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북해 (2)
강엽은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만약 빙궁이 광명마교에 점령당했다면 윗선부터 졸자들까지 모조리 목을 치면 그만.
그럼에도 신중하게 접근한 것은, 단순히 힘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거나 적진에 자신과 비견될 강자가 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낭왕을 빈사지경으로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인가.
하오문주의 서찰에도 적히지 않은 걸로 보아 빙궁이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광명마교가 한 짓이라면 굳이 숨길 이유가 없을 텐데....’
그때로부터 시일이 지난 지금은 낭왕의 생사도 불명확했다.
광명마교가 빙궁에 간섭하는 지금 그들과 적대하는 낭왕을 살려둘 리는 만무했으니까.
최악의 경우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
내심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정하며 어찌 행동해야 할지 가늠할 때였다.
“저기 오는군.”
함께 온 주인장이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강엽을 만난 날, 그는 주루에 들른 빙궁 무인을 통해 서찰을 전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 빙궁의 윗선에 끈이 있다고 했던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에야 빙궁의 윗선을 만날 수 있게 된 것.
새하얀 두건을 깊이 눌러쓴 사람이었다. 피풍의로 전신을 가렸기에 누군지 알아볼 순 없었다.
다만 피풍의로도 가릴 수 없는 늘씬한 체형은 접선자가 여인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저자인가?”
약간은 쉰 목소리. 일부러 목소리를 깔았다기보다는 원래부터 그런 목소리를 지닌 것 같았다.
“하오문주의 서찰을 받고 왔다고 들었다. 낭인전의 금패급이라지. 확인하고 싶은데.”
강엽이 말없이 금패를 꺼내서 보여주자 두건 속의 갸름한 턱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정말이었군.”
“나도 한 가지 묻고 싶은데.”
“낭왕의 소재에 대해서겠지?”
“살아있나?”
“아직은.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줄 수 없어. 그건 본궁의 내밀한....”
거기까지 말한 인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쓸데없는 말을 할 뻔했군. 영단은 갖고 왔나? 낭왕을 살리려면 영단이 필요해.”
“헛소리는 작작해라.”
“뭐라고?”
강엽이 코웃음을 치며 따졌다.
“까놓고 말해서 그쪽을 어떻게 믿지? 낭왕의 생존도 확인되지 않는데?”
“그건....”
“영단을 꿀꺽하려는 건 아닌가?”
“감히 본궁을 모욕하는 건가?”
농밀한 살의가 사위에 깔린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주인장이 움찔할 만큼 싸늘한 살기.
“금패급이면 대단한 고수겠지. 하지만 본궁을 모욕하고 살아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자연히 그녀의 손이 허리춤에 매어둔 검을 매만졌다. 여차하면 출수할 태세였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소란이 일면....”
주인장이 진땀을 빼며 만류했다.
여기서 싸움이 나면 광명마교가 득달같이 달려올 것이다.
여인도 새삼 떠올렸는지 혀를 찼다.
“그래, 장소가 좋지 않군.”
“아니.”
그녀의 말을 부정하며 고개를 돌리는 강엽의 모습.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간혹 한두 합 나누는 듯 격한 소리가 들렸지만, 그마저 오래가지 않고 툭 끊긴다.
두건 속 여인의 눈빛이 격랑을 만난 것처럼 거세게 출렁였다.
“네놈...!”
“스무 명이나 대동했군. 야행복을 입었지만 똑같은 병장기를 패용했고, 등 뒤의 기습에 대항하는 법도 비슷해. 하나같이 똑같은 초식으로 맞서고 있어.”
“뭐...?”
강엽의 말에 여인이 벙쪘다.
부하들의 숫자야 기감으로 헤아렸다고 해도 복장이나 초식 같은 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부하가 있었나!?”
그래, 부하들이 있다면 말은 된다.
미리 매복한 다음 이쪽의 인원이 왔을 때 몰래 뒤를 점해서 기습을 날리고, 전음으로 그 사실을 말해준다면...!
“꽤 유능한 부하지. 너도 봤을 거다.”
