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생사 (2)
“상태가 안 좋아보이는군.”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는 사내.
어딘지 공허하게 느껴지면서도 은근한 압박감으로 사위를 압도하는 그가 짓궂게 입매를 비틀었다.
“진조의 후예가 대단하긴 하군. 천하의 마의를 이리 만들 줄이야.”
[여긴 왜 온 거냐?]
어쩐지 불만에 찬 목소리.
한창 망자를 해부하던 마의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불청객을 돌아봤다.
[교주.]
광명마교주가 사람 좋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너무 심통부리지 말게. 비꼬려는 의도는 없어. 단지 자네가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온 거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아무렴. 하지만....”
[계획은 순조롭다. 대계 역시 문제 없지. 모든 건 네놈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텐데 뭐가 걱정이냐?]
광명마교의 대계에 올라타서 염원을 이루겠다는 계획.
서로 협조하며 벌이는 일인 만큼 마의 역시 자신의 염원에만 몰두할 수는 없었다.
“진조의 후예가 심흔을 치료하고 온다면 더 무서워질 걸세. 자네의 심상절예가 지닌 약점을 꿰뚫어봤을 터. 그에 대한 대비책은 있는가?”
[대비책이라....]
하던 일을 잠시 멈춘 마의가 기둥에 걸려있는 일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나같이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행색.
“흠, 설마 인질극을 벌일 셈인가?”
[그게 먹힌다면 좋겠지.]
다시 수술대 위로 시선을 내린 마의가 여상한 태도로 손을 놀리면서 망자를 해체했다.
[하나 안 먹혀도 상관없다. 인질극보다 중요한 건 상대의 행동 양상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이니까. 그놈이 걸릴지 증손녀가 걸릴지 모르겠지만, 동선을 유도할 수 있지 않나?]
이윽고 해체 작업을 끝낸 마의가 텅 비어버린 팔뚝 위로 망자의 팔을 가져다댔다.
다른 망자가 조심스럽게 떠받치는 동안 바늘을 놀려서 절단된 부분을 강제로 잇는다.
광명마교주가 기가 찬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게 꿰맨다고 이어지나?”
원래 자신의 팔을 잇는다고 해도 안 될 텐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팔이 아닌가?
[무턱대고 하면 당연히 거부반응이 오겠지.]
“자네가 하면 다르고?”
[망자는 단순히 병정으로 써먹기 위해 만들어낸 물건이 아니다. 이것들 모두가 내 부품이지.]
“부품이라. 재밌는 표현이군.”
[내겐 재생력이 없다. 괴뢰마처럼 혼백을 쪼개지도 않았고, 금마처럼 금강불괴도 아니야.]
하지만 그에겐 망자의 군세가 있다. 술법이 전개되는 동안엔 꾸준히 숫자를 불리는 개미떼들이.
[사기에 오염된 망자는 서서히 변해가지. 종국엔 신경과 경맥, 뼈와 근육의 형태 모두 나와 비슷하게 변모한다. 그게 이 술법이 진정으로 걸작인 이유다.]
자신의 술법을 자화자찬하는 광오한 태도.
그러나 광명마교주는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라면 실로 대단하군. 저 망자들 모두 자네의 육신이라는 뜻 아닌가?”
마의의 몸뚱이엔 팔뚝 말고도 여기저기 기워낸 자국들이 있었다. 비슷한 일을 이전에도 했었다는 의미.
[아까 놈이 내 심상절예의 약점을 간파했다고 했지. 하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강엽 역시 마의의 심상절예를 경계하는 만큼 무턱대고 심상절예를 쓰지는 못할 터.
피차 심상절예가 봉인된 처지라면, 결국 각자 쌓아온 기량이 승리의 향방을 가를 열쇠가 되겠지.
[여기는 내가 준비한 전장이지. 이런 곳에선 다른 사대악인들도 나와 겨루려고 하지 않았다.]
한때 팔가로 불렸던 무림의 정점.
그 안에서 흐느적거리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망자들의 모습에 광명마교주가 실소했다.
“그래, 괜한 기우였군.”
[알았으면 가라.]
그렇게 광명마교주가 사라진 자리엔 식은땀으로 온몸이 흥건하게 젖은 젊은 여인이 있었다.
흑건(黑巾)으로 양눈을 가린 여인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삼사도, 교주님께 무례하지....”
[너도 꺼져라, 육사도. 상대하기 귀찮다.]
파리를 내쫓듯 손등을 휘젓는 모습에 육사도가 한숨을 삼켰다.
“당신을 보필하라는 교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터. 제가 없었다면 모용세가를 점령하지도 못했을 것 아닙니까?”
