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고향 (1)
길조차 나지 않은 깊은 산골짜기.
녹음이 우거진 곳에선 날붙이가 부딪치는 파찰음과 악다구니가 뒤섞인 채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징글징글한 척마대 놈들...!”
텁석부리 마인이 격노했다.
피와 땀이 흥건한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었지만, 살기는 맹수도 뒷걸음질을 칠 만큼 강렬했다.
동료들을 베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청년 검객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기어이 끝장을 보자는 거냐?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싸워보자고?”
“그걸 이제 알았소?”
“뭐야!?”
“까놓고 말해서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면 당신들이 우릴 쫓았겠지. 실제로 당신들은 인간 사냥이랍시고 도망친 사람들을 재미 삼아 잡아 죽이지 않았소? 왜, 쫓기는 입장이 되니 새삼 억울한가?”
통렬한 꾸짖음에도 마인의 분노는 가라앉기는커녕 기름을 뿌린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한낱 애송이놈 주제에 감히 날 훈계하는 거냐!”
“홍화마권(烘禍魔拳) 구담.”
이름을 들은 마인이 멈칫하는 찰나 청년이 경멸을 담아 말했다.
“십여 년 전에 섬서성 안강에 출현, 십수 개의 마을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수탈했지. 사람들을 셀 수 없이 죽였고, 여인들을 욕보였다고 들었소.”
“네놈이 그걸 어떻게...?”
“결국 악행이 발각되어 화산파의 제자들이 파견되자 꼬리를 말고 도망치지 않았소?”
“너... 화산파였군.”
검객은 부정하지 않았다. 척마대 소속으로 싸우고 있으나 그는 대 화산의 자랑스러운 제자였다.
“화산검룡 무일기라고 하오. 당시 사숙들께서 놓친 마두를 이렇게 내 손으로 잡는군.”
“건방진 놈!”
노기를 드러낸 홍화마권이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굳은살이 박힌 주먹이 무일기의 안면을 강타한다.
상체를 흔들어 간단히 주먹을 피한 무일기가 검을 휘두르자 자색의 검광이 번쩍였다.
홍화마권이 기겁하면서 어깨를 빼는 찰나.
그윽한 꽃내음이 코끝의 점막을 찌르는 감각과 함께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크악!”
“잘 가시오.”
이십사수매화검법. 화산의 진산제자들이 익히는 절정의 검초가 홍화마권을 가르고 지나갔다.
혈선이 맺힌 목이 천천히 미끄러지면서 힘없이 허물어지는 몸뚱이.
그렇게 악명높은 마인을 벤 무일기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줄 때였다.
묵직한 충격이 전조도 없이 엄습했다.
콰앙!
“컥!”
무일기는 대응하지 못했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하늘 높이 치솟은 뒤였으니까.
낙법도 취하지 못하고 구른 그는 피를 토하면서 적을 노려봤다.
“격...공?”
“견문이 제법 넓군.”
피골이 상접한 남자였다.
뺨은 움푹 들어갔고, 눈밑엔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겉모습만 보면 조만간 굶어죽게 생긴 인상.
하나 무일기를 바라보는 눈길은 한없이 위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거살풍(鋸殺風)이다!”
“무 형이 위험하오! 얼른 구해야...!”
무일기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본 척마대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지만 거살풍은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무일기가 놀라서 소리쳤다.
“물러나시오!”
홍화마권과 달리 거살풍에 대해선 잘 몰랐으나, 그가 삼화취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명백했다.
척마대원들이 떼로 합공한들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을 리가 만무.
사방에서 달려든 척마대원들이 거살풍의 육신에 닿기도 전에 피를 뿌리며 쓰러진다.
그제서야 거살풍의 무위를 깨달은 척마대원들의 안색이 변할 때, 그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거살풍이라는 이름 그대로 톱을 쓰는 무공이 펼쳐진다.
“아아악!”
표적이 된 척마대원이 비명을 질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격분하며 덤벼들었으나 소용없었다.
덤벼드는 족족 톱날이 그들의 살을 찢고 뼈를 끊어버렸던 것이다.
“젠장, 언제 삼화취정에...!”
아연해진 척마대원들을 쭉 둘러본 거살풍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우릴 쫓아오지 않았다면 살았을 것을. 너희가 죽인 홍화마권은 우리 중 최약체였다.”
“이럴 수가....”
무일기의 목소리가 떨렸다.
적들이 도망가길래 자신 있게 쫓았건만, 이래서야 도리어 적의 함정에 빠진 꼴이 아닌가?
“착각하지 마라. 너희가 무서워서 도망친 게 아니니까. 그 작자들만 없었다면 진작에....”
