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고향 (4)
침상 위에 누운 백발의 노인.
강엽이 이불 밖으로 나온 마른 손을 매만질 때, 뒤에 있던 완안극이 말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지 급소는 피했습니다.”
내장을 다치긴 했으나 빨리 손을 쓴 덕에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완안극은 자책했다.
“송구합니다. 저희가 더 빨랐다면....”
“천만에.”
백서희와 완안극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강엽이 본 것은 스승의 무덤이었을 터.
두 사람을 탓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고마움을 느껴야 마땅했다.
“깨어나시지 않는 건 수혈을 짚었기 때문인가?”
“예. 상처는 어떻게든 봉합했지만... 함부로 진통약을 쓰면 고령의 노인은 감내하지 못할 겁니다.”
강한 진통약엔 앵속이 들어가기 때문에 쓰면 쓸수록 약에 집착하게 되고, 정신이 피폐해진다.
그렇기에 완안극은 진통약을 줄이고 수혈을 짚어 송계학을 잠재웠다.
“스승님을 구해줘서 고맙다.”
“무슨 말씀을. 주인님의 스승이라면 제게도 남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만 고생한 것도 아니고요.”
“당연히 서희도 고생했겠지.”
현장을 못 봤지만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필시 완안극이 송계학의 목숨을 붙들고 있는 사이, 백서희가 암야각의 살수들을 상대했으리라.
강엽은 그런 의미로 말했지만, 완안극은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주모도 고생하셨지만 제가 말하는 사람은 당가의 여아입니다.”
“당묘정이?”
“제 무능을 고하는 것 같아서 부끄럽지만, 사람의 배를 개복하고 내장을 봉합하는 건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의술에 정통하면서도 손재주가 좋은 방수가 필요하지요.”
사람의 육신은 소우주라 불릴 만큼 정교하기에 한 치만 어긋나도 죽기 십상이다.
하물며 고령의 노인이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피를 흘렸다면 십중팔구는 삼도천을 건널 수밖에.
“장담컨대 그 아이가 없었다면 고비를 넘기지 못했을 겁니다. 만나시면 치하해주십시오.”
“어딨지?”
“척마대와 함께 출타했습니다. 옆동네의 지주가 암야각의 놈들에게 강도짓을 당한 모양입니다.”
하현(夏縣)에서 만석꾼으로 통하는 대지주가 집에 보관했던 재물을 모조리 내준 사건.
그 외에도 암야각으로 인한 사건이 산서성 곳곳에서 발발하고 있기에 척마대가 쉴 틈 없이 바빴다.
“암야각이라... 계속 거슬리는군.”
비용헌을 습격한 것부터 시작해서 스승인 송계학을 암습하고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까지.
안 그래도 낭왕을 통해 놈들에게 파고들 만한 건수를 찾고 있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생각보다 더 빨리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으윽....”
신음을 흘린 스승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던 것이다.
“스승님?”
놀라서 몸을 돌린 강엽을 본 송계학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웃었다.
메마른 입술 사이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허허, 내가... 헛것을, 보는 겐가...?”
“아뇨.”
강엽은 스승의 손을 꽉 잡았다.
노인의 주름진 손은 고목처럼 앙상해서 함부로 쥐면 부러지지 않을까 염려해야 할 정도였다.
“엽아야, 정말... 너냐?”
“예, 스승님. 강엽입니다.”
“얼굴이... 흐릿하구나. 목소리만 들려....”
“...죄송합니다.”
강엽은 보이지 않게 이를 꽉 물었다.
‘더 일찍 돌아왔어야 했다.’
그동안 핑계를 대고 뒤로 미루었던 일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돌아올 뻔했다.
스승이 암습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던가.
“이젠, 떠나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잠든 송계학의 모습.
완안극이 맥을 짚으며 말했다.
“가끔 깨어나십니다. 그땐 끙끙 앓으시지요.”
“식사는?”
“송 소저가 미음을 먹입니다.”
“...그렇군.”
스승의 몸을 덮은 이불을 치우자 하얀 침의 사이로 붕대로 꽁꽁 감싼 복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위로 손을 올린 강엽이 심력을 집중하자 따스한 선천지기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활명술로 주입한 기운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관찰한 강엽은 스승의 숨소리가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력이 너무 많이 쇠했으니 바로 깨어나진 못하겠지만, 머지않아 병상을 훌훌 털고 일어날 터.