영문 모를 말을 늘어놓으면서 손가락을 따악 튕기자 좁은 골목에서 사람을 묶은 붉은 줄기가 나타났다.
아연해진 주인장이 칼을 뽑아들 때 땅을 뚫고 등장한 혈목이 그의 발목을 칭칭 감아 넘어뜨렸다.
“억! 이게 무슨...!”
“가만히 있어라.”
발목 잘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으름장을 놓듯 덤덤하게 말을 잇자 주인장이 이를 갈며 여인을 돌아보았다.
“피하시오, 부인! 이놈은 위험하오!”
“이럴 수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모습.
주인장, 아니 남편이 혼신을 짜내 쥐어짠 목소리도 들리지 않은 것처럼 멍하니 강엽을 바라보았다.
“너, 넌 누구지? 어떻게 이 괴물들을 부리는 거냐?”
“오랜만이군.”
피식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강엽의 모습에 여인은 흠칫 놀란 얼굴로 물러났다.
한 걸음 더 따라가며 강엽이 말했다.
“별로 반가운 재회는 아니야. 처음 만났을 때도 다짜고짜 칼질부터 했었지?”
“너, 너! 아니, 당신은 설마...!”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두건을 넘겨버린다. 말총처럼 질끈 묶은 긴 머리가 이리저리 흩날렸다.
뺨에 긴 상처가 있는 걸 빼면 기억 속에 있는 얼굴과 똑같은 용모.
“아설하라고 했던가? 야율산산의 부하였지?”
파리하게 질려 굳어진 채 입만 뻐끔거린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목구멍을 쥐어짜냈다.
“다, 당신이 낭인전의 금패급이라니....”
따지고 보면 강엽이 흡혈귀가 된 것은 고작 일 년하고 일곱 달 전의 일이었다.
당시 흡혈귀가 되자마자 그녀를 만났고, 한바탕 싸운 끝에 간신히 제압했다.
‘그것도 요행이 따른 거지만.’
흡혈귀의 본능과 재생력에만 기대서 버텼고, 마지막엔 혈목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그 뒤에 혼인을 했나 보군. 소궁주의 측근과 부부 사이라... 그럼 저자가 중책을 맡은 것도 이해가 되지. 당신 배후에 야율산산이 있었나?”
“부인, 도망가시오! 제발!”
그녀의 남편은 얼른 도망치기를 권유했으나 아설하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남편과 부하를 번갈아보고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챙강!
“...남편과 부하들을 풀어줘.”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가족과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검을 버리는 모습에 남편이 울분을 짓씹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원한이 있는 건 나잖아? 그때 당신을 공격한 건 내 실책이야. 그러니까....”
강엽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착각?”
“이놈들을 제압한 건 원한 때문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정보를 알기 위해서지.”
한마디로 낭왕의 위치, 그리고 정확한 상태를 알기 위해 이들을 인질로 잡았다는 뜻이었다.
“고작 영단이나 얻으려고 사람을 먼 북해까지 불러내진 않았겠지. 낭왕은 살아있을 거야.”
“하지만 그건 본궁의....”
“신경 쓸 체면이 있나? 보아하니 광명마교가 이미 빙궁을 점거한 것 같은데. 그러니 너희도 도둑놈처럼 몰래 행동하는 거 아닌가?”
적나라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말에 아설하의 낯빛이 수치심으로 벌게졌지만, 강엽과 눈이 마주치자 이성이 다시 통나무처럼 뻣뻣해졌다.
잠시 후 그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내가 말해주지 못하는 건 본궁의 비밀이기 때문이야. 설령 당신이 우리 전부를 죽여도 말해줄 수 없어.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니까.”
“그럼 간단하군.”
강엽은 혈목에게 명령해서 그녀의 남편과 부하들을 풀었다.
“그걸 판단할 수 있는 사람에게 안내해라.”
“...거절하면 죽일 건가?”
“그럴 필요는 없겠지.”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땐 너희를 존중하지 않을 거다. 너희 없이 사태를 해결할 생각이니까.”
