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각성 (2)
가루라의 화신.
역대 광명마교주들이 물려받은 초대 교주의 영성.
[네놈들 광명마교의 종자들에게 있어 가루라의 화신은 살아있는 생신(生神)이나 진배없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일사도를 들여다보는 일월신교주의 흑백안이 둥글게 휘었다.
일사도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 눈의 힘인가?”
[‘혼세안(混世眼)’이라고 하느니라.]
흰자와 검은자의 색이 뒤바뀐 눈.
섬뜩한 안광이 일사도의 수려한 용모 뒤편에 가려진 본질을 짚어냈다.
[흐음, 태어났을 때부터 정상이 아니었군. 모체가 태아를 품기 전부터 대법으로 손을 썼어. 모체에 심상의 조각을 심어놓은 건가?]
“......!”
일사도의 눈매가 실룩거리는 것을 본 일월신교주가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평범한 모체라면 견디지 못했겠지. 전대 사도 중에 태양지체가 있다고 들었다. 광명마교주가 그 여자와 통정하여 너를 낳았다면....]
콰아아아아아앙!
강대한 경파가 일월신교주를 쳤다.
황금빛 섬광이 뜨거운 벼락을 내뿜었다.
“하아압!”
한 줄기 벼락으로 화한 일사도가 멀리 튕겨진 일월신교주를 따라붙으며 공세를 퍼부었다.
사방팔방에 황금빛 섬광이 빗발치며 일월신교주의 전신을 끊임없이 두들겨댄다.
쾅! 쿠앙! 꽈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너울지는 크고 작은 돌조각들. 흙먼지 사이로 뇌기가 번쩍거리며 그물을 만든다.
일전에 모용세가에서 강엽과 싸웠을 때 썼던 절기.
-진둔신벌.
강엽도 깊은 인상을 받았던 절기가 일월신교주를 가두기 위해 다시 한번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완성에 이르기도 전에 날카로운 경파가 뇌기의 그물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큭!”
[느려.]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일월신교주가 관자놀이를 향해 손가락을 뻗은 뒤.
일직선으로 쏘아진 빛살이 일사도의 이마를 살짝 찢으며 수십 장 너머까지 치달았다.
쿠구구구구구궁......!
건물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주저앉는다. 지풍 한 방으로 수많은 일가의 터전을 무너뜨린 신위.
엇박자로 휘두른 뇌검이 일월신교주의 호신강기를 베고 피분수를 일으켰으나,
[심검이 아니면 소용없느니라.]
일월신교주는 태연하게 재생하며 일사도의 명치에 족격을 먹였다.
“...!”
[내공을 아끼는 거냐? 네놈이 본좌를 상대로 힘을 아낄 처지는 아닐 텐데?]
족격은 일사도를 해하지 못했으나 호신강기는 크게 깎아냈다.
그 사실에 섬뜩함을 느낀 일사도는 좌방으로 운신하면서 심상을 덧씌운 검두를 휘둘렀다.
비록 검두가 뭉툭하다 하나 유사시엔 둔기로 써도 될 만큼 단단하기 그지없는 바.
심상까지 덧씌웠으니 적중만 한다면 일월신교주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으리라.
투학! 타악!
그러나 일월신교주는 가볍게 검두를 뿌리치고 어깨를 맞댔다.
종아리 비복근에서 끌어올린 발경 고법이 일사도의 경혈을 두들긴다.
그렇게 일사도의 자세가 잠시 흐트러진 틈새.
오싹하리만치 싸늘한 냉기가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완벽히 허점을 찌른 순간.
[음?]
일월신교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장심의 냉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는 게 아닌가?
[만곡광역?]
역대 광명마교주들의 호신강기.
극한의 이화접목으로 상대의 투로를 왜곡시키는 수법이 펼쳐진 것.
그 사이 일사도가 허공에 뿌린 광점이 연결되며 뇌기의 강을 그려냈다.
면면부절 흐르는 뇌기의 대하(大河).
절기가 완성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본 일월신교주는 일사도의 꿍꿍이를 깨닫고 실소했다.
[재밌군. 절기를 합쳐 한계를 초월하겠다?]
뇌기의 강이 일사도의 검에 쏟아졌고, 일사도의 전신에서 강렬한 파동이 뿜어졌다.
-신여뇌극락.
뇌기와 합쳐진 거대한 심검이 천지를 갈라버린다.
그러나 일월신교주는 느긋했다.
[보여주마.]
목소리보다 빨리 울려 퍼지는 의념 속에서 심상이 완성된다.
늦게 출수했는데도 일사도의 심상절예보다 배는 빠른 후발선제.
