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78화 (372/450)
  • 75화. 불권 (3)

    세 사람은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환신의 기록이 남아있다는 불권의 말에 강엽이 일단 그것을 열람하고 싶다고 요청했기 때문.

    다시 소림사로 돌아간 뒤, 강엽은 불권에게 한 권의 서책을 받았다.

    -환야진서(幻夜振舒).

    진서(珍書)가 아닌 진서(振舒).

    쭉 읽어본 강엽은 어째서 환신이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이해했다.

    ‘이것 자체가 그의 심법진이다.’

    환신 자신의 심법진을 글로 풀어낸 비급. 그 안엔 평생을 쌓아온 술법관까지 녹아들어 있었다.

    강엽이 쥔 이것이야말로 환신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환신 시주가 이걸 남겼을 때, 이 늙은이는 무척 당혹스러웠다네.”

    그랬을 것이다. 술법과는 인연이 없었던 불권이라 해도 이 비급의 가치를 한눈에 꿰뚫어봤을 테니.

    “당시 환신 시주는 이렇게 말했네. 천기를 엿보니 후인을 둘 팔자가 아니었다고 말이야.”

    환신 역시 작금의 염왕과 불권이 그랬듯 천기를 엿보는 경지에 접어들었던 것.

    하지만 그때는 이미 천수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억지로 후인을 두자면 못 둘 것도 없으나, 그런 식으로는 금세 맥이 끊길 거라고 했지. 해서 비급의 형태로나마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했네.”

    “하지만 이걸 이해한다고 환신의 술법이나 심법진을 익힐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환신의 비급이 진귀한 보물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술맥을 계승하는 것과 큰 관계는 없었다.

    ‘굳이 억지로 하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비유하자면 가장 근본적인 오의부터 통달한 다음 초식을 짜맞추는 것과 같았다. 백번 양보해서 후자는 그렇다 쳐도 전자부터 말이 안 되는 일.

    강엽의 이맛살에 골이 파였다.

    “보물은 보물인데... 계륵이군요.”

    “어떤 면에서?”

    “이 비급에 적힌 내용을 대충이라도 이해하려면 최소한 심법진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심법진을 터득한 술사라면 이미 일가를 이룬 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법진을 터득해야 이해할 수 있는데, 이미 심법진을 터득했다면 다른 심법진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환신의 술법을 터득하는 게 만만한 일도 아닙니다.”

    강엽처럼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한 사람이 복수의 심상을 다루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강엽 역시 비급의 내용을 어렴풋이 이해할지언정 환신의 심법진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한낱 비급으로 대술사의 심법진을 배울 수 있을 리가 만무.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걸 익힐 바엔 그냥 기존의 술법을 연마하는 게 낫습니다.”

    “음....”

    “환신쯤 되는 기인이 그걸 몰랐을 리는 없지요. 그럼에도 굳이 이런 걸 남겼다는 건....”

    순간 강엽의 왼쪽 눈동자에서 폭사된 붉은 광채가 비급을 훑었다.

    아마 불권쯤 되면 강엽의 안법이 마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을 테지만 별 동요는 없었다.

    그저 비급이 일으킨 변화에 주목할 따름.

    우우우우웅...!

    마치 스스로 우는 것과 같은 묘한 공명.

    비급의 표지 위쪽으로 묵빛 문자들이 증발하듯 떠오르더니, 이내 강엽을 향해 화살처럼 쏟아졌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불권도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부릅뜨는 순간.

    “상당히 괴팍한 성격이셨군.”

    투두두두두둑!

    강엽의 말과 함께 보이지 않는 힘이 묵빛 문자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움찔거리는 묵빛 문자들을 바라본 강엽이 냉소했다.

    “심법진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도 없는 비급. 하지만 그 경지에 도달하면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는 계륵 같은 비급.”

    그럼에도 후인을 양성하기 위해 익힐 수밖에 없도록 강압적으로 조치했다.

    “심법진을 터득했어도 대술사가 남긴 비급을 봤다면 누구나 호기심으로 한 번쯤 읽어보겠지.”

    자신에게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비급을 봤을 터.

    심법진에 이른 술사라면 행간의 규칙을 알아챘을 공산이 컸다.

    “심법진의 핵심을 짚는 법문을 어떤 식으로든 자극하면 비급에 남긴 심상이 발동된다.”

    그로써 환신의 의념이 강제로 새겨지며, 환신의 술법에 광적으로 집착하도록 술사를 통제한다.

    본래 환신의 술법에 관심이 없었다 할지라도 의지를 흔들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방술.

    그러한 설명을 들은 불권의 안색이 납처럼 굳어졌다.

    후인의 의지가 어떻든 환신 자신의 뜻대로 억지로 후인을 만든다는 말이 아닌가?

