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77화 (371/450)

75화. 불권 (2)

천하오악 중 중악에 꼽히는 숭산.

본디 북위 시절 발타 선사가 건립하였으나, 무림인들은 달마 대사를 실질적인 개파 조사로 여긴다.

달마가 창안한 역근경과 세수경이 소림 무학의 근본이자 천하 무공의 시초로 여겨지기 때문.

‘실제로는 그전에 이미 무공이 존재했지만 말이지.’

그러나 달마가 창안한 무공이 천하의 무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오만한 진조조차 인정하지 않았던가.

“무량수불... 이쪽으로 오시지요.”

강엽을 안내한 이.

지난날 호광성의 싸움 이후 칩거에 들어간 불권을 대신하여 방장 노릇을 하는 법현이라는 노승이었다.

정식으로 장문령부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나, 불권이 입멸하면 차기 방장으로 내정된 사대금강.

공덕이 얼마나 깊은지는 눈대중으로만 봐선 모르겠지만, 무공은 차기 방장답게 고강했다.

‘일전에 봤던 사대금강보다도 강해.’

강엽 자신이 심상지경에 들었기에 알 수 있었다.

이 법현이라는 노승이 심상지경에 들기까지 고작 한 발짝 정도만 앞두고 있다는 것을.

때로 그 한 발짝을 내밀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같은 자리에서 답보하는 이들도 많으니, 반드시 오른다고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그렇게 법현 대사를 따라간 곳.

커다란 은행나무와 금강역사상을 지나 불당이 줄지어 늘어선 소림의 경내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별로 없군요.”

오다가다 사미승들과 동자승들을 마주치긴 했지만, 정작 향화객은 보이지 않는다.

의아해하는 시선을 받은 법현 대사가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무량수불... 오늘 하루만큼은 객들을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불권이 돌아온 직후 날을 정해 포고한 일. 행여나 향화객들이 잘못 찾아오지 않도록 산밑 등봉현의 객잔들에도 주지시켰다.

“두 분을 청한 일이 그만큼 중하기 때문입니다.”

“두 분이라....”

강엽 말고 한 명이 더 왔다는 뜻.

숭산에 올랐을 때부터 어떤 존재감을 감지했기에 그게 누군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소림사의 중심인 대웅보전.

벽에 기대고 선 장발의 사내가 강엽을 알아보고 먼저 이채를 띠었다.

“...강해졌군, 애송이놈.”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엽이 옅게 웃으며 인사하자 염왕이 코웃음을 쳤다.

“신수가 훤해졌어.”

“남해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제자 녀석에게 들었나?”

“얼마 전에도 연통했습니다. 선배님을 애타게 찾고 있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더군요.”

“음? 그놈이 나를 왜?”

“곧 혼인할 거니까요.”

“혼인?”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한 해괴한 표정.

강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애아빠도 될 겁니다.”

“...점입가경이군.”

천하의 염왕에게도 제자에게 자식이 생겼다는 말은 감회가 새로운 걸까.

살짝 복잡한 감정이 떠오른 모습에 법현 대사 또한 희미하게 웃으면서 축하해줬다.

“감축드립니다, 염왕 시주.”

“내가 혼인하는 것도 아닌데 감축은 무슨.”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기분은 좋은지 입가가 살짝 올라간 모습이었다.

“내 제자 녀석은 그렇다 치고. 네 녀석은 뭔가 좋은 소식 없나?”

“아직은 없습니다. 혼인은 전쟁이 끝난 뒤에나 차차 생각해봐야지요. 서두르진 않을 겁니다.”

“그러는 놈이 꼭 사고 치던데....”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렇게 근황을 나눈 두 사람은 말끝을 흐리면서 대웅보전의 안쪽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안쪽의 정경.

뒤통수만 보이는 노승이 삼존불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염불을 읊조리다 깊숙이 절했다.

이내 몸을 돌려 대웅보전을 나선 노승이 강엽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먼 길 와줘서 고맙네, 강 시주.”

일전에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초췌한 몰골.

원래도 마르긴 했지만 지금은 볼이 움푹 들어간 데다 눈밑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고, 몸도 깡말랐다.

필시 이 순간에도 자신의 목숨을 불사르며 광명마교주의 심검을 봉인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리라.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버틸 만하네. 성수장주께서 보약을 지어주셨지 뭔가?”

약선이 지은 약이라면 보탬이 되었으리라.

다만 불권의 용태는 천고의 영약을 복용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든 지 오래.

남은 수명이 얼마 없는 만큼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식사는 하셨는가?”

“예?”

“기왕 온 김에 절밥도 한번 먹어보게. 속세의 진미에 비하겠냐만 먹어볼 만하다네. 나중에 술자리에서 안줏거리로 써먹어도 좋고. 소림 방장이 대접하는 절밥을 먹을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기사 숭산에 오르는 동안 시간이 꽤 지나서 슬슬 뭔가를 먹을 때가 되긴 했다.

