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북해 (3)
야율산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강엽을 다시 만날 거란 생각도 못했는데, 그가 낭인전의 금패가 되어서 왔으니 얼마나 놀랍겠는가.
하물며 그녀가 기억하는 강엽은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당신이 강엽 공자라고요?”
야율산산이 여느 무인들처럼 건장한 강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녀와 헤어졌을 당시 강엽은 피골이 상접한 말라깽이였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그때의 기억을 대입하면 바로 믿기 어려운 게 사실.
“강엽 공자, 당신은 지금까지....”
야율산산은 강엽이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새삼 그 사실을 떠올렸는지 무심코 물으려다, 옆에 선 아설하를 의식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죠. 아 대주가 당신을 데려왔다는 건....”
“내가 하오문주의 의뢰를 받고 왔다.”
강엽은 담백하게 사실을 전했다.
야율산산과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며칠 동안 생사를 함께한 인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은 빙궁의 사정을 파악하고, 낭왕의 상태와 소재를 알아내는 게 훨씬 시급할 터.
“낭왕은 살아있나?”
“네. 지금 모처에 계세요.”
“광명마교가 살려둘 리 없을 텐데?”
“그들은 낭왕께서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어요.”
“뭐?”
“...낭왕께선 본궁의 대적과 싸우시다 중상을 입으셨어요. 다만 본궁의 의술로는 치료하지 못해서, 빙관(氷棺)에 넣어 그분을 가사 상태로 인도했어요.”
“누구와 싸웠지? 아니, 다시 묻지.”
강엽의 눈에서 일순 차가운 기광이 뿜어졌다.
“빙궁은 왜 사실을 감춘 거냐?”
“...아 대주가 말해주지 않았나 보네요.”
아설하가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으나 야율산산은 개의치 않았다.
“아 대주도 말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자는 본궁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을 정도로 비밀스러운 존재거든요. 그자는 본궁을 위협하는 대적이자, 동시에 본궁에 축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예요.”
“선문답을 좋아하진 않는데.”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하라는 으름장.
아설하가 울컥해서 뭐라 쏘아붙이려는 찰나 야율산산이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내가 알아서 말씀드릴 테니까 가만히 있어.”
“하오나 소궁주님...!”
“아버지도 이해해주실 거야.”
부친을 입에 담는다. 함구령을 내린 배후에 빙궁주가 존재하는 걸까.
“낭왕께서 누구와 싸우셨는지, 그리고 광명마교가 어떻게 본궁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지 설명하려면 일단 오래전의 이야기부터 해야 해요.”
어찌 보면 빙궁의 치부였다. 그러나 야율산산은 이야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작금의 난관을 타파하려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군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 * *
“그자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어요.”
야율산산이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그녀의 부친인 빙궁주 역시 갓 태어난 아이였던 까마득한 옛날.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억센 눈보라가 치는 날, 그 괴물은 설풍을 뚫고 홀연히 나타났다.
온몸에 하얀 불꽃을 휘감은 열양지기의 화신.
스스로 이름도 밝히지 않고, 대화도 통하지 않았던 마인은 나타나자마자 북해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생존자들은 본궁에 도움을 청했어요. 당시 궁주였던 증조부님께서 무인들을 파견하셨고....”
그리고 그들은 하루도 못 가서 전멸했다.
당연히 빙궁은 비상이 걸렸고, 이번엔 원로급의 절세고수가 정예들을 이끌고 향했다.
“그들 역시 소식이 끊겼죠. 하지만 마인은 본궁에 쳐들어오지 않고 북쪽으로 향했어요.”
이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처럼 하염없이 추운 곳을 향해서만 나아갔던 것.
그때가 되어서야 빙궁은 미쳐버린 마인이 향하는 곳이 빙궁의 금지라는 것을 알고 기겁했다.
“금지....”
“금지라고 하지만 본궁에 있는 건 아니에요. 본궁에서도 머나먼 북쪽에 있는... 오래된 곳이었죠.”
잠시 입술을 우물거린 야율산산이 처연한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빙정(氷精)이라고 아세요?”
“기록을 본 것 같군. 공청석유와 함께 음한지기의 극한이라 일컬어지는... 설마?”
강엽의 눈이 커졌다. 오래전 음한지기의 영약을 찾을 때 빙정에 대한 기록 역시 봐두었다.
하지만 여느 전설적인 영약들이 그렇듯 빙정 역시 실존이 의심되는 영약이었다.
한데 빙정이 정말로 존재했다니....
“빙정은 천지의 음기가 모이는 곳에 고드름처럼 굳어져요. 과거 본궁의 혈족들은 빙정이 있는 성소에서 운기하면서 내공을 키우곤 했어요.”
강엽은 그 말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과거에 그랬다는 것은 더 이상은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뭔 일이 벌어진 거냐?”
