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69화 (363/450)

74화. 암야 (1)

“오래전부터 죽헌 노사를 흠모했지. 사특한 자들에게 변을 당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놀랐네.”

스스로를 불권의 제자라 칭한 외소림의 수장.

이젠 외소림이란 과거에서 탈피해서 멸마전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소림의 암검.

백담서원 주변의 객잔에 방을 잡은 그는 강엽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백서희는 그들의 목적지가 백담서원이라는 걸 알고 급히 송하영을 찾아간 마당.

“다행히 아직 귀천하실 때는 아닌 것 같더군.”

“그분과 친분이 있으시오?”

강엽은 스승과의 관계를 밝히지 않았다.

어차피 적미성이 작정하고 파고들면 들키겠지만, 굳이 자신의 입으로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

“젊은 시절에 연이 닿았지. 그분께서 사천성 순무(巡撫)로 재직하던 시절에 말일세.”

강엽도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송계학이 한림원과 육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순무로 일한 적도 있었다니?

“청렴하고 열정적인 분이셨지. 난 폭정을 일삼은 탐관오리가 그분의 손에 걸려 아작나는 것도 봤다네.”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쿡쿡 웃은 적미성이 목구멍에 독한 화주를 털어넣었다.

“한창 혈교가 창궐하던 시절이기도 했고. 혈귀들은 관무불가침의 관례도 깡끄리 무시해서, 관인과 무림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피해를 봤었지.”

“....”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보통 인연은 아니었을 터.

그때 적미성이 날카롭게 물었다.

“한데 자네는 왜 여기에 있는 겐가?”

“그건....”

강엽이 대답하려 했을 때.

무언가를 감지한 듯 두 사람이 갑자기 입을 다물면서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 곳에서 폭음이 아련히 들려오는데 후개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크, 큰일 났소, 강 형!”

“무슨 일인가?”

강엽에게 한 말이지만 적미성이 물었다.

후개가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하려는데 뒤따라 들어온 거한이 선수를 쳤다.

“초륜 사제가 사고를 쳤습니다, 대사형.”

“사고?”

“연 형에게 갑자기 달려들었소!”

후개가 다시 소리쳤다.

졸지에 말이 끊긴 거한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후개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분위기가 심각하오. 초륜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눈이 회까닥 뒤집혀서 달려들었는데....”

강엽은 바로 일어났다.

주렴을 헤치고 밖으로 나가자 멀리 떨어진 곳에서 거센 기파가 충돌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강 시주?”

소창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어떻게 여기에... 북해로 가셨다고 들었는데....”

“오늘 돌아왔소.”

“그, 그렇군요. 빨리 오셨네요. 아니, 그게 아니지. 혹시 저 사람 누군지 아십니까?”

강엽이 시선을 돌렸다.

쾅! 콰앙!

연가휘와 남궁상아, 황보진악 등이 적미성을 호종한 거한과 격렬한 공방을 나누고 있었다.

흉터 가득한 민머리의 거한. 얇은 입술을 말아올린 얼굴엔 비릿한 살기가 꿈틀거리고 있다.

소림의 정종무학을 익혔되, 파계승 뺨치는 강렬한 살의를 발산하는 옛 아라한.

신들린 듯 춤추는 철곤이 세 사람의 무공과 부딪치며 둔탁한 파찰음을 일으킨다.

소창후가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림의 무공을 쓰는 걸 보면 정파인 것 같은데....”

“외소림의 생존자요.”

“...!”

잔뜩 굳어진 소창후를 일별한 강엽은 곧 세 사람의 뒤편에서 팔을 부여잡은 당묘정을 발견했다.

부상을 입은 듯 창백하게 질린 신색. 강엽과 눈이 마주친 그녀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소창후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당 시주도 끼어들었는데 그만....”

“....”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 사람의 싸움으로 튄 경파가 그녀에게 향하는 걸 보고 한달음에 솟구쳤다.

