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고향 (3)
‘여기서 이 녀석을 만날 줄이야.’
거진 십 년의 세월 동안 수학한 서원.
비씨세가의 소가주 비용헌은 강엽과 비슷한 시기에 백담서원에 들어왔던 동문이었다.
무림 문파로 치면 사형제와도 같은 관계.
그것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비용헌은 언제나 자신이 최고여야 만족했다.
실제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고, 그걸 뒷받침할 만한 근면한 성격도 갖고 있었다.
다만 다른 경쟁자를 용납하지 못했을 뿐.
스승의 눈치가 보여서 대놓고 패악질을 부리진 못했지만, 소위 친구들을 모아 도당을 이루며 경쟁자들을 골탕 먹이고 망신을 주었다.
‘책을 훔치거나 무공으로 겁을 주거나, 싫다는 술 억지로 먹여서 다음날 숙취로 경연(競演)에 참가하지 못하게 한 정도였지만....’
쪼잔하긴 해도 죽을죄를 저지른 건 아니다.
다만 옛날부터 사사건건 충돌하다 보니 시간이 지난 지금도 친한 척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패거리들은 어디 갔나?”
“응? 뭐, 뭐라고?”
얼빠진 태도로 물었던 비용헌은 뒤늦게 강엽의 물음을 이해하고 쓰게 웃었다.
“...서원을 나온 뒤엔 다 헤어졌지. 가끔 연락 정도는 하지만 예전처럼 몰려다니진 않아.”
“발바닥 핥을 기세로 따라다녔던 놈들이 막상 목숨이 위험하니 도움이 안 되는군.”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아내랑 함께 불공을 드리러 가는데 그놈들을 왜 데려가나?”
“뭐, 네 개인적인 사정은 알 바 아니지. 근데 아까 한 얘기는 뭐냐?”
스승이 암습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설마 날 꼬드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건 아니겠지. 네가 개자식이긴 해도 스승님 목숨 가지고 장난질을 할 만큼 못되먹은 놈은 아니라 믿는다.”
강엽의 눈이 위험하게 빛나자 비용헌의 안색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사, 사실이다. 스승님은 아까 그놈들... 암야각이라는 놈들에게 암습당하셨어.”
“왜?”
“그게....”
비용헌이 어렵사리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애써 끓는 화를 억누르면서 끝까지 이야기를 들은 강엽은 눈을 감은 채 콧잔등을 주물렀다.
“그러니까 스승님이 황제의 어전에 마교를 규탄하는 상소를 보냈는데, 그 뒤에 놈들이 찾아왔다?”
“마, 맞아.”
“확실한가? 놈들이 상소 때문에 스승님을 찾아온 게 맞냐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러나 비용헌은 답답한지 가슴을 쿵쿵 쳤다.
“확실해! 나도 소식 듣자마자 놀라서 달려갔는데, 그놈들이 쳐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떠들었다고 했어. 쓸데없는 붓질로 화를 자초했다고!”
“....”
그쯤 되니 강엽도 더는 부정하지 못했다.
‘광명마교의 이사도는 절강성 포정사. 하지만 본래는 복건성의 포정사였다.’
똑같은 포정사라고 해도 광명마교의 총단 이전에 맞춰 자리를 옮기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북경의 조정에 끈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원래라면 광명마교의 주구임이 밝혀지는 즉시 해임됐어야 했어. 적어도 심문은 당했어야 했다.’
누군가 광명마교의 뒤를 봐주고 있다. 어쩌면 한두 명 정도가 아니라 여러 명일지도.
“암습이 언제였지?”
“나흘 전. 그나마 무림맹이 와서 스승님이 살아계신 거야. 조금만 늦었다면....”
무림맹이 도착했을 땐 이미 암야각이 쳐들어온 뒤였다. 그러나 사태를 깨달은 누군가가 달려가서 살수들을 죽이고 두 사람의 스승을 구했다.
“척마대를 이끄는 여고수였는데... 별호가 섬무검예였나. 내가 갔을 땐 길이 엇갈려서 못 만났다.”
“서희가 스승님을?”
“...아는 사이냐?”
비용헌이 물었지만 강엽은 답하지 않았다. 이마를 쓸어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따름.
‘정말이지 간발의 차였군.’
만약 백서희가 제때 당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한 가지 더. 여긴 어디지?”
“어디긴. 그야 여량산(呂梁山)....”
“그렇군. 만나서 반갑진 않았지만 정보는 고맙다. 이제 볼일 끝났으니 가봐.”
“...지금 산을 내려가라고?”
비용헌이 떨떠름해했다. 일행에 합류해서 야영 준비를 하는 사이 날이 완전히 저물어져서 하산은 무리였다.
“고수라면 야산 정도는 마실처럼 다녀야지. 걱정 마라. 난 네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전에 야산에서 호랑이를 잡은 적도 있다면서?”
