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팔존 (2)
먼 곳에서 다가오는 존재감.
광명마교주가 자신의 기세를 숨기지 않고 한껏 드러내자 전장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다.
사람들은 말문이 막혔고, 망자들은 겁먹은 짐승처럼 납작 엎드린 채 오들오들 떨 뿐.
“이, 이게 대체....”
헤진 비단옷을 입은 중년인이 침음처럼 중얼거렸다.
모용세가의 가주인 안평검(安平劍) 모용풍.
정도십대고수에 꼽히진 못했으나, 팔가의 가주로서 그 이름을 강호 무림에 두루 떨친 검호였다.
바로 옆에선 태상가주이자 전대 정도십대고수인 비연검군(飛燕劍君) 모용도진이 주름진 눈가를 파르르 떨며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강호의 괴수들이구나.”
그는 심극의 경지에 오른 초고수.
지금이야 사기 때문에 골골거리면서 싸우는 신세지만, 본래의 무위였다면 사도와도 겨룰 만했다.
하지만 광명마교주가 강림한 지금.
그는 자신 역시 모래알갱이처럼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격이 다른 존재감에 전의마저 사그라든다.
“아직 안 끝났어요!”
뭇 무림 명숙들이 자리한 전장에서 독려하는 여인.
당묘정의 외침에 척마대원들과 모용세가의 무인들이 넋을 잃은 채 고개를 돌렸다.
희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면서도,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목소리를 힘껏 쥐어짜내고 있었다.
“우리가 포기하면... 그 사람이, 강 무사가 한 일은 뭐가 되는데요!”
“당 소저의 말씀이 옳습니다!”
남궁상아가 망자를 베며 동조했다.
“남궁가의 말예 남궁상아가 삼가 무림 동도들께 청합니다! 설사 우리 모두 죽더라도 끝까지 싸웁시다!”
그녀는 그렇게 외치면서 연가휘를 향해 씩 웃어보였고, 연가휘는 쓴웃음을 지으며 끄덕였다.
지난날 망자들에게 포위당해 삶을 포기했던 그녀가 이젠 무림맹의 동도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내게 무공을 가르쳐주신 분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무인이 침대에서 편히 죽는 것은 복락이나,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 것은 영광이라고.”
“하... 전직 마교도답지 않게 멋진 말을 지껄이는군.”
황보진악이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뚝을 몇 번 문지르다 주먹을 맞댔다.
“황보가의 사나이로 태어나서 겁먹을까 보냐. 상대가 마교주라도 기세로 질 순 없지! 당당하게 이기고 살아서 돌아가자고!”
“아까는 어버버거렸으면서.”
황보진악의 옆에 온 소창후가 땅에 떨어진 혈목을 주워 창처럼 잡았다.
“저 역시 복호승으로서 본분을 다할 겁니다. 사마외도의 무리 따위에게 질 순 없으니까요.”
“장문인께서 싸우고 계십니다. 저는 끝까지 장문인과 생사를 함께하겠습니다.”
청수 역시 부러진 혈목을 검처럼 쥐고 동료들과 함께 나란히 서서 망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르르르르르...!
광명마교주의 존재감에 숨을 죽였던 망자들이 적대감을 내비친다.
한 방 먹은 얼굴로 가만히 있던 모용세가의 무인들도 정신을 차리고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허허, 늙은이가 부끄럽구만.”
비연검군의 입매를 타고 쓰디쓴 자괴감이 번져나갔다.
젊은 혈기에 무모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작금의 상황에선 젊은이들이 옳았으니까.
오히려 앞서서 싸워야 할 그가 두려움에 움츠러들었으니 수치심을 느껴야 마땅할 터.
“그래, 여기서 물러날 데도 없지. 하물며 여긴 본가의 터전이다. 우리의 터전에서 마교도들 따위가 설치는 꼴을 볼 수는 없지 않겠느냐?”
“저흰 싸울 준비가 됐습니다.”
“아들아, 우린 죽을 각오로 싸우자꾸나. 우리가 죽더라도 소가주가 후사를 이어줄 것이다.”
