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각성 (3)
진조의 심상에서 태어난 마신상.
심상법과 합쳐진 심상절예를 다시 깎아낸 것이기에 전성기의 위력엔 크게 못 미친다.
‘그런데도 광명마교주와 대등하게 겨루었지.’
상반신만 이 장에 달하는 마신상이 오연하게 팔짱을 끼며 일월신교주를 굽어본다.
[심상지경에 오른 놈이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했는데....]
보석 같은 붉은 눈이 조소하듯 휘어졌다.
[이렇게 보니 알겠군. 네놈, 흑룡교의 용혈을 억지로 취하다 탈이 났구나.]
“용혈이라....”
진조의 말에 강엽도 저간의 사정을 깨닫고 끄덕였다.
“그렇군. 확실히 용혈의 기운이 느껴져.”
그 자신이 백무량의 안배로 용혈을 얻었기에 알 수 있었다.
일월신교주의 심상절예가 용혈로 인해 뒤틀린 결과물이라는 것을.
[다중 심상절예.]
진조가 말했다.
[심상지경에 오른 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복수의 심상을 다룰 수 있지. 유익이 그랬다.]
일월성신의 영성을 타고난 초대 교주이자 강엽의 전생.
[음양의 심상을 깨우친 그놈은 말년에 그로부터 파생된 오행의 심상까지 손에 넣었지. 유익의 핏줄이라면 그 재능을 물려받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하지만, 이라고 짧게 단서를 달면서 마신상의 형태로 고개를 설설 가로젓는다.
[문제는 용혈을 취했다는 거다. 용혈처럼 강력한 피는 그 자체로 영성을 띠고 있어서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을 취하는 자에겐 한없이 적대적이지.]
“정당하지 못한 방법?”
[뻔하잖느냐.]
필시 사특한 대법으로 흑룡교의 혈족들을 죽이고 그 피를 강제로 뽑아낸 것이리라.
흑룡교주의 피를 잇지 않았음에도 백무량의 인정을 받아 그 재능을 취한 강엽과는 대조된다.
‘흑룡교가 망했으니 혈족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겠지. 망한 직후엔 그래도 꽤 살아남았을 테니.’
일월신교와 흑룡교는 꽤 가까웠으니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며 끌어들인 게 아니었을까.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일월신교주가 강제로 용혈을 취한 것은 사실.
[용혈의 공능은 물을 다루지. 용혈을 취하면 유익처럼 오행에 닿으리라 생각했나?]
묘하게 심기를 비꼬는 말에 일월신교주의 눈썹이 역팔자로 올라갔다.
[건방진...!]
노기를 드러내면서 양팔을 들어올리는 모습.
잿빛의 쌍룡이 좌우에서 그를 감싸고, 그림자의 원영신이 배후를 파고들면서 심검을 휘둘렀다.
투콰아앙...!
팔을 휘둘러 원영신을 날려버린 진조가 말했다.
[저번보다 좀 더 조정했으니 쉽게 쓸 수 있을 게다.]
직후 강엽의 체형에 걸맞게 쪼그라든 마신상이 전신을 완전히 감싸고 돌았다. 숫제 마신상이 아니라 마신갑(魔神鉀)이라고 해야 할 모양새.
‘잘 됐군.’
안 그래도 덩치가 지나치게 커서 쓰기 불편했는데 한결 편해졌다.
마신과 합일된 강엽이 핏빛 안광을 떠올리면서 발을 내딛는 찰나.
어둠과 동화된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쉬릭!
역시 빛살로 화한 일월신교주가 강엽의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양손의 심검을 휘둘렀다.
마신갑을 두른 지금도 보신경 자체는 일월신교주가 근소하게 우위였기 때문에 강엽의 반응이 늦었다.
이제 막 몸을 돌린 강엽의 옆구리를 벤 일월신교주가 입꼬리를 씩 들어올린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바로 사라졌다.
콰앙!
[아니!?]
마신갑의 반탄지기가 심검을 튕겨내는 게 아닌가?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강엽이 빠르게 허점을 찌르고 들어온다.
역동적으로 자세를 틀어 가까스로 피했으나, 강엽 역시 핏빛 안개로 변해 등 뒤를 점한 상황.
찰나에 육화해서 날린 족격이 포탄처럼 일월신교주를 꿰뚫었다.
투아아아아앙...!
단순한 발길질에 대기가 찢어지고, 십수 장에 이르는 고랑이 파인다.
[웃기지 마라!]
일월신교주가 격노해 외친 순간.
어깻죽지를 감싼 좌우의 쌍룡이 열기와 냉기를 발하며 일월신마공의 절기를 완성시켰다.
