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상흔 (1)
호리병처럼 좌우폭이 좁은 골짜기.
가파른 산길과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인해 협소한 길목엔 수백 명의 시체가 마구잡이로 쓰러져 있었다.
통일된 무복을 입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낭인처럼 입은 자들도 뒤섞인 채 핏덩이를 게워낸다.
까악-!
하늘에선 만찬을 예감한 까마귀들이 날개를 퍼덕이면서 시신들을 주시했다.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살벌한 기세를 드러낸 무인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
“축하드립니다, 누님.”
호위단주 조영빈이 고개를 조아렸다.
조영옥이 문주로 취임하면서 그는 정식으로 태화문의 편제로 들어갔다. 조영옥 개인의 호위로 따라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출세였다.
조영옥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뺨과 이마는 길게 베여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후우....”
호흡 몇 번에 씻은 듯이 아물었으니까.
요선을 죽이고 그 영성을 흡수한 뒤 조영옥은 재생력과 금호요안을 쓸 수 있게 됐다.
축기량 역시 비약적으로 상승한 덕에 혈풍신군을 일대일 맞대결로 잡는 데 성공했다.
꼬리처럼 살랑거리는 시커먼 강기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이들이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혈풍신군과 혈교의 무리를 잡기 위해 천라지망을 짠 사천의 무림인들. 정사를 초월해 손을 잡은 이들은 이순간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당문주, 암독쌍절 당천경도 마찬가지였다.
‘태화문은 앞으로도 건재하겠군.’
사천삼패 역시 막대한 전력을 잃었으나 내홍을 겪은 태화문은 문파의 힘이 거덜난 신세.
자칫하면 사천의 흑도들이 이를 드러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조영옥은 멋지게 난관을 돌파했다.
홀로 혈풍신군을 잡은 것을 만인이 목도했으니 사천 무림 전역에 소문이 퍼져나갈 터.
태화문의 몰락을 점쳤던 산하 방파들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까.
당천경이 속으로 생각하는 그때 머리 위에서 산바람이 불어왔다.
차작!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인영.
먼 거리를 날아온 중년인이 착지의 반동을 발경으로 넓게 퍼뜨리면서 균형을 잡았다.
“가셨던 일은 잘 되었습니까?”
“쉬운 놈은 아니더구려.”
마뜩찮은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은 신유가 큼지막한 머리를 내밀었다.
혀를 빼물고 죽은 거한의 수급이었다.
“구파의 장문인들을 막은 놈이라고 하더니 명불허전이었소. 혈안사군 고년보다 훨씬 고강하더군.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고생하셨습니다.”
당천경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혈풍신군을 잡기 위해 펼친 천라지망이 외부의 개입으로 한차례 흐트러졌을 땐 얼마나 놀랐던가.
지난날 화산과 공동의 장문인들을 막은 혈진대군이라는 거한이 동료를 구하기 위해 난입한 것이다.
“선배님이 아니었다면 낭패를 봤을 겁니다.”
조영옥이 혈풍신군을 상대하는 사이 신유가 혈진대군을 쫓았고, 기어이 죽이는 데 성공했다.
짙은 피로감에 사로잡힌 가운데서도 신유는 쾌활하게 웃었다.
“나 혼자 한 것도 아니잖소? 전강과 하후진, 두 젊은이의 공이 컸지. 그 친구들이 교성들을 잡아두지 않았다면 내가 당했을 거요.”
전강이 젊은이라 불릴 나이는 아닐 텐데....
쓴웃음을 삼킨 당천경이 말했다.
“이제야 겨우 사천의 혈교 세력을 일소했군요.”
“놈들도 당분간은 경동하지 못할 거요.”
잔존 세력이야 있겠지만 사천에서만 팔대교왕의 절반이 죽었다. 운남에서 죽은 자들까지 합치면 무려 여섯 명이 죽어나간 상황.
가히 일인군단으로 군림했던 팔대교왕과 휘하의 초고수들이 우후죽순 죽었으니 혈교의 상층부도 당혹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때 조영옥이 다가왔다.
“이자가 혈진대군인가요?”
“그렇소. 어찌나 단단한지 금강불괴가 따로 없었지. 그래도 싸운 보람은 있었소.”
“보람이요?”
조영옥과 당천경이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신유가 넉살 좋게 웃었다.
“술자리에서 자랑할 거리가 생기지 않았소? 팔대교왕을 격살한 건 십 년은 우려먹을 안줏거리외다.”
호사가가 입담을 뽐내듯 말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긴 하지만 신유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온 천하를 주유하며 가인들과 풍류를 읊고, 때론 호사가로 위장하여 재치 있게 만담을 풀며 사람들과 웃고 울고 노래하는 풍운아.
“조 문주께서도 혈풍신군을 쓰러트리셨으니 사천을 넘어 온 강호가 경동할 것이오.”
“저는 마무리만 지었죠. 아미파 장문인께서 내상을 입혀두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아미파 장문인은 천라지망에 참여하지 않았다.
