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고향 (2)
산속 깊숙한 곳에 버려진 허름한 초막.
곰팡이가 피다 못해 썩어가는 집 한복판에서 난데없는 기침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콜록! 콜록! 으웩, 이게 웬 먼지야....”
긴 금발을 지닌 이국적인 용모의 소녀가 손을 휘저으면서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뺨에 흉터가 진 여인 역시 미간을 좁히며 세간에 쌓인 먼지를 손으로 훑었다.
“오랫동안 안 썼나 보네요.”
“여기가 정말 태원인가?”
노파의 물음에 장신의 흑포 청년이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엄밀히 말하면 태원은 아닙니다. 그 근방의 어디쯤 되지요.”
“바로 도시로 가지 않은 건 사람들의 시선을 염려하기 때문인가?”
“물론 그것도 있지만....”
청년, 강엽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대도시 한복판에 입도공월의 문을 열면 주목을 사기 마련.
하나 인적 드문 곳에 문을 연 건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제가 열고 싶다고 아무데나 문을 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문을 열 수 있는 장소가 정해져 있지요.”
기실 입도공월은 지맥을 따라 이동하는 축지의 술법.
대자연의 정기가 밀집된 용맥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특정한 장소에서만 문을 열 수 있다.
‘대도시에도 용맥이 흐르긴 하지만... 산에 있는 것만은 못하지.’
만약 용맥이 아닌 곳에서 함부로 연다면, 공간의 틈새에 갇혀 죽을 때까지 빠져나가지 못한다.
강엽이 그런 점을 설명하자 일행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낭왕이 수염을 쓸며 허허 웃었다.
“의외로 위험한 술법이었구만.”
“많은 인원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들어가면 용맥의 뒤틀림이 심해져서 길이 끊길 수 있다. 그때는 모산파의 장문령부인 금시환령을 써도 답이 없었다.
금시환령은 길을 찾게 해줄 뿐, 없는 길을 만들 능력까진 없으니까.
“일단 산을 벗어나지요.”
태원은 태행산맥과 여량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 정확한 방향을 알려면 민가부터 찾아야 하리라.
그렇게 일행이 초막을 빠져나와 태양의 위치와 그림자로 대략의 방향을 가늠할 때였다.
강엽과 낭왕, 빙오선이 멈칫했다.
“들었나?”
낭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의 모습.
야율산산이 물었다.
“뭔가 있나요?”
“멀리서 싸움이 났구나.”
“예?”
야율산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 또한 고수인 만큼 탁월한 기감을 지녔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오 리쯤 떨어졌네. 소궁주가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빙오선의 말에 야율산산은 아연해졌다.
절세고수들의 기감이 초월적이라고 해도 그만한 거리에서 일어난 싸움을 포착한단 말인가?
낭왕이 강엽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 거냐?”
일행 중 빙오선이 가장 나이가 많지만, 일행을 이끄는 책임자는 강엽이니 그가 결정해야 하리라.
“가지요. 싸움에 개입할지 말지는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에 야율산산에게 고개를 돌렸다.
“빙궁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다.”
“아뇨.”
야율산산이 고개를 저었다.
“필요해서 하는 일이잖아요? 강 공자님께만 맡길 수는 없어요.”
낭왕은 내상을 씻지 못했고, 빙오선 또한 완전히 회복하진 못했기에 싸우는 건 무리였다.
야율산산이 따라갈 뜻을 밝히자 아설하를 비롯한 설혼대도 나섰다.
“하면 저희도 따르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기감으로 헤아려보니 근처에 개울이 있군. 마침 해가 지려고 하니 야영 준비를 해줬으면 한다.”
지금이야 해가 중천에 걸렸지만 산은 빨리 어두워지니 곧 있으면 석양이 질 것이다.
아설하가 야율산산을 돌아보자 그녀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강엽의 말을 거들었다.
“빨리 돌아올게.”
“조심하셔야 합니다.”
강엽이 있으니 죽을 일은 없겠지만, 적들의 수가 많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
고수라도 등 뒤에서 칼이 날아온다면 크게 다칠 수 있다.
“응, 고마워. 그럼 갔다 올게.”
낭왕과 빙오선에게도 인사한 그녀는 강엽을 따라 몸을 날렸다.
