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85화 (385/450)

77화. 대전 (3)

천년의 고도 항주.

한때 남송의 황도였고, 황도가 아니게 된 작금의 세상에서도 강남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그 항주에 광명마교가 들어서부터, 이 도시는 무림 최대의 격전지로 변모했다.

항주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전당강의 한복판.

과거 적벽대전의 조조군이 그랬듯 누선들을 사슬로 연결한 거대한 수상요새가 들어서 있었다.

어부들은 물론 쪽배 한 척도 통과시키지 않을 듯한 삼엄한 기세를 풍기는 자들은 무림인들이 아니었다.

“하오문의 미천한 계집이 삼가 제국 수군의 도독첨사 대인을 뵙습니다. 소녀는....”

“무례하군.”

태사의에 앉은 초로인을 보필하는 부관이 노란 궁장을 입은 면사 여인을 노려봤다.

“하오문의 소문주라고 했던가? 도독첨사 어르신 앞에서 면사를 쓰는 게 하오문의 예법인가?”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작게 읍한 여인이 면사를 벗자 좌우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터졌다.

장수도 말문을 잃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크흠 헛기침을 했다.

“홍가(紅家) 가려라고 합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불철주야 힘써주시는 도독첨사 대인과 여러 제장들을 뵈어 영광입니다.”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는 홍가려의 모습에도 도독첨사와 장수들의 안색은 풀리지 않았다.

부관이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하오문이 본 군영에 용무가 있다면 마땅히 문주가 직접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

“송구스럽습니다. 문주께서 현재 몸이 편치 않으셔서 부득이하게 소녀가 배알을 청했습니다.”

“하면 문주의 대리로 왔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때 도독첨사가 손을 들자 부관이 입을 다물고 옆으로 빠졌다.

날카로운 시선이 홍가려를 꿰뚫듯 다가왔다.

“본래라면 강호의 무뢰배 따위가 본관과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홍가려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도독첨사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제 할 말만 계속했다.

“그럼에도 본관이 그대를 들인 까닭이 무엇인지 아느냐?”

“감히 추측컨대 본문을 대인의 우환을 치유하기 위한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재밌군. 본관이 병에 걸렸다고?”

“동상에 걸리면 썩은 부위를 얼른 도려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가 썩으니까요. 세상 만사 모두가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확신하는가?”

“소녀가 대인 앞에 서 있는 게 증거입니다.”

“으음.”

뜻 모를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 장수들은 뒤루룩 눈동자만 굴릴 뿐.

그때 누군가 벌떡 일어나서 발언했다.

“이년이 감히 어디서 요사한 혀를 놀리는 거냐!? 도독, 이 계집을 즉시 쫓아내셔야 합니다!”

그러나 홍가려는 반응하지 않았다.

장수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도독첨사를 향해 얇은 서책을 내밀 따름.

“대인의 우환을 풀어줄 물건입니다.”

“가져와라.”

부관이 망설이면서도 홍가려가 내민 책을 전하자 모두가 의아해했다. 책을 넘긴 도독첨사의 입가를 비집고 미소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홍 소문주, 자네 말이 옳다. 군영의 간자들이 내내 거슬렸지.”

“...!”

간자란 말에 모두가 눈을 부릅뜰 때였다.

도독첨사가 입술을 우물거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뒤편에서 검은 인영이 불쑥 솟구쳤다.

“아니, 도독! 이게 무슨...!”

“닥쳐라. 본 군영의 정보를 빼돌리는 쥐새끼들.”

그 말에 모두가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장수들과 홍가려를 번갈아돌아봤다.

즉 하오문은 저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어찌 저 계집을 믿고 이러십니까! 저희는 억울...!”

“정황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오문이 준 것은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였지. 너희가 본관의 동태를 광명마교에게 팔아넘겼다는 증거 말이다.”

항변을 가볍게 일축한 도독첨사가 손을 휘젓자 인영들은 장수들을 거칠게 제압했다.

