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46화 (340/450)

67화. 상흔 (3)

강엽은 약선을 찾아갔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부산스러웠던 그녀는 떠난다는 말을 듣고 눈을 껌뻑였다.

“언제 떠난다고?”

“내일 새벽에 출발할 겁니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

“갈 길이 바빠서 말입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며칠 전에 떠나야 했다.

그러나 마의와의 싸움, 이후에 이어진 광명마교와의 싸움으로 인해 시일을 허비했다.

“서희와 완안극은 남을 겁니다.”

“하긴 두 사람은 먼 여정을 떠날 만큼 회복되진 않았지. 자네만 기이하게 빨리 회복했어.”

“....”

약선이라면 강엽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정신을 잃었을 때 맥을 짚었을 테니까.

강엽의 안색이 낮게 가라앉자 약선이 쓰게 웃었다.

“자네의 체질은 음기에 치우쳐 있어. 정확히는 음이 칠, 양이 삼 정도지. 그 정도가 딱 좋아.”

“진기의 균형을 이루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여태까진 재능으로 균형을 유지했겠지만... 사실 지금도 아슬아슬해. 되도록 열양지기는 쓰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당묘정의 헌신 덕분에 살아남긴 했지만, 지금 강엽의 육신은 누더기로 만든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다.

심흔을 치유한 것과 별개로, 한번 균형이 깨진 이상 언제고 다시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겠지.

엽초를 입에 문 약선이 손가락을 튕겨 삼매진화의 불꽃을 일으키며 연기를 빨아들였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언젠가는 균형이 무너질 날이 올 거야. 기운은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튀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말하면 미안하지만, 자네 몸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화탄이나 다름없어.”

“...방법이 없겠습니까?”

“두 가지가 있지.”

약선이 손가락을 펴들었다.

“좀 더 안전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아닌 방법,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더럽게 위험한 방법.”

“둘 다 듣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말했다.

“전자는 음기를 연마해 균형을 이루는 방법이지. 그리고 후자는... 음양의 진기를 하나로 합일시켜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이야.”

당연하지만 후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아무리 강엽이 재생력이 있다지만 몸이 완전히 산산조각나도 재생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딱히 새삼스럽지는 않군.’

이미 심상세계에서 진조에게 대강 방법을 들었으니까.

다만 진조는 철저히 음으로 치우친 반면, 강엽은 일월성신의 영성을 각성하여 열양지기를 손에 넣은 것이기에 변수가 많았다.

“한데 내일 아침에 출발하면... 맹주와 총군사는 만나지 않을 건가?”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맹주와 제갈의현은 성수장에 없다. 잠시 들르긴 했지만 무인들과 진법가들을 이끌고 모용세가로 돌아갔다.

광명마교가 만든 석탑을 조사하고, 부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어렵겠지.’

외부에서는 어떤 수단을 써도 타격을 입힐 수 없다. 내부로 들어가는 것조차 막혔다.

무림맹에선 지반을 파서 석탑을 무너뜨리자는 의견도 나오는 듯했지만, 강엽이 보기엔 현실성이 없었다.

석탑을 보호하는 힘이 석탑의 주변을 아우르고 있기에 위해를 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

그런 식으로 무너뜨릴 수 있었다면 염왕이 물러나지도 않았겠지.

“그 난리통에서 그런 걸 어떻게 세운 걸까....”

약선이 연기를 훅 뿜어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석탑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강엽은 그녀가 말하는 대상이 그게 아님을 직감하고 물었다.

“아직도 마의가 신경 쓰이십니까?”

“흠, 뭐라고 해야 하나.”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분명히 그때 죽었는데, 왠지 그 인간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단 말이지. 자그마치 백 년이나 질기게 연명한 작자인데....”

제아무리 마의라 한들 육신이 동강이 났는데 살아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강엽은 방문좌도의 술로 죽음을 피하는 적들을 수없이 봤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마의가 죽었으면 된 거고, 죽지 않았다면 다시 한번 죽이면 그만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강엽은 더 이상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었다.

“아, 그래. 이걸 가져가라.”

“이게 뭡니까?”

“소혼단(甦魂丹). 생사단만은 못해도 경혈을 다스리고 생기를 불어넣지. 생사단을 연구한 장주들이 그 효과를 따라가기 위해 만든 약이다.”

옛 장주들이 생사단을 모방하기 위해 대를 이어가며 만들어낸 비약.

생사단에 미치지는 못해도 인륜을 지키는 선에서 만들어낸 최선의 결과물이었다.

“심흔을 치유하진 못하겠지만... 심한 내상을 입은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요상약이 없지. 자네 일행도 소혼단을 복용하고 차도를 봤어.”

“잘 쓰겠습니다.”

대환단이 있다지만 혹시 모르는 법. 강엽은 약선이 준 목함을 따로 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동이 트기 전에 성수장을 빠져나가 입도공월의 문을 열었다.