[...방해하면 너부터 치울 거다.]
그럴 염려는 없다는 듯이 침묵하는 육사도.
그녀는 기둥에 묶인 사람들을 힐끗 응시하다, 고개를 돌리며 안쪽의 전각군으로 걸어갔다.
* * *
눈가를 찌르고 들어오는 햇볕이 몹시 따끔하다.
치밀어오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몸을 돌린 강엽은 보드라운 느낌에 눈을 껌뻑였다.
“서희...?”
한순간 백서희를 떠올렸지만 아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당묘정의 얼굴을 본 강엽이 돌처럼 굳어질 때 그녀의 눈꺼풀이 스륵 올라갔다.
강엽처럼 눈을 끔뻑인 그녀는 문득 자신이 알몸인 걸 자각하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자, 잠깐만요! 지금은...!”
“...어떻게 된 거요?”
강엽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몸 곳곳에 감은 붕대를 제외하면 그 역시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침대에 점점이 수놓인 혈흔과 땀내를 보면 간밤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명확했다.
“혹시 내가 소저를....”
“아니에요.”
고개를 흔든 당묘정의 얼굴이 능금처럼 빨개졌다.
차마 강엽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슬며시 옆을 돌아본 그녀가 작게 실토했다.
“약선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강 무사님의 체내 균형이 깨져서 진기가 폭주하기 직전이었다고... 그, 이걸 다스리려면... 야, 양기를 빼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끝으로 갈수록 못 알아들을 만큼 심하게 더듬었지만, 강엽은 무슨 말인지 대강 깨달았다. 둔기로 후려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얼얼했다.
“그, 불쾌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강 무사님에겐 백 소저가 있으니 저랑 이런 일을 하시는 게....”
“소저야말로 괜찮소?”
여인의 정절이 중시되는 세상이다. 치료를 위해서라지만 순결을 잃은 것은 너무 큰 대가가 아닌가?
마음이 북받치는 것처럼 말을 잇지 못한 당묘정이 서글프게 웃었다.
“제가 원한 일이에요.”
“....”
“그러니까 꼭 그들을 구해야 해요.”
이후 당묘정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강엽은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복잡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얼마 안 있어 약선이 들어왔다.
“결국 약속을 못 지켰구나.”
약선에게 말한 열흘의 시간. 결과적으로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이제는 별 의미도 없어. 자넬 살리느라 남은 생사단을 전부 써버렸거든.”
“....”
심흔이 어느 정도 아문 것을 보고 짐작했지만, 설마 하나도 남지 않았을 줄이야.
“이젠 어쩔 작정이지?”
“싸울 겁니다.”
“운 좋게 살리긴 했지만 다 낫진 않았다. 거동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무슨 수로?”
약선의 말마따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격한 통증이 사지백해를 따라 내달리는 상황.
그러나 강엽은 막무가내였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방법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다시 싸울 겁니다.”
“내가 허락치 않는다고 해도?”
그녀가 눈썹을 치떴는데도 강엽은 철면피를 두른 듯 태연자약했다.
약선이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쯧, 기껏 살려줬더니만.”
마뜩찮은 얼굴로 팔짱을 낀 그녀는 이내 마의가 전언을 보냈다는 사실과 그 내용을 말해주었다.
강엽이 턱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닷새라....”
“하루가 지났으니 나흘이 남았지.”
거기까지 말한 약선이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지. 고비는 넘겼지만 언제 다시 폭주할지 몰라. 몸 안에 잠든 열양지기를 한계 이상으로 쓴다면 무조건 폭주할 거다.”
일월성신의 영성을 각성하면서 얻은 백염이 도리어 강엽 자신의 목을 조르는 역설적인 상황.
지금은 뇌기조차 함부로 쓸 수 없었다.
‘그나마 빙백은 쓸 수 있는 것 같지만, 이것만 가지고 마의를 상대하는 건 무리야.’
섶을 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격이 될 터. 이제까지 경험한 싸움을 반추해봐도 이 정도로 수세에 몰린 경우는 손에 꼽았다.
“모용세가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글쎄, 경공을 쓴다면 하루면 충분할 것 같은데. 하지만 마차를 타고 간다면 몇 배는 더 걸릴 거야.”
지금 강엽의 몸으로 경공을 쓰는 것은 무리다. 억지로 경공을 쓴다 해도 중간중간 쉬지 않는다면 피로만 쌓일 것이다.
“마차를 준비해주십시오.”
“가면서 운기할 셈이군. 의원으로선 뜯어말리고 싶지만 사정을 아니 더는 말리지 않겠어. 대신 나도 함께 간다.”