-금환천라인(金環天羅印).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
검게 물든 태양 바깥으로 드리운 금빛 고리가 불길하게 회전하는 순간.
-......!
그들이 있던 대지가 주저앉고, 주변의 모든 것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소리마저 자취를 감춘 완전한 침묵.
사아아아아아....
뒤늦게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일사도의 검이 먼지로 화한다.
칼자루만 남은 검을 지긋이 내려다본 일사도는 그것을 미련 없이 뒤로 던졌다.
[...심상절예를 심검으로 써야 하는 이유지. 천하제일의 신검도 심상절예의 반동을 견디지 못한다.]
잠시 사이를 두고 일월신교주가 입을 열었다.
민가에서 훔쳐입은 옷은 갈갈이 찢겨나가고, 검게 탄 화상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등 참혹한 몰골.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 낭패감 따윈 보이지 않았다.
[감명깊은 심상절예였다. 마의 종파를 떠나서 너는 본좌의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다.]
상처투성이의 근육을 드러낸 채 터벅터벅 걸어간 그는 가만히 자신을 노려보는 일사도를 툭 쳤다.
그 작은 손짓에 일사도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칠공은 물론 전신으로 피를 게워내며 깊은 피웅덩이를 만들어낸다.
“크헉...! 크윽...!”
[심흔의 고통은 당해본 사람만 알지.]
그야말로 영혼이 통째로 찢겨나가는 고통.
언제나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일사도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자비로 고통없이 보내주마.]
검결지를 따라 흘러나온 심검이 일사도의 목을 노리고 떨어지는 찰나.
일월신교주가 검을 휘두르다 말고 몸을 돌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세 개의 인영을 베었다.
[괴뢰마, 뭐하자는 거냐?]
그가 벤 것은 괴뢰마의 분신이었다.
아설하가 놓친 세 명의 분신이 일사도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여 시간을 번 것이다.
“그 친구가 죽으면 우리 교주가 날 죽이려 들 거라서. 나도 이러긴 싫지만 방법이 없군.”
[쯧, 본좌가 권유했을 땐 귓등으로도 안 듣던 놈이 이제 와서 광명마교에 귀의하다니....]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과거 괴뢰마가 악명을 떨치던 시절, 두 사람은 우연히 인연이 닿아서 만난 적이 있었던 것.
[다시 생각해도 아쉽군. 너라면 칠성좌의 자리를 약속할 수 있는데... 지금이라도 전향할 생각은 없나?]
“사도에서 성좌로 바꿔봤자 거기서 거기지. 그리고 당신보다는 광명마교주가 더 두렵다.”
[그 말은 못 참아주겠군.]
그 시점에서 잠시 말을 멈춘 일월신교주는 멀리서 이무기와 싸우고 있는 낭왕을 곁눈질했다.
괴뢰마는 일사도를 구하기 위해 이무기를 낭왕에게 떠맡기고 곧바로 달려온 것이다.
[너와 일사도를 죽이고, 빙궁을 지우겠다. 본좌의 자리를 되찾고 천하를 경략하리라.]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군, 마제(魔帝).”
과거 일월신교주를 칭한 별호. 옛 별호를 들은 일월신교주는 뚱한 얼굴로 수중의 심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뜻밖의 방해가 끼어들었다.
타카아앙-!
심검과 심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이제야 나왔구나, 사생아야.]
소리 없이 튀어나온 강엽의 심검이 정수리를 향해서 떨어진 것.
일월신교주의 도발에 강엽이 미간을 구겼다.
“사생아?”
[본좌는 후인을 둔 기억이 없는데 넌 일월신마공을 익히지 않았느냐. 사생아와 무엇이 다를까.]
강엽은 굳이 항변하지 않았다. 일월성신의 영성을 각성했다고, 자신이 초대 교주인 유익의 환생이라고 지껄여봤자 너저분할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 합을 나누고 괴뢰마가 있는 곳까지 후퇴했다.
“협력해라, 괴뢰마.”
“진심으로 묻는 건가?”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질문.
강엽은 태연히 끄덕였다.
“낭왕을 도와서 이무기를 막아.”
“거절하지. 우리는 이대로....”
괴뢰마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일사도의 위로 혈목이 솟구치며 그를 꽁꽁 감쌌던 것이다.
“일사도를 살리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해라.”
“이런 젠장.”
낯짝을 구기며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모습.
언제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던 그가 지금만은 낭패한 얼굴로 혀를 차고 있었다.
“저놈을 막으면 일사도를 살려줄 건가?”
“살려주는 건 그렇고. 대신 못 본 척 보내주지.”