* * *

“기분이 어떤가?”

환한 빛이 내리쬐는 하얀 전당.

뒷짐을 진 광명마교주는 빛을 받아 하얗게 부서지는 듯한 옥색의 못을 들여다보았다.

무쇠처럼 단단한 근육이 박힌 강건한 청년이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빠져 있었다.

“...나쁘진 않군.”

눈을 반개한 채 대답한 청년.

일순간 동공 주변의 홍채가 노랗게 변한 청년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면서 관절을 풀었다.

“죽다 살아났는데 불만을 품으면 안 되겠지. 그간 쌓은 무공을 잃은 건 아깝지만....”

“그땐 정말로 자네를 잃은 줄 알았지. 하필이면 심검에 베이는 바람에 의심도 못했어.”

모든 사도는 죽으면 몽상정토로 향하나, 심검이나 심상절예에 당한 이들은 예외였다.

그 증거로 강엽의 마신상에 죽은 사사도는 몽상정토에 오지 못했다.

“그래도 설마 분혼대법으로 혼백을 나눌 줄이야. 칠사도가 하던 걸 자네가 할 줄은 몰랐네.”

“유비무환이라 했지. 상대가 상대인 만큼 나도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십할 성공을 장담할 순 없었지. 솔직히 시운이 따랐다.”

“그래서 무공은 언제 되찾을 수 있겠나?”

“몰래 보관해둔 시체들이 있다.”

“호오.”

“역대 흑룡교주들의 시신을 안장해둔 무덤이다. 흑룡교가 패망한 이후엔 버려졌지. 경맥을 닦는 대로 그쪽에 가서 사기를 흡수할 생각이다.”

“하면 얼마 안 걸리겠군.”

만족스럽게 웃은 광명마교주를 물끄러미 응시한 마의가 문득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나?”

“음?”

“불권을 죽여야 할 텐데?”

심검을 되찾으려면 불권의 숨이 끊겨야 한다.

가만히 둬도 얼마 못 버틴다지만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않은가?

“괜찮네. 심검이 없어도 심상법이 있으니까. 그리고 불권은 두어 달도 못 버틸 걸세.”

“그렇게 빨리 간다고?”

“그 늙은 승려가 품은 건 지난 천 년간 누적된 심상의 힘이지. 불권 본인도 자신의 명줄이 타들어가는 게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질 터.”

“으음....”

“오히려 잘 됐네. 심검이 불권의 심상을 장작 삼아 활활 타오를 테니까. 심검이 이 손에 돌아오는 날, 그 늙은 승려의 심상까지 손에 넣을 걸세.”

“화가 오히려 복이 됐다는 말인가....”

“그렇지.”

그렇게 환담을 나눌 때였다.

돌연 광명마교주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침음을 흘렸다.

“음....”

“왜 그러지?”

“복주의 지단이 무너졌네.”

“...!”

복건 무림의 터줏대감인 우문세가. 총단을 항주로 옮긴 이후 복건성은 우문세가를 통해 관리하고 있었다.

한데 그 우문세가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

“죽은 교도들의 혼백이 몽상정토에 들어왔네. 그들이 말하길 습격자들이 소림의 무공을 썼다는군. 다만 소림승으로 보이진 않는다고 했네.”

“누구지? 속가 문파 따위가 그런 짓을 했을 리는 없을 텐데?”

“그들이 돌아온 것 같군.”

“그들?”

“삼십 년 전 사라진 야차들. 혈교의 마수에 빠져 자기들끼리 자멸한 소림의 암검 말일세.”

광명마교주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어렸다.

“그 우두머리는 꽤나 야심가였지. 불권에게 사사했음에도 제 사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음지에 숨었어.”

“외소림의 수장이 살아있었다?”

“그간 숨죽이고 살았지. 제 사부가 천명이 다할 때가 되니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군.”

매끈한 턱선을 매만진 광명마교주. 그가 북풍한설처럼 싸늘한 경멸을 담아 중얼거렸다.

“제 사부의 자리를 노리는 탕아의 귀환이라....”

* * *

하나같이 철탑을 닮은 거구의 사나이들.

온몸에 덕지덕지 바른 피와 땀을 지울 생각도 없다는 듯 보무도 당당하게 백주대로를 활보한다.

창문과 골목 사이사이에서 쏟아지는 두려움 가득한 시선을 뒤로한 채 나아가는 모습.

“이교의 죄인들, 감히 본교의 영역을...!”

투앙!

하얀 도복을 입은 광명마교의 무인들이 보이지 않는 주먹에 맞은 것처럼 피를 쏟으며 날아갔다.

좌판을 부수고 곤두박질치는 이들.

다행히 요 앞 우문세가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상인들은 한참 전에 철수했는지라 좌판엔 아무것도 없었다.