두꺼운 나무 줄기를 박차고 뛰어오른 그녀는 앞서가는 강엽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새삼 이 년 전에 함께 싸웠던 기억이 뇌리를 스쳐지나가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무공 한 수 익히지 못한 유약한 청년이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북해로... 에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강엽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피를 마셔야 연명할 수 있는 흡혈귀의 특성상 북해로 갔다면 그것대로 문제가 됐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산길을 주파하던 때였다.
-아아아악!
“이건....”
산기슭을 따라 메아리치는 비명.
즉시 상념을 지운 그녀는 곧바로 기감을 일깨우고 표정을 굳혔다.
나 살수요, 라고 대놓고 보여주듯 시커먼 복면을 뒤집어쓴 무리가 마차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
그때 앞서가던 강엽이 우뚝 멈춰섰다.
“강 공자님?”
설마 여기까지 와서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일까.
야율산산이 의아해하며 돌아보는데, 강엽이 눈매를 좁히며 믿기 어렵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 녀석...?”
“엥? 아는 사람인가요?”
“지인이다. 같은 서원에서 수학한 동문이야.”
“아, 그럼 친구....”
“친구는 아니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강엽이 혀를 찼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 오히려 반대였다.”
“...내버려둘 건 아니죠?”
놔둔다면 죽고 말 것이다. 호위무사들이 필사적으로 마차를 지킨다지만 숫적으로 열세였으니까.
“....”
“강 공자님?”
“음, 그래. 싫은 녀석이지만 죽게 내버려둘 정도로 미워하진 않았으니....”
떫은 표정을 지은 강엽이 땅을 박찼다.
* * *
“크윽!”
팔뚝이 찔린 무인이 침음했다. 상처가 깊진 않았으나 요혈을 찔린 탓에 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양 호위!”
마차의 옆문을 가로막은 사내가 호위의 위기를 보고 눈을 부릅떴으나 도와줄 순 없었다.
그 역시 적들과 싸우느라 누군가를 도울 형편이 아니었다.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멍청한 놈이군.”
“뭣이?”
“아니까 공격하지. 설마 우리가 굶주린 나머지 아무나 습격하는 비적떼로 보였나?”
“...!”
“비씨세가의 소가주. 네놈을 사로잡으면 네 아비 역시 우리에게 굴복하겠지.”
“네놈들 설마...!”
“큭큭, 마차에 있는 건 네 처인가? 비씨세가의 며느리가 제법 미색이라고 들었다.”
음욕을 숨기지 않은 끈적한 눈빛에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패하면 절망적인 미래를 맞이할 터.
하지만 적들은 아군보다 배는 많았고, 무위 또한 출중해서 이길 가망성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말리는 건데....’
가문에서 비교적 가까이 있다고 방심했다. 세월이 하수상하니 불공은 다음으로 미룰 것을.
“커억!”
또 다시 아군이 쓰러지는 소리.
그게 양 호위의 단말마임을 깨달은 사내는 아득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걱정 마라. 너희는 귀중한 인질이니까. 좀 험하게 굴려도 목숨을 앗진 않을 거야.”
음침하게 웃은 복면인의 말에 그는 남은 내공을 박박 끌어와서 검격을 내질렀다.
가문의 비전무공인 날렵한 쾌검이 허공을 갈랐지만, 복면인은 여유롭게 피한 다음 반격했다.
촤아악!
“컥.”
핏물이 솟구치는 허벅지. 비틀거린 사내의 명치에 복면인의 발끝이 인정사정없이 꽂혔다.
쓰러진 사내를 흘겨본 복면인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아아악!”
“아, 안 돼...!”
마차에서 비명을 지르는 시비와 미소부를 강제로 끌어낸 복면인이 광소를 터뜨렸다.
“과연! 이런 약골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까운 여자가 아닌...!”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불쑥 내려선 그림자가 골통을 박살내는 바람에 웃는 그대로 숨이 끊겼다.
현실감이 흐려지는 광경에 사내와 호위들은 물론, 복면인들도 일순 반응하지 못했다.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컥!”
소리 없이 날아온 빛살이 복면인들의 요혈을 관통했으니까.
찌는 듯이 무더운 날씨에도 피가 흘러나오다 말고 쩌저적 얼어붙는다.
싸늘한 한기를 뒤집어쓰고서야 정신을 차린 복면인들이 목구멍을 쥐어짜냈다.
“누구냐? 누가 감히 암야각의 행사를...!”
그 역시 말을 끝맺지 못했다. 사내의 눈동자가 그를 향해 굴러가는 순간 목이 분질러졌다.
손도 대지 않고 사람의 목을 꺾어버린 신위.
