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북해 (1)
장성 너머 존재하는 새외 문파.
그 위명은 익히 알려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아는 자가 없기에 접해본 자가 극히 드문 신비문파.
일설에 따르면 북해빙궁은 초원의 유목민들이 사는 땅보다도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안 가본 데가 없다고 하더니 북해에도 문을 놨구만.’
내공의 한계로 인해 단번에 가진 못하고 며칠에 걸쳐 이동과 회복을 반복했지만 마침내 장성을 넘었다.
불로장생에 미쳐 천하 곳곳을 탐방한 모산혈조답게 북해에도 입도공월의 문이 있었던 것이다.
모산파의 장문령부를 길잡이로 삼아 목적지에 도착한 강엽은 그렇게 길을 열었다.
사시사철 얼어붙은 혹한의 대지.
분명히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뼛속까지 얼어붙을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닥칠....
“뭐야?”
강엽은 눈을 깜빡였다.
분명 금시환령은 이곳을 가리켰다.
북해로 가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 이쪽으로 안내한 것이다.
그런데 눈보라는커녕 녹음이 우거진 푸른 호수만 보였다.
“...여기가 아닌가?”
암만 여름이라고 해도 그렇지, 사시사철 얼어붙은 혹한의 땅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금시환령이 길을 잘못 잡아준 게 아니라면....’
웅웅웅웅웅...!
줄곧 한쪽만 가리켰던 모산파의 장문령부는 문을 나오자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목적지는 얼추 맞는 것 같은데....”
여름이긴 하지만 무덥지는 않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살갗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강엽은 주변을 살폈다.
북해로 왔다고 해도 빙궁에 가려면 일단은 길을 아는 사람을 찾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이게 수원이라면 주변에 마을이 있겠지.’
바다처럼 수평선을 이루는 규모에 혹시나 했는데 혀끝에 느껴지는 물맛은 전혀 짜지 않았다.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담수였다.
타탓!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강엽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아래를 조망했다.
휘이이이잉...!
아까보다 더 쌀쌀한 바람이 머리를 흐트러뜨린다.
질끈 묶은 머리를 누르면서 동자료혈에 공력을 집중하자 저 멀리 호수를 면한 마을의 정경이 보였다.
절세고수의 안력으로도 어렴풋이 보이는 먼 마을.
강엽은 마을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강을 따라 북쪽으로 가시오.
마을 주민이 손짓발짓을 하며 했던 말이었다.
솔직히 강엽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언어가 달랐으니까.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마을의 촌장으로 보이는 이족 노인이 한자를 알고 있었기에 뜻이 통했다.
정확히는 나뭇가지로 땅에 적은 ‘북해빙궁(北海氷宮)’이라는 글귀를 알아본 것이다.
그는 호수에서 발원한 강줄기를 따라갈 것을 권유했고, 강엽은 그가 시킨 대로 했다.
그렇게 며칠을 더 갔을까.
“으음, 생각보다 더 먼데...?”
정확히 재본 건 아니지만 천오백 리는 간 것 같았다. 북쪽으로만 갔기 때문에 상당히 추워졌고, 이젠 숨을 쉴 때마다 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한서불침이라 추위에 영향받지 않아서 망정이지, 평범한 몸이었다면 야밤의 추위를 이기지 못했겠지.
그렇게 강줄기를 따라 중간중간 크고 작은 마을을 들러 방향을 물었는데, 의외로 북쪽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한어를 알아듣고 있었다.
처음 갔던 마을의 촌장은 북해빙궁이라는 글귀만 겨우 알아봤다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일.
흔히 대륙인들이 홍모귀라 칭하는 피부 하얀 이족들이 어눌하게나마 한어를 구사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아니, 의외로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지금은 얼굴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은 소녀.
흡혈귀가 되기 전에 이래저래 얽혔던 빙궁의 공녀인 아율산산 역시도 한어를 구사하지 않았던가.