“기왕 밥 줄 거면 술 좀 내와라. 듣자하니 검선이 빚은 술을 뜯었다고 하던데?”

“염왕 시주,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구려. 술이 아니라 곡차요. 그리고 뜯은 게 아니라 정당한 내기의 결과로....”

“장기로 땄든 골패로 땄든 내 알 바 아니니 얼른 내오기나 해라. 검선 그자도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곧 다시는 못 먹겠지. 희귀한 술은 미리 먹어놔야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는 법.”

“.......”

세속에 초탈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뚱한 기색으로 염왕을 쳐다보는 불권의 눈빛.

욕을 한바가지 쏟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염왕은 오히려 철면피로 응수했다.

“불만이냐? 사람을 불렀으면 술 정도는 대접해야지. 소림의 인심이 참 빡빡해졌군.”

“거참.”

입맛을 다신 불권이 고개를 내저었다.

“염왕 시주께선 젊을 때나 지금이나 참으로 한결 같으시구려. 하나도 변치 않으셨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했다.”

뼈가 옹골찬 말로 서로 신경을 긁긴 했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 악의는 없었다.

불권이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쓸었다.

“그건 그렇지. 염왕 시주께선 부디 변하지 말고 오래오래 그 모습으로 남아주시오.”

“....”

염왕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복잡한 심정을 감추듯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 * *

불권이 곡차라고 우기는 술까지 곁들인 뒤.

방장 대리의 업무를 위해 사찰에 남은 법현 대사를 뒤로한 세 사람은 경내를 빠져나왔다.

역대 고승들의 사리를 모신 탑림(塔林)과 소나무숲을 거쳐 험난한 잔도를 건너가기를 한참.

이름 모를 골짜기에 당도한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길을 멈추었다.

휘우우우우우웅...!

“.......”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대자대비한 불가의 법력을 머금은 숭산의 호연지기와는 걸맞지 않은 음산한 기운.

“어째 명부에 들어온 것 같군.”

삐딱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 염왕의 한마디.

강엽도 알아차렸다.

‘초목의 상태가 달라졌다.’

특이하게도 이 주위의 풀과 나무들만 말라 비틀어졌다. 벌레들도, 산새들도 접근하지 않는다. 심지어 썩은내까지 진동했다.

비슷한 기운을 이전에도 몸소 겪어본 바.

“마의가 생각나는군요.”

“흐음.”

염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망령놈이 지나간 곳도 이랬지.”

“마의를 본 적 있으십니까?”

“옛날에 한 번. 그놈이 도망치는 바람에 잡지는 못했지. 듣자하니 네놈이 죽였다면서?”

“힘든 상대였습니다.”

“잘했다. 천하에 해만 끼치는 놈이니 죽일 수 있을 때 죽여야지. 한데....”

“예, 마의의 사기와 완전히 같진 않습니다.”

느낌은 비슷하지만 세세히 파고들어가면 마의가 흘리는 사기와는 결이 달랐다.

마의의 사기가 시체에게서 흡수한 진기라면, 이곳에서 풍기는 명부의 기운엔 강한 의념이 묻어나온다.

그 의념의 주인이 누군지는 두 사람을 데려온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터.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군?”

“무량수불....”

손에서 염주를 굴리며 염불을 중얼거린 불권이, 회한이 가득한 눈빛으로 골짜기를 둘러보았다.

“염왕 시주께선 알고 계시겠지만, 이 늙은 땡중은 오래전부터 심마에 시달려왔네.”

마음이 만들어낸 번뇌는 실체가 없기에 죽일 수도, 억지로 떨쳐낼 수도 없었다.

“본래는 불공으로 심신을 다스려야 했을 터. 하나 이 땡중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순리를 따르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지.”

난데없는 고백에 강엽은 불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직감하고 안색을 가라앉혔다.

흑룡교를 토벌했던 시절엔 사마외도를 가차없이 척결하면서 광승이라 불렸던 불권.

불살계조차 거침없이 침범했던 그의 심상절예가 사람을 죽이는 대신 다른 형태로 귀결되었다면, 그 이면엔 상당한 곡절이 있었을 터.

불권의 안내로 명부를 연상시키는 골짜기에 들어온 지금, 강엽은 그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깨달았다.

“심마와 심상이 한데 섞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군요. 심마가 실체를 가진 겁니까?”

“...그렇다네.”

자신의 근원을 파고들어 이상향에 도달한 법칙.

그 법칙을 심검이나 심도 등으로 이 세상에 아로새기는 것이 심상절예의 요체였다.

‘그 과정에서 본래는 환상으로 그쳐야 할 심상의 풍경이, 실체를 갖고 구현한다.’

