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각성 (4)
강엽은 자신이 외딴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치고받던 심법진의 공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진조의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하얗게 덧칠되어 덧없이 보이는 무(無)의 공간.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놀라서 허둥댔겠지만 강엽은 이미 이런 경험이 신물이 날 만큼 익숙했다.
“하얀색을 너무 사랑하시는군. 결벽증인가?”
“그럴 리가.”
질문에 화답하는 목소리.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강엽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학창의처럼 검은 테두리를 지닌 하얀 장삼을 입은 사내가 뒷짐을 지고 있었다.
개구쟁이처럼 짓궂은 미소를 짓는 중년인.
‘닮았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다르지만, 눈앞의 중년인은 강엽 자신을 닮았다는 걸.
아니, 자신이 저 사내를 닮은 거라고 해야 할까?
“유익.”
일월신교의 초대 교주.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갑다, 내 후신(後身).”
“강엽이다.”
“그래, 강엽. 날 한눈에 알아본 걸 보니... 진조를 통해 과거를 본 모양이군?”
“당신은 내가 봤던 것보단 나이가 좀 들었군.”
“하하, 말년에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거든. 천기를 너무 깊게 들여다본 폐해지.”
그러고 보니 진조를 찾아왔을 때 자신의 수명이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던가.
“네가 보는 나는 임종을 앞뒀을 때의 유익이다. 정확히는 그 찌꺼기라고 할 수 있지.”
“진조와 같은 경우인가?”
“흠, 글쎄...?”
고개를 기울인 유익은 곧 쾌활하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널 부르긴 했지만, 바깥의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각할 수도 없고. 다만....”
말끝을 줄인 그는 아무것도 없는 하얀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깨어났다는 건, 네가 일월성신의 화신으로서 진정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이지.”
“난 방금까지 당신 후손과 싸웠는데.”
“...대련인가?”
침묵은 곧 부정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유익이 깊이 한탄했다.
“음, 뭐 내가 끼어들 순 없는 문제지. 내 후손과 싸우는 건 유감이지만.”
“날 내보내라.”
일월신교주를 잡아야 한다.
유익의 잔념을 만난 것은 뜻밖이지만, 한가하게 대화나 할 시간은 없었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건가?”
“내 입장이 묘하긴 하군. 그래도 내 후손과 너를 저울질해야 한다면 너를 고르겠다. 내 핏줄을 이은 머나먼 후손과 혼백을 계승한 환생.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당연히 후자가 아닐까?”
강엽이 말없이 눈썹만 찌푸리자 유익의 입가를 타고 짙은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걱정 마라. 여기 시간은 현실과 다르니까. 그렇지 않으면 가르침을 줄 수 없겠지.”
“가르침이라니?”
“일월신마공의 가르침.”
“....”
“난 네가 살아가는 시대를 모른다. 다만 이 시대엔 나도, 백무량도, 예사란도 없지. 진조는 네게 힘을 물려준 만큼 약해졌을 테고.”
“심상지경에 오른 고수들은 있어.”
당장 염왕과 불권만 해도 강엽보다 고강하다. 물론 불권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는 혈마를 못 죽인다.”
유익은 딱 잘라 말했다.
“심상지경에 올랐으면 알 테지만, 그 안에서도 고수와 하수가 나뉘지. 네가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걷기 시작했다면, 혈마는 드높은 태산 위에 있다.”
강엽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는다고 강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 넌 이렇게 생각하겠지. 이제 와서 일월신마공을 대성한들 더 강해질 수 있을까?”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익의 말대로 일월신마공은 어디까지나 보조로 익혔으니까.
“그 생각이 틀린 건 아니다. 무공 자체만 놓고 보면 일월신마공을 대성할 필요까진 없을 거야. 네가 익힌 무공들도 그만큼 훌륭할 테니까.”
괜히 천하제일인은 있을지언정 천하제일의 무공은 없다는 격언이 있는 게 아니었다.
분명 무공 간에도 격차는 존재하나, 일정 이상의 신공절학들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기 때문.
거기까지 말한 유익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내가 널 가르치려는 이유는 다중 심상절예를 위해서다.”
일월신마공을 대성하는 과정에서 강엽이 깨달음을 얻어 다중 심상절예의 경지에 이르는 것.
“넌 지금 익힌 것들을 온전히 수습해야 해.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합쳐야 혈마와 대적할 수 있다.”
“.......”
상단전의 영성이 속삭였다.
저 말이 옳다고. 넌 아직 무결한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유익의 말이 이어졌다.
“다중 심상절예는 심상법과 심상절예를 합친 것과는 다르지. 그건 나처럼 희귀한 재능을 타고난 이들에게만 허락된 기적이다.”
강엽처럼 양손에 해와 달의 문양을 새겨넣은 그가 손을 들자 바닥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흘렀다.