강엽도 간간이 쓰는 일월합신. 잿빛으로 타오르는 섬광이 모든 걸 삼키며 막강한 충격파를 퍼뜨렸다.
‘이만하면 심상절예에 준하는 위력인데....’
과연 일월신마공의 종사답다고 해야 할까.
진정한 일월신마공을 보여주겠다고 한 게 허언이 아님을 증명하듯 엄청난 절초들이 쏟아졌다.
강엽은 자신을 향해 눈을 부릅뜨는 일월신교주의 모습에 모종의 예감을 느끼고 즉시 회피했다.
콰아아아아앙!
잿빛을 넘어 시커매진 화마가 방금까지 있던 곳을 폭사하듯 덮쳤다.
맞았다고 죽진 않았겠지만, 반동으로 몸이 굼떠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을 터.
‘진회멸(眞灰滅)인가?’
본래는 손가락으로 쓰는 지법.
하나 일월신교주는 격공에 절초를 섞는 방식으로 공간을 초월해 공격하고 있었다.
[네놈이 정녕 일월신마공의 후인이라면 증명해봐라!]
발을 딛은 지면에서 얼음칼이 삐죽 치솟는다.
사뿐히 뛰면서 얼음칼을 즈려밟은 강엽은 측면에서 나타난 일월신교주의 검을 받아냈다. 심검의 칼날을 쳐내면서 엇박자로 관수를 찌른다.
바로 그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원영신!’
아까 전에 마신상에게 얻어맞고 날아간 원영신이 은밀히 접근해서 심검을 휘둘렀다.
마신갑의 완갑으로 심검을 막아냈지만, 타격 지점에서 극한의 음기가 몰아쳤다.
-빙멸혼(氷滅魂).
혼백을 멸하는 한빙지기.
눈앞에서 폭사한 얼음폭풍을 속절없이 뒤집어쓴 강엽을 향해 일월신교주가 심검을 날렸다.
심검의 궤적을 따라 지옥같은 열기가 일어나며 사방의 공기를 뜨겁게 달군다.
얼음으로 인해 관절이 굳어졌지만, 강엽은 억지로 손가락을 휘둘러 심검을 막아냈다.
무광암의 어둠이 심검을 가로막았지만....
투학!
이번엔 원영신이 심검으로 강엽의 어깨를 내려치며 강제로 진기가 끊기게 만들었다.
“쯧.”
[이놈부터 어떻게든 해야겠구나.]
진조의 말에 강엽도 동감했다. 아무리 마신갑이 단단해도 협공당하는 상황에선 답이 없었다.
‘물론 그만큼 놈도 내공이 쭉쭉 닳겠지만....’
문제는 빙정과 태양지체의 기운을 먹어치운 일월신교주의 내공이 자신을 아득히 상회한다는 것.
‘혈라지망을 유지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하지만 혈라지망을 풀면 마신갑 역시 사라질 테니 승산이 극히 희박할 터.
그전에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한다.
파지지지직...!
수삼양경을 타고 흐르는 뇌기의 일권으로 원영신의 안면을 후려치고, 놈이 잠시 경직된 틈을 타서 선회.
하얗게 얼어붙는 발밑을 피해 핏빛 안개로 화하면서 놈의 사각을 점했다.
[본좌가 좌시할 것 같더냐!]
원영신을 공격하는 강엽의 측면에서 일월신교주가 빛살처럼 나타나서 심검을 휘두른다.
강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살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뼈를 취한다.’
마신갑의 단단함을 믿고 원영신의 가슴에 날카롭게 모은 관수를 꽂았다.
동시에 무지막지한 충격이 마신갑을 강타, 반탄지기로도 막지 못할 고통이 전신을 내달렸다.
이를 꽉 물면서 고통을 감내한 강엽은 원영신을 꿰뚫은 오른손에 백염과 뇌기를 집중시켰다.
‘지금까지 놈은 극음의 무공만 썼다.’
일월신교주와 동시에 존재하되, 그 능력은 진신에 크게 못 미치는 분신. 놈이 극음의 결정체라면, 극양의 기운으로 공략해야 할 터.
-......!
일월신교주의 원영신은 이목구비가 없다.
그렇기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강엽은 이 순간 놈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은 기분이었다.
[이놈이...!]
“...원영신은 양날의 검이더군.”
매우 강력한 공능을 발휘하나, 원영신이 받은 타격은 고스란히 주인에게 돌아간다.
원영신처럼 가슴이 터지면서 벌건 속살이 드러난 일월신교주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강엽 역시 격통으로 인해 죽을맛이었다.
“솔직히 말하지. 순수한 기량만으로 싸웠다면 나는 당신을 못 이겼을 거다.”