“흠....”

“왜 그러느냐, 사제?”

더벅머리 중년인의 물음에 흉터를 누더기처럼 새긴 민머리 거한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나 숨은 자들 중에 마교에 협력한 놈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오. 분명히 광명마교에 귀의한 자들도 적잖이 있을 터인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린 말에 곳곳에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자 거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오체를 분시해야지. 어딜 할 게 없어서 마교 따위에 들어긴단 말이오?”

“...너무 그러지 마라. 마교도들이 칼 들고 협박하면 사람들이 무슨 힘이 있어 대항하겠느냐.”

“차라리 죽어야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마교도 따위에게 굴복해선 안 되지.”

흉터를 아로새긴 입매를 비틀면서 그리 말하자 무거운 살기가 거리를 잠식했다.

가까이 있던 자들은 목구멍이 막히는 기분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릴 지경.

중년인이 거한의 어깨를 잡았다.

“사제.”

“....”

민머리 거한의 눈이 유리알처럼 번들거렸지만 중년인은 놔주지 않았다.

그렇게 눈싸움이 계속되자 민머리 거한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능청맞게 굴었다.

“농담이우, 농담. 무서워서 농담도 못하겠구만.”

“조심해라. 우린 마교를 척결하러 세상에 나온 거다. 저들은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야.”

그때 두 사람이 가던 길목의 옆에서 쌍둥이처럼 닮은 텁석부리 거한들이 나타났다.

“아, 갈 사형과 초 사제. 여기 계셨구려. 탈출한 놈들은 잡았소?”

“지금까지 발견한 놈들은 모두 죽였수다, 사형들.”

민머리 거한의 말에 텁석부리 쌍둥이가 껄껄 웃었다.

“역시 초륜 사제야. 손속 확실하구만.”

그들은 사냥을 하고 있었다.

광활한 복주성을 사냥터 삼아 퇴로를 틀어막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마교도들을 척살하는 일.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얼추 일이 마무리되자 흩어졌던 이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두려움에 질린 관병들의 시선조차 개의치 않고 짙은 피비린내를 풍긴 그들은 성문을 빠져나가 동쪽의 고산(鼓山)으로 향했다.

복주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산봉우리에 거칠게 기른 머리를 휘날리는 황삼 사내가 있었다.

“우리 돌아왔소, 대사형.”

구릿빛 근육질의 중년인.

가볍게 고갯짓을 한 그가 말했다.

“수고했다, 사제들.”

“별로 어렵지도 않았소. 사도가 있었으면 했는데....”

텁석부리 쌍둥이가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셨다.

우문세가의 가주라는 자는 그들의 일초도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

“듣자하니 우문세가를 광명마교에 팔아넘긴 놈팡이는 원래 낭인전 소속인데, 같은 낭인전의 금패급에게 시비를 걸다 뒈졌다고 하더구려. 그 뭐시냐, 별호가....”

“귀영이라고 했었지.”

더벅머리 사내의 말에 텁석부리 쌍둥이 중 맏형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 그래! 귀영! 꽤 유명한 놈이라고 하더이다!”

“제가 정보를 좀 모아왔습니다. 낭인전의 금패급에, 일각에선 낭왕의 후계자라고 부릅니다. 귀주에선 무림맹의 무인들을 구했고, 한중에선 혈교도들을 쓸어버렸습니다. 또 하남의 무림맹에서도 광명마교주와 싸울 때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하더군요. 광명마교의 오사도도 그의 손에 죽었다는 모양입니다.”

“이야, 그만하면 대단한데...!”

거한들의 얼굴에 경탄이 어리고, 일부는 호승심을 드러내며 저들끼리 귀영의 무위를 추정했다.

그때 대사형이라는 중년인이 말을 가로챘다.

“천하팔존 수준일 거다.”

“엥? 그놈이 말이오?”

“나도 나름대로 알아봤다. 운남에서 사대악인 둘을 죽였다고 하더군. 금마와 모산혈조 말이다.”

“음...!”

“그 뒤의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또 어디서 뭘 할지 모르지.”

“허, 대사형의 말씀대로라면 물건은 물건이구만.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궁금해지는구려.”

중년인은 대답 대신 싱긋 웃자 입술을 가로지른 흉터가 살벌하게 꿈틀거렸다.

“언젠가 만날 기회가 있겠지.”

“그래서 이젠 어디로 갑니까? 마교놈들 소굴에 쳐들어가는 게요?”

“아니, 항주로 바로 쳐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다. 일단 대륙을 돌아다니며 우리가 돌아왔음을 강호에 알리고, 흩어진 형제들을 규합해야지. 그 뒤엔....”

말끝을 흐리며 몸을 돌린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면서 시뻘겋게 타오르는 서녘을 똑바로 바라본 그가 무겁게 중얼거렸다.

“우릴 내친 소림을 점령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