무언가 말하려고 했던 거살풍이 고개를 흔들면서 톱을 고쳐쥐었다.
“말이 길었군. 이만 죽어라.”
그는 가장 먼저 무일기부터 노렸다. 그가 척마대를 이끄는 좌장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톱날에 맺힌 강기를 느낀 무일기는 호신기고 뭐고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고 암담해졌다.
그렇게 톱날이 코앞까지 짓쳐들었을 때.
터엉!
돌연 날아온 돌멩이가 톱을 때려맞히면서 거살풍의 타점을 비틀어버렸다.
돌멩이에 깃든 암경을 느낀 거살풍이 무일기를 공격하다 말고 다시 거리를 벌렸다.
“뭐냐?”
대답 대신 한 사람의 수급이 날아왔다.
데구르르 발치까지 굴러온 머리를 알아본 거살풍이 침음했다.
눈이 살집에 파묻힌 비대한 사내.
“비영자(肥影子)...!”
그보다 한참이나 앞서 삼화취정을 이뤘으며, 무리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안에 들어가는 초고수였다.
어둠 속에서 나온 인영을 알아본 거살풍이 미간을 구겼다.
“너는....”
보기 드물게 빼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
분홍색 장삼을 흩날리는 그녀는 자색의 검을 움켜쥔 채 삐딱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잡았다, 요놈. 날래기가 날다람쥐 뺨치네.”
“...발을 묶은 줄 알았는데.”
그들이 괜히 도망치다 말고 싸운 게 아니었다.
쫓기던 와중에 또다른 마인의 무리와 마주치고, 그들에게 가장 까다로운 적들을 내던졌던 것.
“독사혈문(毒邪血門)을 말하는 거라면 아마 지금쯤 사이 좋게 염라대왕 만나러 갔을걸?”
독을 다루는 사마외도의 문파.
문주인 독괴(毒怪)는 당문주와도 겨룰 수 있을 만큼 독술에 일가견이 있다고 알려진 자다.
암만 강한 고수라도 독괴와 싸우는 건 부담스러우니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설마 그 꼬맹이가 독사혈문을...?”
“뭐, 알고 싶으면 저승 가서 물어봐. 선객이 있다면 아마 흔쾌히 말해주지 않겠어?”
어깨를 으쓱인 백서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쭉 늘어났다.
이형환위의 보신경으로 단숨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면서 자성검을 휘두른다.
우우웅...!
주인의 손이 아님에도 검명을 토하는 신검. 두터운 호신강기가 종잇장처럼 찢기면서 선혈이 튀었다.
다급해진 거살풍이 외쳤다.
“나를 지켜라!”
장내엔 그 말고도 많은 흑의인들이 있었다.
실상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에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거살풍의 명령에 따랐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무림맹이 그들을 용서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다들 죽기 살기로 경파를 날렸다.
‘됐다. 이제 시간만 좀 벌면....’
한순간이라도 좋다. 신공의 호흡으로 공력을 그러모은다면 구명절초를 구사할 수 있을 터.
하나 결과만 놓고 말해서 흑의인들은 터럭만큼도 활약하지 못했다.
퍼억!
“악!”
어둠 속에서 날아온 방천화극이 흑의인 두 명을 꼬치처럼 꿰매서 나무에 박아버렸다.
빠르게 쏘아진 비침이 흑의인들의 요혈을 찌르며 그들을 저승으로 인도했다.
뇌성벽력을 동반한 중검이 흑의인들의 몸통을 깊숙이 베었다.
그리고 머리에 헝겊을 두른 비구니가 절묘한 솜씨로 창대를 긁으며 발경 경파를 퍼부었다.
“...!”
참혹하게 구겨지는 거살풍의 낯짝. 시간벌이를 하라고 시켰는데 다섯 호흡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 모습을 기분 좋게 감상한 백서희가 빈정거렸다.
“설마 나 혼자 왔다고 생각했어?”
“젠장.”
연가휘와 당묘정, 남궁상아와 소창후.
일행이 열어준 길을 따라 걸음한 백서희가 수중의 검을 내던졌다.
거살풍은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전력을 쏟아부었다.
기합을 지를 새도 없이 교차하는 두 사람의 절기.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는 그들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구파는 역시 무섭군. 장문인을 두 명이나 잃고도 잘도 이런 고수를 배출했어.”
푸화악!
구멍이 난 심장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선혈.
적아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넋을 잃고 거살풍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절세고수의 목숨을 앗아간 신검은, 주인의 손을 떠나서도 허공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이기어검....”