하나도 믿지 않는 얼굴로 엄지까지 치켜세우는 강엽의 모습에 비용헌이 당혹스러워했다.
“아니, 그, 그건....”
“설마 네가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허세를 떨었으려고. 호피도 가져오지 않았나?”
“그건 사냥꾼에게서 산....”
“대 비씨세가의 소가주께서 거짓말을 하진 않았겠지.”
“....”
결국 비용헌은 똥 씹은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미안하다.”
“뭐가?”
“내가 예전에 한 일들. 널 괴롭힌답시고 했던 모든 행동들. 내가 철이 없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냐?”
강엽이 어깨를 잡자 비용헌은 움찔 경련했다.
아까 전에 강엽의 한 수에 비참하게 죽었던 암야각의 살수들이 떠오른 걸까.
강엽이 피식 웃으면서 손을 뗐다.
“하긴 네가 진심인지는 중요치 않겠지.”
“뭐, 뭐?”
“착각하진 말고. 널 용서한 건 아니니까. 그냥 이제 와서 원한을 품기엔... 넌 너무 하찮거든.”
물론 비용헌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면 응분의 대가를 치렀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좀 전엔 과거의 앙금이 생각나서 심술을 부렸을 뿐.
‘예전엔 이 녀석 면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났었는데....’
다만 이제 와서 그런 감정에 허덕이기엔 그간 겪은 일이 너무 많았다.
“좀 전에 한 말은 잊어라. 날이 밝으면 내려가. 식사를 내줄 테니 여자들 깨어나면 좀 먹이고. 그리고 사태가 해결될 때까진 바깥 출입을 삼가는 게 좋을 거다.”
“고, 고맙다... 근데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라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뒷말에 비용헌은 목울대를 꿀꺽 움직였다.
“암야마독이라 했었지.”
사도십대고수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끓어오르는 화를 뱃속 깊숙한 곳에 쑤셔박는다.
강엽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는 옛 동문을 뒤로하며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그놈이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알게 해줘야지.”
* * *
다음날 날이 밝자 비용헌이 강엽을 찾아왔다.
“고맙다.”
“음?”
강엽이 고개를 돌리자 그가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아내를 살려줬잖냐.”
“네가 예뻐서 살려준 건 아닌데.”
“넌 말을 꼭 그렇게... 아무튼, 이번엔 빚을 졌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
비용헌의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내려갔다.
어젯밤 자존심을 버려가며 용서를 구했던 것과 달리 진심이 깃든 감사 인사였다.
“부인을 많이 아끼는군.”
“내겐 과분한 여인이거든. 마음씨 곱고 내가 잘못하면 따끔하게 훈계도 하고...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이레마다 찾아와서 불공도 드리고 있지.”
“그럼 여기까지 온 게?”
“이 산에 있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석불이 있지. 실제로 주변에 효과를 본 사람들이 꽤 많아.”
“흐음....”
“왜?”
“아니, 별거 아니다. 이 주변에 그런 게 있는 줄 몰랐군. 참고하지.”
“...?”
의아해하던 비용헌은 이내 싱거운 녀석이라고 중얼거리고는 작별 인사를 고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한 뒤에 일행을 챙겨서 내려가는 모습에 뒤에 있던 야율산산이 물었다.
“바로 서원으로 가실 건가요?”
“그래야지. 하지만 그전에....”
말꼬리를 흐린 강엽은 바로 낭왕을 찾아갔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제 그 녀석과 나눈 이야기 때문이냐?”
동네방네 들리도록 떠들진 않았어도 낭왕의 청력이라면 두 사람의 얘기를 못 들었을 리가 만무.
딱히 기막을 치지도 않은 만큼 낭왕과 빙오선, 두 사람은 강엽의 내력을 알게 됐을 것이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진 않으마. 네가 지금껏 말하지 않았다면 이유가 있겠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른 게 있다고?”
“비용헌의 말로는 암야각은 점조직이라고 합니다. 무림맹도 놈들의 실체를 잡아내진 못한 것 같고요.”
“암야각이 하오문 같은 구조라면 그럴 수 있지. 칼잡이들 몇 놈을 잡아서 심문해봤자 소용없을 거다. 그놈들은 끄나풀일 테니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잡졸들 몇 놈을 잡아서 마안으로 머릿속을 훑어도 알 수 있는 건 거의 없으리라.
그렇기에 이번엔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다.
“아무리 절세고수가 이끌어도 자금이 없으면 조직이 굴러갈 수 없지요. 비용헌의 말대로라면 암야각이 녀석을 노린 건 몸값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비씨세가 말고도 부유하기로 소문난 상인들과 지주들이 암야각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갑자기 장원에 쳐들어가 협박하거나, 이번처럼 가족을 납치해서 인질극을 벌이는 식.
