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60화 (354/450)

72화. 각성 (1)

‘이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내공을 모으기 위해 약 한식경 동안 운기에 몰두했으나, 결과적으로 적을 놓치고 말았다.

일월신교주의 힘이라면 빙궁과 그 도시를 쓸어버릴 터.

아니, 일월신교주가 나설 것도 없이 그가 부리는 이무기만 나서도 능히 그럴 수 있으리라.

쿵! 쿵!

암벽에 줄기를 박으며 성큼성큼 올라간 혈목의 동체가 멈춘다.

직감적으로 도착했다는 걸 깨달은 세 사람이 고개를 들었을 때, 혈목이 스르륵 풀려나왔다.

뜨거운 열기가 살갗을 태우는 느낌.

“.......”

웅장했던 전각군은 처참하게 무너졌고, 그 사이로 화마와 연기가 치솟아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보, 본궁이... 선조들의 혼이 깃든 터전이....”

빙오선이 목소리를 더듬고, 팔사도 역시 내색은 안 했지만 복잡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깨어났다.

“으, 으윽...!”

전장의 뜨거운 열풍이 얼굴을 때리자 빙궁주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잇새 사이로 신음을 흘린 그가 불현듯 눈을 떴을 때.

“크억!”

강엽은 그의 멱살을 잡고 벽면까지 힘껏 밀어붙였다.

깜짝 놀란 빙오선이 뭐라 하기 전에 빙궁주를 들여다본다. 각각 푸른 광채와 붉은 광채를 토해내는 정마안이 그의 정신을 낱낱이 살폈다.

“가, 강 무사...!”

“...연기는 아니군.”

일월신교주의 심상이 느껴지지 않는다. 빙궁주의 눈빛과 호흡으로 그가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강엽은 물러났다.

‘정신을 잃어서 세뇌가 풀린 건가?’

아니면 일월신교주가 이제는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고 빙궁주의 내면에 있던 심상의 조각을 회수했을지도.

“실례했습니다. 궁주님께서 제정신인지 확인해야 해서요.”

“...쿨럭, 이해하오.”

화를 낼 만도 한데 빙궁주는 침착했다.

빙오선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기억이 나십니까?”

“못난 모습을 보였구려, 하아....”

차마 고개를 못 들고 자책 어린 한숨을 내뱉은 빙궁주의 모습에 빙오선이 안쓰러워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모든 게 내 불찰이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빙궁주가 괴로워하며 말했다.

“본궁을 되찾았을 때만 해도 괜찮았소. 그땐 내 의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싸움이 끝난 날부터....”

왠지 모르게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행동 역시 엇나갔다.

호위들을 제압한 뒤에 홀로 빙궁을 나가서, 광명마교가 봉인한 일월신교주를 꺼내왔던 것이다.

이후 뇌옥에 갇혀있던 팔사도를 지하의 금지로 끌고 와서 머릿의 속삭임대로 제물로 삼았다.

“강 무사와 대치했을 땐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소. 마치 어둠 속에 갇힌 것 같았지....”

빙궁주는 멀리서 창백한 얼굴로 벽에 기대 앉은 누이동생을 발견하고 움찔 떨었다.

입술을 깨문 그가 고개를 떨구자 팔사도 역시 별다른 말 없이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우오오오오오오!

천지를 강타하는 괴물의 포효.

성채만한 덩치를 지닌 이무기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때마다 금빛 벼락이 간헐적으로 치고, 거센 경파가 사위를 뒤집어놓는다.

멀리서도 확연히 보이는 격전에 팔사도의 봉목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일사도?”

“일사도만이 아니야.”

어느새 옆에 온 강엽의 기척에 팔사도가 흠칫 놀랐지만, 강엽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낭왕도 함께 싸우는군. 아무래도 합공하는 모양새인데...?”

강엽도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가만히 있으면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는데, 굳이 끼어들어 손을 보탤 이유가 없지 않은가?

쿠구구구구구궁-!

이무기가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가옥이 무너지고, 자욱한 흙먼지가 하늘 높이 솟구친다.

그제서야 격전이 도시까지 번졌다는 것을 깨달은 빙궁주와 빙오선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다, 당장 막아야 하오!”

“언제 저기까지...!”

대피령을 내리긴 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기감으로 일대를 헤아린 강엽은 멀찍한 곳에 있는 기척들을 감지하고 눈을 빛냈다.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군.’

* * *

야율산산이 목청껏 소리쳤다.

“부상자부터 챙겨! 노약자와 아이는 달구지에 옮기고, 그 외의 사람들은 도보로 이동한다!”

이미 도시 바깥. 그러나 괴력난신들의 싸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그녀는 사람들을 독촉했다.

눈부신 백마를 몰면서 명령을 내린 그녀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급하게 달려갔다.

“무슨 일이지?”

“아, 그, 그게....”

빙궁의 무인들이 쩔쩔맸다.

야율산산이 돌아보자 비단옷을 입은 자들이 급히 두 손을 모았다.

“소궁주님을 뵙습니다. 저희 아가씨가 다치셔서 달구지에 오르려는데 저들이 막아서....”