직후 네 사람의 사이를 절묘하게 파고들며 경파를 막고, 족격을 뻗어 철곤을 찍어눌렀다.

천근추의 묘리로 땅에 처박자 초륜의 눈매가 찢어질 듯 부릅뜨였다.

“이놈이...!”

“왜 공격한 거지?”

“비켜라! 난 사마외도를 구제하는 거다!”

“사마외도라....”

연가휘를 슬쩍 돌아보자 그가 발끈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어이가 없군. 이름도 대지 않고 갑자기 기습한 주제에 구제라고?”

“너, 이름 모를 마구니야!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으냐? 분명히 무림맹에 잠입한 마교의 첩자렷다!”

그 말에 연가휘는 물론, 척마대의 무인들까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초륜을 바라보았다.

연가휘가 입매를 실룩였다.

“나에 대해 모르나 보군. 나는....”

“갈!”

일성을 터뜨린 초륜이 팔근육을 불끈거리면서 철곤 끄트머리를 우격다짐으로 들어올렸다.

천근추의 압력조차 이겨내는 불굴의 신력.

“비켜-!”

“아니.”

강엽이 고개를 저었다.

수십 배는 무겁게 느껴질 철곤을 들어올린 것은 놀랍지만, 이 이상 난장을 피우는 걸 용납할 생각은 없다.

‘나서지 않을 건가?’

어느새 객잔을 나선 적미성.

만약 그가 수하를 지키겠답시고 나선다면 일이 복잡해지리라.

적미성이 개입할 것을 허락하듯 턱짓을 하자 수염이 덥수룩한 거한이 단숨에 중인들을 넘어 초륜의 옆에 착지했다.

“그쯤 해두거라, 초 사제.”

“갈 사형!”

“대사형, 아니 전주님의 명이다. 저자는 척마대원이 맞아. 또한 그의 정체는 무림맹도 알고 있다.”

“뭐요!?”

초륜의 눈매가 치켜올라갔지만 갈 사형이라 불린 자는 사제를 무시하고 연가휘를 돌아봤다.

“흑룡교 출신의 연가휘. 무림맹에 포로의 신분으로 끌려갔을 땐 흑풍랑이라 불렸지만, 근자엔 ‘묵룡협(墨龍俠)’이라는 별호로 불린다지.”

“니기미! 마구니 주제에 협은 개뿔이...!”

대뜸 쌍욕을 퍼붓는 꼬락서니에 척마대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황보진악이 뚱한 얼굴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이보쇼, 형씨. 저 친구가 전직 마교도였다는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초면에 쌍욕을 퍼부으면 쓰나. 그리고 이제는 어엿한 우리 동료인데.”

물론 그리 말하는 그도 연가휘에게 시비를 건 전적이 있는 만큼 척마대원들은 실소를 흘렸다.

황보진악은 못 본 척 계속 말했다.

“댁이 뭐하는 작자인지 모르겠지만 이 친구를 죽이려 했다간 우리부터 넘어야 할 거요.”

“흥, 뭣도 모르는 애송이가....”

초륜이 으르렁거렸지만 사형이 어깨를 꽉 누르자 혀를 차며 물러났다.

“운이 좋았구나, 마구니. 이놈들이 없었다면 이걸로 네놈 골통을 부숴줬을 텐데.”

“글쎄, 누가 이길지는 두고 봐야지 않겠소?”

짐짓 너스레를 떤 연가휘가 능청맞게 말했다.

“나는 이겨도 당신을 죽이진 않을 테니 안심하시구려. 당신은 얼마든지 도전해도 좋소.”

“이 쓰레기 새끼가 뭐가 어쩌고 저째!?”

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싸우는 일은 없었다.

갈 사형이라 불린 자가 초륜을 뒤로 밀치면서 강엽과 연가휘를 향해 머리를 살짝 숙인 것이다.

