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환야 (3)
산산조각 박살난 환신의 의념.
환신이 생전 남긴 기준을 충족한 자를 전인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찌꺼기는, 그렇게 제대로 된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다만 그의 심상은 강엽의 내면에 단단히 새겨졌다.
‘환몽(幻夢)의 심상이라....’
사전에 펼쳐둔 혈라지망을 통해서 파훼하긴 했지만, 환신의 심상법을 낮잡아볼 생각은 없다.
만약 생전의 환신이 펼친 심상법이라면 이보다 몇 배는 고생했을 테니까.
‘기억과 욕망을 기반으로 펼친 환술.’
일견 마안의 공능과 비슷하지만, 심상지경의 고수에게도 통하는 면에서는 훨씬 윗줄이었다.
강엽도 위화감은 느꼈을지언정 혈라지망이 제 효과를 내기 전까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쓰기에 따라선 어지간한 심상절예보다 위험한 심상법.
만약 전장에서 환몽의 심상을 걸고, 적들이 서로 공멸하도록 유도한다면 실로 무지막지한 위력을 발휘하리라.
‘이건 마안과 함께 써야 효과가 좋겠는데....’
어차피 심상 한 조각으로는 환신이 생전에 발했던 위력을 반도 발휘할 수 없다.
그렇게 심상을 마안에 녹여낸 강엽은 차분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불권의 심마를 상대했던 동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
“흠, 다 끝난 건가?”
“무량수불....”
염영과 불권도 의외인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심법진이 사라졌으니 밖으로 나와야지. 심마 또한 용맥에서 떨어져나갔다.]
햇볕에 증발하듯 서서히 희미해지는 진조가 말하자 세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염왕이 미간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드는군. 심마는 나와 한창 싸우던 중이었다. 결착을 짓지 못했는데 끝내다니.”
“심법진과 결합되었으니 심법진이 사라진 순간 같이 사라진 게 아니겠소?”
불권의 말에 강엽이 시선을 멀리 향했다.
심법진이 해제되어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더 이상 심마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잔흔마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용맥에서도 확실히 떼어냈다.’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시점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상황.
진조를 돌아보니 그 역시 고개를 젓는다.
[이 일은 우리 손에서 떠났다.]
“무량수불... 세 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진조 역시 감사의 대상에 포함되었음을 암시하는 말.
진조가 코웃음을 치며 강엽을 돌아봤다.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수확을 얻었구나.]
그라면 환신의 의념이 수작을 부렸다는 것쯤은 진작에 알아봤을 것이다.
강엽이 환신의 의념을 죽이고 그 힘의 잔재를 흡수했다는 것도.
염왕도 고개를 주억였다.
“심법진이 깨진 순간에 익숙한 존재를 느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염왕과 불권은 알 자격이 있다.
그러나 대답하기 전에 염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말하지 마라.”
“예?”
“그 늙은이와 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전우로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괜한 말을 들어서 그 추억을 더럽히고 싶진 않군.”
환신의 의념이 나왔을 때 무언가 느낀 걸까.
두 사람의 싸움에 개입하진 못했지만 그 정도의 절대고수라면 낌새를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불권을 돌아보자 그 역시 반장을 하며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무량수불... 강 시주의 판단에 맡기겠네.”
이미 다 끝난 일.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강엽 역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사태가 일단락되자 불권이 화제를 돌렸다.
“이 빚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려. 빈승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보답하겠소.”
일을 하는 대가로 무언가를 주겠다는 말은 없었으나 소림의 방장이 맨입으로 넘어갈 리가 만무.
염왕이 실소하며 말했다.
“대환단 남은 거 있나?”
“아쉽게도 없소이다. 소환단은 좀 있소만.”
“그럼 소환단 두 알만 내놔라. 제자 녀석의 내자와 자식에게 줘야겠군.”
“세 알을 드리겠소. 염왕 시주도 요 근래 고생해서 원기가 상하신 것 같은데 보양 좀 하시구려.”