“아가씨?”

야율산산과 동년배인 소녀가 어깨를 감싸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표독하게 무인들을 쏘아보았다.

“마침 잘 오셨어요, 소궁주님. 제가 다쳐서 신세를 좀 지려는데 저들이 못 타게 막더군요.”

“소저, 달구지엔 중상자들만....”

무인들과 주민들을 막론하고 부상자들이 속출하는 상황.

그러나 무심코 항의하던 무인은 소녀의 눈총을 받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경황중이라 가문의 마차를 가져오지 못했답니다. 소궁주님께서 저들에께 따끔하게 한마디....”

“야.”

야율산산이 대뜸 쏘아붙이자 소녀가 눈을 껌뻑였다.

“절 말씀하시는지...?”

“어, 그래, 너. 멀쩡히 말도 할 수 있고 걸을 수도 있으면 마차는 무슨 얼어죽을 마차. 걸어서 가!”

소녀는 빙궁에서도 존귀한 신분이었다.

가문은 오랜 세월 궁주를 섬겼으며, 가주인 아비는 빙궁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조직의 수장.

조부 역시 장로원에 속했기에 그녀 자신은 아무 지위가 없어도 빙궁의 무인들을 하인처럼 부렸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도 제 신분을 내세워 부상자들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할 줄이야?

면박을 당한 소녀의 얼굴이 벌게졌다.

“소궁주님, 어찌 그런 말씀을... 전 다쳤습니다!”

“팔에 찰과상 좀 입은 거 갖고 엄살이야? 뼈 부러진 사람도 걷고 있는 거 안 보여?”

평소였다면 그녀의 가문을 봐서 좋게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엄연한 전시.

야율산산이 검을 빼들고 외쳤다.

“신분과 무력을 앞세워서 부상자들의 자리를 빼앗는 자가 있다면 목을 치겠다!”

내공이 담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소녀와 주변인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아니, 소궁주님...!”

“뭐 해? 알아들었으면 빨리 가!”

서슬 퍼런 살기가 떨어지자 소녀와 주변인들은 하얗게 질린 채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들 사이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야율산산은 신경 쓰지 않았다.

길게 이어지는 줄을 보면서 이를 악물 따름.

‘젠장,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얼핏 보면 많이 구한 것 같지만, 본래 도시에 살았던 주민들의 숫자에는 크게 못 미친다.

승천할 기세로 빙궁을 부수고 솟구친 거대한 이무기.

낭왕이 야율산산을 안고 피신하는 동안 빙궁을 박살낸 재앙은 도시까지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도망칠 새도 없이 죽은 이들의 비명이 생생히 떠오른다.

“소궁주님!”

“아 대주? 엄마는?”

“다행히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휴우.”

야율산산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무기가 도시를 덮쳤을 때 날아온 파편이 어머니를 덮쳤던 것이다.

하필이면 머리를 맞은지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상처가 그리 깊지는 않은 듯했다.

그때 야율산산의 뒤편을 바라보던 아설하가 경호성을 질렀다.

하늘에서 떨어진 네 남녀 중 세 명이 철푸덕 쓰러졌다.

“아, 아버지!?”

“궁주님!”

초췌해진 빙궁주가 딸을 부둥켜안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했구나.”

“제가 할 말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미안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구나.”

피난길을 둘러본 빙궁주의 안색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가 일월신교주에게 당하는 바람에 주민들이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비가 없는 동안 네가 지휘한 모양이구나.”

“이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세요.”

“아니, 네가 하는 게 좋겠다.”

“예?”

의아해하는 야율산산의 머리를 쓸며 빙궁주가 쓴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무거운 짐만 안겨줘서 미안하다. 하지만 아비는 저들을 볼 면목이 없구나.”

“아버지.”

“넌 할 수 있다. 이미 아비보다 잘하고 있어.”

“아, 아니에요. 전....”

야율산산이 당황하며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빙궁주는 고개를 저으며 딸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아비는 할 일이 있다. 우리의 터전을 짓밟은 놈과 싸워야 하느니라.”

“안 돼요!”

저건 괴물이다. 살아있는 천재지변을 무슨 수로 대적하겠는가.

그러나 빙궁주는 확고했다.

“죽으려고 가는 게 아니다. 네게 이 자리를 물려주기 전까지는 살아있어야지.”

눈시울이 붉어진 딸을 다독인 빙궁주가 빙오선과 아설하를 돌아보며 설핏 웃었다.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뒤로한 그가 이번엔 팔사도의 앞에 섰다.

“뭐예요?”

“이제 와서 화해하기엔 너무 많이 왔지.”

빙궁은 그녀의 운명이 불길하다 하여 내쫓았고, 그녀는 빙궁을 무력으로 짓밟았다.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상황에서 얽힌 실타래를 풀 방법이 과연 존재하긴 할까.

“난 널 용서하지 않는다.”

“그건 나도....”

“하지만 과거에 빙궁이 네게 저지른 짓에 대해선 사과하고 싶다.”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배다른 오라비의 말을 듣는 팔사도의 모습.

