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39화 (333/450)

65화. 생사 (6)

멀쩡히 살아돌아온 오사도의 모습.

강엽은 그 사실에 놀라기보다 초음의 파동으로 그녀가 정말 살아있는 사람인지부터 헤아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채색의 파동이 전방을 훑고 지나가자, 그 사실을 깨달은 사도들이 표정을 굳혔다.

“허어, 기파하고는 좀 다르구나. 방금 건 무엇인고?”

“이교의 죄인이 시건방진 짓거리를...!”

이사도는 백염을 쓸어내리며 흥미를 보이고, 사사도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콧김을 내뿜었다.

다만 초음을 알아차렸을지언정 그게 어떤 힘인지는 모르는 기색.

일사도가 냉철하게 통찰했다.

“우리 체내를 훑었다.”

“음?”

“정확히는 오사도를 훑어봤지. 우리는 옆에 있었기에 얻어걸린 것 같군.”

거기까지 말한 그가 시선을 흘깃 돌리며 질문했다.

“내가 본 게 맞나, 삼사도?”

[제대로 봤군.]

마의가 고개를 주억이며 의견을 보탰다.

[저자, 귀영은 나조차도 처음 보는 재주가 많다. 아마 진조의 능력이 아닐까 싶은데.]

무공이라 하기엔 괴이쩍고, 술법이라 하기엔 심법진 때문에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그러한 마의의 설명에 일사도가 중얼거렸다.

“진조의 능력이라....”

[뭔가 아는 게 있나?]

똑같은 사도지만 일사도는 직위의 특성상 다른 이들보다 내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별 건 아니다. 오래된 사료에서 본 적이 있지.”

“흐음, 그런 사료가 있었던가?”

이사도가 의아해했다. 광명마교의 역서를 대부분 꿰고 있는 그였지만 그런 사료는 본 적 없었던 것이다.

“서고엔 없는 책이다. 나 역시 교주님의 배려로 초대께서 집필하신 서적을 조금 봤을 뿐.”

“호오.”

이사도가 눈을 반짝일 때 사사도가 미간을 구기며 구시렁거렸다.

“역사 얘기는 나중에 셋이 있을 때 실컷 하시오. 적을 앞에 두고 할 얘기는 아니지 않소?”

“껄껄, 뭐 그리 급하신가?”

“영감님은 어떨지 몰라도 난 임무를 수행하다 왔소이다.”

“실질적인 업무는 팔사도가 다 하고 자네는 무력이나 보태는 역할로 알고 있네만...?”

이사도가 고개를 모로 비틀며 반문하자 사사도는 켕기는 게 있는지 눈알을 뒤루룩 굴렸다.

“아, 아니... 싸우는 것도 일이지. 북해의 얼음귀신들이 얼마나 독한지 아시오? 하마터면 동상 걸려 뒈질 뻔했다니까?”

“다들 잡담은 그만하지.”

일사도의 말에 두 사람이 입을 꾹 닫았다.

때마침 강엽이 물었던 것이다.

“그녀가 정말로 사람인가?”

겉으로 봤을 때 오사도는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멀쩡했다.

‘혈색도 괜찮고 호흡도 고르다. 하지만....’

기감으로 살폈을 때부터 뭔가 찝찝했는데 초음으로 보니 확실해졌다.

“모종의 기운으로 선천지기를 대체했군. 내공이나 주력은 아닌 것 같고....”

굳이 따지면 영약처럼 영성을 띠고 있었지만, 영약과는 달리 한없이 순수한 기운.

오사도가 코웃음을 쳤다.

“흥, 대답해줄 것 같....”

“구천회생관.”

오사도의 목소리를 끊은 장본인.

대답은 의외로 검선의 입에서 나왔다.

“얼마 전 사조들께서 남기신 기록을 본 적 있네. 그 옛날 광명마교가 무림과 싸웠을 때, 사도들이 치명상을 입고도 살아돌아온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고 하더군.”

당시엔 광명마교가 지금처럼 강하지 않아서 무림을 전복하지 못하고 팽팽히 맞서다 패망했다.