하필이면 성대를 다친 탓에 처음 만났을 땐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그 뒤에 진조의 진법에 갇혔을 땐 그녀도 육신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말을 했었다.
그 뒤로도 진조의 배려로 병이 쾌차해서 말할 수 있었고....
빙궁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덧 얼음처럼 새하얀 성벽이 자태를 드러냈다.
산 위에 지어진 성벽 위쪽으로는 푸른 기와지붕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성하도시가 들어선 풍경.
강을 따라 지나친 마을들을 다 합친 것보다 배는 더 큰 규모였다.
중경이나 항주 같은 대도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현보다는 훨씬 번화했다.
성벽과 같은 하얀 돌로 야트막한 벽을 두른 도시엔 병장기를 패용한 무인들이 줄지어 늘어선 상인들의 짐마차를 검문하고 있었다.
옷깃에 털이 달린 백삼을 입은 무인들.
‘북해빙궁의 무인들이겠... 음?’
강엽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빙궁의 무인들까지는 그렇다 쳐도 그들 사이에 이질적인 인물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피로 만든 피풍의 사이로 언뜻 드러난 황금빛 태양의 문양이 제법 익숙하게 다가왔다.
느긋하게 섭선을 부치는 모습에 빙궁의 무인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봐도 상전으로 모시는 모양새였다.
‘느껴지는 기운은 대교급.’
중단전을 개방한 절정고수. 저만하면 북해에 온 광명마교의 교군 중에서는 고위층일 공산이 컸다.
처리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빙궁 내부의 상황을 모르면서 섣불리 건드릴 필요는 없을 터.
북해로 간 사사도가 호광성에 왔을 때부터 빙궁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건 예상했다.
‘누가 봐도 인력이 남아서 온 것 같았지.’
달리 말하면 광명마교가 빙궁을 점령했다는 뜻.
거기까지 생각한 강엽은 암신으로 몸을 감추고 상인들 틈에 섞였다.
상단을 지키는 표사들이 경계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빙궁의 무인들이 경고했다.
“도시 안에서는 절대로 병장기를 꺼내지 마시오. 시비가 붙어도 마찬가지요. 책임 소재가 누구에게 있든 중벌을 면치 못할 테니까.”
“주먹다툼도 하지 말란 소리요?”
상대가 시비를 걸어도 싸우지 말라는 것은 최소한의 방어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닌가?
표두가 볼멘소리를 내뱉자 빙궁의 무인이 인상을 썼다.
“싫으면 나가시든가.”
“아니, 그런....”
“잊지 마시오. 본궁의 권위를 무시하면 당신들이 누구든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을 거요.”
“....”
엄포를 놓는 것치곤 광명마교의 눈치를 심하게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따져봤자 소용없다고 느꼈는지 표두는 불만을 표출하는 대신 굳은 안색으로 대답했다.
“알겠으니 성문이나 열어주시오.”
“아, 잠깐만.”
별안간 광명마교의 관심을 받은 표두가 긴장감이 완연한 얼굴로 목울대를 꼴깍 움직였다.
“...말씀하시지요, 대인.”
“별 건 아니고 요즘 중원 소식이 궁금해서. 자네들도 중원에서 온 것 같은데 뭐 아는 게 없나?”
“그, 글쎄요. 소인들은 요동에서 온 지라... 요새 중원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요동이라... 먼 데서 오셨구만.”
구태여 붙잡을 생각은 없는 듯 광명마교의 무인이 섭선을 휘저으며 가라는 시늉을 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표두가 성문을 통과한 것과 동시에 강엽도 표행에서 떨어졌다.
‘역시 감시자가 붙는 건가....’
건물과 건물 사이 절묘한 각도에 숨어있던 자가 은밀하게 상단을 미행하고 있었다.
음한지기를 익힌 빙궁의 무인들과 달리 열양지기가 흘러나오는 날숨.
무사히 통과시킨 것과 별개로 혹여 수상쩍은 짓을 하는 않는지 감시하는 것이리라.