“실례가 많았소, 귀영. 그리고 묵룡협 연가휘. 성미가 급하긴 해도 나쁜 녀석은 아니니 부디 해량해주시오.”

“같은 자리에 있어봤자 부딪치기만 하겠지.”

그리 운을 뗀 강엽은 두 사형제 너머에 있던 적미성을 슬쩍 흘겨보곤 말했다.

“백담서원의 원주님은 편찮으시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는 게 좋겠군. 지금은 누굴 만나실 상황이 아니라서.”

“그건 당신이 정하는 게....”

“오라버니!”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백서희, 야율산산과 함께 달려온 송하영이 인파를 헤치고 강엽의 옆에 와서 숨을 몰아쉬었다.

적미성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오라버니라고?”

“....”

강엽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어지간하면 자신과 백담서원의 관계를 노출하고 싶지 않았으나,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을지도.’

백담사원과의 관계를 숨기고 싶었다면 아예 발걸음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송하영이 자신을 사형이라고 밝혔으니 숨길 수도 없겠지.

그녀를 알아본 척마대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군. 죽헌 노사의 제자였나? 그것부터 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당신이 스승님과 어떤 사이인지 몰랐으니까.”

급한 대로 적당히 둘러댄 변명.

다만 적미성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넘어가는 눈초리였다.

“하긴 스승이 암습을 당했으니 조심스러울 만도 하지. 하지만 아까 말한 내 이야기는 사실이다.”

피식 웃은 적미성이 두 사제를 손짓으로 부르면서 몸을 돌렸다.

“자네 말대로 죽헌 노사께서 편찮으시다면 나중에 와야겠군. 그분께서 깨어나시면 안부나 전해주게. 과거의 인연이 당신을 잊지 않고 찾아왔노라고 말이야.”

그리 말한 뒤에 대답도 듣지 않고 두 사제와 함께 밤거리를 떠났다. 여기까지 안내해준 후개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남긴 채.

“.......”

적미성과 그의 사제들이 떠난 뒤에도 거리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척마대원들은 강엽이 백담서원의 제자였다는 사실에 놀란 기색을 금치 못했고, 송하영은 자신이 혹여 뭔가 실수했나 싶어 주춤주춤 다가왔다.

“그... 오라버니, 제가 혹시 말실수를....”

“괜찮다.”

강엽은 눈치를 보는 사매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어차피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지. 생각보다 조금 더 빨랐을 뿐이야.”

그렇게 송하영을 위로하고 있을 때였다.

싸움이 끝난 뒤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당묘정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만약 강엽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

강엽은 그녀의 거동이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팔이 부러진 거요?”

“아, 아뇨. 그 정도는....”

하지만 초음으로 본 결과 그녀의 팔뚝엔 가느다란 금이 가 있었다. 심지어 찢겨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팔뚝엔 시커먼 피멍이 진 상태.

여기저기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 개자식이... 외소림의 생존자라면서 하는 짓은 왜 이리 더러워?”

백서희가 툴툴거리는 소리를 뒤로한 강엽은 당묘정의 팔 위에 손을 올려 활명술을 썼다.

따스한 빛에 피멍이 사그라들자 당묘정이 숨을 골랐다.

“역시 술법은 굉장하네요. 저도 이런 걸 익혔다면....”

“생각보다 만능은 아니오. 제약도 은근히 많고. 부상은 치료해도 병마는 치료할 수 없소.”

게다가 쓸 때마다 선천지기를 소진해야 하니 평범한 사람은 제 명에 살지 못하리라.

“일전에 스승님을 구해줬다고 들었소.”

당묘정과 마주하는 게 아직도 어색하게 느껴지긴 해도 강엽은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당묘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전 한 것도 별로 없는데요.”

“전혀 그렇지 않던데? 완안극도 소저가 없었으면 스승님을 살릴 수 없을 거라 했소.”

“완 노사님이 너무 추켜세우셨네요.”

“내가 아는 완안극은 그럴 사람이 아니오.”