모용세가의 소가주는 마의가 쳐들어올 당시 탈출했다.
혈족들과 함께 옥쇄하겠다고 한 것을 기절시키고 가신들에게 맡겨 강제로 내보냈던 것이다.
모용가주가 땅에 떨어진 혈목을 주워들며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
“아비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미안할 뿐이다. 하나 이 늙은이가 가문의 앞에서 싸우리라.”
그렇게 모두가 배수진을 친 각오로 몰려오는 망자들을 막을 때.
강엽은 광명마교주를 맞이하고 있었다.
* * *
“진조의 후예....”
을씨년스러운 바람 사이로 하얀 장삼자락을 나부끼는 사내.
그가 강엽과 백서희를 감싼 마신상을 보고 웃었다.
“그래, 진조도 거기 있는 것 같군. 자신의 의념을 심상에 투사해서 싸울 수 있는 분신을 만든 건가?”
[.......]
마신상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광명마교주가 강림한 여파로 혈라수가 제 기능을 못하면서 심법진까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심법진에서만 활동할 수 있는 여건상 혈라수가 무너지면 진조 역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
광명마교주 역시 그걸 아는지 심법진의 정경을 휙 돌아보며 딱하다는 듯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급하게 만든 심법진 같군. 강력하지만 빈틈이 많다. 자신에게도 제약을 건 것은 둘째치고, 저리 진축을 드러내서야... 상대에게 약점을 알려주는 꼴 아닌가?”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사도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저들을 맡을 테니 그대들은 무림맹의 패잔병들을 맡거라. 생사는 묻지 않겠다.”
[그러면 살려도 상관없겠군.]
마의가 급하게 끼어들자 일사도가 눈총을 주었지만 광명마교주는 흔쾌히 허가했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마의 자네가 힘써주었으니 그 정도 편의는 봐주겠네.”
선심 쓰는 듯한 태도에도 마의는 따지지 않았다. 한시가 급하다는 듯이 쫓기듯 사라질 따름.
그 모습을 곁눈질한 사사도가 입맛을 다셨다.
“쩝, 아쉽군요. 되도록 제 손으로 저놈 숨통을 끊어주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강엽을 한번 지긋이 노려본 사사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일사도가 부복했다.
“교주시여.”
“오사도의 혼백이라면 걱정 말거라. 그녀의 혼백은 육사도와 함께 몽상정토에 돌아왔느니라.”
광명마교주가 이사도의 육신을 통해 강림한 이유.
오사도와 육사도를 잃더라도 그녀들의 혼백을 수습해 자신의 사후세계로 인도하고자 급히 온 것이다.
“하해와 같은 자비에 감읍할 뿐입니다.”
“교도들의 충의에 마땅히 보답해야지. 너도 저들을 따라가서 한 손 보태거라.”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렇게 일사도까지 멀어지고 나자 광명마교주가 강엽의 품에 안긴 백서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설마 그 여자를 안고 본좌와 싸울 생각은 아닐 거라 믿는다.”
그 말에 강엽은 백서희를 바라보았다.
백서희 역시 강엽을 보고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냥 싱긋 웃고는 천천히 마신상에서 빠져나왔다.
때론 백마디 말보다 표정이 그 사람의 심정을 진실되게 말해주는 법. 이 순간 두 사람은 입을 움직이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진조의 후예, 저번엔 그냥 놓아줬지.”
애초에 구사도의 육신으로 본신의 무위를 발휘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에 싸움을 뒤로 미뤘다.
“지금은 그 결정을 후회한다. 천기를 엿보는 경지에 이르렀으나 정작 코앞에 닥친 미래를 보지 못했구나.”
구사도를 살리려고 강엽을 놓아준 결과 육사도가 죽었다. 기껏 살려낸 오사도 역시 분풀이만 하다 원한을 갚지 못하고 육신을 잃었다.
“하나 두 사람의 혼백이 몽상정토에 들어왔으니, 본좌의 힘은 더욱 강해진 바.”
쿠구구구구궁......!
공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대지가 흔들리고, 땅 깊숙이 박힌 혈라수의 뿌리가 요동친다.
