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70화 (364/450)

74화. 암야 (2)

마을을 따라 이어진 한갓진 관도.

어둠이 사위를 집어삼켜 희미한 달빛에만 의존해 밤길을 거닐던 중 초륜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대사형, 이렇게 떠나는 건....”

“닥쳐라!”

사형인 갈마중의 타박에 초륜은 입을 다물었지만, 얼굴에 어린 불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강엽과 갈마중으로 인해 어영부영하게 끝난 싸움.

만약 끝까지 싸웠다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한 만큼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앞서 걸어가던 적미성이 물었다.

“그냥 떠나서 아쉬우냐?”

“예, 그야 당연히... 컥!”

말하다 말고 허리를 꺾은 채 컥컥거리는 꼬락서니.

격공을 맞은 초륜이 털썩 주저앉아 괴로워하는 광경에 놀란 갈마중이 급히 적미성을 돌아보았다.

“대사형...!”

창백해진 초륜이 식은땀을 흘렸다.

소림의 외공을 극한까지 단련해서 갑옷처럼 단단한 피부를 지녔지만, 적미성의 격공은 그를 비웃듯 내가중수의 묘리로 장기를 직접 타격했다.

눈에 실핏줄이 오른 채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린 그의 눈에 뒷짐을 지고 있는 적미성이 보였다.

좀 전과 똑같은 질문이 귓가에 꽂힌다.

“아쉬우냐고 물었는데.”

“그, 그게....”

초륜은 감히 항변하지 못했다.

어설프게 변명을 주워섬기다간 머리통이 날아갈 것 같았으니까.

심지어 갈마중도 초륜의 행동거지에 짜증이 난 것과 별개로 감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사랑스러운 막내야, 내가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해야겠느냐?”

뿌드득!

“끄윽!”

손가락이 두피를 파고들자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과 콧물만 줄줄 짠다.

눈을 까뒤집은 채 졸도하려고 하는 사제의 몰골에 적미성이 손가락을 떼며 물러났다.

“헉! 히익! 케엑...!”

“....”

힘은 풀었으나 사제를 굽어보는 적미성의 눈빛은 한없이 싸늘하다.

갈마중이 발로 툭 건드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초륜이 납작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대사형! 아니, 전주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운 좋은 줄 알거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적미성은 밤하늘에 휘영청 걸린 초승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귀영은 네게 살의를 품고 있었으니까. 내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격살당했을 게다.”

초륜이 본전도 못 찾고 우물쭈물할 때 갈마중이 물었다.

“귀영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글쎄.”

“예?”

“손에 잡히는 느낌이 없었다. 그래도 광명마교의 일사도보다는 강한 것 같더군.”

“대사형의 말씀대로라면....”

“심상지경이겠지.”

석상처럼 굳어진 두 사람을 내버려둔 채 뒷짐을 진 적미성이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제 스승이 암습당했으니 귀영은 암야각을 찾으려고 할 터.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한다.”

* * *

송계학은 하루 뒤에 정신을 차렸다.

안 그래도 말랐던 노구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고생한 탓에 잔뜩 홀쭉해진 상태.

그럼에도 유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노학자의 눈빛은 주름진 노안과는 어울리지 않게 형형했다.

“그래, 무림인이 되었다고....”

“면목이 없습니다.”

낯을 들지 못하는 제자의 모습에 송계학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게 죄송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의 선택이고, 네가 정한 삶의 방식인 것을.”

“하지만 스승님의 기대를....”

“엽아.”

제자를 부른 노인의 입가에 옅은 웃음기가 감돌았다.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진 않으마. 그렇게 말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일 테지. 하나 이 스승이 네게 과거에 급제하라고 강요한 적이 있더냐?”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스승 송계학은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사람된 도리를 다하라고 가르칠지언정 제자들의 앞날에 깊이 간섭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관직이 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학문 역시 그렇지. 하늘 아래 도를 논하는 공부가 어찌 하나뿐이랴. 이 스승의 눈치를 볼 것 없다. 넌 너의 길을 가면 된다.”

“사람들이 비난해도 말입니까?”

“거참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구나. 이 스승이 아는 한 너는 남의 눈치 따위 보지 않는 놈인데.”

“아니, 제자는 나름 심각하게 여쭤본 건데 매도하시면 어떡합니까?”

강엽이 한숨을 쉬며 푸념해도 송계학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 내가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둘 거냐?”

“그건 아니지요.”

“거 봐라. 어차피 답이 정해졌는데, 내가 말려봤자 쇠귀에 경 읽기밖에 더 되랴?”

정답을 정해둔 대화는 백날 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면서 창가를 멀거니 돌아본다.

“다만 이 스승은 네가 가는 길에 피가 덜 흐르기를 바랄 뿐이니라.”

