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74화 (368/450)

74화. 암야 (6)

끝없이 질주하는 찬란한 유성.

순식간에 밤하늘의 공간을 집어삼킨 심상은 암야마독을 넘어 가까이 있던 사람들까지 삼켰다.

밤하늘을 관통한 은은한 서광은 멀리 있던 사람들의 이목까지 집중시켰다. 급박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넋을 잃었을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심상에 사로잡힌 암야마독 또한 눈을 부릅떴다.

“유성...!”

밤하늘을 가른 아름다운 별빛.

단지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은은한 곡선을 그리며 그녀의 허점을 파고들고 있었다.

“웃기지 마!”

이대로 땅끝까지 처박아주마.

그녀는 물러서기는커녕 더욱 기세를 끌어올렸다. 허공에서 자세를 바꾸며 내지르는 족격. 발끝에 뭉친 공력이 긴 잔상을 그렸다.

콰과과과과과과광!

족격과 유성이 충돌하며 반발력을 자아내자 암야마독은 입꼬리를 올렸다.

백서희의 검은 빨랐지만, 단지 빠르기만 해서는 그녀가 수십 년간 쌓아올린 무공을 뚫을 수 없었다.

발로 검극을 막은 그녀는 용천혈로 진기를 분사하며 추진력을 더했다. 강력한 반발력을 받은 검극은 단단한 아성을 뚫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끝이다. 땅끝까지 처박아주마!”

-심극 전개.

발끝에서 회전하는 용오름.

백서희가 스스로 유성으로 화했다면, 그녀는 모든 걸 집어삼키는 태풍으로 화하리라.

-용풍비연....

그렇게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암야마독은 허공을 거슬러 올라간 또 다른 유성을 보고 눈을 껌뻑였다.

막 출수하려던 심극이 파훼됐다. 호신강기가 잘려나가고, 화끈한 느낌이 얼굴을 가르고 지나갔다.

몸통을 긋고 지나간 검격이 턱선을 지나치며 미간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아....”

한 박자 뒤에 솟구치는 선혈. 상단전의 직감으로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닫고 탄식했다.

“이따위 속임수로....”

자성검을 쓰느라 잠시 넣어뒀던 또 다른 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는데, 첫 번째 검격이 막힌 순간 어검으로 솟구쳐서 주인의 손에 잡혔다.

그렇게 어검의 비행에 몸을 맡기며 자성검을 놓고, 그대로 암야마독을 베어버린 것.

허공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암야마독을 일별한 백서희는 검에 매달린 채 쓴웃음을 흘렸다.

“원래 살수 비기는 속임수거든?”

암야마독이 푸념한 대로였다. 어검이라는 것만 빼면 시정잡배나 할 법한 너절한 속임수였으니.

그렇게 어검을 잡고 내려온 그녀는 땅에 박힌 자성검을 회수했다.

우우웅...!

자기를 버렸다고 투정하는 걸까.

달래듯이 검신을 매만진 그녀는 문득 건너편의 집에 있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미처 창문을 닫지 못했는지 안쪽이 훤히 보였는데, 중년의 사내가 식구들을 껴안고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음,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린 그녀는 허공섭물로 창문을 걸어 잠갔다.

그 뒤에 몸을 돌렸을 때.

“크으....”

바닥에 엎어진 암야마독이 꿈틀거렸다. 검이 몸과 얼굴까지 베었는데도 용케 죽지 않은 것이다.

주먹을 꽉 쥐며 얼굴을 든 그녀가 흉신악살처럼 으르렁거렸다.

“너, 너...!”

푹! 푸욱!

말을 하기도 전에 허벅지에 꽂힌 비침.

암야마독이 다시 쓰러진 채 쿨럭거리는데, 입가를 따라 걸쭉한 핏덩이가 흘러나왔다.

“썅, 고작 살수 나부랭이에게....”

“웃기셔. 그러는 본인도 살수 비기를 익혔잖아.”

“틀려. 나는, 무영문(無影門)의....”

“뭐?”

맥아리 없이 중얼거리는 바람에 끊겼지만, 뛰어난 감각은 그녀가 하려던 말을 잡아챘다.

‘무영문이라면 전설적인 도둑 문파인데?’

도둑과 살수는 은신술이 장기라는 점에선 비슷했다. 남의 물건을 가져가느냐, 남의 목숨을 가져가느냐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왜 족격을 쓰나 했더니만.’

도주를 염두에 두고 하체를 단련시켰을 테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리를 쓰는 무공이 강해진 게 아닐까.

‘무영문이라면 그 신투(神偸)의 후예인가?’

수십 년 전 훔치는 능력으로 무림을 진동시킨 전설적인 양상군자. 일신의 무공 역시 당시의 팔존과 비견된다는 소문이 있었던 자였다.

“협상을, 하자... 날 살려주면... 엄청난 재보를....”

“별로 끌리진 않은걸.”