얼마 전 혈풍신군과의 싸움에서 극심한 내상을 입고 본산으로 물러나서 정양하는 중이었다.
그 싸움에서 그녀 또한 혈풍신군의 내장을 진탕시켰으니 무작정 패했다고 할 순 없겠지만....
‘강호는 승자만 기억하지.’
결과적으로 아미파 장문인은 체면을 구겼고, 조영옥은 전공을 올리고 명성을 드높였다.
아미파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스스로를 낮추긴 했지만,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머지않아 흑도 출신의 팔존이 나올지도 모르겠군.’
이미 사도십대고수의 무위를 갖춘 조영옥이다.
강엽을 제외하면 이토록 빨리 성장한 예는 두 사람의 넓은 식견을 통틀어봐도 전무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내심 앞으로의 강호를 내다보며 있을 때, 조영옥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났다.
약지에 낀 반지를 매만지는 그녀의 입가엔 뿌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 * *
[...그렇게 된 거예요.]
“그렇군. 몸은 괜찮소?”
[그럼요. 오히려 너무 멀쩡한데요. 아,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한데....]
“문제?”
심각한 목소리로 묻자 장난기 어린 질문이 돌아왔다.
[가신들이 빨리 혼인하라고 성화인데 어쩌죠?]
“쿨럭.”
사레 들려서 기침을 내뱉자 저편에서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웃음이 가신 뒤에 이어지는 것은 토라진 것처럼 새침한 목소리였다.
[저와 혼인하는 게 싫은 건 아니죠?]
“...설마.”
물론 혼인을 한다고 해도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해치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민가의 혼인도 인륜지대사라고 해서 납채니 뭐니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물며 조영옥은 사천삼패와 어깨를 견주는 대문파의 수장이다.
[물론 지금 당장 하자는 건 아니에요. 아직은 전쟁 중이기도 하고... 백 동생 의견도 들어야 하잖아요.]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할 말이 있는데.”
강엽은 호광성에서 일어난 일을 전했다.
한동안 강엽의 말을 경청하기만 한 조영옥은 이윽고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탄식했다.
[그런 일이... 사천보다 심각하랴 싶었는데 더 심하면 심했지 못하진 않네요.]
“호광성은 한동안 혼란스러울 거요.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성의 경계를 넘어갈지도 모르겠소.”
[염두에 둘게요. 근데 당신은 괜찮아요?]
“나야 뭐....”
강엽은 거기까지 말하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당문주님은 잘 계시는지 궁금해서. 상의할 일이 좀....”
아니, 이게 아닌데. 강엽은 문득 이게 뭐하는 짓인가 회의감이 들었다. 당묘정과의 일을 조영옥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도 뭔가 그렇지 않은가?
[할 말이 있다면 제가 대신 전해도 되는데요?]
“...일단 여기서 일어난 일을 상세히 전해주시오. 그럼 당문주님이 알아서 판단하실 테니까.”
[그럴게요. 그리고 바쁜 건 알지만 종종 연통해요. 목소리 들으니까 정말 좋네.]
“얼마든지.”
법구의 한계로 인해 매일은 힘들어도, 가끔씩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안부를 묻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상념을 정리하며 몸을 돌리는데, 마침 이쪽으로 오는 당묘정과 눈이 마주쳤다.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모습에 강엽은 왠지 입맛이 썼다.
“모용세가 쪽에 들르는 길이오?”
“아, 네.”
모용세가의 장원은 폐허가 됐기 때문에 무림맹은 성수장이 있는 악양에 돌아왔다.
지금은 성수장에서 부상자들을 돌봤는데, 모용세가는 워낙 부상자들이 많아서 따로 구역을 할당받고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당묘정은 탕약을 전하기 위해 약당을 잠시 빠져나온 것이다.
“좀 쉬는 게 좋지 않소?”
모용세가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약선과 당묘정은 쉴 수 없었다. 의원인 그녀들에게는 부상자들이 있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전장이었다.
당묘정이 뺨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음, 괜찮아요. 다른 의원들도 열심히 일하고 있고, 교대로 틈틈이 쉬고 있거든요.”
“별로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눈밑이 거뭇한 게 며칠째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참, 소식 들으셨어요? 제갈 소가주를 찾았대요.”
“오늘 아침에 들었소.”
화제를 어물쩍 넘기려는 의도가 보였지만 강엽은 모르는 척 넘어갔다. 쉬라고 강권을 해봤자 결국 잔소리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날 살리기 위해 희생했다지.”
“제갈 소가주는 반대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강 무사가 없었으면 그날 우린 마의에게 전부 죽었을 거예요.”
설령 죽지 않았더라도 끌려가서 그가 벌이는 인신공양의 희생양이 되었을 터.
강엽이 제때 오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지 상상하면 온몸의 피가 싸늘히 마르는 것 같았다.
“그 친구가 정신을 차리는 대로 찾아갈 생각이오. 안 된다면 전언이라도 남겨야겠지.”