기감으로 흐름을 느낀 강엽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태극....”
“음양에서 사상과 오행이 나오고, 삼라만상이 발생하지. 만물의 생사와 성쇠가 우주의 섭리대로 돌고 도니 이를 천리(天理)라 하리라.”
유익의 손짓을 따라 흘러나오는 심상의 파동.
밤하늘의 별이 쏟아지는 심상에 사로잡힌 강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다중 심상절예를 손에 넣었으나, 그것들을 합치지 못해 무극(無極)에 닿지 못했다.”
유익은 말할 것도 없고, 교주를 지냈던 후손들 중 그 누구도 닿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지.
유익은 그 경지에 올라야만 혈마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시대엔 우리가 없어. 그러니 네가 우리 모두의 힘을 갖고 혈마와 싸워야 한다.”
“.......”
“너도 심상지경의 고수이니 일일이 말로 설명하는 건 의미 없겠지. 부딪쳐서 쟁취해라.”
“결국 싸우자는 거군?”
강엽은 픽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전부터 당신이 얼마나 강했는지 궁금했지. 백무량의 잔념과도 겨뤄봤는데, 당신은 그와 비교하면 얼마나 강한지 시험해주지.”
“거참 맹랑한 녀석일세.”
헛웃음을 흘린 유익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훌륭한 도발이다. 그런 말을 들으니 네 녀석을 작신작신 밟아줘야겠다는 생각이 팍팍 드는구먼.”
그렇게 가르침을 빙자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일월신교주는 분노했다.
[하룻강아지 같은 놈들이...!]
원영신을 잃고, 살주까지 맞은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렇기에 이무기를 끌어들여 강엽을 처치할 생각이었는데....
“당신은 여기서 죽을 것이오.”
금발 사이로 빛나는 새파란 안광.
부상을 입어 피에 절어버린 빙궁주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면서도 끝끝내 버티면서 말했다.
[본좌에게 조종당한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그 혼자 싸우는 게 아니니까.”
대답한 것은 전신이 피를 흠뻑 뒤집어쓴 낭왕이었다.
내장은 진탕되어 말을 할 때마다 피가 흘러내리고, 왼팔은 부러진 채 힘없이 덜렁거린다.
한계까지 쥐어짠 단전은 바닥이 드러나서 더는 어병술을 쓸 수도 없을 만큼 궁지에 몰린 마당.
그럼에도 적을 노려보는 눈빛은 형형하기만 했다.
“그렇지 않느냐, 칠사도야?”
“입 닥쳐라, 낭왕.”
무뚝뚝하게 받아친 괴뢰마의 모습에 낭왕이 즐거운 듯 살벌한 미소를 흘렸다.
“풍류남아 낭왕과 악명높은 마인, 새외문파의 문주라. 참으로 보기 힘든 조합이 아닌가 말이야.”
“농담할 여유가 있으면 칼이라도 더 휘둘러라. 그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버는 유일한 길이다.”
세 명의 절세고수가 협력했음에도 일월신교주의 몸엔 털끝 하나 닿지 못했다.
잠시나마 발길을 묶는 게 전부.
-우오오오오오오......!
일월신교주의 노기를 읽은 이무기가 제 주인을 떠받치며 우렁차게 울부짖었다.
그것만으로도 대지가 흔들리고, 간신히 형상을 유지하던 앙상한 가옥들이 형편없이 무너졌다.
콰아아아아아아!
거대한 꼬리뼈가 대지를 휩쓸었다.
그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든 뭉개버릴 수 있는 거력. 꼬리짓과 함께 일어난 농밀한 기파가 파도처럼 세 사람을 덮쳤다.
[애처롭군. 나름 강하다고 자부하는 것들이 합공의 치를 무릅쓰고도 도망치는 데 급급하니....]
조롱에 응수할 겨를도 없었다. 일월신교주의 말마따나 제 목숨을 돌보는 것만도 벅찼으니까.
“크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빙궁주는 기파에 튄 낙석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호신강기를 짤 공력도 없어서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야율 궁주...!”
[일단 하나.]
쿠와아아아아앙!
부지불식간에 지면을 내려친 꼬리.
빙궁주의 몸이 멀쩡했다면 당하지 않았겠지만, 온전치 않은 몸으로는 치명타였다.
[그리고 둘.]
“...!”
소리 없이 배후로 뛰어든 괴뢰마가 고개를 돌린 일월신교주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강엽과의 싸움으로 인해 몸이 축났음에도 강대한 기파가 움튼다.
순식간에 십여 합을 나눈 끝에 괴뢰마의 목을 움켜쥔 일월신교주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마지막으로 셋.]