“광명마교를 얕보지 마. 저 위엔....”
“팔사도가 있는 거 아닌가? 빙궁의 혈족이면서 광명마교에 투신한 여자 말이야.”
“하, 그걸 알면서 나서겠다고?”
“상관없어.”
강엽이 그녀를 지나치며 말했다.
“난 이미 사도를 죽였다.”
“...!”
불신과 경악으로 굳어진 그녀를 두고 강엽은 술법을 발해 정신을 잃은 빙궁 무인들을 깨웠다.
* * *
“아직도 고민하고 있소?”
“....”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숙하지만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얼굴로 냉차를 가져갈 뿐.
아름다운 금발과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를 곁눈질한 청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야율 소저도 알지 않소. 빙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본교뿐이라는 것을.”
황금빛 태양이 새겨진 하얀 장삼을 입은 청년.
입술이 얇아 간사한 인상이지만, 뭇 여인들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영준한 용모였다.
하지만 청년을 향한 여인의 눈빛은 차가웠다.
“말씀을 함부로 하시는군요, 예 공자.”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겠소. 하지만 잘 생각해보시오. 빙궁의 문제... 지난 수십 년간 당신들을 괴롭혔던 문제만 해결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소.”
말이 없는 그녀가 답답했던지 청년도 자신의 앞에 놓인 냉차를 쭉 들이켰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괴물을 잠재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덧없이 죽었는지 알지 않소?”
“....”
싸늘하게 가라앉은 여인의 표정.
하나 그녀의 심사가 뒤틀리든 말든 청년은 제멋대로 제가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이고 있었다.
“본교의 힘이라면 문제를 해결하는 건 물론이고, 빙궁의 무림 진출을 도와줄 수 있소.”
“무림 진출이라... 칼받이로 쓰겠다는 말을 참 고상하게 표현하시는군요. 듣기 싫으니 나가세요.”
매정한 축객령에도 청년은 개의치 않았다. 짧게 혀를 차는 소리를 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집부리지 마시오. 이미 빙궁은 본교의 수중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와 소저의 혼인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요식행위일 뿐이오.”
“....”
끝까지 대답하지 않는 여인을 힐끗 노려본 청년이 차갑게 몸을 돌리면서 소리쳤다.
“가자!”
그 말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광명마교의 무인들이 청년을 호종하듯 좌우로 따랐다.
문이 닫히자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시비들이 울분에 찬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소궁주님....”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런데, 잠시 나가줄래?”
시비들이 낙담한 얼굴로 방을 나가자 홀로 남은 여인은 한숨을 쉬며 냉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일신의 무력함을 곱씹으며 울화통을 달래는 그때였다.
“소궁주님.”
오랜 친구이자 수하인 아설하의 목소리.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녀가 출타한 이유를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들어와. 갔던 일은 잘 됐어?”
낭왕을 찾아온 낭인전의 금패를 만나러 간다면서 잠시 자리를 비웠던 그녀였다.
처소에 들어온 아설하가 머뭇거렸다.
“그게... 그자가 소궁주님을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자의 정체가....”
“응? 누군데 그래?”
그녀가 의아해했을 때였다.
“야율산산.”
귓가에 꽂히는 나직한 목소리.
순간 화들짝 놀란 그녀가 푸른 눈동자를 크게 뜰 때 시야가 일렁이면서 흑포 사내가 나타났다.
“이게 뭔...!”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설하를 바라보자 그녀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대답을 쥐어짜냈다.
“소궁주님께서도 아시는 자입니다. 일전에 중원에서 큰일을 겪으셨을 때 만났던....”
“중원에서 만나?”
순간 그녀는 무언가 떠올린 듯 경악한 표정으로 강엽을 돌아보았다.
“...강엽 공자?”
“용케 기억하는걸.”
이름을 말해준 건 딱 한 번이었다. 그 뒤로 시간이 흘렀으니 야율산산이 잊을 수도 있었다.
강엽이 입가를 당기며 말했다.
“꼬맹이가 몰라보게 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