무일기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정도십대고수 중에서도 이룬 자가 극히 드물다는 어검술이 백서희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그 사이 잔당을 처치한 척마대원들이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당묘정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다른 사람들은 싸움이 끝나면 쉬지만, 그녀는 싸움이 끝나고 나서 가장 바빠지는 것이다.
동료를 잃은 척마대원들은 침울해하면서도 몸에 박힌 버릇대로 피해를 보고했다.
“열한 명이 죽고 스무 명이 다쳤습니다. 중상자는 여섯 명입니다.”
“후방에 보내야 해요.”
당묘정이 말했다. 늑골이 부러져 폐를 찌르거나 오장육부가 진탕됐기 때문에 한동안 정양해야 한다는 첨언과 함께.
“...임시 부대주님도 마찬가지세요.”
“전 그럭저럭 버틸 만합니다.”
무일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임시라는 직함으로 알 수 있듯 그는 본래 부대주가 아니었다. 열 명의 조를 이끄는 조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두 명의 부대주 중에 한 사람이 죽으면서 그 자리를 맡을 사람이 필요해졌다.
‘내가 이 자리를 감당할 깜냥이 될까?’
용봉지회에 있을 적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천하의 기재들이 모인 용봉지회에서도 그는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무슨 일이든 쉽게 처리했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요 근래 힘겨운 싸움을 연달아 치르면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나보단 저 사람이 더....’
백서희의 뒷모습을 바라본 그는 불현듯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자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백서희가 다가와서 말했다.
“이로써 칠흉회(七凶會)는 사라졌어요.”
근자에 산서 무림을 휘저었던 사마외도의 무리. 칠흉은 결사를 만들 때 합류한 마두들을 뜻했다.
백서희의 손에 죽은 거살풍과 비영자, 그리고 무일기의 손에 죽은 홍화마권이 칠흉의 일원.
칠흉회가 사라졌다는 건 일곱 명의 마두들이 전멸했다는 의미였다.
“다른 두 명도 죽은 겁니까?”
“여기 오기 전에요.”
칠흉회가 도망치기 전에 두 명을 죽였고, 조금 전에 세 명을 죽였으니 남은 것은 두 명.
“완 노사님의 손에 하직했죠.”
“역시 그분은 대단하군요. 한데 같이 안 오신 겁니까?”
“하필이면 독사혈문과 마주쳐서. 놈들은 완 노사님께 맡기고, 우린 도망친 놈들을 잡기 위해 온 거예요.”
“그렇게 된 겁니까.”
무일기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살풍으로 인해 동료들이 죽고 다쳤지만 백서희를 원망하진 않았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칠흉회와 독사혈문이 사라진다면 암야각(暗夜閣)만 상대하면 되겠군요.”
칠흉회와 마찬가지로 난세와 함께 태동한 집단.
다만 일곱 명의 간부가 느슨하게 다스렸던 칠흉회와 달리 암야각은 각주가 모든 권력을 쥐었다.
그럴 만한 게 각주인 암야마독(暗夜魔獨)은 사도십대고수의 반열에 든 절세고수였던 것이다.
백서희의 안색이 흐려지자 무일기는 아차 하는 마음에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암야각이 백담서원도 습격했군요.”
산서성 남부의 운성에 자리한 유서깊은 서원. 원주인 죽헌 노사는 유림에서 존경받는 학자였다.
한림원의 학사로 벼슬길에 올라 육부의 시랑까지 올랐으며, 나이가 들어 낙향한 지금도 학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던가.
“암야각은 어째서 그분을 습격한 겁니까?”
“상소 때문일 거예요.”
“예?”
“광명마교가 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잖아요. 당장 이사도가 절강성의 포정사고요.”
광명마교가 난장을 피우는 걸 알면서도 황제는 방관했다. 아무리 황실이 무림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지만 지나칠 만큼 고요했다.
“죽헌 노사님을 포함해서 식견 있는 학자들이 상소를 올렸죠. 하지만 그게 광명마교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에요.”
“하면 암야각은....”
“광명마교의 사주를 받은 거죠.”
어쩌면 암야각이 광명마교주에 복속됐을지도 모르는 일.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주리를 틀고 싶었지만, 암야각은 점조직이었다.
구성원들도 밀지를 받고 명령을 수행할 뿐, 총단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강엽....’
백서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처럼 따르던 스승이 암습을 당해 위중하다는 사실을 알면 그가 얼마나 상심하겠는가.
완안극이 손을 써서 저승 문턱을 넘는 것은 막았지만, 워낙 고령이라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빨리 와. 평생 후회할 일 만들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