다만 그 일을 하는 자가 빙궁의 무인이 아니라 광명마교의 무인이라는 점에서, 도시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상행을 오는 상단이라면 빙궁의 수뇌부와 안면을 텄을 텐데도 면밀하게 감시하는 태도.
만약 강엽이 모습을 드러내고 들어왔다면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정체를 추궁당하지 않았을까.
응달진 골목으로 들어간 강엽은 문득 피부를 찌르는 통증에 하늘을 불만스레 올려다보았다.
술시가 진작 지나서 날이 어스레져야 할 때인데도 하늘은 한낮처럼 환하기 그지없었다.
북해 사람들은 이를 백야(白夜)라고 하던가.
그나마 상단은 짐마차 안이 어두워서 암신을 쓰기 쉬웠지만, 이런 환경에선 몸을 숨기는 게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대충 거리를 돌아다니며 도시 분위기를 익히기를 한참.
문득 주루란 현판이 걸린 목재 건물을 발견한 강엽은 왠지 모를 반가움에 헛웃음을 흘렸다.
입구의 주렴을 헤치고 들어가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독한 술냄새와 약향이 번졌다.
슬쩍 엿보자 구석에서 도박을 하며 앵속을 피우는 무리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혼자 오셨소?”
주루에 들어왔을 때부터 암신을 풀었기에 주인장은 강엽을 알아보고 위아래로 훑었다.
병장기를 패용했는지 살펴보는 눈초리였다.
“혼자면 여기 앉으시오. 탁자는 일행이 있을 때만 앉을 수 있거든. 우리 가게가 작은지라 혼자 오는 객들은 돈대(墩臺)를 써야 하오.”
주인장의 앞엔 오동나무로 만든 길쭉한 돈대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 의자 몇 대가 놓여 있었다.
지금껏 갔던 주루에선 못 보던 자리였다. 아무래도 이곳만의 독특한 문화인 듯싶었다.
강엽이 자리에 앉자 주인장이 팔짱을 꼈다.
“보시다시피 그리 좋은 술은 없소. 중원의 술이 좀 있긴 한데 가격이 비싸지. 그래서 추천하진 않소.”
“비싼 술이라면 더 팔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사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차림새를 보면 상인은 아닌 듯한데, 돈은 있으시오?”
사실 강엽의 옷차림이 허름한 건 아니었다.
마을 주민들이 얇게 입으면 얼어죽는다고 호들갑을 떨어서 반 강제로 모피가 달린 피풍의를 샀으니까.
‘어째 바가지를 주고 산 것 같긴 하지만....’
도시의 시장에서 상인들과 흥정하는 아낙들은 절반이나 싸게 주고 샀다. 현지 사정을 몰라서 눈 뜨고 사기를 당한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눈탱이를 맞은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여기 사람들은 어떤 술을 많이 찾소?”
“마유주. 마유주를 증류한 술도 많이 찾는 편이고. 마유주를 뜨겁게 데운 다음 기름을 둥둥 띄워서 마시기도 한다오.”
“...그럼 가장 싼 걸로. 안주도 적당히 주시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은 주인장이 시큼한 냄새가 나는 마유주와 말린 고기를 내왔다.
솔직히 입맛엔 전혀 맞지 않았기에 몇 모금 마시고 그만뒀다. 그나마 염장을 한 고기는 먹을 만했지만 너무 질겨서 식감이 좋진 않았다.
어차피 배를 채우기 위해 주문을 한 것도 아닌 바.
지나가듯 물었다.
“참, 도시에 광명마교의 교도들이 돌아다니던데...?”
“입조심하시오.”
흉터 그득한 면상을 실룩거린 주인장이 한쪽에서 앵속을 빨며 도박을 하는 무리를 곁눈질했다.
“이 도시엔 듣는 귀가 많아. 외지인이 관심을 가지면 오해 사기 딱 좋소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지 않다면 봐도 못 본 척하고, 들어도 못 들은 척하고 술이나 쳐드시오.”