먼 과거를 추억하듯 회한에 잠기는 모습.

강엽이 피로가 역력한 스승의 얼굴에서 누군가를 떠올렸을 때, 노인의 목소리가 나직이 이어졌다.

“적미성이 왔었다고 들었다.”

“스승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군요.”

“한때는. 하나 오래전에 연을 끊었다. 적미성... 아니, 외소림이란 자들과 더 이상 얽히기 싫었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스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지만, 적미성 일당에게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알아야 할 터.

“껄껄, 궁금하다는 표정이구나.”

“말씀하시기 불편하면 나중에 듣겠습니다.”

“아니다. 좋은 추억은 아니지만 네겐 말해주마. 내가 겪은 외소림은...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이었다.”

잠시 목소리가 메이는지 목소리가 탁해졌기에 강엽은 얼른 탁자 위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스승의 손에 쥐여주었다.

물잔을 다 비운 송계학이 쓰게 웃었다.

“그들은 사마외도를 미워하는 만큼이나 그들을 두려워했지. 그리고 두려워하는 만큼이나 닮아갔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불살계를 범하면서도 괴로워했던 아라한들은, 언젠가부터는 아무 고민도 없이 사마외도를 죽여갔다.

“그게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정신이 마모됐기 때문인지는 모르겠구나.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그들은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무덤덤해졌고, 사마외도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을 치르든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무고한 중생이 죽는다고 해도....”

중생을 구하기 위해 사마외도를 죽이는 게 아니라, 그저 사마외도를 죽이기 위해 싸우는 집단.

수단과 목적이 합치되었을 때, 그들은 불제자라는 신분을 버리고 야차로 전락했다.

“어느 날 적미성이 날 찾아왔다. 석면(石棉)에 한 가문이 있는데, 무림과는 연관이 없지만 실상은 혈교의 주구라면서 야밤을 틈타 공격할 거라고 했었지.”

굳이 송계학을 찾아온 것은 마침 그 근방에 시찰을 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딴에는 관인인 내가 무림의 싸움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겠지. 나는 말리지 못했다. 그가 내민 증거가 확실해 보였으니까.”

“그 말씀은 설마....”

강엽의 눈이 커졌다. 송계학은 말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확실해 보인다는 것과 확실한 것은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너라면 눈치챘겠지. 그가 내민 증거는 사실이 아니었다. 철저히 조작된 거짓이었느리라.”

“적미성이 꾸민 건 아니겠군요.”

그런 식으로 증거를 날조할 거라면 애초에 송계학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누명을 씌웠다는 게 밝혀지면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올 테니까.

“알고 보니 혈교가 꾸민 계책이었지. 그러나 그 때문에 죄없는 이들이 몰살당했다.”

“....”

“그 뒤로는 적미성과 만나지 않았다. 그들의 소식은 나중에야 들었지. 그 일로 외소림이 갈가리 찢겨지고, 아라한들끼리 싸웠다고....”

송계학이 외소림에 대한 말을, 아니 사천에 순무로 파견되었다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은 이유.

필시 자신이 무심히 넘긴 증거로 인해 한 가문이 멸문당했다는 자책감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외소림, 아라한, 사천, 멸문....’

순간 어떤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스승님, 이런 질문을 드리는 건 외람되지만 멸문당했다는 가문이... 혹시 장씨 성을 썼습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소스라치게 경악한 스승의 반문.

강엽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 그 멸문한 가문의 생존자이며, 죄책감에 빠진 아라한이 그를 평생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얽히고설킨 은원의 실타래는 어디까지 이어졌는가.

강엽이 무림에 투신한 순간부터 시작된 인연은, 뜻밖의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 * *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른 아침.

식사를 하고 난 뒤 송계학의 용태를 살펴볼 무렵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낭왕 어르신을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문주님께서도 강 무사님께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당신이 올 줄은 몰랐군.”

지난날 낭왕의 구출 의뢰를 맡기러 찾아왔던 하오문의 소문주.

홍가려가 말갛게 웃으며 차를 음미했다.

“차향이 좋네요. 백담서원의 원주님께서 다도의 대가라 들었는데 손녀분의 차도 일품이군요.”

“과, 과찬이세요.”

병상에 누운 송계학을 대신해서 손님 대접에 나선 송하영은 홍가려의 미모에 얼이 빠졌다.

백서희와 당묘정, 야율산산도 빼어난 미인이었지만 홍가려는 그녀들과는 다른 화려한 기품을 타고났다.

스스로 하오문의 소문주라 밝힌 여인은 가히 경국지색과도 염기로 사위를 압도했던 것이다.

홍가려가 호위단에 눈짓을 하자 한 명이 나서서 비단보로 감싼 목함을 내밀었다.