시큰둥하게 좌중을 둘러본 강엽이 멍하니 선 사내에게 아는 척을 해보였다.
“오랜만이군, 비용헌.”
“뉘, 뉘시오? 아버지께서 보내신 거요?”
설마 가문에서 몰래 보낸 호위일까.
기대감이 서린 눈빛에 강엽은 기가 차다는 듯이 되물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예...?”
“좀 섭섭한걸. 세월이 지나도 그렇지. 나는 널 한눈에 알아봤는데.”
“아, 아니 그게...?”
비용헌이 쩔쩔매자 낭랑한 목소리가 그의 뒤편에서 들렸다.
“다들 그럴 걸요? 저도 강 공자님과 재회했을 땐 못 알아본 걸요.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잖아요.”
고개를 살살 가로저은 금발의 소녀는 태연하게 싸움터 한복판을 가로질러 비용헌의 처와 시비를 보호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다친 데는 없나요?”
두 여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방에 널린 시체 때문에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긴장하는 순간.
은밀하게 눈빛을 교환한 복면인들 중 한 명이 식은땀을 흘리며 나섰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고인들께서 납시셨군. 혹시 어디서 오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소?”
“그러는 너희는 누구지?”
“우린 암야각에서 나왔소.”
“처음 들어보는데.”
“...외지에서 오셨나 보구려. 본각이 결성된 지 오래되지 않은 만큼 그럴 수 있소. 하나 본각의 각주님께서는 강호에서도 위명이 자자하신 분이오. 고인께서도 암야마독의 이름을 들어보셨을 터.”
“사도십대고수?”
“그렇소. 본각의 행사에 함부로 끼어들면 피를 볼 수도 있소이다. 설마 사도십대고수의 진노를 사고 싶진 않을 테지?”
그러나 강엽은 암야마독의 이름을 듣고서도 뚱한 표정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야율산산만 고개를 기울였다.
“사도십대고수라면 흑도 무림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고수죠? 얼마나 강해요?”
“대충 삼화취정은 이뤘겠지. 광명마교의 사도와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싶은데.”
“아, 그럼 강하네요.”
그야말로 긴장감이 결여된 대화.
암야각의 살수들이 미친놈 보듯 바라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에 살수들이 다시 나서려는 때였다.
“당신... 설마 강엽인가?”
비로소 강엽을 알아본 비용헌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빨리도 알아보는군.”
“그럴 수가... 내가 기억하기로 넌....”
“뭐,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지. 고향에 오자마자 만나는 사람이 너인 게 한탄스럽지만, 그래도 과거의 인연이 있으니 외면하기도 뭐하군. 감사히 여겨라.”
“밉상스럽게 말하는 건 여전하구나.”
“우리가 하하호호 웃으며 술잔을 기울일 사이는 아니지 않나?”
“....”
비용헌은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외쳤다.
“조심해라! 저놈들 막나가는 놈이니까. 스승님도 저놈들 때문에 다치셨어.”
“...뭐?”
강엽이 멈칫하며 돌아본 찰나.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복면인들이 눈을 빛냈다.
“죽엇!”
그러나 그들의 외침은 닿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칼날의 궤적이 그들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단숨에 복면인들이 전멸하자 비용헌은 구명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한순간에 다리가 풀릴 만큼 오싹한 살기.
한낮에도 훤히 보일 만큼 강렬한 핏빛의 안광이 비용헌과 호위들의 심장을 옥죄였다.
“방금 뭐라고 했나?”
“그, 그전에... 크읍!”
비용헌은 덜덜 떨면서도 호위들을 돌아보았다.
다친 사람들이 많은 만큼 상처를 수습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가서 얘기해요, 강 공자님.”
“....”
야율산산까지 나서자 강엽이 한숨을 쉬었다.
자연히 기세가 풀리면서 비용헌과 호위들은 죽었다 살아난 기분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일행이 있다. 자세한 얘기는 거기서 하지. 일행 챙기고 따라와.”
“그, 그래. 근데 시체는....”
콰앙!
땅을 뚫고 나온 핏빛의 줄기가 호위들의 시신을 한쪽에 정리하고, 복면인들의 시신은 끌고 들어갔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리는 가운데 강엽이 나직하게 물었다.
“더 원하는 게 있나?”
“아, 아니....”
“따라와. 마차는 저 녀석들이 지킬 테니 괜찮을 거다.”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비용헌과 호위들은 호랑이굴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강엽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