일월신마공은 말할 것도 없고, 심상지경으로 봐도 일월신교주는 몇 수 위의 고수.
그러나 마신갑이 보호하는 한 강엽에게 타격을 입힐 방법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건방 떨지 마라! 이까짓 심법진만 부순다면...!]
광활한 심법진의 공간을 떠받치는 거대한 핏빛 나무.
일전에 광명마교주가 그랬듯 일월신교주 역시 혈라수가 진축임을 알아보고 절초를 쏟아부었다.
쐐애애애애액-!
나무의 밑동을 향해 쇄도하는 참격. 강엽은 원영신에 집중하느라 막을 새도 없었다.
심검에 의해 썩둑 잘린 거대한 혈라수가 기우뚱 쓰러지면서 핏빛 하늘의 정경이 깨져나간다.
[인정하마. 본좌가 네놈을 너무 얕봤구나. 저것부터 베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중얼거린 일월신교주가 돌연 말끝을 흐렸다.
혈라수가 넘어가면서 드러난 그루터기 아래에 숨겨진 함정이, 칼날처럼 그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이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힘.
만약 심상지경의 고수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도 이상치 않을 치명적인 술법.
“모산파의 살주(殺呪)다.”
모든 술법을 틀어막는 혈라지망의 심법진.
본래라면 강엽도 술법을 못 썼겠지만, 혈라수의 진축에 미리 술법을 숨겨놓는다면 조금 다르다.
혈라수가 잘리는 것을 발동 조건으로 삼아, 그 하나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날린 치명적인 술법.
[아둔한 놈! 본좌를 죽이지 못하면 네놈이 죽을 텐데...!]
“어차피 매한가지 아닌가?”
살주는 저주한 대상을 죽이지 못하면 술사가 대가를 돌려받는 양날의 검이지만, 어차피 일월신교주를 죽이지 못하면 강엽 자신이 죽는 마당.
제시간에 일월신교주를 죽이면 그만이다.
‘심상법의 경지를 이뤘다면 이런 식으로 함정을 깔아두지 않아도 됐겠지만....’
다만 당장 심상법에 오르는 길이 막막한 지금은 이런 식으로 개량을 거듭해야 하리라.
마신갑이 흩어지기 전에 원영신의 목줄을 쥐어 터뜨린 강엽이 피곤한 안색으로 말했다.
“시간 없으니 빨리 끝내자.”
[이놈이...!]
죽일 듯이 강엽을 노려보는 일월신교주.
원영신을 잃은 데다 살주에 당해서 전세가 역전됐음에도 불구하고 섬뜩하기 그지없는 살의를 뿌린다.
[아니, 죽는 건 너다! 여기까지 와서 본좌가 포기할 성싶으냐!]
자존심을 버려서라도 이겨야겠다고 생각한 걸까.
일월신교주는 산산조각 깨져나간 심법진의 천장 위로 드러난 하늘을 향해 단숨에 날아갔다.
[교룡이 있는 곳으로 가는군. 쫓을 테냐?]
“그래야 하는데 말이지.”
강엽이 입맛을 다셨다.
내공이 한 줌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쫓아간다면 쫓아갈 수 있겠지만, 과연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의문....”
그렇게 한탄하는 때였다.
후우우우웅!
돌연 오른손의 기혈에서 움튼 뜨거운 기운이 사지백해로 퍼져나가는 게 아닌가?
“이 기운은....”
[설마 대환단의 기운인가?]
진조의 목소리에도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지난날 낭왕을 치료했을 적에 강엽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 속에 흘러들어왔던 대환단의 잔여 기운.
어쩐 일인지 오른손의 태양에 흘러들어갔던 열양지기가 다시 경맥을 휘돌고 있었다.
그야말로 상리를 초월하는 기사에 강엽은 물론 진조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런 건 짐도 처음 보는구나.]
“당신도 모른다고?”
[짐이라고 일월성신에 대해 전부 아는 건 아니다. 유익 그놈이 전부 알려주지도 않았고.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겠다. 그 문양은 단전이다.]
“단전이 손등에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그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군.”
강엽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양손의 손등은 단순히 일월성신의 영성을 각성했다는 표식이 아니었다.
음양의 균형을 잡으며, 넘쳐나는 기운을 흡수하여 잠시 보관할 수 있는 또다른 단전.
그걸 깨닫는 순간, 이제껏 혈공진기와 따로 놀았던 일월신마공의 기운이 양손으로 흘러들어갔다.
또한 정수리의 백회혈을 타고 어마어마한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이게 무슨...?]
진조도 강엽에게 일어난 변화를 알아챘다.
단순히 일월신마공이 안정되는 것을 넘어, 강엽의 심상에서 무언가 태동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