강엽의 눈이 이채가 돌았다.

“이게 뭐지?”

“문주님께서 죽헌 노사의 소식을 듣고 준비하신 물건이에요.”

비단보를 풀고 목함을 열자 맑고 그윽한 향이 접견실을 가득 메운다.

최상품의 용정차조차 압도하는 산삼의 약향에 송하영은 눈이 튀어나올 듯이 깜짝 놀랐다.

“마, 맙소사...!”

“죽헌 노사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송하영은 차마 감사하다는 말도 못하고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강엽도 놀라기는 매한가지. 그간 많은 영약들을 봤다지만 이만한 산삼은 처음이었다. 잔뿌리를 빼고 봐도 어린아이의 팔뚝만 했으니까.

“대충 봐도 수백 년은 묵은 것 같은데.”

“이백 년 묵은 산삼이에요.”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햇수에 송하영이 떨떠름한 얼굴로 산삼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귀한 걸 받을 수는....”

“괜찮습니다. 문주님께서 선물을 보내신 건 죽헌 노사께서 쾌유하시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그전에 강 무사님이 본문을 위해 애써주셨기 때문이니까요.”

“예? 오, 오라버니가요?”

“이번만 해도 문주님의 부군을 머나먼 북해까지 가서 구하셨죠. 그전엔 제 목숨도 여러 번 구해주셨고요.”

그 말에 강엽을 새삼스런 시선으로 돌아보는 송하영의 모습.

강엽은 산삼을 받아도 된다고 고갯짓을 하면서도 홍가려의 사의를 대수롭지 않게 일축했다.

“다 의뢰였다. 공짜로 일한 건 아니야.”

“돈을 받는다고 모두가 마교주와 싸울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래도 돈이 강 무사님께 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니까요. 이건 본문이 드리는 의뢰비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겉면에 성도전장의 이름이 음각된 둥그런 패를 올려두었다.

“복잡한 절차는 낭인전과 함께 처리했으니 돈만 찾으시면 돼요. 참, 그리고 낭왕께서 이번엔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애초에 낭왕을 구하는 게 의뢰의 골자였으니 낭왕이 수수료를 뜯어가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그렇기에 납부해야 할 수수료를 감면한 것.

“이십만 냥을 그냥 먹었군.”

“으엑!?”

어마어마한 거액에 송하영이 깜짝 놀랐다.

“이, 이십만 냥이요? 의뢰 한 번에 그 정도나...!”

“이십만 냥은 당치도 않죠.”

홍가려가 어림도 없다는 듯 실소했다.

“수수료만 이십만 냥이라는 뜻이에요. 본문이 실제로 지급한 의뢰비는 이백만 냥이고요.”

“어어....”

고관대작의 손녀로 태어난 송하영조차 감히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거금.

백담서원의 일 년 예산과 비교해본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강엽을 돌아보았다.

“...관직에 진출할 필요가 없겠는데요? 뇌물 받는 탐관오리도 저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우리 서원도 열 번은 더 살 수 있을 테고....”

“잡담은 이쯤에서 끝내지.”

강엽이 홍가려를 똑바로 응시했다.

“소문주가 왔다는 건 암야각에 잠입할 방법을 찾았다는 뜻 같은데.”

암야각에 인질로 잡힌 자들을 찾아달라는 부탁.

낭왕이 하오문에 맡기겠다고 했으니 적당한 건수를 찾아냈을 터.

찻잔을 내려놓은 홍가려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인질을 찾는 건 소용없을 거예요. 비슷한 시도를 한 자들은 모두 실패했거든요. 물론 인질을 구하는 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런 식으로는 암야각의 중추에 닿을 수 없어요.”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있죠. 인질이 아니라 돈줄을 쫓아야 해요.”

“...과연.”

인질을 잡아둔 곳이 암야각의 총단이 아닌 다른 장소라면 인질을 찾는 건 의미 없다. 인질범들이 총단의 위치를 모른다면 더더욱 그렇다.

“알아본 결과 암야각은 강도짓을 하든 인질극을 하든 돈을 수금하는 이가 따로 있었어요. 그들은 산서성 곳곳에 있는 전장에 돈을 맡겼죠. 하지만 한 번 방문한 전장을 다시 찾는 일은 없었어요.”

“돈을 찾는 이가 따로 있다?”

“아패(牙牌)를 확인하지 않는 무기명 전표를 썼을 거예요. 다만....”

“전표를 넘기려면 접선을 해야지.”

“본문의 조사는 거기서 막혔어요.”

수많은 인파가 몰린 저잣거리에서 스치듯이 전표를 주고받았다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조차 잡아낼 수 있는 안력의 소유자라면....”

“내가 의뢰한 일이니 그 정도는 해야지.”

강엽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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