    “...면목이 없네. 결례를 저질렀군.”

    동기가 어쨌든 비급을 건네주었으니 환신에게 일조한 셈.

    하지만 강엽은 개의치 않았다.

    “아마 환신은 대사님을 도와드린 대가로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불권도 비급을 읽었겠지만, 아무리 심상지경의 고수라도 술법에 능통하지 않다면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환신은 불권이 사문에 비급을 공개하지 않을 거라 믿고 그를 이용한 게 아니었을까.

    ‘실제로 후인을 남기려고 비급을 짜냈으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딱 그게 전부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되, 진실을 다 말하지도 않았다.

    불권의 노안에 근심이 어렸다.

    “환신 시주가 괴팍하긴 해도 악인은 아니었거늘.”

    “글쎄요. 저도 술법을 익혔지만 술사들 중엔 상리를 벗어난 자들이 많습니다.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과정 따윈 무시하는 자들이 말입니다.”

    특히나 자신의 수명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후인을 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면 더더욱 그러한 사고로 귀결되었으리라.

    “평소에 제자를 길렀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만....”

    “환신 시주는 기준이 높았지. 그에게 가르침을 청한 이들은 수두룩하게 많았지만 이 늙은 땡중이 아는 한 다들 중도에 나가떨어졌네.”

    “...그러면 처음부터 이런 방식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강 시주에겐 안 통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두 번째 조치를 취한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이건 시커먼 속내를 알면서도 걸려들 수밖에 없는, 실로 악랄한 조치였다.

    “자신의 심상을 지닌 자만 심법진의 문을 열 수 있게끔 했군요.”

    “.......”

    이번만큼은 불권도 말문이 막혔는지 대답을 못하고 미간에 천(川) 자를 만들었다.

    “이런 무간지옥에 떨어질 종자를 봤나....”

    그래도 쌍욕을 하긴 그랬는지 바로 입을 닫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강엽은 못 들은 척하며 말을 이었다.

    “이 건은 저도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불권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쓴웃음만 흘렸지만, 강엽은 개의치 않았다.

    환신이 남긴 묵빛의 문자들을 태극반의 경파로 가둔 뒤, 고민하는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잘하면 알맹이만 쏙 빼먹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본래 환신이 남긴 의도와는 다르지만, 그가 남긴 안배를 날로 먹으면서 일을 해결할 수 있을 듯싶었다.

    * * *

    다음날 다시 골짜기에 모인 세 사람은 보다 깊숙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염왕은 왼팔에 먹빛 문자들을 두꺼운 팔찌처럼 두른 강엽을 힐긋 보고 물었다.

    “환신의 심상이라고?”

    “예. 이걸 열쇠로 써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미 염왕도 환신이 남긴 안배에 대해 들은 마당.

    강엽을 강제로 전인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말에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음흉한 영감탱이 같으니. 옛날부터 후인 타령을 하더니 죽어서도 후인에 집착하는군.”

    아마 환신의 기준을 통과하려면 모산혈조나 제갈의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애당초 오의부터 깨닫게 하고 거꾸로 술법을 짜게끔 비급을 남긴 것부터가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난 술법을 모르지만 그게 너를 노리고 있다는 건 알겠다. 용케 침식당하지 않았군.”

    태극반의 경파로 대술사의 심상을 묶고, 그 위에 여러 술법적 조치를 해둔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지남철에 이끌리는 쇳조각처럼 집요하게 안쪽으로 파고들려는 환신의 심상.

    태극반에 더 많은 공력을 쏟으며 심상의 파편을 밖으로 밀어낸 강엽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사아아아아아....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주듯 음산한 기운이 주변을 잠식한다.

    “지기(地氣)가 죽었군.”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은 것을 넘어 시커멓게 물든 땅을 가죽신 앞코로 쿡 찌른 염왕이 정면을 주시했다.

    “여길 넘어가는 순간부터 심법진인가?”

    “그렇소.”

    “이전에 와본 적은... 없겠군. 어차피 환신의 심상이 없다면 출입조차 못하니.”

    “...굳이 오려고 하지도 않았지.”

    “어떻게 할 거냐?”

    불권의 입장에선 굳이 과거의 허물을 마주쳐서 좋을 게 없었다.

    최악의 경우엔 심마가 불권을 죽이려고 하거나, 그의 육신을 노릴 수 있지 않겠는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가면 안 되겠지만....”

    “결자해지라고 했다. 당신의 손으로 없애지는 못해도 마지막은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발언권을 넘기듯 강엽에게 시선을 돌리는 염왕이었다.

    이미 정안으로 주변을 둘러싼 심법진을 관찰하고 있던 강엽이 그 시선을 눈치채고 말했다.

