청선자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허어...!”

    “맹주님!”

    지위에 걸맞지 않게 앞장서서 싸운 맹주도 마찬가지.

    그리고....

    “강엽!”

    우연히 약선과 함께 등을 맞대다 함께 빛에 휩싸인 백서희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러나 그 손을 잡기도 전에, 백서희는 약선과 함께 증발하듯 사라졌다.

    “...!”

    강엽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지고, 한 박자 뒤에 그의 정수리에도 거대한 빛무리가 꽂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느낌.

    저항한다면 끌려가지 않겠지만, 강엽은 빛이 이끄는 방향이 어딘지 직감하고 힘을 풀었다.

    “상공...!”

    “반드시 돌아오겠소.”

    망연해하는 조영옥을 일별한 강엽은 그렇게 빛에 휘감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지금쯤 시작됐겠군요.”

    풀잎을 질겅질겅 씹는 청년.

    광명마교의 구사도는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암산을 바라보았다.

    “준비되셨습니까, 칠사도?”

    “...그래.”

    거대한 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틀던 사내.

    괴뢰마가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뒤로 수많은 인영이 도열했다.

    “지금부터 이빨 빠진 호랑이를 사냥한다.”

    “사대금강 중 둘은 출타 중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지금쯤 무림맹과 함께 총단을 습격하고 있겠지요.”

    “대신 소림은 텅텅 비었겠지. 십팔나한도 얼마 없을 테니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솔직히 가만히 놔둬도 죽는 목숨을 굳이 암살하러 숭산까지 올 줄은 몰랐습니다.”

    “시간이 금이야. 불권이 죽어야 우리가 산다.”

    그렇게.

    괴뢰마를 위시로 한 광명마교의 결사대가 숭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전 시대의 천하제일인을 죽이기 위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