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64화 (358/450)

72화. 각성 (5)

새카맣게 타버린 시신.

호신강기도 없이 심상절예를 맞은 일월신교주는 이렇다 할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

말없이 죽은 자를 내려다본 강엽이 가죽신 앞코로 지면을 툭툭 쳤다.

그러자 혈목이 일월신교주를 감싸며 그 안에 깃든 선천지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전달된 선천지기를 음미하며 싸움을 복기할 때였다.

“음?”

강엽이 눈을 크게 떴다.

혈목이 미처 흡수하지 못한 미증유의 기운이 양손의 문양으로 스며들고 있는 게 아닌가?

“아, 그렇군. 이게....”

빙정과 태양지체의 기운.

일월신교주가 젊음을 되찾고 더 강해질 수 있게끔 도와준 기운이, 일부나마 체내에 스며든 것이다.

이젠 강엽도 손등에 새겨진 문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음양의 이종진기를 축적할 수 있는 단전. 그 수용량은 하단전에 필적할 정도였다.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지. 문양 덕에 스스로 음양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됐으니까.’

비록 조화를 이루진 못했으나 공존은 가능하니 주화입마에 빠질 염려도 없다.

이전까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

‘석 달이라... 오래도 있었군.’

유익과 무를 견준 시간.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강엽이 익힌 것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일월신마공을 대성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월신교의 술법과 역사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어지간한 건 전부 가르쳐줬다. 솔직히 더 가르쳐주고 싶긴 한데 이젠 시간이 없군. 정 익히고 싶으면 일월신교의 총단에 가서 알아봐라.

-몇 가지 물어봐도 되나?

-말해봐.

-일월신교를 어찌 생각하지?

-질문의 요지를 모르겠는데.

-당신이 미래를 염려한 건 알겠어. 당신과는 상관없는 먼 훗날의 일에도 신경 써준 건 감사한다. 하지만....

일월신교의 폐해도 만만치 않았다.

혈마를 막고 천하를 구하기 위해 만든 종파가, 정작 천하를 위협하는 것은 역설이 아닌가?

-으음, 뭐라고 해야 할까....

유익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일월신교가 처음부터 마도는 아니었지. 처음 교리를 엮었을 땐 그들이 중생을 구제하는 종파가 되길 바랐다.

본디 그가 몸을 담았던 일월성문은 도가와 음양가에 뿌리를 둔 문파.

선맥과도 이어진 만큼 처음 엮어낸 일월신교의 교리엔 사마외도를 긍정하는 구절도 없었다.

-하지만 만물이 그렇듯 일월신교도 변한 거지. 내 사후의 일이니 잘 모르겠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을 거다. 교단이 커지면서 사마외도의 힘이 흘러들어오거나, 교주들이 야망을 품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강산도 십 년이면 변하는데, 일월신교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뎌왔다.

그동안 변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이겠지.

-이런 말을 하면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내가 어찌할 방도는 없다.

강엽도 알고 있었다. 천 년의 세월을 내다보고 안배를 해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해야 할 터.

그럼에도 굳이 일월신교를 짚고 넘어간 것은 자신의 행보 때문이었다.

-당신은 내가 교주가 되길 원하나?

-네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

일말의 미련도 없이 즉답한다.

-내 안배는 여기까지다. 이후는 너를 비롯한 이 시대의 사람들이 결정할 일이야. 솔직히 이 정도면 해줄 만큼 해준 거 아니냐?

일월신교주가 죽는다면 교주의 일맥은 끊긴다.

물론 교주의 일맥이 끊긴다고 일월신교가 하루 아침에 망하진 않겠지만, 쇠락은 피할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네가 교주가 되겠다면, 몇 가지 도움을 줄 수는 있겠군. 그건....

“.......”

귓가에 맴도는 유익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강엽은 몸을 돌려 죽은 자를 떠났다.

* * *

쿠구구구구궁...!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석탑이 무너진다.

멀리서 광명마교의 석탑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지켜본 강엽은 눈부신 광채를 발견하고 눈가를 좁혔다.

‘심상의 조각.’

석탑의 진축인 심상의 조각이었다.

저게 존재하는 한 언제든 다시 석탑을 세울 수 있는 만큼 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강엽이 한 걸음 나서려고 했을 때, 심상의 조각은 신기루처럼 허공에 녹아들었다.