당장 뿌리째 뽑힐 것 같은 격한 진동이었다.
‘지기(地氣)가...!’
혈라수는 강엽의 내공을 거의 소모하지 않는다. 구현할 때만 내공을 잡아먹고, 그 이후엔 땅의 지기를 빨아들여 심법진을 지탱한다.
하나 광명마교주는 자신의 기파로 대지를 붙잡아 혈라수를 흔들고 있었다.
“전에 이렇게 물었던가? 혈마를 죽인 다음엔 널 다음 표적으로 삼을 거냐고 말이다.”
광명마교주의 입가에 한기 어린 조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럴 생각이었다. 몽상정토의 힘이라면 불멸에 이른 마신조차 묻어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순서를 조금 바꿔도 상관없으리라.”
화아아아아악!
끝을 모르고 치솟은 공력과 함께 광명마교주의 손이 검결지를 쥐고 종으로 그었다.
-천단.
탐색전은 생략하고 바로 발출한 심상절예.
심상의 의념이 바깥으로 퍼지기도 전에 완성된 참격이 피할 틈새도 주지 않고 공간을 가로질렀다.
그에 강엽이 눈을 부릅뜰 때.
[시건방진 놈.]
마신상을 움직이는 진조가 손날을 휘둘러 허공을 절단하는 심검의 칼날을 막아냈다.
-......!
무엇이든 절단하는 심검과 모든 것을 막는 마신의 팔이 충돌, 일대의 공간이 왜곡된다. 만약 주변에 사람이 있었다면 그 충격에 그대로 가루가 되었을 터.
광명마교주의 심상절예가 처음으로 막힌 순간이었다.
멀리서 무림인들을 몰아붙이던 사도들조차 그 사실을 깨닫고 한순간이나마 공격을 멈출 지경.
광명마교주의 안색이 낮게 가라앉았다.
“절대방어의 심상인가?”
[틀렸다.]
콰아아아아앙!
광명마교주의 참격을 쥐고 터뜨린 마신상이 손바닥을 펼치자 무지막지한 공력이 그 안에 모였다.
[공방일체의 심상이니라.]
직후 검붉은 강구가 허공을 갈랐다.
스쳐지나갔음에도 충격에 밀려난 대지가 고랑처럼 길고 둥글게 파이며 시뻘건 속살을 드러내는 위력.
피한다면 광명마교주가 등진 석탑이 무너지고 말 터.
하나 광명마교주는 굳이 막는 대신 훌쩍 피했고, 강구는 그대로 석탑의 첨단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앙!
대기를 찢는 굉음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일고, 어마어마한 경파의 파편이 휘몰아친다.
그러나 뜻밖에도 석탑은 돌가루만 조금 흩날린 것을 빼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오히려 진조가 쏘아보낸 강구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며 술법진의 천장을 부수는 게 아닌가?
[저건?]
석탑의 전면을 감싸안은 기이한 파동.
마치 원을 그리듯이 회오리치는 기운을 알아본 진조가 어이없어했다.
[심상절예? 사람도 아닌 건물이 심상을 쓴다고?]
“그럼 본좌가 아무런 대비도 안 하고 저렇게 무식한 건물을 적진 한복판에 세울 줄 알았나?”
옷자락을 젖히며 흙먼지를 날린 광명마교주가 당긴 입꼬리 사이로 조소를 흘렸다.
그때 푸른 안광을 내뿜은 강엽이 말했다.
“그냥 석탑이 아니군. 술법진을 통해 석탑 전체에 심상을 담아낸 건가?”
[뭔지 알겠구나. 생전에 심상절예를 이룬 절대고수의 심상을 석탑에 덧씌운 걸 거다. 마의라는 놈이 이룬 심상절예와 비슷한 것 같은데....]
마의가 타인의 심상절예를 되돌려준다면, 석탑이 휘두르는 심상절예는 방향까지 조절할 수 있다.
이치는 비슷하나 이쪽이 훨씬 고절한 기예였다.
“본교의 부교주였지. 과거 본교가 무림맹에 쫓겨 심산유곡에 숨은 이후 한동안 교를 이끈 여인이었다.”