호기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굳이 암야마독을 살려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

그 목소리에서 묘한 기색이 느껴지는 순간, 불길한 낌새를 받은 백서희는 생포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암야마독의 머리를 향해 검격을 내친다.

카앙!

“당신...!”

뚝 떨어지듯 나타난 텁석부리 거한이 껄껄 웃었다.

“미안하구먼. 근데 이 여자는 무조건 지키라는 게 대사형의 명이라서 말이야.”

“합공해도 용서하시구랴!”

겹치듯이 울려 퍼지는 목소리.

분명 두 사람이 말하는데 한 사람이 말하듯 똑닮은 목소리였다.

앞뒤에서 짓쳐든 공격을 피한 백서희가 인상을 썼다.

“외소림...!”

“이젠 멸마전이라우!”

한 사람은 갑옷처럼 두꺼운 철갑을, 다른 한 사람은 새카만 철곤을 들고 덤벼온다.

백서희도 암야마독을 상대하면서 적잖은 내공을 쓴 만큼 쌍둥이의 합공에 수세에 몰렸다.

‘이 인간들 강하잖아!?’

놀랍게도 두 사람은 삼화취정을 이루었다.

권갑과 철곤에 강기를 덧씌우고 공격하는데,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린다.

“적미성을 따르는 놈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구시렁거리듯이 외치는 투덜거림에 권갑을 낀 쌍둥이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갈 사형과 초 사제만 보고 우리 수준을 논하면 섭섭하지.”

“갈 사형은 원래 무재보다 문재가 뛰어났지. 초 사제야 뭐... 우리 사형제 중에 최약체고.”

어쨌든 두 사람의 합공으로 인해 점점 암야마독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상황.

피투성이가 된 암야마독이 섬뜩하게 웃었다.

“그러게 머리부터 노렸어야지.”

엎어진 채 들어올린 손엔 작은 종이 있었다.

째애애애애앵...!

날카로운 종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진다.

백서희를 몰아붙인 텁석부리 쌍둥이도 종의 정체를 모르는 눈초리.

“저게 뭐시여?”

그때 사방의 지붕과 담벼락에서 복면인들이 출현했다.

그들이 주먹만한 검은 구슬을 꺼내는 걸 본 백서희는 사색이 됐다.

“야, 이 미친년아! 민가 한복판에서 화탄을...!”

쾅! 콰콰콰쾅! 콰아앙!

폭음이 일고, 새하얀 연기가 안개처럼 솟구친다.

연기를 맡은 백서희는 숨을 삼켰다.

‘독탄...!’

텁석부리 쌍둥이도 기겁했다.

“이보쇼! 이건 너무 막나가는 거 아녀!?”

암만 그들이 적미성의 명을 우선시한다지만 독탄을 터뜨리는 걸 좌시할 순 없는 노릇.

그때 철곤을 든 쌍둥이가 쌍욕을 뱉었다.

“망할! 그년 튀었소이다, 형님!”

“뭣...!”

권갑을 쓴 쌍둥이도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좀 전까지 죽을 듯이 위태로웠던 암야마독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게 아닌가?

“아하하하하하하하!”

구름처럼 깔린 연기 위로 울리는 교소.

피투성이가 된 암야마독이 입꼬리를 찢으면서 쌍둥이를 비웃었다.

“시간 벌어줘서 고마워, 두 분!”

“이런 쳐죽일 쌍년을 봤나!”

그제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쌍둥이가 분통을 터뜨렸지만 암야마독을 쫓기엔 늦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누군지 모를 복면인에게 업혀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여러분 모두 안녕! 난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내 행복을 찾아 떠나겠어!”

한쪽 눈을 찡긋거린 그녀는 손바닥으로 입을 맞춘 뒤에 쌍둥이를 향해 고맙다는 듯이 보냈다.

어안이 벙벙해진 쌍둥이를 버려둔 백서희는 벽을 박차고 뛰면서 자성검을 역수로 쥐었다.

어검술을 쓰기엔 내공이 턱없이 부족한 판국.

‘저것들만 아니었어도...!’

아니, 남탓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암야마독이 말한 대로 처음부터 머리를 노렸다면 이 사달도 안 났겠지.

극한의 심력을 발휘, 역수로 쥔 검파에 모든 내공을 쏟아부으면서 저 멀리 사라지는 암야마독을 노려봤다.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다.

쐐애애애애액-!

단전의 내공을 박박 긁어모아 최후의 내공까지 담은 비검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지상의 사람들을 비웃으면서도 경계심을 곤두세웠던 암야마독이 눈알을 부라렸다.

투아아아앙...!

“젠장!”

“아하하! 아깝네!”

무리하게 격공을 써서 피를 토한 암야마독의 모습.

하지만 백서희가 모든 힘을 담은 비검은 격공을 맞고 엉뚱한 곳으로 꺾였다.

“다음에 보자고! 너랑 귀영, 둘 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여주겠...!”