그리고 무림맹과 백도 무림인들은 광명마교의 성지로 쳐들어갔고, 광명마교가 미처 회수하지 못한 몇 가지 기록과 성물들을 강탈했다.

“그중에 하나가 구천회생관과 ‘옥연(玉淵)’에 대한 기록이었네. 영혼백육만 무사하다면 죽은 이조차 부활시킬 수 있다고 하더군.”

실제로 옥연은 당시에 발견했다. 세월이 지나서 메말랐기 때문에 지금은 흔적만이 남았지만.

“다만 한 번 부활한 이는 오래 싸우지 못한다고 했었지. 옥연의 기운이 다할 때까지만 생자로 이 땅을 거닐 수 있는 게야.”

만약을 대비해서 사조들께서 남기신 기록을 살펴보긴 했지만 그중 하나를 진짜로 볼 줄이야.

그가 자못 놀랍다는 얼굴로 중얼거리자 강엽과 약선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사실인가 보군.’

대부분의 사도들이 담담하게 흘려들었지만 사사도는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시뻘게졌던 것이다.

오히려 당사자인 오사도가 더 침착했다.

“그래, 백도 정파의 위선자들이 과거 본교의 성지를 침탈한 적이 있었지. 그 때문에 본교가 한동안 강호를 떠나서 은둔해야 했어.”

설마 검선의 입에서 진실이 나올지는 몰랐지만, 그녀를 비롯한 사도들은 개의치 않는 눈초리였다.

일사도가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전력차는 명백하다. 그대들은 이길 수 없어.”

“그래서 얌전히 목을 내밀어라?”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비아냥거리는 약선.

일사도가 고개를 흔들었다.

“항복하라는 거다. 순순히 투항하면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없을 거다.”

“아니, 그게 뭔... 일사도, 제정신이오? 육사도가 죽었는데 놈들을 봐주겠다고?”

사사도가 반발하고 들자 일사도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육사도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비교적 멀쩡하게 죽었기에 제한적으로나마 되살릴 수 있던 오사도와는 달리 육사도는 목이 베였다.

강엽이 머리를 날려버리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시신을 수습한들 되살릴 순 없겠지.

기감으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 일사도는 일순 말을 흐렸지만, 뜻을 굽히진 않았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이마저 거절하면 더 이상의 제안은 없다. 그대들은 죽어서 본교의 대업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 말에 세 사람이 빠르게 눈짓을 교환했다. 저런 말을 듣는다고 곧이곧대로 따를 리는 만무.

강엽은 혈목이 뽑아낸 육사도의 선천지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끼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말이 길었지. 시작해보자고.”

“...그런가.”

강엽의 투지를 이해한다는 듯이 턱을 움직인 일사도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었다.

“그렇다면 이교의 죄인들이여, 본교의 사도를 시해한 죗값을 치르라.”

파지지지짓...!

새하얀 검신을 타고 금빛의 뇌기가 노도처럼 흐른다.

그렇게 또다른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투콰앙!

금빛 뇌광이 질주하고 우렛소리가 검로를 따라 포효한다.

호신강기를 둘러 뇌기를 막은 약선이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여섯 명이라. 한 사람당 두 놈을 상대하면 되나?”

멀리 떨어진 마의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찰나였다.

문득 오싹한 감각에 사로잡힌 그녀는 급하게 머리를 숙여 등 뒤의 기습을 피했다.

육안보다 빨리 기감으로 적의 위치를 판단해서 일장을 때려봤지만 손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약선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여 회피 보법으로 물러난 것이다.

[조심하십시오. 그놈은 천부적인 살수입니다.]

귀에 꽂히는 강엽의 전음에 그녀는 비도를 돌리던 구사도를 떠올렸다.

일사도가 싸움의 포문을 연 것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자.

“큭...!”

“하하, 약선이 이런 고수일 줄은 몰랐군요.”

재밌다는 듯이 빈정거리는 놈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주고 싶었지만 맞지 않았다.

살수와 싸워본 적이 없기에 이럴 때 어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이다.

반면 쉴 새 없이 비도를 휘두르고 내찌르면서 호신강기를 긁은 구사도는 적당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슬쩍 암기를 내쏘았다.