“굳이 그러실 것까진 없습니다만.”
“하, 착각하지 마. 자네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나도 초대받았기 때문이니까. 마침 나도 그 빌어먹을 노마두와의 악연을 후대까지 물려줄 생각은 없었어.”
언젠가는 마의가 성수장 출신이라는 사실이 탄로날지도 모르는 일.
후손들이 지탄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마의와의 악연을 하루 속히 정리할 작정이었다.
“자네 몸은 가는 길에 최대한 봐주지. 그리고 당묘정 그 아이는... 흠, 설마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당문주가 알면 죽이겠다고 쫓아오겠군.
당천경이 잔뜩 살기를 벼르는 광경을 상상한 강엽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내 다가올 싸움에서 어떤 손패를 쓸지 고민에 잠겼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지.’
* * *
팔가의 일익인 모용세가는 호남성의 대호족.
장사 동북쪽의 영주산(影珠山) 기슭에 들어선 그들의 터전은 악양에서 삼백 리 가량 떨어져 있다.
마의가 하필이면 모용세가를 약속 장소로 잡은 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믿기지 않는군. 그 모용세가가 하루 아침에....”
마부 겸 호위로 일행을 호종하는 연가휘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목울대를 꿀꺽 움직였다.
앞에는 강을 끼고 뒤엔 산을 둔 배산임수의 지형.
구중궁궐을 연상시키는 대장원 앞엔 새카만 군상들로 가득했다.
흐느적거리는 망자의 군세가 전후좌우 사방을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연가휘와 마찬가지로 호위로 따라온 남궁상아가 참담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결국 멸문하고 말았군요.”
검선을 붙잡은 뒤 여세를 몰아 모용세가를 쳤던 걸까.
실제로는 육사도가 모용세가를 기습한 것이지만, 두 사람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문이 덜컥 열리면서 약선이 나왔다.
“징글징글하네. 하여튼 빌어먹을 노마두 같으니....”
곧이어 그 뒤를 따라 당묘정의 부축을 받은 강엽이 눈살을 찌푸리며 마차 밖으로 내려섰다.
무언가 결린 것처럼 불편한 운신을 지켜본 약선이 품에서 작은 단환을 꺼내 내밀었다.
“진통제다.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안 쓰는 것보단 낫겠지.”
“감사합니다.”
물도 없이 쓰디쓴 단환을 씹는 건 고역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통증이 둔해지면서 당묘정의 부축 없이도 운신할 수 있게 된 것.
“오감 전체가 무뎌졌으니 기감도 영향이 있을 거야. 싸우는 게 여의치 않으면 동료들만 구하고 도망쳐.”
그간 꾸준히 운기하긴 했지만 강엽이 마의와 싸울 만큼 회복됐는지는 미지수인 상태.
강엽은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 연가휘와 남궁상아가 있는 곳까지 가서 저편을 면밀히 관찰했다.
약선은 오감이 둔해졌을 거라 충고했지만, 때마침 밤이 찾아왔기에 그리 실감이 되진 않았다.
그렇게 과거 모용세가였던 곳을 둘러싼 망자들의 군세를 한차례 살피고는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일단 길부터 뚫어야겠지.”
혈목을 이용해서 망자들을 격멸한다면 잠시 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강엽이 멀리 보이는 장원의 대문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쿠구구구구궁...!
지반이 크게 흔들리고, 수백의 혈목 다발이 일제히 땅을 뚫고 나오면서 망자들을 굽어본다.
-캬아아아아아악!
그제야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차린 망자들이 달려들었지만, 혈목을 뚫은 놈들은 없었다.
콰직! 투학! 퍼억-!
오히려 관영신창의 묘리를 발하는 혈목의 끝에 관통당하며 처참하게 도륙당할 뿐.
망자들의 사지와 허리가 끊어지며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사기가 안개처럼 퍼지기 시작한다.
“저건 뭐지? 자네가 부른 건가?”
“우리 편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약선의 기감이라면 혈목에 흐르는 사특한 힘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가타부타 따질 때가 아니라고 여겼는지 떫은 얼굴로 학살극을 지켜보았다.
백염과 자성검법이 봉인된 지금, 강엽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혈공진기를 비롯한 흡혈귀의 능력뿐.
그렇게 망자들을 치우면서 강제로 길을 열어젖힌 강엽이 연가휘를 휙 돌아봤다.
“안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일행을 구하면 바로 뒤로 빠져라.”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자기들만 믿으라는 듯이 가슴을 쿵쿵 두들기는 연가휘의 얼굴.
강엽이 시퍼런 살광을 내뿜었다.
“그럼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