“내일 아침 다시 찾아오지.”
강엽에게 눈인사를 건넨 염왕은 땅을 박차며 점이 되어 사라졌다.
불권이 씁쓸하게 웃었다.
“염왕 시주께선 그 나름의 방식으로 환신 시주를 애도하려는 것 같군.”
“대사님은 괜찮으십니까?”
“노납 또한 애석하지만, 환신 시주가 한 일에 대해선 그가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나저나 자네는 원하는 게 없나?”
원하는 거라.
염왕처럼 소환단을 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와서 소환단으로 내공을 쌓는 것은 무리였다.
굳이 따지자면 오른손의 태양 문양에 넣어뒀다 잠시 쓸 수는 있겠지만....
“혹시 ‘용혼갑(龍魂鉀)’이 아직 소림에 있습니까?”
과거 흑룡교주가 입었던 호신갑.
흑룡교가 멸망한 최후의 날, 염왕과 불권, 환신은 흑룡교주를 합공하여 격살했다.
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졌지만, 흑룡교주가 입었던 신물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나도 백무량과 싸우지 않았다면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몰랐겠지.’
향로의 심상공간에서 백무량과 수도 없이 싸웠다.
이제는 백무량을 몰아붙이면서 그의 밑천을 모두 견식했고, 실제로 몇 번은 이길 뻔했다.
‘그놈의 용혼갑만 아니었다면....’
심검을 얻은 이후엔 신병이기에 대한 관심을 잃은 강엽이 드물게 눈여겨볼 만큼 뛰어난 공능.
심상절예를 한 번쯤 막아주는 호신갑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을 땐 얼마나 황당했던가?
딱 한 번만 막을 수 있긴 해도 목숨을 여벌로 들고 다니는 셈이었다.
‘심지어 자체적으로 회복까지 하고.’
오죽하면 살아있는 갑옷이라고 불렸겠나.
만약 용혼갑이 없었다면 당시 심상지경에 오른 세 명이 전부 달려들 필요도 없었을 터.
“하오문에 알아보니 흑룡교주를 죽인 뒤에 대사님께서 용혼갑을 가져가셨다고 하더군요.”
“사실이네.”
선뜻 대답한 불권이 염주를 매만졌다.
“처음엔 환신 시주가 가져가려고 했지. 술법으로 그 공능을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한데 문제가 생겼네. 용혼갑이 환신 시주를 거부한 걸세.”
“입지 못하게 했다는 말씀입니까?”
“아예 만지지도 못하게 했지. 손이 닿을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영성이 격하게 저항했네.”
“....”
“물론 억지로 쥐려고 했다면 못 쥘 것도 없었겠지만... 제대로 쓸 수는 없었을 게야.”
환신은 그걸 안 뒤에 분노하면서 용혼갑을 내던졌고, 염왕이 도전하였으나 역시나 실패로 돌아갔다.
“웬일인지 노납의 손까지 거부하진 않았네. 다만 노납은 당시에 이미 금강불괴를 이뤄 딱히 호신갑을 필요로 하지 않았었지.”
당시 불권은 심상지경에 오른 직후였다.
귀물 따위에 의존하기보다는 심상절예를 연마하는 게 보다 올바른 선택이었으리라.
“자네는 용혼갑을 다룰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가?”
“예.”
너무 당당하게 하는 말에 불권은 잠시 말문이 막혔는지 강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 자신한다면 내 안내해주겠네.”
“안내요?”
“용혼갑은 본사에 없네. 정확히 말하면 조금 떨어진 곳에 봉인되었지.”
“봉인이라면...?”
“용혼갑의 의념이 너무 강했네. 본사의 경내에 뒀다간 젊은 제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줬을 걸세.”
“그래서 어디에 있습니까?”
불권의 살갗에 파인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참회동에 있네.”
* * *
사마외도의 공적들을 잡아 가둔 뇌옥.