“그자가 빙정을 흡수했어요.”
그전까진 누구도 빙정을 품겠다고 나서지 못했다.
빙정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음기의 정수. 설사 빙공을 익힌 초고수라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으리라.
“하지만 그자는 달랐어요. 오히려 빙정을 흡수하고 더 강해졌거든요. 그 뒤로는 쭉 성소에서 머물렀어요.”
그때부터 성소는 금지가 되었고, 빙궁의 혈족들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절대사지로 전락했다.
“빙정을 흡수했다고 상태가 좋아진 건 아니었어요. 대신....”
야율산산은 목구멍이 따가웠는지 냉차로 입술을 축인 다음 말을 이었다.
“그가 살아있는 빙정이 되었죠.”
“뭐?”
“그전까진 열양지기를 내뿜었는데, 빙정을 흡수한 뒤엔 한빙지기를 함께 내뿜었어요.”
“.......”
강엽은 어떻게 한 사람이 음양의 이종진기를 다룰 수 있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바로 본인이 그 예외의 산 증인이 아닌가?
‘이 녀석이 하는 말로 미루어보면....’
일전에 일월신교의 신녀가 말했던 과거의 비사.
야율산산의 이야기가 그와 겹치는 걸 보면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리라.
“문제는 그자가 주기적으로 발작을 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싸워야 한다는 거예요. 증조부님도, 조부님도 그자와의 싸움으로 내상을 입고 돌아가셨어요.”
“그럼 축복 운운했던 건 뭐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만족할 만큼 싸운 뒤엔 스스로를 봉인해요. 그때부턴 그자의 근처에서 운기하면 예전처럼 내공을 축기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된 거였나.
전부 이해한 건 아니지만, 대략적인 사정은 깨달았다.
확인하기 위해 모르는 척 물었다.
“마인의 정체는 알고?”
“...일월신교.”
치맛자락을 꽉 쥐는 야율산산.
강엽을 보는 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한때 일월신교의 교주였던 자였어요.”
“...놀랍군.”
전혀 놀라지 않았지만 야율산산은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십 년 주기였다고 하는데, 근래에 들어 더 짧아졌어요. 아버지도 내상을 입으시고....”
이후 낭왕이 도착했고, 동맹을 청했을 때 빙궁은 조건을 걸었다.
궁주 대신 일월신교의 교주를 막아달라는 조건을.
“.......”
“잘못됐다는 건 알아요. 죄송해요.”
강엽의 안색이 싸늘하게 가라앉자 야율산산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만약 일월신교의 교주가 봉인에서 풀려나와 폭주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지.
낭왕도 그걸 아니 제안에 응한 것이리라.
“...하나만 묻자. 만약 낭왕이 그자를 무사히 막아냈다면, 정말 동맹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나?”
폐쇄적인 기풍을 지닌 새외 문파가 순순히 약속을 지키려 할까.
야율산산은 아무 말도 못했다.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지금껏 나서지 않았던 아설하가 입을 열었다.
강엽의 힘을 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아쉽기 때문인지 그녀는 스스로를 낮추었다.
“광명마교의 팔사도가 궁을 휘젓고 있습니다. 낭왕께서 패하신 뒤에 그녀가 광명마교의 교도들을 시켜 세운 석탑이....”
“잠깐, 석탑?”
강엽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지난날 마의가 모용세가의 한복판에 세운 석탑, 그 안에서 사사도가 나오지 않았던가.
‘검선이 적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똑같은 석탑이 네 군데에 더 있다.’
북해 역시 그중 하나였다.
안 그래도 낭왕의 일이 끝난 뒤에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정보를 들을 줄이야.
‘석탑이 입도공월 같은 술법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석탑을 통해서 오가는 것도 이론상 가능하긴 해.’
강엽을 비롯한 무림맹의 인사들은 석탑에 접근도 하지 못해서 정확한 실체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정황을 보면 석탑이 축지법의 기능도 한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
“그 석탑에 대해서도 말해봐. 광명마교가 석탑을 어디서 세웠고, 그걸로 뭘 하고 있지?”
“그건....”
아설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설명이 끝났을 때, 강엽은 비로소 빙궁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다.
‘개판이군. 내우외환이 따로 없어.’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한 뒤 야율산산을 응시했다.
“의뢰 내용은 어디까지나 영약을 전달하는 거였지. 낭왕을 살리기만 하면 끝이었어.”
“강 공자....”
“하지만 그냥은 못 돌아가겠군. 낭왕의 일은 내가 이어받지. 의뢰비는 일을 끝내는 대로 받는 걸로 하고.”
야율산산과 아설하의 안색이 굳어졌다. 강엽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맹 약속, 지키는 게 좋을 거야. 만약 딴마음을 먹거나 적당한 구실로 빠져나가려고 하면....”