소리조차 삼킨 무음의 암기.

쩌정!

“...!”

호신강기가 깨지고 나서야 암기를 알아차린 약선이 봉복을 치켜뜨면서 몸을 억지로 틀었다.

의념과 함께 몸이 뜻대로 움직이는 삼화취정의 고수답게 암기를 피하는 데 성공했으나, 뒤이은 구사도의 공격엔 허를 찔렸다.

“아뿔싸...!”

기이하게 휘어진 예기가 목을 노리고 쏘아진다.

늦게나마 구사도의 하박을 쳐내면서 일장을 들어올렸으나 구사도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다른 손으로 비도를 바꿔들며 원을 그리는 보법으로 허점을 공략한 것.

발바닥 용천혈로 땅을 내딛으면서 뿜은 기파가 절세고수의 감각조차 일순 흐트러뜨린다.

팔다리의 각도와 허리 근육의 움직임으로 약선이 발경 격타를 준비하고 있음을 깨달은 구사도가 한 박자 빨리 일격을 가져가는 찰나.

투콰아앙!

“커억...!”

옆에서 날아온 독장이 그를 훨훨 날려버렸다.

부지불식간에 나뒹군 구사도가 격중된 허벅지를 잡고 인상을 쓰자 약선도 깜짝 놀라 고개를 틀었다.

“당신은...?”

“죽을 맛이군.”

창백하게 질린 완안극이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곤란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 그가 손바닥을 위로 눕힌 채 약선에게 내밀었다.

“진통제 있나? 내가 가진 건 다 빼앗겼다.”

“있긴 있는데... 그 몸으로 싸우려고?”

아무리 절세고수가 생명력이 질겨도 사기에 잠식된 상태론 내공을 돌리는 데 한계가 있을 터.

완안극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어쩔 수 없지. 너희들이 주변을 안 돌아보고 싸우느라 우리가 있는 곳까지 오지 않았느냐.”

그 말에 약선은 아차 했다.

정신없이 싸우느라 백서희를 비롯해 사기에 잠식된 이들이 운신하는 곳까지 온 것이다.

완안극은 이대로 두면 안 된다고 판단해서 무리를 하면서까지 싸움에 개입한 것이고.

약선이 건넨 단환을 그대로 씹어삼킨 완안극이 쓴맛이 감도는 가래침을 퉤 뱉었다.

“더럽게 쓰구만.”

“원래 좋은 약은 쓴 법이지.”

약선의 말마따나 효과는 확실했다.

완안극은 몸을 좀먹는 고통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걸 느끼면서 옆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백서희를 포함해 사기에 잠식된 이들이 가부좌를 튼 채 식은땀을 흘리며 운기하고 있었다.

사기에 대항하느라 바깥은 거의 신경 쓰지 못하는 모습에 약선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졌다.

“큰일이군.”

“거미줄처럼 끈적이는 기운이다. 운기를 한다고 몰아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야.”

그때 구사도가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이런. 절세고수 두 명의 합공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의 얼굴에 짜증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이 더없이 재밌다는 듯이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양손으로 비도를 쥐었다.

“시간 없으니 빨리 죽여드리지요. 그래야 저 뒤에 있는 것들까지 다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요.”

특히 백서희를 향한 시선에 서늘한 살기가 맺혔다.

지난날 옥룡설산에서 강엽과 백서희에게 당할 뻔한 원한을 잊지 않고 기억해두었던 것이다.

“애송아, 이 만독자가 지키는 한 저분의 몸엔 손끝 하나 댈 수 없다.”

“만독...?”

약선과 구사도가 뭔가를 깨닫고 표정이 변하는 순간 완안극의 눈이 시뻘건 안광을 토했다.

바닥에 고인 핏물이 올라와 전신을 덮는다.

-혈정호신갑(血精護身鉀).

지난날 강엽과 처음 조우했을 당시 둘렀던 호신갑.

단단히 응고된 핏빛의 갑주로 전신을 감싼 완안극이 양손 가득 독기를 뿌리며 외쳤다.

“어디 누가 죽나 해보자꾸나!”

