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상흔 (2)
은유적으로 강엽의 연원을 물어보는 질문.
가문이나 사문 등 피상적인 것을 넘어, 그가 어떤 생각으로 마교와 싸우고 있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사마외도의 기운을 풍기는 자가 어떤 곡절을 겪었기에 마교와 대적하는 건지.
강엽의 지인들 중에선 백서희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진실.
‘문제는 이들의 약속이 얼마나 효과적이냐는 건데....’
설령 두 사람이 약속을 지킨다 해도, 피를 마시는 괴물임이 알려지면 백도 무림이 자신을 받아들일까.
당장은 절대고수가 부족하니 쉬쉬할지 몰라도, 언제까지나 그럴지는 알 수 없는 노릇.
‘...그렇군.’
먼 훗날 언젠가는 백도 무림과 결별할 수도 있다.
애초에 강엽 자신이 백도 무림의 인물도 아니거니와, 딱히 소속감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두 마교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과 얽혔고, 공공의 적을 격멸하기 위해 손을 잡았을 뿐.
정마대전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그 뒤에도 함께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무작정 거짓말을 하는 건 하책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 말하는 것도 상책은 아니겠지.’
강엽은 두 사람을 덮어놓고 신뢰하지 않았다.
두 장문인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은 존경스럽지만, 흡혈귀에 대해 말해서 약점을 노출할 생각은 없는 바.
여기선 적당히 넘어가는 게 최선이리라.
“제가 왜 마교와 대적하냐고 하문하셨지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두 장문인과 차례로 시선을 나누면서 천천히 입을 놀렸다.
“송구하나 사문이 그들과 악연으로 얽혔다는 것 외엔 달리 드릴 말씀이 없군요. 직접적인 원한은 없지만, 먼 옛날의 악연으로 그들이 저를 죽이려 드니 살기 위해 맞서는 것뿐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무림에 나서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조용히 살았겠지요.”
그 이상은 사문의 내밀한 사정이니 알려줄 수 없다.
그런 의미를 담아 완곡하게 거절하자 검선이 가슴께까지 이어지는 수염을 쓸며 불권을 슬쩍 돌아보았다.
강엽을 지긋이 바라본 불권이 사이를 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주의 이야기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는군.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네.”
속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으면서도 투명한 눈길.
강엽은 오래된 고승이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생각해보면 전강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었지.’
예전에 흑룡교의 비밀 분타에서 전강도 타인의 마음을 막연하게 느낄 수 있는 신통력을 부리지 않았던가.
전강이 그럴진대 소림 무맥의 최고봉에 오른 불권이라면 두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민감한 질문을 해서 미안하이. 시주는....”
말을 잇다 말고 염불을 읊조리는 불권이었다.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불리하지 않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검선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소림 방장께서 얼추 용무를 끝내신 것 같으니 빈도의 용건을 말해야겠구먼.”
그가 품에서 목함을 꺼내 내밀었다.
“태청단(太淸丹)일세.”
“...!”
그 말엔 강엽도 깜짝 놀랐다.
소림의 대환단, 화산의 자하단과 더불어 백도 무림을 대표하는 영단이 아닌가?
“이번에 본산의 제자들이 가져왔지. 세간엔 내공을 증진하는 효과가 뛰어나다 알려졌지만, 실은 구명에 더욱 효과적인 비약이라네. 자네에게도 제법 큰 도움이 될 게야.”
“...이런 걸 주셔도 됩니까?”
태청단 같은 절세영단은 무당에서도 귀할 것이다.
제자들이 사문의 존장을 살리기 위해 가져온 것을 문파의 외인에게 덜컥 내주다니?
“껄껄, 자네는 본산의 무맥을 살렸네. 빈도뿐만 아니라 빈도의 제자와 그 제자까지 살리지 않았나? 마땅히 보답을 해야지.”
현운 도장과 청수, 두 사람은 무당 무맥의 전수자.
암만 무당에 기재들이 많다 해도 무당의 현재와 미래로 점지되는 두 사람을 잃었다면 타격이 컸을 것이다.
“과한 선물을 주시는군요.”
“자네가 복용해도 되겠지만, 지인에게 주는 것도 좋을 걸세. 태청단은 모든 진기와 두루 어울리니 누가 복용해도 효과를 볼 것이야.”
강엽은 그 말에 멈칫했다. 태청단을 받은 순간부터 불현듯 어떤 가능성이 뇌리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혹시 태청단이 심흔도 치유해줍니까?”
“심흔을...?”
고개를 살짝 기울인 검선이 고민하는 기색에 빠졌다.