정신을 잃은 채 끌려가는 자들의 모습에 모두가 식은땀을 흘릴 때 도독첨사는 홍가려를 응시했다.

“본관에게 이걸 가져다준 저의가 있겠지.”

“뱃길을 열어주십시오.”

“불가.”

딱 잘라 거절한 도독첨사가 말했다.

“이는 지엄한 황명이다. 본관은 무림인들이 항주에서 충돌하는 것을 막고자 출동한 몸. 뱃길을 열어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

“대인이 길을 열어주시지 않아도 충돌은 일어납니다.”

“본관을 협박하는 게냐?”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지려고 했으나 홍가려는 눈도 깜짝 안 했다.

“외람되지만, 대인께서 받으신 명은 뱃길의 통제가 아니라 시간 끌기가 아닙니까?”

“....”

“또한 황명도 아닐 테고요.”

“너....”

“천하팔존 패군이 어린 황상을 인질 삼아 군부에 전횡을 부린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한마디만 더하면 네년의 혀를 잘라버리겠다.”

“그가 광명마교의 간자라는 것도 알고 있지요.”

“...!”

혀를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놀리는 홍가려의 모습.

하지만 도독첨사는 아무 말도 못했다.

“놀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가 광명마교의 팔성자라는 사실은 본문도 근래에 파악했으니까요. 대인께서 시간벌이를 위해 항주의 뱃길을 틀어막은 건 황상의 의지가 아니라 패군의 의지이지요.”

황실을 위해 일한다는 천하팔존.

현 무림맹주인 멸도 팽무강과 동수를 이루면서 팔존의 반열에 오른 그가 조정을 장악한 실세였던 것이다.

“대인, 광명마교를 축출하지 않으면 이 나라의 운명은 더욱 암울해질 겁니다. 하찮은 계집도 알고 있는 것을 대인께서 모르실 리가 없겠지요.”

“광명마교의 교주는 신인이라 들었다. 아무리 무림맹이라고 해도 그를 대적하는 건....”

“그 역시 인간입니다. 소림 방장님과의 싸움으로 중상을 입었지요.”

사실은 심검을 빼앗겼을 뿐이지만 홍가려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말하진 않았다. 내상을 입었다고 말하는 게 더 직관적이었으니까.

“하면 무림맹이 지금 싸우는 건....”

“절호의 기회... 아니,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습니다.”

“.......”

말없이 탄식한 도독첨사가 피로한 낯짝으로 태사의에 몸을 뉘였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본관이 널 내쫓지 않을 줄은 어찌 알았느냐?”

만약 도독첨사가 삿된 마음을 먹었다면 홍가려는 물고기밥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 또한 호위를 대동했지만, 배 위까지 데려오지는 못했으니까.

“대인께서 과거 무당파에 빚을 졌다고 들었습니다.”

“...지나가던 무당 도사가 우리 일가를 구해주었지.”

이십 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

사마외도의 악적과 시비가 걸려 죽을 뻔했을 때, 한 의기로운 청년 도사가 구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표주 중인 도사였다. 식객으로 머물기를 청했으나 그는 수행을 해야 한다면서 떠났지. 얼마 전에 들으니 무당의 장문인이 되었더군.”

“무당의 장문인께서도 항주로 오고 계십니다.”

“안다. 구파의 표식이 걸린 배들이 전당강을 따라 항주로 오고 있다고 들었다.”

만약 도독첨사가 뱃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검을 들이대야 하리라.

“대인께서 그때의 일을 기억하신다면 적어도 말은 들어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맹랑한 계집이군.”

피식 웃은 도독첨사가 물었다.

“정인은 있느냐?”

“...예?”

뜬금없는 질문에 홍가려가 눈을 껌뻑였다.

“너라면 본관의 손자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다.”

“아, 그게....”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에 도독첨사가 입맛을 다셨다.

“있나 보군. 본관의 말은 잊어도 좋다. 물러가도록.”

“하면 뱃길은....”

아직 확답을 듣지 못하지 않았나.

도독첨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마. 무림맹은 항주에 무혈입성할 것이다.”