“스승님과 서원을 부탁한다.”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주인님의 고향은 저 완안극이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완안극이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했다.
* * *
강엽이 스승 송계학의 처소에 있을 때, 밖에 있던 세 여인은 난감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송계학의 처소가 보이는 정자에 앉아 서로를 묘한 눈초리로 살펴본다.
탁자 위엔 그윽한 용정차와 주전부리가 있었지만 거의 손대지 않았다.
두 손님의 사이에 낀 송하영만 눈동자를 뒤루룩 굴리면서 차를 홀짝거릴 따름.
자기 소개는 했지만 어색한 기류만 감도는 가운데 강엽이 나왔다.
“오라버니!”
강엽이 스승부터 찾아간지라 회포를 풀 틈새도 없었던 바.
나비처럼 몸을 던지는 송하영의 모습에 백서희가 떨떠름한 기색을 띠었지만, 그녀를 막진 않았다.
이 년 만에 상봉한 사매가 대뜸 안겨오자 강엽은 살짝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받아냈다.
“이 녀석아, 다 큰 처자가 이러면 남들 흉 본다.”
“뭐 어때요?”
혀를 쏙 내민 사매의 얼굴에 강엽도 풀썩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많이 원망했어요. 살아있다면 빨리 왔어야지....”
“....”
“그래도 백 언니에게 오라버니가 힘드셨다는 얘길 들었어요. 한동안 병으로 고생하셨다고....”
백서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픽 실소하면서 전음을 보냈다.
[적당히 둘러댔어. 암만 그래도 흡혈귀가 됐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고맙다.]
[잘 다독여 줘. 근데....]
문득 백서희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피어났다.
[나한테 뭐 할 말 있지 않아?]
[으음?]
묘하게 추궁하는 듯한 모습.
순간 일전에 당묘정과의 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빙궁의 소궁주 말이야. 보아하니 꽤 친한 모양이네?]
[뭐 아주 친한 건 아니고....]
[이따 제대로 해명해.]
[그, 그래.]
다행히 이 건에 대해선 차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감동적이어야 할 상봉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는 그때 송하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라버니, 아프셨다면서요?”
“응? 아, 그래. 그랬지.”
“근데 몸은 왜 이렇게 좋아졌어요? 어머?”
단단한 팔근육을 신기하다는 듯이 만진 송하영은 소맷자락을 걷어올리고 탄성을 흘렸다.
살갗이 조금 창백하긴 해도 선명하게 갈라진 하박근은 유생들의 그것과는 격이 달랐다.
강엽을 위아래로 살핀 송하영은 뭔가 상상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을 붉혔다.
“와, 완전 무인 다 되셨네요.”
“으음....”
노골적으로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백서희를 흘깃한 강엽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지금은 건강하다. 그리고 우리 사이가 좋아도 외간 남자의 몸을 함부로 만지면 못 쓰지. 정혼자도 있는 녀석이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겠냐.”
“애저녁에 깨졌는데요?”
“뭐?”
“그 새... 아니, 그 인간 웬 여자와 눈이 맞아서 야반도주했어요. 할아버님께서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노발대발하셨는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강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백서희를 돌아보자 그녀도 처음 듣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도 제가 경솔했네요. 백 언니도 계신데... 죄송해요, 언니.”
“아, 아니에요.”
사과를 받아주면서도 목이 메이는지 뜨거운 차를 홀라당 들이키는 백서희였다.
가자미눈을 치켜뜬 그녀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이따 두고 봐.]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강엽도 억울했지만, 일전에 지은 죄가 있는 만큼 끝까지 항변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야율산산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 * *
송하영은 서원에 머물 것을 권했지만 강엽은 마을로 내려갔다.
어렸을 적의 추억이 깃든 집.
양친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쭉 살았던 집에 오랜만에 돌아오니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래도 먼지가 가득 쌓였을 줄 알았는데....”
이 년 동안 집을 비운 것치고는 깨끗했다.
강엽이 실종된 뒤에 송하영이 사람을 시켜 쭉 관리했던 것이다.