“...솔직히 잘 모르겠군. 심흔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기도 하고... 조사들께서 남기신 기록에도 태청단으로 심흔을 치유했다는 구절은 없었네.”
기실 심상지경에 오른 이들은 무당의 긴 역사를 통틀어봐도 손에 꼽힐 만큼 희귀한 존재.
당금 무림에 유난히 심상지경에 오른 이들이 많을 뿐, 본래는 한 시대에 많아봤자 한두 명이었다.
그때 불권이 물었다.
“무량수불, 혹여 지인이 심흔으로 고통받는가?”
“....”
낭왕이 죽을 곤경에 처했다는 말을 해야 할까.
강엽이 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불권이 소맷자락에서 무언가를 꺼내 태청단의 옆에 내려놨다.
“대환단일세.”
“예?”
“노납 역시 신세를 졌네. 시주가 그때 오지 않았다면 광명마교주의 손짓에 골통이 깨졌겠지.”
천신만고 끝에 광명마교주의 심검을 봉인하긴 했으나 광명마교주 본인은 건재했다.
만약 그때 강엽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심검을 봉인한 게 무색하게도 광명마교주의 손가락에 심장이 뚫려 하직했을 것이다.
“태청단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환단에 대해선 확실히 말해줄 수 있네. 본사의 장경각에 대환단으로 심흔을 치유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그 말에 검선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강엽도 할 말을 잃고 아연해할 때 불권의 목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물론 심흔이 너무 깊다면 한계가 있을 걸세. 가령 광명마교주가 남긴 심흔이라면... 대환단으로도 완치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하겠군.”
“그만하면 충분합니다.”
“노납의 작은 머리로 헤아리건대 아마 태청단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걸세. 천지의 자연지기가 농축됐으니 능히 심흔을 다독일 수 있을 게야. 그래도 심흔은 대환단으로 치유하고, 태청단은 공력 증진에 쓰시게.”
불권이라면 강엽의 내공이 음기에 치우쳤다는 것쯤은 진작에 알아봤으리라.
그렇기에 체질을 덜 타는 태청단을 복용하고, 대환단은 사람을 살리는 데 쓰라고 조언한 것.
‘태청단은 서희에게 줘야겠군.’
강엽은 일전의 싸움에서 사사도와 육사도의 피를 흡수하여 선천지기가 넘쳐흘렀다.
당장 세맥과 낙맥에 흩어진 선천지기도 수습하지 못했는데 태청단을 먹는 것은 과욕이었다.
백서희도 이번 일로 심신이 축났으니 태청단을 복용한다면 훨씬 빨리 병을 털고 일어나겠지.
“두 분이 주신 영단은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실 텐가?”
“일이 있어 북해로 가야 합니다.”
“...거기까지?”
“무림맹과도 관련이 있는 일입니다.”
“그렇군. 어떤 일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건승하시게. 시주라면 잘 해낼 게야.”
“예, 그럼 강녕하십시오.”
강엽이 포권지례를 하고 물러나자 두 사람은 불호와 도호를 읊으면서 인사를 받았다.
이윽고 강엽의 기척이 죽림을 빠져나갔을 무렵.
“...말씀하시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검선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의문했다.
반면 불권은 가부좌를 틀고 수중의 염주를 매만질 뿐.
“빈도가 함부로 참견할 일이 아님을 압니다. 하나 저 친구라면 ‘그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사필귀정이라 하지 않습니까.”
자연스레 검선이 입을 다물고, 불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늦든 빠르든 언젠가 닥칠 일. 그렇지만 순리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돌고 돌아 태극이라. 성한 것은 쇠하는 법이고, 쇠하는 법이 성하는 법이니....”
현기 어린 답변을 주고받는 두 절세기인의 모습.
때마침 대나무잎을 스치고 들어온 살바람이 그들의 옷깃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그보다 간만에 만났는데 바둑이나 두지 않으시렵니까? 저번엔 노납이 이긴 것 같았는데....”
“허허, 무슨 말을 하시는 겝니까. 분명히 빈도가 이겼습니다. 십전 육승 사패였지요.”
“노납의 기억과 살짝 다릅니다만...?”
“아이들에게 일러 바둑판이나 가져오겠습니다. 이번엔 무르기 없기입니다.”
“그러면 내기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일전에 염왕께서 천산의 곡주를 가져오셨습니다. 일월마교의 마두들이 마시는 걸 강탈했다고 하셨지요. 과연 그 맛이 천하일품이었습니다.”
“하면 빈도는 소요곡 아래 묻어둔 곡주를 걸어야겠군요. 참고로 빈도가 직접 빚은 술입니다.”