오직 가루라의 화신만이 교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가루라의 화신은 어리고 약했기에 교주에 오르기에 적합지 않았다. 그렇기에 예외적으로 본래는 없었던 부교주라는 직함을 수여했던 것.
“더불어 그녀는 교주의 부인이자 다음 교주의 어미이기도 했지. 따져보면 이 몸의 조상이기도 하다.”
“조상의 심상을 이용했다는 거냐?”
“그녀가 원한 일이었다. 자신의 심상을 담은 사리를 남겨 후손들이 쓸 수 있게끔 했거든.”
그 사리는 정확히 다섯 조각이었고, 오늘날 광명마교가 대계를 진행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얼마 전 염왕이 해남도에 있는 석탑을 찾아내서 파괴하려고 했지. 하지만 결국 물러나야 했다.”
“.......”
그러고 보니 염왕이 남해로 향했다고 했던가.
제자인 하후진도 이유를 몰라서 답답해했는데, 염왕은 그때 이미 낌새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염왕도 못 부순 석탑을 그대들이 부술 수 있을까? 참고로 나 역시 이 석탑을 부술 수는 없다.”
이만한 권능이 대가 없이 주어질 리는 만무했다.
수많은 이들의 혼백을 바쳐 심상을 깨우고, 술법진으로 자연지기를 빨아들여 유지되는 것이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이토록 엄청난 시설을 만들었단 말인가.
-심상법 몽상정토.
광명마교주의 등 뒤에서 휘황한 빛기둥이 솟구치며 붉은 천장을 부수고 하늘 높이 뻗어나간다.
절대자의 의념이 전성을 타고 사방에 퍼져나간다.
[이 땅에서 죽은 이들을 몽상정토에 모아서, 혈마를 죽일 보검으로 벼려내리라!]
진조가 경악하며 외쳤다.
[이건...!]
광명마교주의 손에서 뜨거운 빛줄기가 뻗어나가고, 혈라수의 거대한 기둥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심법진이 무너지면서 억눌렸던 주력이 일제히 풀려나와 마의의 손끝에 모인다.
[이걸로 장군이군. 판은 뒤집어졌고, 너희의 목숨은 이 손끝에 달렸다.]
손가락만 튕겨도 사기에 잠식된 이들은 망자가 될 터.
설령 마의에게 그럴 마음이 없다 해도 이쪽의 명줄이 넘어간 셈이다.
‘빌어먹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마의부터 끝장을 낼 수밖에.
낌새를 눈치챈 일사도와 사사도가 마의를 지키고, 광명마교주가 다시 검격을 내지르려 할 때.
우우우우우웅!
돌연 전장 한복판에 나타난 연꽃이 마의를 에워쌌다.
그리고 또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어지러운 속세에 관여치 않으려고 했으나, 외면하기엔 너무 많은 피가 흐르는구려.]
덤덤하나 웅장한 전성에 광명마교주가 놀랐다.
“불권?”
콰아아아앙-!
천장을 뚫고 낙하하는 인영.
황색 가사를 입은 노승이 반장을 취하며 낙하하고, 그 뒤를 따라 고수들이 내려선다.
바람이 떠받치듯 사뿐하게 내려앉은 이들 중엔 강엽이 아는 얼굴도 제법 많았다.
“맹주?”
“늦어서 미안하네.”
천하팔존 멸도 팽무강.
그 옆엔 섭선을 든 채 광명마교의 사도들을 지긋이 노려보는 제갈의현까지 있었다.
“호광의 소식을 듣고 급히 지원군을 데려왔네. 다행히 천군만마와 같은 조력자께서도 함께 해주셨지.”
맹주가 그 말을 흘린 직후.
백염을 휘날리는 노승이 불호를 외자 상서로운 기운이 퍼져나가며 무림인들을 감쌌다.
“엇? 사, 사기가...!”
심신을 좀먹었던 사기가 씻겨내려간다.
가히 기적과도 같은 법력(法力)을 느낀 이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환호했다.
강엽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장군이 아니라 멍군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