* * *

강엽은 슬쩍 눈알을 굴렸다.

백서희를 비롯한 부상자들이 운기요상을 하는 곳에서 완안극의 기세가 들불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부탁한다, 완안극.’

흡혈귀가 강건하다지만 한계는 있다. 지금의 완안극은 사기에 잠식당해 전력의 절반도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의지할 수밖에.

“어딜 보는 거냐!”

쩌엉-!

대로한 사사도의 노성과 함께 거대한 경파를 두른 도끼가 일도양단의 기세로 떨어졌다.

도끼날이 닿지도 않았는데 몸이 갈라지는 듯한 오싹한 살기.

패도적인 고수들은 많이 접했으나, 사사도의 도끼술은 격이 달랐다.

콰아아아아아앙!

거인이 내려친 것 같은 충격에 혈라수가 거세게 흔들린다.

사사도가 호탕한 광소를 터뜨렸다.

“이 거대한 나무가 네 심법진의 진축이지? 이것만 넘어뜨리면 심법진도 깨지렷다!”

곰 같은 거구와 과격한 성격 탓에 가끔 오해도 사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심법진을 떠받치는 거대한 혈라수가 강엽의 약점이라는 걸 알아보고 피할 틈을 원천적으로 차단.

부아아아아아앙!

불괴의 공능에 힘입어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강엽을 향해 도끼날의 궤적을 바꿔 휘둘렀다.

급히 혈무화로 도끼날을 흘려버린 강엽이 다시 육화(肉化)하여 사사도의 복부를 강타했다.

바로 그때 거대한 흑선이 나선을 그리며 강엽의 배후를 노렸고,

강엽이 피할 경로를 예상했다는 듯이 철시가 바람을 타며 흑선을 피해 달아나는 강엽을 노렸다.

투콰아아앙!

“...!”

간신히 철시를 막은 강엽이 이를 악물고 나무 위에 내려서자, 오사도가 서늘한 눈빛을 토해내며 철시를 장전했다.

“사도 네 명의 합공이야.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검선을 상대하는 이사도와 약선을 상대하는 구사도를 제외한 네 명이 모두 강엽을 노리는 것이다.

[자랑스럽게 여겨라. 그만큼 너를 인정한다는 뜻이니까.]

아무렇지 않게 궤변을 늘어놓은 마의가 여덟 개의 거미다리를 크게 움직이며 전면을 휩쓸었다.

암신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한 강엽을 향해 사사도가 다시 도끼를 휘두르고, 오사도가 철시를 쏜다.

우우우우우웅-!

-심극.

그와 함께 두 사람의 몸에서 태동하는 강렬한 심상.

-반고개벽(盤古開闢).

-봉황추살시(鳳凰追殺矢).

무지막지하게 농밀한 공력이 두 사람의 병장기에 깃들었다.

거인이 도끼를 휘둘러 하늘을 쪼개는 심상과 거대한 불새가 끝까지 적을 추격해 섬멸하는 심상.

마의 역시 극한으로 압착한 흑선을 강엽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함부로 심상절예를 쓰면 그때와 같은 같은 꼴을 당할 거다.]

이미 심법진을 쓴 강엽이다. 설령 몸이 정상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썼다간 몸이 견디지 못하리라.

조금 떨어진 곳에선 일사도가 뇌기의 검을 휘두를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필살의 절기들이 삼면으로 짓쳐들어오는 바로 그 순간.

-심극.

강엽의 몸에서 새로운 심상이 발현되었다.

[뭐?]

이미 강엽의 심상절예를 봤기에 어떤 형태인지 아는 마의가 노란 안광을 크게 키웠다. 한 사람당 하나뿐인 심상을 두 개 이상 다룬단 말인가?

[그렇군. 놈이 일월신마공을 익혔다면...!]

대대로 양극의 심상을 휘둘렀던 일월신교의 교주들.

일월성신의 영성을 각성한 강엽은 그들 이상으로 능란하게 다수의 심상을 다루었다.

-빙부만상(氷覆萬象).

시리도록 빛나는 폭풍이 사도들의 절기를 밀어내고 일대를 하얀 설원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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