흉악한 면상에서 심장을 옥죄는 기세가 흘러나왔다.
어지간한 사람은 그 흉악한 면상만 봐도 오금이 저리겠지만 강엽은 태연하게 손을 뻗었다.
주방 한쪽에 놓인 호리병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는 것처럼 수중에 쭉 빨려들어왔다.
“방금 무슨...?”
“죽엽청이군. 그것도 질 좋은 최상품이야.”
“...너 누구냐?”
맹수처럼 으르릉거리는 기세에도 아랑곳 않고 마개를 따서 한 입에 털어넣은 모습.
입술에 묻은 액을 손끝으로 훔친 강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까 성문에서 상인들을 봤다. 자기들 말로는 요동에서 왔다고 하더군. 하지만 산서 말투를 썼어.”
산서땅이라고 해도 지역마다 조금씩 억양은 다르지만 강엽은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똑같이 산서 태생이었으니까.
“그땐 그러려니 했다. 산서땅에서 태어나도 요동에 있는 표국에서 일할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산서땅에서도 구하기 힘든 최상품의 명주가 있군. 운송 비용을 생각하면 이런 주루에서 취급하긴 어려워.”
“말 돌리지 마. 넌 뭐냐고 물었다.”
주인장의 눈가에 시퍼런 살의가 스쳐지나갔다.
“좋아. 끝까지 대답하지 않겠다면 마음대로 해라. 대신 이 도시에서 살아돌아갈 생각은....”
“음한지공을 익혔군. 빙궁 출신인가?”
“...!”
“그런 살기를 흘리는 주제에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주장하진 않겠지?”
주인장은 상당한 고수였다.
설마 저간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들른 주루에 빙궁 출신의 고수가 있을 거라 누가 알았을까.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죽엽청을 홀짝인 강엽이 석상처럼 굳어진 주인장을 향해 말했다.
“국가 간의 무역은 금하고 있으니 밀무역일 테고, 머나먼 북해에 상행을 보낼 수 있는 건 대상단밖에 없지. 산서의 진상(晋商) 중에서도 규모가 큰... 이를테면 태행상단(太行商團)이 있겠군.”
사천의 천금상단, 섬서의 장안대상회와 어깨를 견줄 만한 산서의 대상단.
너무 외진 곳에 있어 하오문조차 분타를 두지 않은 도시였지만 대륙과 교류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그들과 빙궁 사이의 중개인....”
찰나 주인장이 한빙지기가 깃든 일장을 내쳤다.
하나 기습적으로 쏜 장력은 강엽의 머리에 닿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힘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흐읍!”
“진정해라. 그러다 이목을 사면 어쩌려고.”
그 말에 안쪽을 둘러본 주인장이 깜짝 놀랐다.
아무리 술과 약에 취했어도 그렇지, 소란이 일었는데 다들 이쪽은 쳐다도 안 보는 게 아닌가?
“맙소사, 기막으로 소리를 막은 건가?”
육안으론 볼 수 없는 무채색의 기막이 두 사람이 일으킨 소리를 차단했던 것이다.
가끔 이쪽을 힐끔거리는 눈길이 있었지만, 그들이 나눈 얘기는 새어나가지 않았다.
“미리 말하지 않은 건 사과하지. 나도 그쪽의 정체를 잘 몰라서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거든.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건 알지만, 나는 빙궁의 적이 아니야.”
아마 주인장은 강엽이 그를 떠보기 위해 여행객으로 위장한 광명마교의 첩자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정말로 그렇다면 광명마교는 빙궁이 대륙의 상인들과 교류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뜻이겠지.
‘빙궁은 광명마교에 완전히 굴종하지 않았어.’
어쩌면 상인들을 통해 하오문에 소식을 전했던 이는 눈앞의 주인장일 수도 있었다.
주인장의 반응과 돌아가는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한 강엽은 낭인전의 금패를 꺼냈다.
“이게 뭔지 알고 있지?”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