“후후, 제갈 소가주가 기뻐하겠네요.”
“소저에게도 빚을 졌소.”
“....”
당묘정은 웃는 그대로 굳어졌다.
잠시 사이를 두고 몇 번이나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쓰디쓴 감정을 웃음 속에 흘려버렸다.
“...잊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본문의 여인과 혼인하면 데릴사위로 들어가야 해요. 강 무사님은 당문의 데릴사위로 사실 생각이세요? 백 소저는 어쩌고요?”
“예외는 없소?”
강엽도 당문의 가풍에 대해선 대강 알고 있었다. 내부적으로 똘똘 뭉치는 만큼 외부엔 폐쇄적인 가문.
당문의 여인과 혼인하는 사내는 데릴사위로 들어가야 하며, 성도 당씨로 바꿔야 한다. 당연히 평생 당문을 위해서만 살아야 했다.
“제가 아는 한은요. 그리고 제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셔서 억지로 책임을 떠안으실 필요는 없어요. 당시엔 저밖에 치료를 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요.”
다소 쌀쌀맞은 말에 강엽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애써 냉정히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건 치료였어요.”
그러니 그 이상의 감정은 갖지 말라는 의미.
강엽은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당묘정은 들을 생각도 없는 듯 걸음이 빨라졌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하지만 그녀는 얼마 못 가고 멈춰야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강 도우가 맞으신지요?”
태극의 문양이 그려진 푸른 도복. 허리춤에 송문고검을 찬 무당의 도사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함께 온 당묘정을 알아보고 도호를 읊었다.
“원시천존, 당 도우도 계셨군요.”
“날 기다렸던 거요?”
강엽을 지목한 데다 바로 앞엔 거처까지 있었다.
“그렇습니다. 백씨 성을 지닌 분께서 강 도우께서 잠시 나가셨다고 하셔서....”
“안에서 기다리시지 않고.”
“아닙니다. 실은 강 도우를 모셔가려고 온 거라서 말입니다. 혹시 바로 가실 수 있겠습니까?”
당묘정을 곁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눈인사를 건네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바로 갈 수야 있는데 무슨 일이오?”
“장문인께서 강 도우를 찾으십니다.”
“검선께서?”
마의와의 싸움에서 빈틈을 만들어주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던 검선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의의 심상절예를 붙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기면서, 강엽이 마의를 벨 수 있도록 돕지 않았던가?
튕겨진 심상절예를 비껴낸 덕에 귀천하진 않았으나, 억지로 심상을 쥐어짠 탓에 한계에 다다랐다.
기실 당장 귀천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었다.
“...어디 계시오?”
* * *
대나무가 우거진 죽림.
성수장 안쪽엔 조성된 한갓진 대나무숲이 있었는데, 그곳에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과 무당.
백도 무림을 대표하는 구파의 종사들이 너럭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강엽을 맞이했다.
겉모습은 지극히 평온한 신색이었으나, 강엽은 그들에게 주어진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직감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검선이었다.
“몸은 좀 어떠신가?”
“염려해주신 덕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허허, 역시 젊은 게 최고구먼.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뼈가 부러지면 잘 낫지도 않는다네.”
절대고수인 불권과 검선이 그럴 리가 있나.
다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목숨을 불태우면서 싸웠기에 예전 같은 힘은 남아있지 않은 상황.
그런 가운데 불권이 백미에 가려진 눈가를 들어올려 강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그러고 보니 불권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검선과는 그나마 짧게라도 인사를 나누었지만, 불권과는 인사 한마디 나눈 적이 없는 상태.
그제야 강엽이 포권을 쥐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무림 말학 강엽이 인사드립니다.”
“...시주께선.”
짧게 운을 뗀 불권이 심유한 눈빛을 내비쳤다.
비록 자의에 의해서라고 하나 무공을 잃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묵직한 존재감.
검선 역시 반가워하던 낯빛을 수습하고 한결 진지해진 얼굴로 불권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어째서 마교와 싸우시는 겐가?”
“...대답하기에 앞서, 어떤 연유로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강엽이 익힌 내공이 사마외도에 근원을 두었음을 모를 두 사람이 아니다. 괜히 알량한 거짓말을 해봤자 되레 오해만 깊어질 뿐.
불권은 차분하게 반문했다.
“옛부터 비인부전이라 했지. 하나 인(人)과 비인(非人)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이 다가오는 고승의 혜안. 주름이 흘러내리고, 검버섯이 피어났음에도 오래된 승려의 눈빛은 나름대로 힘을 품고 있었다.
“정과 마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사람의 본질은 천성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에 있는가? 시주의 심상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
강엽이 품은 심상. 불권은 일전의 마신상이 그의 심상절예가 아님을 꿰뚫어본 것이다.
‘아니, 그걸 넘어....’
백도 무림의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거인들.
비록 일신의 무력을 잃었으나 여전히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이들이, 대답에 따라선 강엽이 사마외도임이 밝혀져도 비호해주겠다고 암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