“...약속은 지켰다.”

“조각을 어디 숨긴 거냐?”

“숨긴 게 아니다. 교주에게 간 거지.”

“....”

강엽은 마뜩찮다는 눈으로 노려봤지만 괴뢰마는 어깨를 으쓱 추어보이며 뻔뻔하게 말했다.

“이건 내 탓이 아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는데 설마 괜한 짓을 할까.”

“글쎄, 나야 알 수 없지 않나?”

“그래서 두 사람을 내주지 않겠다고?”

팔사도는 그렇다 쳐도 일사도는 심상지경에 올랐으니 살려두면 큰 후환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강엽은 혀를 차면서도 흔쾌히 내주었다.

“가져가라.”

숲 바깥에서 기어온 혈목이 거대한 구체를 괴뢰마의 앞에 툭 내려놨다.

구체를 이룬 핏빛 줄기가 풀리자 피투성이가 된 일사도가 정신을 잃은 채 엎어졌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죽겠군.”

“....”

석탑이 멀쩡했다면 광명마교의 총단으로 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상황.

지금부터 서둘러도 광명마교의 영역으로 가는 동안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물론 약속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다 죽이는 게 가장 편한 길이겠지만....

‘권약(券約)의 금술은 절대적이니까.’

살주처럼 술사의 목숨이 내건 술법.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빼앗긴다.

강엽도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쓸 줄은 몰랐는데, 뜻밖에도 괴뢰마가 술법을 꿰고 있었던 것.

괴뢰마는 석탑을 철거하겠다는 약속을, 강엽은 일사도와 팔사도를 내주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일사도를 짊어진 괴뢰마가 물었다.

“팔사도는?”

강엽이 손을 흔들자 잠시 후 팔사도가 왔다.

부상을 입은 빙궁주 대신에 그녀를 호종한 야율산산과 아설하가 그 목에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강엽이 고갯짓을 하자 아설하가 팔사도의 양손을 묶은 밧줄을 싹둑 잘라냈다.

붉게 물든 피부를 어루만진 팔사도가 멀리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안색을 흐렸다.

야율산산이 차갑게 말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돌아오라고 해도 안 돌아와.”

쓴웃음을 흘린 그녀는 문득 자신을 응시하는 강엽의 시선을 알아채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신세를 졌군요.”

광명마교와 배신자들을 처단한 것도 강엽이고, 일월신교주에게 잡힌 그녀를 구한 것도 강엽이다.

강엽과는 말 그대로 은원으로 엮인 셈이었다.

“나는 빚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돌아가면 당신을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하지만....”

무언가 여지를 둔 듯한 언행. 잠시 입술을 머뭇거린 팔사도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전장에서 당신의 동료들과 만나면, 한 번은 목숨을 빼앗지 않고 돌려보내주겠어요.”

어차피 강엽은 그녀가 목숨을 걸어도 이길 수 없으니 동료들을 살려주겠다고 한 걸까.

팔사도의 진심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강엽은 별 생각 없이 무심히 대꾸했다.

“그전에 날 만나지 않는다면 말이지.”

이번엔 고이 보내주지만 다음은 아니다.

만약 전장에서 팔사도를 마주친다면 그녀는 은원을 운운할 새도 없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서둘러라, 팔사도. 시간이 없다.”

뒤에서 보채는 괴뢰마의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무는 팔사도의 모습.

곧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빨리 가죠.”

그렇게 멀어지는 세 사람.

강엽은 그들이 기감의 범위를 벗어났을 때, 자신을 묶은 권약의 금술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겠죠?”

옆에서 팔사도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야율산산이 슬며시 물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거냐?”

“글쎄요....”

“무림에선 만날 수도 있겠지.”

워낙에 큰 피해를 입은 만큼 빙궁은 당분간 두문불출하며 전력을 추슬러야 할 터.

그러나 동맹건과 별개로 광명마교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으니 복수를 해야 한다.

“무림맹에 잘 말해봐라.”

“예?”

“동맹을 맺었어도 구체적인 건 무림맹과 얘기해야지. 그때 최대한 생색 내라. 그래야 받아낼 수 있는 거 다 받아낼 것 아니냐.”