다시 지붕을 박차고 오르면서 날아갈 때.

어둠 속에서 뜬금없이 날아온 거대한 금빛 섬광이 그녀를 업은 암야각의 고수를 덮쳤다.

퍼엉!

폭음과 함께 떨어지는 두 사람이 떨어졌다.

* * *

“.......”

암야마독을 놓쳤다는 죄책감에 이를 갈았던 백서희도, 조금 밑에서 분기를 곱씹던 쌍둥이도.

모두 하나같이 벙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형님! 저, 저기 좀 보쇼!”

“염병할. 하필이면 이런 때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쌍둥이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기겁하자 백서희도 눈을 가늘게 떴다.

노란 장삼 위에 주홍색 가사를 걸친 늙수레한 승려.

수염은 기르지 않았지만, 허연 눈썹 아래 흘러내린 주름은 노승의 나이가 굉장히 많음을 알려주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마에 찍힌 여덟 개의 계인.

지난날 모용세가의 싸움에서 불권을 만난 백서희는 당대 소림 방장의 이마에도 같은 수의 계인이 찍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림 방장과 같은 항렬...!’

누군지 몰라도 그가 암야마독을 제압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쌍둥이를 돌아보니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노승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노승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화들짝 놀란 것처럼 부리나케 도망칠 준비를 한다.

“지금 잡히면 안 된다! 얼른 도망쳐야...!”

“어딜 도망가느냐.”

후욱!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

수십 장이나 떨어져 있던 노승이 어느새 세 사람의 간합에 들어와서 쌍둥이를 꾸짖고 있었던 것.

한 박자 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백서희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쌍둥이 역시 대경한 표정으로 거리를 벌렸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가...!”

짓씹듯 내뱉은 쌍둥이가 서로를 흘깃거리고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달렸다. 한 사람이 잡히더라도 다른 쪽은 도망칠 수 있다는 계산.

그러나 채 십 보를 내딛기도 전에 노승의 신형이 아홉으로 갈라졌다.

여섯은 쌍둥이에게, 셋은 힘겹게 일어나서 절뚝거리며 어둠 속으로 도망치는 암야마독에게.

세 명의 절세고수가 단박에 제압당하는 광경에 백서희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연대구품!’

세간에도 익히 알려진 보신경.

지나치게 난해하여 입문한 이도 거의 없다고 알려진 보법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구사하는 경지.

불제자로서 쌓은 공덕과는 별개로, 노승의 무공 역시 고절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무량수불, 결례를 저질렀구려.”

백서희는 감히 따질 수 없었다.

내심 마른침을 삼키면서 두 손을 맞잡아 예를 갖출 따름.

“무림 말학 백서희가 삼가 소림의 노스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점창파 전전대 장문인이신 낙일신검께 사사했으며, 강호에선 섬무검예라는 별호로 불립니다.”

“알고 보니 점창파의 제자셨구려. 게다가 문 장문인의 제자라... 그분께서 입적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소. 늦었지만 조의를 표하오.”

“감사합니다. 한데....”

대체 노승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신을 잃은 세 사람을 눈짓한 백서희가 긴장한 낯빛으로 바라보자 노승이 희미하게 웃었다.

“법종이라고 하외다.”

“사대금강(四大金剛)...!”

소림 방장의 사형제로서 장문인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시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절세고수들.

수십 년 전부터 산문을 나서지 않았던 자들이 갑자기 출도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니, 사대금강만이 아니야. 이 기척은....’

저잣거리 곳곳에서 웅혼한 공력 기파가 출현, 암야각의 고수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십팔나한(十八羅漢)들이오.”

“맙소사.”

무당의 태극검수, 화산의 매화검수와 비견되는 소림의 최정예.

전원 중단전을 개방했다고 알려진 무승들이 나타나자 사태는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멸마전... 아니, 외소림까지 공격하는 건가요?”

“일단은.”

부정하지 않는다. 사대금강과 십팔나한이 오랜 칩거를 깬 것은 오래전 사라진 외소림 때문이었다.

“하나 살계를 열진 않을 것이오. 저 아이들의 말을 들어보고, 저들이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면 풀어줄 생각이외다.”

“저들의 수장은 여기에 없어요. 저희 일행과 싸우고 있는데....”

강엽과 싸우기 위해 도시를 벗어나지 않았던가.

백서희는 저간의 사정을 말하려고 했지만, 법종 대사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시오. 그쪽에도 본사의 사람이 갔으니. 사형께서 그 아이를 막기 위해 가셨소이다. 시주의 일행은 무사할 것이오.”

“어... 제가 말씀드리는 건 그게 아닌데요.”

“음?”

갸우뚱하는 노승을 향해 백서희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제 일행... 강엽이 적미성을 죽였을 수도 있어요. 원래는 암야각 정리하려고 온 건데 그자가 방해해서 빡쳤... 아니, 많이 화가 났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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