참회동에 대해서 익히 들어봤지만, 설마 용혼갑쯤 되는 신물을 참회동에 넣어둘 거라 누가 생각했을까.
하지만 불권의 설명을 들은 강엽은 납득했다.
용혼갑에 깃든 강성한 의념이 주변 모든 것에 영향을 끼쳐 움츠러들도록 종용했던 것이다.
마치 천적 앞에 노출된 초식동물처럼 다리가 굳어져서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고 하던가.
삼화취정쯤 되면 별 영향을 받지 않지만, 벽을 넘지 못한 자들은 하나같이 위축된다고.
-죄인들의 내공을 봉했으니 덤비진 못할 걸세. 광증이 들려 시비를 거는 자들이 있긴 한데 무시하게.
빛 한 점 통하지 않는 어두운 동굴에 발을 들인 강엽은 안에서 풍겨나오는 악취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어째 요즘은 동굴에 자주 오는구만.’
굳이 용혼갑이 아니어도 이런 장소에 오래 갇혀 있다면 정신력이 강한 고수들도 오래 못 버틸 것이다.
하물며 단전까지 봉인되어서 폐인 신세가 되었다면 절망감에 정신줄을 놔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렇게 강엽이 안쪽 깊숙이 들어갔을 때, 창살 너머에서 사슬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정수리가 벗겨진 왜소한 노인이 희번뜩한 안광을 빛내며 광소를 터뜨렸다.
“키키킥! 이 사지를 토막내버릴 새끼야! 네놈을 젓갈 담아 부모에게 먹이겠다! 시체에 똥오줌을 갈기고 네 대가리를 뒷구멍에 처박아....”
화아아아악!
무형의 기파에 강제로 입이 다물린 노인이 읍 소리를 내면서 땅바닥을 뒹굴었다.
오물 위를 뒹구는 노인의 모습을 슬쩍 흘겨본 강엽은 그를 허공섭물로 벽에 밀어버린 뒤 사슬로 묶었다.
손도 쓰지 않고 노인을 제압하는 광경에, 어둠 속에 묻혀있던 일부가 흥미로워했다.
“...허공섭물을 잘 쓰는군. 제아무리 삼화취정의 고수라도 반항하는 사람을 붙잡을 순 없을 텐데.”
“못 보던 놈이다. 소림의 빌어먹을 땡중이 아니야. 머리카락이 제법 길어.”
“정파도 아니다. 기운이 사특하기 짝이 없어.”
과연 참회동에 갇힐 만한 마인이라고 해야 할까.
단전이 부서져 내공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감각까지 완전히 잃진 않았는지 혈공진기의 성향을 파악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용무가 없었던 그들을 깔끔히 무시하고 통로 저편을 향해 나아갔다.
“히히! 그 갑옷을 노리는구나. 흑룡교의 신물을...!”
수염이 덥수룩한 배불뚝이 노인이 입가를 쪼갰다. 팔다리는 앙상한데 배만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체구.
강엽이 무심하게 지나려고 하자 발악하듯 외친다.
“크하하! 이교의 죄인아! 넌 그거 못 쓴다! 흑룡교주의 혈손들만 쓸 수 있는 지고한 보물이란 말이다!”
“잘 아는군.”
강엽이 발길을 멈추고 시선을 돌리자 노인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경련했다.
“날 이교의 죄인이라고 불렀지. 흑룡교의 생존자인가? 참회동에 갇힐 정도면 구천호법이나 그에 준하는 신분 같은데 맞나?”
“흥, 내가 왜 대답해야....”
“아니.”
강엽의 왼쪽 눈에 붉은 광채가 떠올랐다.
“당신은 대답할 거다.”
배불뚝이 노인뿐만 아니라 참회동에 갇힌 모든 마인들이 선명한 광채를 보고 흠칫했다. 저들끼리 쑥덕대거나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는 일도 없다.
그리고 그 순간.
“아아, 교주님!”