일도양단의 기세로 대도를 휘두르는 낭왕, 그를 향해 괴뢰마를 내던지며 검지를 겨누었다.
재처럼 탁한 열양지기가 손가락 끝에 응집, 두 사람을 꿰뚫을 기세로 허공을 관통한 찰나.
투아아앙!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난 인영이 지법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강엽!”
[끝까지 방해하는구나!]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일월신교주를 힐끗 본 강엽은 떨어지는 두 사람을 허공섭물로 붙들었다.
“말할 게 있다. 빙궁주가...!”
“괜찮습니다.”
강엽의 시선이 향한 쪽을 돌아본 낭왕은 반쯤 주저앉은 빙궁주를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무기에 깔리기 전에 강엽이 구출한 것이리라.
그때 괴뢰마가 경고했다.
“조심해라!”
강엽의 신경이 분산된 틈을 탄 이무기가 꼬리를 휘둘렀던 것.
그러나 맞는 일 따위는 없었다.
투아아아아앙-!
그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이무기를 그대로 밀어버렸으니까.
낭왕과 괴뢰마가 넋을 잃었다.
“...격공?”
“저게 격공이라고?”
상승의 기예라고 해도 그렇지, 저 거대한 덩치를 한 방에 뒤집다니?
이무기의 위에 있던 일월신교주도 어이없어했다.
[그만한 내공이 남았다고...?]
말을 끝맺을 새도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친 충격이 호신강기를 통째로 부수며 묵직한 고통을 선사했으니까.
-캬아아아아악!
이무기가 주인을 지키기 위해 제 몸을 던지면서 강엽을 삼킨다.
의외로 강엽은 저항하지 않았다.
“...!?”
순순히 이무기의 입속에 들어가는 광경에 적과 아군 모두가 당혹감에 빠졌을 때.
투아아아아아앙......!
눈부신 섬광을 동반한 무형의 기파가 이무기의 입 안에서 터지며 머리를 산산조각 박살냈다.
심검으로도 죽일 수 없었던 이무기가 단 일격으로 허물어지는 순간.
모두가 벙찐 가운데 일월신교주가 이를 갈았다.
[일월합신...!]
그가 허공을 박차며 쏘아졌다.
[오냐! 끝을 보자!]
화아아아악!
음울한 고리를 두른 검은 원반.
일월신교주의 머리 뒤쪽에서 홀연히 나타난 심상절예가 빠르게 회전하며 불길한 빛을 토해냈다.
감각을 방해하면서 상대의 진기를 강제로 탈선시키는 심상절예.
강엽은 침착하게 일월신교주와 맞섰다.
투앙! 타앙! 쿠콰아앙...!
각기 핏빛의 안개와 빛살로 화한 두 사람이 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고 부딪친다.
심상절예를 발하고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일월신교주는 두 번째 심상절예까지 꺼내들었다.
“무리하는군.”
[닥쳐라!]
잿빛의 쌍룡이 열기와 냉기를 토한다. 강엽이 그랬듯 일월합신의 절기를 펼치기 위함이었다.
하나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뭣...!]
일월합신으로 일어난 기파가 강엽의 장심으로 빨려들어가며 손바닥만한 구체로 변했던 것이다.
직후 강엽이 손바닥을 펼친 순간.
콰아아아아!
잿빛의 섬광을 얻어맞은 일월신교주는 형편없이 날아가서 몇 번이나 지면을 나뒹굴었다.
[컥! 크윽...!]
땅에 엎어진 채 선혈을 게워낸다. 본인의 심상절예를 되돌려받은 일월신교주가 눈을 홉떴다.
“쿨럭! 이, 이게....”
이젠 전성을 발할 힘도 없는 건가.
한달음에 그 앞에 온 강엽은 멀리 보이는 낭왕과 괴뢰마를 힐끔거리면서 걸음을 내디뎠다.
“으아아아아아!”
악다구니를 지르면서 몸을 날린 일월신교주의 몰골.
복부를 걷어차서 그를 들어올린 강엽이 하관을 붙잡고 땅을 박찼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서, 인적이 없는 개활지에 내던진다.
콰아앙!
땅에 떨어진 충격으로 생긴 구덩이 안에서 기어나온 일월신교주가 흑백이 뒤집힌 눈을 파르르 떨었다.
“넌 뭐냐...!”
“일월성신의 화신.”
돌처럼 굳은 일월신교주를 무덤덤하게 응시하며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심상을 불러낸다.
-심상절예 구현.
놈이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도록, 이 자리에서 멸절시킨다.
강엽의 내면에서 흘러나온 심상을 감지한 일월신교주가 피를 내뱉으며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천뢰무한(天雷無限).
하늘에서 끝없이 빗발치는 벼락.
세상 끝까지 도망쳐도 추격하는 심상의 벼락이 일월신교주의 정수리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