한데 그런 심상이 심마와 합쳐졌다면.

“심마가 생명을 얻은 거나 다름없지.”

염왕이 못마땅한 얼굴로 부언했다.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지만 통제도 못하고, 되레 꼭두각시가 되어 조종당하는 거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면 이 땡중은 스스로를 잃었겠지.”

말하자면 내면에서 움튼 또 다른 자아가 원래의 인격을 지우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셈.

“...그건 빈승의 반쪽입니다. 욕망, 살의, 질투...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한데 엉킨 허물이지요.”

“경지를 격하시키는 것을 감수하고, 심상과 함께 심마를 강제로 뽑아내서 봉인한 거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염왕이 혀를 찼다. 심상과 합쳐졌기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해졌다면서.

강엽이 끄덕이며 말을 이을 때였다.

[쉽게 말해서 저기 있는 건 저 땡중놈의 부끄러운 과거라는 말이 아니냐?]

“.......”

싸늘한 침묵이 살바람처럼 휘돌았다.

염왕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네놈은....”

[아까부터 말을 참 어렵게 하는구나. 과거가 쪽팔려서 숨겼다고 하면 되는 것을.]

강엽의 그림자가 확장되면서 나타난 거인. 진조의 돌발 행동에 강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어차피 짐의 존재는 저 땡중도 알고 있다. 일전의 싸움에서 짐을 맞닥뜨리지 않았더냐.]

비록 그때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불권 역시 강엽을 감싼 마신상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불권은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강 시주에게 귀신이 붙어있다는 건 알고 있었소. 이제 보니 어마어마한 지박령이었구려.”

[제 과거를 부끄러워해서 자멸한 놈에게 그딴 말을 듣고 싶진 않군.]

그때 강엽이 물었다.

“당신이 나온 건 심상의 기운 때문인가?”

본래 심법진이 아니면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진조가 뜬금없이 나온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

하지만 골짜기에 은은히 깔린 불권의 심상이라면 심법진을 능히 대체할 수 있겠지.

[네 짐작이 맞다. 하나 그뿐만은 아니리라.]

“그럼?”

[저 땡중놈이 심상과 합쳐진 심마를 따로 떼어내서 봉인했다고 했지. 그런 걸 평범한 장소에 봉인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진 않겠지.”

[최소 심법진, 어쩌면 심상법이겠지. 제법 잘 숨기긴 했는데 짐의 눈을 속일 순 없다.]

심법진에서 흘러나온 기운으로 나왔다는 뜻.

눈을 반개한 채 염주를 굴리는 불권을 언짢게 굽어본 그가 비틀린 조소를 그렸다.

[저 불꽃쟁이와 강엽 녀석을 데려온 건 네 심마를 제압해서 다시 네 것으로 삼고자 함이냐? 심마의 힘으로 억지로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 말이다.]

불권은 무공을 잃었으니 그 대신 싸워줄 심상지경의 고수가 필요했냐는 질문.

광명마교주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건 신념을 깡그리 짓밟는 짓이었지만 불권은 분노하지 않았다.

“빈승을 대신해서 싸워줄 이들이 필요한 건 맞소.”

[....]

“아마 염왕 시주라면 이 늙은 땡중의 심마쯤은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없앤다고 장담할 수는 없기에 강 시주를 부른 것이오.”

“그건 무슨 말이지?”

제압할 수는 있다면서 없앨 수는 없다니?

“빈승의 허물을 제압한 건 ‘환신(幻神)’이었소.”

“그자가?”

강엽도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과거 흑룡교주와 싸울 당시 염왕, 불권과 함께 합공에 나섰던 세 번째 절대고수.

제갈세가의 가주와 모산파의 장문인조차 뛰어넘는 무림 최고의 대술사.

“하나 환신도 빈승의 허물을 제압할지언정 없애지는 못했소. 그것이 밖에 나올 때부터 숭산의 용맥과 결합하여 불사의 존재가 된 탓이오.”

“...!”

“환신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소. 빈승의 허물을 없애려면 두 명이 필요하다고. 바로 빈승의 허물을 막을 수 있는 절대고수와 용맥에 개입할 수 있는 대술사요.”

환신은 그 모두가 가능한 존재였지만, 동시에 다른 일을 하지는 못했다.

“훗날 빈승이 심상절예를 되찾았을 땐 환신께서 귀천하신 뒤였지.”

“그랬군....”

염왕이 침음하듯 중얼거렸다.

물론 환신이 살아있을 때 염왕을 불렀다면 해결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엔 그가 은거한 뒤였다.

불권과 연통이 닿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훗날이었으니 방법이 없었으리라.

“이 늙은 땡중이 죽은 뒤에도 저 허물은 남아있을 것이오. 이 목숨이 다하기 전에 허물을 치우는 것이 빈승의 마지막 과업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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