강엽의 손가락에 하얀 불꽃이 일면서 순식간에 탁자를 집어삼키면서 활활 타올랐다.
지난날 북해를 습격했던 마인과 같은 불꽃.
그 의미를 깨달은 야율산산과 아설하가 아연해할 때, 강엽이 더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도 말로는 안 넘어갈 것 같거든.”
* * *
“오라버니도 참 고집이 세시네요.”
“....”
“이미 빙궁은 본교의 수중에 넘어왔어요. 그 괴물은 본교의 권능으로 잠재웠고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의 가인.
팔사도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그리면서 탕약을 내려놓자 중년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찬란한 금발은 빛이 바래고, 얼굴에 주름이 지긴 했지만 나이를 먹은 지금도 수려한 용모.
그녀의 배다른 오라비이자 세간에선 빙궁주라 불리는 야율경이 일그러진 얼굴로 추궁했다.
“...언제부터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언제부터 가신들을 포섭했느냐는 말이다. 대체 무슨 수로 그들을 꾀어낸 거지?”
북해에선 설왕(雪王)이라 불리며 숭앙받는 그였지만 홀로 금지의 괴물을 상대할 순 없었다.
최정예들을 이끌고 가도 버티는 게 최선.
그렇기에 가신들 중 일부가 배신했을 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한창 싸우던 중이라 손쓸 겨를이 없었다.
간신히 괴물을 뿌리치고 배신자들을 족쳤지만, 금세 쫓아온 괴물에게 내상을 입고 말았다.
살아남은 게 기적일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지. 측근들 몇 명이 낭왕을 꾀어내서 금지로 보냈더군.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궁주의 인장을 훔쳐 거짓 의뢰서를 꾸몄어.”
국가로 치면 신하가 왕의 옥새를 함부로 쓴 격이다. 들통 나면 죽음으로 다스려야 할 일.
하지만 그가 정신을 잃어 무력해졌을 때 가신들은 간담 크게도 그런 짓거리를 벌였다.
“내 눈을 가린 채 이상한 탑을 세우고, 낭왕을 차도살인하고, 이제는 날 허수아비로 만들었어. 이럴 거면 날 죽이지 왜 살려두는 거냐?”
“딸이 혼인하시는 건 보셔야죠.”
“너...!”
“오라버니와 산산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신들이 혼사를 추진하고 있어요. 예로부터 혼인 동맹은 두 세력을 이어주는 매개였죠. 산산 그 아이도 아비의 목숨이 저당 잡힌 이상 거부할 수는 없을 거예요.”
“대체 원하는 게 뭐냐?”
“빙궁.”
창 사이로 흐릿한 햇볕을 내리쬔 팔사도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아름답지만 섬뜩한 미소가 배다른 오라비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전 한시도 잊지 못했어요. 태양지체(太陽之體)를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절 저주받은 아이라 매도하며 죽이려 했던 당신들을....”
“그들은 내쫓겼다. 내가 궁주가 된 뒤에 모두 숙청했단 말이다!”
“하지만 제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지요. 그리고 절 불길하게 여긴 건 아버지도 매한가지였잖아요?”
“그건....”
“빙궁을 없애는 건 너무 쉬워요. 그런 걸로는 제 복수심이 채워지지 않아요.”
“그래서 이런 짓을 한단 말이냐?”
“네, 빙궁을 가진 뒤에 망가뜨리려고요. 뭐, 본교의 대계를 우선시하긴 했지만, 겸사겸사 제 복수심도 채우면 일석이조잖아요?”
“...본궁을 어쩔 셈이냐?”
“짐작하실 텐데요.”
팔사도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빙궁의 무인들을 한데 모아서 강호를 공격할 생각이에요. 어디부터 공격할지도 정해놨답니다. 일단 산서 무림을 정리한 뒤에....”
팔사도가 그렇게 말을 잇던 그 순간.
쿠와아아아앙......!
그녀가 있는 궁주전까지 위아래로 출렁거릴 만큼 무지막지한 진동이 빙궁 전체를 강타했다.
황급히 복도 너머로 고개를 돌린 그녀가 외쳤다.
“적습이에요! 빨리 가서...!”
하지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꽈아아아아앙!
또다시 굉음이 울렸으니까. 심지어 이번엔 매우 가까운 곳에서 충격이 터졌다.
궁주전의 천장을 부수고 난입한 불청객.
“.......”
팔사도는 물론 빙궁주도 망연해하는 가운데 새카만 장삼을 펄럭이는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총단에서 다음 사도 후보로 불리는 대교의 머리를 한 손에 움켜잡은 채.
혀를 빼물고 잘려나간 머리의 모습에 팔사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당신은...!”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창졸간에 거리를 좁힌 강엽이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으로 호신강기를 찢어발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