빙궁주는 씁쓸한 감정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오늘 이후로 만나지 않는 게 모두를 위해 좋겠지.”

뜻 모를 말에 팔사도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빙궁주는 대답하지 않고 강엽에게 향했다.

“강 무사, 나도 데려가주시오.”

“안 된다고 하면 어쩌실 겁니까?”

“그땐 내 발로 가야지.”

“힘으로 제압하고 가야겠군요.”

“...이런 말을 하긴 면목이 없지만, 나는 궁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오.”

강엽은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죽을 수도 있다고 설득하기엔 빙궁주의 결심이 너무 단호했다.

“나도 내가 어리석다는 걸 아오. 하지만 외인에게 모든 걸 맡길 수 없지. 부디 이해해주시구려.”

진지하게 부탁하는 빙궁주의 모습에 강엽은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 * *

쾅! 꾸아아앙-!

거센 경파가 질주할 때마다 집과 거리가 으스러지면서 일대를 폐허로 만들었다.

“저만한 덩치가 이리 빠르다니.”

어처구니없다는 음색으로 혀를 차는 괴뢰마의 모습.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꼬리가 채찍처럼 날아들어 그가 발을 디딘 지붕을 깔아뭉갰다.

콰아아아아아앙!

단단한 벽돌로 만든 집이 한시도 버티지 못하고 두부처럼 으깨진다.

간발의 차로 피한 괴뢰마는 문득 하늘을 불태우는 뇌기를 느끼고 눈동자를 굴렸다.

섬광이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궤적을 따라 대기를 찢는 가운데 세 명의 병장기가 얽히고설켰다.

낭왕의 좌검우도가 은발의 사내를 중심에 두고 교차하는 사이 일사도의 뇌검이 반대쪽 측면을 쳤다.

빠져나갈 순간마저 차단한 절묘한 합공.

그러나 은발의 사내, 일월신교주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이게 전부면 실망인데....]

대기를 웅웅 흔드는 전성.

광명마교 일사도와 천하팔존의 합공은 그의 육신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추었다.

옴짝달싹못하는 두 절세고수의 모습에 일월신교주가 피식 웃었다.

[이 너저분한 놈팡이는 그저 그렇지만. 보아하니 일사도 네놈은 심상지경에 오른 것 같은데. 심검은 국 끓여 먹으려고 아끼는 거냐?]

“그럼 이건 어떠냐?!”

도발에 응한 것은 낭왕이었다.

허공에 붙잡힌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공력을 있는 대로 퍼붓는다.

수중의 좌검우도가 몸을 옥죄는 압력을 강제로 찢고, 주인의 심상을 받들며 묘한 기운을 발한다.

-천기병장해(千器兵仗海).

방원 수백여 장을 아우르는 절세고수의 심상.

드넓은 범위에 널브러진 잔해들이 흔들리면서, 그 아래 깔린 주인 없는 병장기들이 호응한다.

앞서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다 횡액을 맞은 빙궁의 무인들이 남긴 것.

검과 도와 창, 드물게 도끼가 섞인 병장기들이 일월신교주를 향해 날카로운 끝을 겨누고....

콰아아아아아앙-!

마치 지남철에 이끌리는 쇠붙이들처럼 일월신교주를 향해 쏟아져 그를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정통으로 맞으면 뼈도 못 추릴 병장기의 소나기. 과거 천무병장이라 불렸던 낭왕답게 수십 자루의 병장기들을 일거에 쏟아낸 것이다.

[어마어마한 어병술(馭兵術)이군.]

도산검림의 중심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낭왕과 일사도는 그 목소리가 어쩐지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는 인상을 받고 안색을 구겼다.

[제법이다. 본좌의 호신강기를 반 치쯤 파고들었구나. 상으로 죽음을 안겨주마.]

잿빛의 불꽃이 피어나며 낭왕이 퍼부은 병장기들을 모조리 휘감는다.

한순간에 재가 되어 흩날리자 심령에 타격을 받은 낭왕이 울컥 피를 내뿜었다.

“쿨럭!”

[이제 그만 죽....]

짐짓 여유롭게 중얼거린 일월신교주가 돌연 눈가를 좁히며 일장을 내질렀다. 뇌기를 휘감은 일사도의 검이 장심에 막혀서 부르르 떨렸다.

[재밌군. 광명마교의 사도가 적을 돕다니.]

“당신이 시비를 걸지만 않았어도 안 나섰을 거다.”

일사도와 괴뢰마가 참전한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억울하게 휘말렸다.

[불가항력이었다. 교룡 녀석이 너희를 발견하고 득달같이 달려들 줄 어찌 알았을까.]

입가를 들어올린 일월신교주가 일사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넌 가루라의 영성을 지녔구나.]

“...!”

[뭘 놀라느냐. 본좌쯤 되는 존재라면 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을. 광명마교주 그놈이 제법 재밌는 실험을 한 모양이군. 본좌가 아는 한 가루라의 화신은 한 세대에 한 명뿐일 텐데... 이번엔 예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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