    “변수가 많긴 하지만, 대사님께서 같이 가시는 게 우리에게 더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또 의외군. 이유는?”

    “만약 그 심마라는 놈이 대사님을 노린다면 유도할 수 있을 테니까요. 반면에 저와 선배님만 가면 아예 나오지 않거나....”

    “숨어버릴 수도 있다?”

    강엽이 고개를 끄덕이자 염왕이 턱을 매만졌다.

    “과연. 심법진의 면적이 광활하다면 찾는 것도 일이겠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다면 되도록 단기전으로 끝내는 게 옳다.”

    “물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만큼 최우선 과제는 대사님을 지키는 일이 될 겁니다.”

    “무량수불, 이 늙은이를 지키는 것보다는 심마를 제압하는 것을 우선해주게.”

    불권이 각오를 마쳤음을 암시하는 말. 서로를 돌아본 세 절대고수는 동시에 일보를 내디뎠다.

    그리고 허공에 녹아내리듯 함께 사라졌다.

    * * *

    술사가 죽은 뒤에도 유지되는 심법진.

    그 안에 첫발을 디딘 강엽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은 새카만 천장과 붉은 빛이었다.

    요사한 빛을 발하는 핏빛의 야광주가 천장과 벽 등에 붙어 어둠 속을 밝히는 광경.

    그때 등 뒤에서 파묻히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고맙네.”

    강엽의 손을 잡고 일어난 불권이 가사를 털다, 자신이 몸으로 뭉개버린 버섯 뭉치를 발견하고 탄식했다.

    “안쪽에선 생명이 자라고 있었는가.”

    “제대로 된 생명이라고 하긴 어렵지만요.”

    으깨진 버섯을 들어올린 강엽은 밑바닥에 눌러붙은 사체를 손으로 쿡쿡 찔렀다.

    죽은 지 오래된 사체였지만 본래는 지네였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얼핏 보면 동충하초처럼 생겼지만,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바깥에서 느꼈던 삿된 기운, 그것을 몇 배로 농축한 것처럼 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한데 여긴 동굴인 것 같구먼. 환신의 심법진은 본래 이렇지 않았을 텐데... 뭔가 변했네.”

    불권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대강은 깨달은 눈초리였다.

    ‘심마와 심법진이 뒤섞인 채 변질됐다.’

    불권의 심마가 심상과 합쳐지면서 생명을 얻었듯, 세월이 흐르면서 환신의 심법진과 결합한 것.

    이전에 불권이 한 말을 떠올린 강엽은 직감할 수 있었다.

    ‘용맥과 결합했다고 했지. 용맥은 땅밑에 있으니 이 광경은 어쩌면....’

    얼마나 깊은지 모를 지저의 심연.

    이미 심법진은 심마를 가두기 위한 뇌옥이 아니라, 심마 자신의 영역으로 탈바꿈된 지 오래였다.

    “일단 염왕 선배님부터 찾는 게 먼저입니다. 같이 들어왔는데 왜 따로 떨어지신 건지....”

    쿠구구구구구궁......!

    그 순간, 두 사람을 둘러싼 공간 전체가 맥동하듯 꿈틀대면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자아냈다.

    암석처럼 단단한 질감을 지닌 벽이 출렁거리더니, 자기들끼리 합쳐지고 나뉘는 게 아닌가?

    동시에 심장이 뛰듯 큼지막한 박동음이 규칙적으로 이어지며 두 사람의 심령을 자극했다.

    “.......”

    침묵으로 견지하는 두 사람의 모습.

    암벽이 합쳐지면서 새로이 생겨난 통로의 저편에서 사특한 존재감이 물씬 풍겨나왔다.

    ‘역시 불권부터 노리는군.’

    그 존재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천천히 걸으면서도 공간을 성큼성큼 건너뛰며 두 사람의 앞에 당도했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 마치 아이가 진흙을 조물딱거린 것처럼 해괴하게 생긴 무언가.

    사람처럼 머리와 팔다리를 가졌되, 이목구비를 갖지 못한 그림자가 두 사람을 주시했다.

    정확히는 강엽의 뒤편에 있는 불권을.

    -심상절예 구현....

    만나자마자 심상절예부터 날리고 보는 건가.

    “화끈한 건 마음에 드는데.”

    염왕이 없다는 게 걸리지만, 불권의 심마가 얼마나 강한지 궁금한 건 강엽도 매한가지.

    상대를 노려본 두 절대고수가, 거의 동시에 심상절예를 완성하여 쏟아부었다.

    -무광암.

    -전륜극형(轉輪極刑).

    등 뒤로 흐릿한 회색의 고리를 불러낸 불권의 심마가 강엽의 심상절예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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