“이 마을에 온 뒤엔 내가 살았어.”
옆에 누운 백서희가 말했다. 흘러내린 이불 위로 부드러운 어깨선과 풍만한 가슴골이 살짝 보였다.
열락의 시간을 보냈음을 방증하듯 땀이 맺힌 얼굴엔 옅은 홍조가 깃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진 않고?”
“적당히 둘러댔지. 마침 척마대 때문에 방이 부족했거든. 원주님께서 암습을 당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느라 객잔도 꽉 찬 상태였고.”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백서희가 민가로 간다는 건 이상했지만, 조용한 곳에서 수련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기에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다.
“집이 아담하고 좋더라. 나중에 이런 데서 살고 싶어.”
“사천에 돌아가면 하나 살까?”
“에이, 뭐하러 그래. 여기서 살면 되지.”
“....”
“왜?”
“아니, 그렇게 말할 줄은 몰라서... 어디서 살지는 차차 고민해보자.”
“하긴 조 언니도 있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다시 열풍에 몰입하려 할 때, 멀리서 웬 기척이 기감을 자극했다.
동시에 멈칫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봤다.
“강엽, 이거....”
“이쪽으로 오는군.”
적대감이나 살의는 아니되, 맹수처럼 사납기 그지없는 기운.
서둘러 옷과 무장을 갖춘 두 사람은 밖에 나가자마자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그림자를 마주쳤다.
‘네 명.’
다른 세 명도 강하지만 굳이 신경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느껴지는 기척은 중단전을 개방한 금패급.
하지만 그 앞에서 오는 자는 차원이 다른, 강엽조차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사자 갈기처럼 뻗은 머리를 뒤로 넘긴 거구의 중년인.
단삼은 소맷자락을 찢어 바위같은 팔근육을 드러냈으며, 바짓단 아래로는 아무것도 신지 않았다.
얼핏 보면 거렁뱅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차림새.
그때 저편에서 누군가 강엽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강 형 아니시오?”
“...후개?”
새롭게 나타난 무리들 중 한 명은 일전에 무림맹에서 만났던 개방의 후개였다.
후개가 호탕하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북해로 가셨단 얘기는 척마대 친구들에게 들었소. 무탈해보여서 다행이구려.”
곧이어 백서희에게도 포권을 하며 아는 척을 하는데, 뒤에서 흥미롭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한테도 소개시켜주지 않겠나?”
앞서 강엽이 의식했던 거구의 중년인. 그 못지않게 장대한 거한들을 좌우에 거느린 그가 나서자 후개가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대협. 소생이 정신이 없었습니다.”
“괜찮네. 간만에 반가운 얼굴을 봤다면 그럴 수도 있지. 이 친구들도 척마대인가?”
“아닙니다. 여기 계신 섬무검예 백서희 소저는 점창파의 제자로, 현 장문인의 사매가 되십니다. 척마대엔 객원으로 참가하셨지요.”
“알고 보니 구파의 형제였군.”
전혀 구파로 보이지 않는 행색. 그러면서도 은연중 자신이 구파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수상쩍은 언행.
강엽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외공으로 짠 근육질의 거구. 하물며 구파의 제자를 자처했다면....’
이후 후개가 강엽의 소개까지 마치자 중년인과 거한들의 안색이 변했다.
“귀영이라. 자네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외소림인가?”
바로 정체부터 찌르는 질문.
중년인의 좌우에 시립한 거한들이 불쾌한 낯빛으로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러나 중년인은 아랑곳하지 않는지 흔쾌히 대답했다.
“외소림을 아나 보군. 자네 추측대로 예전엔 그리 불렸지. 하나 이제 우린 스스로를 바깥의 소림이라 부르지 않네.”
“그럼 뭐라 부르면 되겠소?”
“멸마전(滅魔殿).”
마를 멸하는 자들의 전당.
소림의 제자를 자처하되 과거와 결별한 중년인이 스스로의 이름을 밝혔다.
“미욱한 몸이네만, 멸마전을 이끌고 있는 적미성이라고 한다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외소림의 비사는 알려진 게 거의 없으니 무명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때 적미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재밌는 말을 들었지. 자네는 사부님과 구면이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