“아...!”

“대신 황궁에 있는 패군을 없애야 한다. 본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물론입니다.”

홍가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 * *

유유히 물살을 가르는 열 척의 함대.

각각 구파와 팔가, 태화문의 표식을 취한 배들이 수군의 함선들이 열어준 길을 따라 나아간다.

마치 수군이 길을 열어준 것만 같은 모양새에 모두가 술렁거릴 때 강엽은 보았다.

휘황한 갑주를 걸친 초로인 옆에 다소곳이 선 노란 궁장의 여인을.

면사도 쓰지 않고 맨 얼굴을 드러낸 그녀는 강엽과 시선이 마주치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초로인이 뭐라 하자 얼굴이 벌게져선 헛기침을 하는데, 초로인은 시원하게 웃었다.

무당의 배가 지날 때 갑판에 있는 현운 도장을 향해 눈인사를 보내는 초로인의 모습.

갑판에 나와 있던 현운 도장 역시 공수의 예로 초로인의 인사에 화답한다.

“항주다! 항주의 성벽이 보인다!”

“와아아아아아!”

열 척의 배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강엽은 등 뒤에서 들리는 하후진의 외침에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항주에 가보지도 않은 놈이 아는 척은.”

“성벽을 넘는 건 다른 문제예요.”

조영옥이 말했다. 전당강을 지키는 수군은 홍가려가 설득했으나 성벽을 지키는 관군은 별개의 문제라고.

“...진짜 시간 끌려고 별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한때 나라의 녹을 먹는 걸 꿈으로 삼았던 강엽의 입장에선 참으로 한숨 나오는 작태였다.

그렇게 항주성에 가까워질 때였다.

“엉? 저것들 악룡맹 아니야?”

백서희가 기다란 원통을 눈에 대며 말했다. 악룡맹의 해적들과 싸울 때 빼앗은 십리경이었다.

“바다에 있던 병력인 모양이네요. 본군을 지원하기 위해 부랴부랴 온 것 같은데....”

“근데 그놈들 전멸했잖아?”

강엽과 염왕이 심상절예를 쓴 여파에 휘말려서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먼지가 되었다.

“그럼 저놈들만 없애면 악룡맹은 멸문하겠군.”

“뭐, 이미 멸문이나 다름없지만요. 근데 피곤할 텐데 또 싸우려고요?”

숭산에서 격전을 치른 뒤 쉬지도 않고 절강까지 오지 않았던가.

중간에 광명마교주와 술법전을 치르고, 악룡맹의 본대까지 없앴으니 피로가 쌓였을 터.

“배에서 쉬어서 괜찮소. 심상절예를 쓸 생각도 없고.”

강엽이 손을 들자 저편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유속이 빨라지며 저쪽의 배가 흔들렸다.

호풍환우의 술법과 수류의 능력, 둘을 조합해서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을 만든다.

콰아아아아아...!

“세상에.”

강엽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백서희와 조영옥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 한복판에 거대한 용오름이 떠오르면서 악룡맹의 배들을 죄다 부숴놓는 게 아닌가?

“생각보다 잘 되는걸.”

“...알고 쓴 거 아니었어?”

백서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강엽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냥 될 것 같아서 써봤는데... 나도 저렇게 효과적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지.”

“....”

“저렇게 뒀다간 우리도 휘말릴 걸요?”

수류의 권능으로 유속이 빨라졌기에 빨리 가라앉히지 않는다면 아군도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

강엽이 얼른 술법을 풀자 날씨가 급격히 맑아지며 저편에서 해가 쨍하니 떴다.

그리고 항주성에선 백기가 휘날렸다.

* * *

“흠, 군기가 엉망이군. 이래서야 외적이 쳐들어오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걱정되는데....”

강엽이 성문을 넘으면서 중얼거리는 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오름으로 함대를 격파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용기 있게 싸울 자들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백서희가 허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병사들에겐 하늘이 천벌을 내린 걸로 보이겠지.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속 편하긴 해.”