털썩 무릎을 꿇은 배불뚝이 노인이 눈물을 흘리며 강엽을 향해 경배했다.
“흑룡교의 하나뿐인 지존이시여!”
“...!”
생각지도 못한 이상행동에 깜짝 놀란 죄인들이 고개를 돌렸지만 노인은 알아채지 못했다.
방금까지 이교의 죄인이라 욕하던 노인이 갑자기 강엽을 흑룡교주가 부르는 까닭이 무엇이겠나.
누군가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환술...!”
상대의 기억을 헤집는 마안의 환술.
환각을 거는 것 정도는 이전에도 가능했지만,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했던 바.
하지만 이젠 그러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그리 되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
“예! 대 흑룡교의 위대한 지존이십니다!”
“그럼 너는 누구지?”
만약 노인이 흑룡교의 고위인사였다면 자신을 못 알아보는 교주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으리라.
하나 노인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소신 구천호법의 우마군(牛魔君)입니다!”
“허...!”
감탄을 흘린 것은 강엽이 아니었다.
노인과 함께 잡혀있던 자들이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해져서 중얼거렸다.
“수십 년간 같이 있었는데도 몰랐군. 구천호법이 바로 옆칸에 있었다니....”
“용혼갑에 대해 말해봐라.”
노인이 구천호법이든 뭐든 강엽은 관심 없었다.
다만 구천호법이라면 용혼갑에 대해 더 잘 알지 않을까 싶어 물었을 뿐.
“예, 그것은....”
딱히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예상한 대로 용혼갑은 용혈을 갖고 있어야만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신물이었다. 다만 삼화취정을 이루어야만 신물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용혈을 갖지 못한 자가 억지로 입으면 모든 경혈이 찢겨 죽습니다. 심상지경이라면 반발력을 누를 수 있겠지만, 효능을 끌어내진 못하겠지요.”
“그렇군. 알려줘서 고맙다.”
손가락을 튕겨 마안의 환술을 풀고 더 깊숙한 곳으로 나아간다.
목인장(木人樁)에 걸린 반투명한 흉갑.
뱀의 허물처럼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호신갑은 강엽의 손이 닿자 묘한 공명을 일으켰다.
어쩐지 익숙하게 다가오는 의념.
용혼갑 역시 강엽의 안에 깃든 용혈을 느낀 것처럼 부르르 떨더니 피부를 타고 녹아내렸다.
몇 번 손을 쥐었다 펴본 강엽은 신물이 체내에 스며들었음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용혼갑을 가져갈 셈이냐?”
돌연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목소리.
죄인들과 말을 섞을 수 없을 만큼 깊숙한 곳에 갇힌 누군가의 소리에 강엽이 우뚝 멈춰섰다.
“...여기에 갇혔다는 말은 들었지.”
철창 너머에 갇힌 거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적미성이 눈을 뜨며 강엽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특이하군. 용혼갑은 흑룡교주의 혈손만 쓸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네놈이 용혼갑을 수습한 걸 어찌 해석해야 할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네놈이 흑룡교의 생존자들을 무림맹에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흑룡교주의 혈손이라면 말이 되는 일이지.”
“....”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이빨을 드러내며 도발하는 적미성의 모습.
강엽은 대답하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갇힌 멸마전의 아라한들과 암야마각을 돌아보았다. 눈에 살기를 띤 채 죽일 듯 노려보는 모습.
“할 수 있으면 해봐라.”
“뭐라고?”
“내가 흑룡교주의 핏줄이라고 알리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지만 어차피 기억하지도 못할 거다.”
“...!”
불권이야 신의가 깊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딱히 조치를 할 필요도 없지만.
자신에게 적대감을 품은 이들을 내버려두고 갈 생각은 강엽 역시 처음부터 없었다.
“너, 너...!”
“걱정 마라.”
마안의 광채를 띄운 강엽이 손을 뻗어 적미성의 턱을 움켜쥐었다.
“살려는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