“장문인께서 빚으셨다니 군침이 싹 돕니다, 껄껄.”
“허허허.”
웃는 얼굴 뒤로 치열하게 수싸움을 한 두 사람은 제자들이 가져온 바둑판 위에서 승부에 몰두했다.
몰려오는 장강의 뒷물결에 미래를 맡긴 노인들의 소일거리였다.
* * *
‘결국 외소림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군.’
불권이 하후진에게 넌지시 언급한 소림의 미래.
죽림에서 불권을 만났을 때 그에 대해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불권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랑 얘기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건지, 검선이 있어서 말을 아낀 건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후자라면 언제 다시 찾아오라고 말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이건 강엽이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불권이 흉중에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는 몰라도, 저쪽에서 말하지 않는데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다.
‘외소림이라....’
불권을 대신해서 혈교와 싸운 소림의 암검.
작금의 시대에선 그 존재가 유명무실해졌기에 그들이 어떤 비사를 겪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진 자신과 접점이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만약 강호의 전면에 나타난다면....
‘지금은 더 급한 일이 많아.’
당장 그의 앞날이 구만리였다. 북해로 가서 낭왕을 구하는 것도 굉장히 시급한 문제였다.
그 길로 거처로 돌아간 강엽은 백서희를 찾아가서 목함을 건넸다.
“엥? 이게 뭐야?”
“태청단.”
“뭐, 뭐!?”
뜨악한 그녀에게 강엽은 두 장문인을 만난 일을 들려주면서 영단의 출처를 밝혔다.
“복용하면 더 빨리 나을 거야.”
“으, 으음.”
뺨을 긁적인 백서희가 객쩍게 웃었다.
“...고마워.”
물론 태청단을 복용한다고 하루 아침에 싹 낫지는 않을 것이다. 사기가 해소됐다고 해도 예전으로 돌아가려면 한동안 정양해야 하리라.
강엽이 뜸을 들이며 말했다.
“실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중요한 거야?”
“북해엔 나 혼자 가려고.”
백서희뿐 아니라 완안극도 몸이 축났다.
사로잡혔을 때 마의가 완안극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대량의 사기를 주입했기 때문. 현운 도장만큼이나 심각했는데 흡혈귀라서 버틴 것이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물론 그쪽에도 광명마교가 있겠지만....”
사사도가 그의 손에 죽은 마당.
팔사도가 광명마교의 교군을 이끌고 있겠지만, 그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낯빛이 어두워진 백서희의 뺨을 만지며 강엽이 쓴웃음을 흘렸다.
“오해하지는 말고. 내가 없는 동안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니까.”
“그게 뭔데?”
“산서에 계신 스승님을 찾아가 줘.”
강호 전역이 전란을 겪고 있었다.
아직은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지만 산서에도 마교의 암수가 닿았을지 모르는 일.
“원래는 내가 가야 하지만, 지금은 몸을 뺄 상황이 아니야. 그렇다고 무림맹에 부탁하는 것도 안 될 일이지.”
강엽이 지금껏 활동하지 않았던 산서땅의 서원에 관심을 가지면 무림맹은 의혹을 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가면 과거가 알려질 수 있어. 최악의 경우엔 혈교나 광명마교가 진실을 알고 서원 사람들을 인질로 잡을지도 모르고.”
“으음... 그, 그건 큰일이네!”
“믿고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어.”
백서희 혼자만 두는 건 좀 불안하지만 완안극이 함께 간다면 크게 걱정할 일은 없지 않을까?
머뭇거리는 백서희를 끌어안으며 이마를 맞댔다.
“부탁한다.”
“...쳇, 그렇게 말하면 거절할 수 없잖아.”
“나중에 스승님께 납채를 부탁하려면 미리 눈도장 좀 찍어둬야지.”
“크, 크흠!”
애써 의연한 척 헛기침을 했지만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까진 막지 못하는 백서희였다.
강엽은 내친김에 자성검까지 꺼냈다.
“어? 이건 왜...?”
“어차피 당분간 자성검법은 못 쓰니까.”
스스로 괜찮다고 확신할 때까지는 자제할 생각. 자성검법 외에도 다른 검법들을 두루 익혔으나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자성검을 들고 있어봤자 빛 좋은 개살구였다.
“마의랑 싸울 때 검을 잃어버렸다며. 나 돌아올 때까지는 쓰고 있어.”
원래 그녀가 쓴 검과 비교하면 길었지만, 사일검법을 주력으로 쓴다면 쌍검보다 훨씬 낫겠지.
“암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까.”
웃으며 하는 말에 백서희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