피멍이 사라지면서 백옥 같은 살결이 되돌아오고 나서야 강엽은 천천히 손을 뗐다.

연가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송구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연 공자의 잘못이 아니에요.”

남궁상아가 그를 두둔했다.

“전후관계도 알아보지 않고 나선 그자의 잘못이지요. 정심해야 할 소림의 신공이 그토록 괴악한 걸 보면 그자의 심신도 정상은 아니에요.”

“음, 나도 동감이오. 예전에 아버지를 따라 소림사를 찾았을 때 젊은 무승들과 교류한 적이 있는데, 그 누구도 아까 봤던 그놈 같지 않았소. 그놈은 소림승인지 살성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지.”

당묘정을 안쓰럽게 바라본 황보진악이 뒷말을 보태자 일행 모두 동감하는 표정이 됐다.

‘확실히 전강이나 야차마곤하고는 다른 기세였지.’

이제껏 만났던 외소림의 생존자들.

그나마 호전적인 야차마곤이 그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초륜이란 자는 완전히 광증에 물들었다.

어쩌면 골수까지 광기에 물들어 심마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

“보아하니 산서에 볼 일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웬만하면 얽히지 않는 게 좋겠군.”

“아, 그게... 불가능할 것 같소.”

후개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일행 사이에 끼어들자 습에 소창후가 장탄식을 토했다.

“그러고 보니 후개 시주께서 그들을 데려왔군요. 대체 왜 그런 자들을 데려온 겁니까?”

“나, 나도 어쩔 수 없었소. 무림맹에서 요청했단 말이오. 맹주님께서 사부님께 부탁하시고, 사부님은 나를 불러 일을 시키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소?”

“맹주님이 그들을 끌어들였다고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일행은 머리에 둔기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후개가 입맛을 쩝 다셨다.

“강 형은 아는 것 같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외소림에 대해 잘 모르실 거요. 삼십 년 전 혈교가 창궐할 때 숭산에서 하산한 소림의 암검들이지.”

“그들의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하면 그들이...?”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외소림이오. 그들이 멸마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무림맹에 입맹했소. 그 힘이 대단해서 무림맹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아무리 무림맹의 전력이 부족하다 하나 수상쩍은 세력을 덜컥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

하나 어디나 그렇듯 예외가 존재했다.

“멸마전은 모든 의심을 덮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했소. 듣기로는 광명마교의 일사도가 그들과 싸우다 패퇴했다고 하더이다.”

“......!”

일행 모두 일사도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호광의 모용세가에서 겪었던 신위. 첫 번째 사도의 위명에 걸맞게 벼락을 수족처럼 다루지 않았던가.

‘그렇군. 그때 놈들과 싸웠던 건....’

북해에서 봤던 일사도와 칠사도.

당시 격전의 흔적이 역력해서 누구와 싸웠는지 궁금했었는데, 그게 멸마전이었던 듯했다.

야율산산과 눈빛을 교환한 강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말할 게 있다.”

일월신교주와 얽힌 비사는 숨긴 채 강엽은 빙궁에서 겪었던 일을 담담히 풀어냈다.

“...그, 그게 사실이오? 일사도와 팔사도가 중상을 입고, 북해의 석탑을 없앴다고?”

“그래, 사정이 있어 처치하진 못했지만 당분간은 전력에서 이탈할 거다. 지금이 기회야.”

물론 사도들이 광명마교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

현재 광명마교주를 보필하고 있는 것은 절강성의 포정사인 이사도와 살수인 구사도뿐.

명색이 포정사가 전장에 나올 가능성은 현격히 떨어지고, 구사도는 다른 사도들보다 약하다.

“그럼 어서 무림맹에 알려야....”

“급전을 보내야겠지.”

어쩌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상당수의 사도들이 전력에서 이탈하고, 광명마교주도 불권에게 심검을 빼앗겨 약해진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광명마교를 칠 기회는 앞으로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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