야율산산이 눈을 끔뻑였다.

“...무림맹의 편 아니에요?”

강엽의 입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무슨 소리냐. 무림맹과 편을 먹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이익까지 대변할 생각은 없어.”

“호, 혹시 조언 같은 거 들을 수 없을까요?”

“무림맹은 대상단들과 음으로 양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 무림맹을 돕는 조건으로 빙궁의 재건 사업을 위해 대상단을 움직이라고 해.”

“으음, 그건 너무 과한 조건이 아닐지....”

아무리 규모가 작다도 풍비박산이 난 도시를 재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강엽은 걱정하지 않았다.

“돈은 많이 들겠지만 무림맹이 보증하면 대상단들도 관심을 보일 거다. 무림맹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데다 빙궁과도 연을 틀 기회니까.”

이미 북해를 왕래하는 상단들 입장에선 달갑지 않겠지만, 빙궁이 그들까지 헤아려줄 순 없었다.

“음, 알겠어요. 안 그래도 거래하는 상단들이 돈을 후려친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오던데... 이 기회에 상단을 바꾸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야율산산은 다가올 미래가 기대된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 * *

도시의 피해를 수습하고 죽은 이들의 장례를 치른 뒤, 강엽은 빙궁주를 찾아가서 작별을 고했다.

빙궁주는 장성을 넘을 때까지 편의를 봐주겠다고 했지만, 입도공월이 있는 강엽에겐 불필요한 일.

입도공월에 대해 밝히자 빙궁주는 하루만 더 머물러달라고 청한 뒤 다음날 다시 불렀다.

그곳엔 십수 명으로 이루어진 빙궁의 사절단이 떠날 준비를 마친 채 강엽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율산산이 빙긋 웃었다.

“궁주님께 말씀 들었어요. 신묘한 축지술로 중원까지 한달음에 갈 수 있다면서요?”

“한데 우리가 다 갈 수 있는 겐가?”

반면 빙오선은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외적으로는 소궁주인 야율산산이 사절단의 수장이지만, 아직 어린 만큼 그녀가 보필할 예정이었다.

“인원은 좀 아슬아슬하군요. 그래도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빚을 지는구려.”

빙궁주가 멋쩍게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내상을 입은 데다 할 일도 많았기에 그는 빙궁에 남기로 했다.

“바로 무림맹에 가진 못합니다. 이 술법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몇 군데를 경유해야 하거든요.”

“그래도 긴 여정이 며칠로 줄어드는 것 아니오? 그 정도는 제약이라고 할 수도 없소이다.”

“다시 뵐 때까지 강녕하십시오.”

“본궁을 도와줘서 고맙소.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오.”

빙궁주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야율산산은 모친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녀가 강엽에게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딸을 잘 부탁드려요.”

“소궁주는 안전할 겁니다.”

그 말에 잠시 멈칫한 그녀는 이내 설핏 웃었다.

빙궁의 가신들과 무인들이 둘러보는 곳에서 출단식을 거행하는 야율산산과 사절단의 인원들.

그리고 강엽은 간밤에 미리 설치한 입도공월의 진식을 발동시켰다.

부러진 팔에 부목을 댄 채 강엽의 옆에 온 낭왕이 작게 속삭였다.

“몇 군데 들른다고 했지? 어디부터 가는 거냐?”

“산서부터 갈 생각입니다.”

“하면 난 태원으로 가마.”

“태원이라면....”

“전에 알려줬지? 금패무고가 거기 있다.”

강엽은 금패가 된 뒤로도 가본 적 없는 무고.

지고한 신공절학들만 모아놓은 금패무고는 강북과 강남에 하나씩 있었는데, 그중 강북은 태원에 있었다.

“무고엔 구명을 위한 영약도 많아. 나한테 필요한 영약은 거기서 구해야 할 것 같더구나.”

빙궁에도 영약은 많지만, 아무래도 음한 쪽으로 치우치다 보니 낭왕에겐 도움이 안 됐다.

“너도 한번 들러라. 크게 도움은 안 되어도 볼 만할 게야.”

“예, 시간 되면 들르겠습니다.”

어깨를 으쓱인 강엽은 휑하니 입을 벌린 문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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