“한 가지 더. 팔사도는 살아있나?”
“아직은.”
“팔사도까지 주면 돕겠다.”
“조건을 따질 때가 아닐 텐데.”
“석탑을 철거하겠다면?”
“...!”
이번엔 강엽이 놀랐다.
팔사도도 석탑을 없애는 방법을 몰랐는데, 괴뢰마에겐 석탑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고?
“그걸 어찌 믿지?”
“근거를 찾을 때가 아닐 텐데.”
조금 전 도발에 대한 응수.
일월신교주를 노려보면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내뱉었다.
“약속 어기면 두 사람은 죽는다.”
“너야말로 약속 지키도록. 두 사람이 죽으면 우리 교주가 빙궁을 지워버릴 거다.”
그렇게 합의를 본 두 사람이 잠시 서로를 노려보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 * *
[아깐 제대로 싸우지 못했지.]
일사도와의 싸움으로 작게나마 심흔을 입은 육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엽을 맞이하는 일월신교주의 기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들불처럼 타오르며 기세를 점점 더해가는 모습.
[너도 심상지경에 올랐으니 알겠지. 심상지경은 무공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혹자는 심상지경이야말로 무의 끝자락이라 일컫지만, 그 경지에 오른 자들은 깨닫게 된다.
똑같이 심상지경에 오른 고수들이라 해도 막상 견주어보면 그 편차는 하늘과 땅 만큼 크다는 것을.
한달음에 거리를 좁히면서 심검을 휘두르고, 심상의 힘을 호신강기처럼 둘러 타점을 비껴낸다.
직후 전신을 핏빛 안개로 바꾼 강엽이 배후를 잡자 일월신교주 역시 빛살로 화했다.
“...!”
찰나와도 같은 시간 속에서 무수히 검을 맞댄다.
육신의 한계를 깨고 수없이 충돌한 두 사람을 따라 공기가 터지고 대지가 쪼개졌다.
[진정한 심상지경의 고수라면 육신에 구애받지 않지. 우리의 감각은 시공(時空)을 초월한다.]
일월신교주의 말은 진조가 혈무화의 능력을 마지막에 준 이유와 상통했다.
단순히 혈무화가 다루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자격이 되지 않으면 다룰 수 없다.’
순수하게 무공만 견주었다면 강엽은 육신의 한계를 초월해 공간을 누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상지경에 오른 지금은 혈무화를 통해 일월신교주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또한 심상을 빚어 이 같은 짓도 할 수 있지.]
-일월화신(一月禍神).
불쑥 치솟은 일월신교주의 그림자.
본체와 떨어진 놈은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강엽을 압박했다.
사아아아아아아...!
심지어 극한의 음기를 뿜기까지.
‘원영신...!’
일찍이 광명마교주와 검선이 보여주었던 기예.
그들이 썼던 방식과는 다르지만, 일월신교주의 원영신 역시 만만치 않은 위용을 내뿜고 있었다.
‘교주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이는군. 게다가....’
원영신이 찌르는 관수를 쳐낸 강엽은 놈이 쌍장을 내미는 것을 보고 표정을 찌푸렸다.
음울한 금빛 고리를 두른 검은 태양이 출현하자 감각에 잡음이 끼면서 진기가 미쳐 날뛰었다.
[심상절예를 꼭 구명절초로 쓸 필요는 없지.]
여상한 어조로 늘어놓은 일월신교주가 손을 까딱이자 좌우에서 잿빛의 용이 나타났다.
똑같이 생겼지만 한 놈은 열기를 내뿜고, 다른 한 놈은 냉기를 내뿜는다.
[심상절예가 꼭 하나일 필요도 없고.]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었으나 전혀 다른 심상절예.
-명룡진회세(明龍盡灰勢).
잿빛의 쌍룡이 열기와 냉기를 뿜는다.
‘이건 위험하다.’
무광암으로 맞서려고 해도 원영신이 출수한 검은 태양으로 인해 여의치 않은 상황.
그러나 쌍룡의 공세는 닿지 않았다.
콰아아앙!
[뭣...!?]
강엽의 전면에서 폭사된 힘이 심상절예를 지우고, 검은 태양의 공능마저 흔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섰던 대지가 사특한 핏빛으로 물들며 땅밑에서 거대한 나무가 자라났다.
[이번에도 꽤나 아슬아슬했구나, 후계자야.]
동시에 강엽의 그림자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면서 거대한 마신상이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일월신교주의 동공이 흔들렸다.
[네놈...!]
“조금 편법이긴 하지만.”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심상절예는 두 개 쓸 수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