“명색이 사도십대고수라는 놈이 좀스러게 돈을 버는구나. 수치도 모르는 쓰레기 같으니.”
칼밥을 먹고 사는 낭인들도 정의롭진 않지만, 암야각의 방식은 명백히 선을 넘었다.
“놈들에게 협박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주십시오. 가족이 인질로 잡힌 자가 있을 겁니다.”
“뭘 생각하는지 알겠군. 하오문에 말하마.”
공교롭게도 낭왕의 목적지인 태원은 강엽의 고향인 운성 원곡현(垣曲縣)과는 정반대인 북쪽에 있었다.
재회를 약속하며 헤어진 낭왕을 떠나보낸 강엽은 빙궁의 무인들을 모아 산을 내려갔다.
* * *
병풍처럼 산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마을.
뒤엔 산을 두었고 앞엔 강이 지나는 명당이라는 것만 빼면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이 마을엔 산서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유서깊은 서원이 자리했다.
“.......”
사방이 탁 트인 누각.
연한 분홍빛 장삼을 입은 절세가인이 산천초목의 풍취를 감상하며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여기서 공부했단 말이지....”
은어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이 난간을 쓸었다. 마치 이곳에 닿았을 누군가의 손길을 되새기는 것처럼.
그때 등 뒤에서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세요, 언니.”
“고마워요.”
빙긋 웃은 백서희가 몸을 돌렸다.
아직 앳된 기색이 남은 여인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있었다.
“차는 입에 맞으세요?”
“음, 어디... 좋은데요?”
딱히 차를 즐기는 취미는 없지만, 그녀가 봐도 여인이 내온 차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여인이 수줍게 말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차 끓이는 건 자신 있거든요. 할아버님께서 다도엔 까다로우셔서요.”
백담서원의 원주이자 세간에선 죽헌 노사라 숭상받는 송계학은 소탈한 성품이지만, 차에 대해선 괴짜 취급을 받을 정도로 완고했다.
“사실 할아버님께선 천하에 소문난 명차를 수집하시는 취미를 갖고 계세요. 제자들이 칭찬하실 때마다 당신께서 아끼는 차를 주셨어요.”
“그래요? 하긴 생각해보니 강엽도 차는 즐기지 않으면서 이상하게 기준이 높았는데....”
“강 오라버니가 가장 많이 받았을 걸요? 적어도 제가 본 제자들 중에선 강 오라버니가 할아버님의 칭찬을 가장 많이 듣고 자랐어요.”
“그래요?”
“예. 언제나 자신만만했고, 사람이 똑부러져서 가끔은 재수없이 보이기도 했는데....”
“아, 그거 무슨 느낌인지 알아요.”
“하하, 지금도 그러나 보네요.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어요. 은근히 여린 구석도 많고, 귀엽기도 하고....”
“엥?”
백서희는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아는 강엽의 모습에서 귀여운 구석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아, 그건 아닌가?’
생각해보니 자신 있게 술법을 완성했다고 큰소리 치고는 실패해서 쭈그러들었을 땐 좀 웃겼던 것 같다.
결국 이를 바득바득 갈고 몇 번이고 도전한 끝에 기어이 성공하긴 했지만.
‘그건 좀 귀여웠을지도?’
그 술법이 흉악한 살상력을 품은 저주였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았다면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면서 혀를 찼겠지만, 아쉽게도 둘만의 추억이었다.
원주 송계학의 손녀이자 강엽의 사매를 자처한 송하영의 말이 이어졌다.
“오라버니는 굴하는 법을 몰랐어요.”
“많이 싸웠나 보죠?”
“음, 그렇다기보다는 오라버니는 집안 사정이 좀 어려웠거든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저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지만 할아버님이 계신데, 오라버니는 가까운 친척도 없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입신양면하겠다고 독하게 공부했죠. 생각해보면 그게 대견해서 할아버님께서도 좀 더 챙겨주신 것 같아요.”
어쩌면 그런 공통점이 있기에 더 친하게 지냈을지도 모른다면서 작게 쓴웃음을 짓는 모습.
송하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실연당했다면서 제 앞에서 질질 짜고 술이나 퍼먹는 건 좀 그랬지만요.”
“...걔가 그랬어요?”
“며칠 지나서 괜찮냐고 물어보니까 그 여자 누구냐고 모르쇠로 일관하더라구요.”
“얼씨구?”
“정신 차려서 다시 공부하고 약관에 향시를 합격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죠.”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그토록 꿈꾸던 입신양명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말하며 송하영이 씁쓸해할 때였다.
“어라?”
백서희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저잣거리를 따라 걸어온 흑포 청년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땅히 미소로 화답해야 했지만....
“저년은 또 누구여?”
강엽의 옆에 따라붙은 금발의 소녀.
야율산산을 발견한 백서희의 눈에서 불똥이 튀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