적어도 사람이 천재지변을 일으켰다는 것보다는 훨씬 믿을 만하지 않은가.

뒤에서 따라온 하후진도 적극 동의했다.

“만약 내가 병사인데 그 꼴을 보고서도 싸우라고 하면 그 새끼부터 족칠걸.”

“그래도 저들은 비켜줄 생각이 없는 것 같군요.”

청수의 말에 일행은 항주의 대로를 따라 달려오는 하얀 도복의 무리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성벽에서 악룡맹의 함대가 좌초되는 걸 봤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온다.

하지만 광명마교가 일행을 공격하기 전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눈보라가 그들을 덮어버렸다.

하얀 털옷을 입은 이족의 무인들.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노파와 금발의 소녀가 강엽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움을 표한다.

“북해빙궁...!”

“이제부터 이 구역의 주인은 본궁이에요. 순순히 물러나시면 유혈사태는 없을 거예요.”

시리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야율산산의 시선이 향한 곳엔 그녀와 빼닮은 금발의 여인이 있었다.

교군을 이끌고 온 팔사도는 강엽 일행을 힐끗하며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그럴 순 없지. 어떻게든 여길 사수하는 게 내 임무거든. 그러니 한 명도....”

하지만 강엽 일행은 아랑곳 않고 뛰어올랐다. 여기서 발목을 잡히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였으니까.

[부탁한다, 산산.]

지붕을 박차고 멀어지는 강엽의 전음.

야율산산이 주먹을 부딪쳤다.

“이젠 끝낼 시간이에요, 고모님.”

“...단단히 얕보였군. 내가 태양지체의 힘을 잃었다고 정말 무력해졌다고 생각하니?”

쿠구구구구구궁-!

팔사도가 발을 구른 순간, 항주성의 성벽이 찬란한 빛을 뿌리며 도시 전역이 밝아졌다.

아연해져서 돌아보는 조카의 모습에 팔사도가 코웃음을 치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밝고 뜨거운 공력이 모이는 것과 동시에 빙궁 무인들이 폭사한 냉기가 허물어진다.

“천시, 지리, 인화. 적진에 발을 들였다면 지리를 포기할 각오는 됐겠지?”

“광명마교가 철저히 준비했구려. 팔사도는 전성기의 위용을 되찾았소. 평교도들 역시 훨씬 강해졌고.”

빙오선의 말에 야율산산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우린 약해졌죠.”

설마 도시 전역에 열양지기를 북돋는 진법을 칠 줄이야.

제대로 의표를 찔렸다.

“하지만 누가 이길지는 어깨를 견주어봐야 아는 법. 이 싸움은 우리가 이길 거예요.”

직후, 항주의 대로엔 한기와 열기가 맞부딪치며 폭음이 메아리쳤다.

* * *

“저쪽도 마침 도착했구먼.”

객잔에서 국수를 먹던 죽립 노인이 여상스럽게 중얼거리자 곳곳에서 화답이 돌아왔다.

“딱 몇 시진 차이군요.”

“남쪽에서 한기가 느껴집니다. 빙궁이 먼저 간 모양입니다.”

“진법이 발동했습니다. 성벽에 진법을... 역시 광명마교는 항주를 격전지로 삼은 걸까요.”

무장을 한 이들이 거리로 쏟아진다.

어지러운 시국에도 장사를 하던 상인들은 눈치 빠르게 퇴거하고, 창문과 문을 걸어 잠갔다.

“진법이든 뭐든 여기까지 온 이상 싸우는 수밖에 없네.”

뚜둑! 뚜두두둑!

허리를 편 장대한 체구의 노인.

들고 있던 거문고를 부수고 큼지막한 대도를 꺼낸 무림맹주가 죽립을 벗으며 말했다.

“광명마교의 총단을 향해 진격한다.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모조리 치우되, 민생을 최우선으로 여기도록!”

하오문의 도움으로 항주성에 침투한 맹의 최정예.

팔가의 가주들과 십이전대의 대주들을 비롯한 무림맹의 정예 무인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