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생사 (1)
-소저, 이대로는 망자들에게 따라잡....
누군가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
정신이 꿈결을 헤매는 것처럼 몽롱한 가운데 강엽은 자신을 부르는 또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멍청한 후계자놈, 그따위 수에 당하다니.]
못마땅한 것처럼 혀를 차는 중후한 전성.
조금 더 명료하게 들리긴 했지만, 강엽은 여전히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떠올릴 수 없었다.
-안 되겠, 내가 어떻게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소가주가...!
언뜻 언쟁을 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귀를 기울여봐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목소리를 통해 젊은 남녀라는 것만 짐작할 따름.
-강 무사를 잘 부탁, 그가 지금은....
부탁을 남긴 사내가 급격히 멀어졌지만, 강엽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
여인의 체취가 코를 찌르자 저도 모르게 내면에서 폭력적인 충동이 치솟은 탓이다.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이 이러할까.
‘피를... 피를 마시고 싶다.’
이 여자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고 감미로운 피를 뽑아낸다면....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싹 돌았다.
-강 무사?
등 뒤의 들썩거림을 느낀 걸까.
자신보다 훨씬 큰 사내를 업어가던 여인의 말에 강엽은 입을 다물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강박이 충동을 억제하고 있었다. 본능과 이성이 충돌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투학!
-크하하핫! 살아있는 계집이구나! 얘들아, 덮쳐라!
망자들이 역병처럼 창궐한 난세에서도 산길을 틀어막은 녹림도들.
통행료만 무사히 보내주는 오랜 관례를 깨고 눈이 돌아가서 덮쳤다.
어쩔 수 없이 강엽을 내려놓은 여인이 채찍과 암기를 쥐고 싸우자 비명과 금속음이 들려왔다.
강엽이 눈을 뜬 것은 그때였다.
‘피가... 살아있는 사람의 피가 필요해.’
평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잡것들의 피.
그러나 목구멍, 아니 혼백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취하리라.
-독과 암기라... 사천당문의 여식인가? 네년 척마대였구나!
절정의 무위를 발휘하며 당묘정을 차근차근 압박하는 텁석부리 거한.
당묘정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강엽을 데리고 도망치느라 지친 탓에 계속 밀렸다.
결국 평소라면 쓰지 않았을 절독까지 쓰며 가열차게 저항하자 여의치 않음을 느낀 녹림채주가 부하들에게 무어라 지시했다.
-큭!
-하하, 포기하거라. 절정고수도 쉬이 뜯지 못하는 철그물이니라.
그물을 빠져나오려고 저항하는 당묘정은 녹림채주의 일장에 복부를 맞고 꺽꺽거렸다.
-고년, 더럽긴 해도 생긴 건 기가 막히는구나! 간만에 젊은 계집을 품어보겠어.
-당문의 계집을 건드리면 위험한 거 아닙니까? 그놈들한테 원한을 사면 죽을 때까지 쫓긴다면서요.
-뭔 상관이냐? 척마대가 으깨졌다는 소문이 동네방네 퍼졌는데!
지체높은 팔가의 혈족이라 한들 이름 없는 야산에서 얼마든지 객사할 수 있는 세상이다.
후환이 두려워서 못할 짓거리는 망자들에게 전가하면 된다.
-안 되겠다. 바로 저지르자.
-켁, 두목. 암만 그래도 좀 씻기시는 게....
녹림의 산적들이 시시덕거리면서 당묘정을 철그물에서 꺼냈다. 온몸을 뒤틀며 반항했던 그녀는 두꺼운 손바닥에 뺨을 맞고 쓰러졌다.
더러운 손이 척마대원을 상징하는 청죽색 무복을 강제로 찢을 때, 뒤에서 엇 하는 경호성이 터졌다.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
-놔둬. 좋은 꿈 꾸나... 뭐냐!?
녹림채주가 덜컥 굳었다.
부하의 얼굴이 돌연 등 뒤로 향한 채 혀를 빼물고 있었던 것이다.
콰직!
산적의 목에 고개를 파묻고 게걸스럽게 피를 빨아먹는 시커먼 인영.
눈이 의심스러운 충격적인 광경 속에서 흉수가 가늘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하아....”
가문 땅에 한 줌의 단비가 내리는 걸 목도한 농꾼의 심정이 이러할까.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기 그지없었지만, 간신히 적아를 구분할 이성을 되찾은 강엽이 천천히 눈을 떴다.
우드득!
죽은 산적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잡아뜯는 광경에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강엽은 목뼈째로 뜯겨나온 머리를 놈들의 발치에 휙 던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녹림채주가 살광을 피워올리며 의문했다.
“네놈은 뭐냐?”
“....”
“안 들리냐? 뭐하는 새끼인데 사람 피를 빠냐고!”
사자후처럼 윽박지른 녹림채주가 명령을 내리자 산적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었다.
손속이 잔혹한 것과 별개로 온몸이 만신창이였기에 만만히 본 것.
그렇게.
우드득! 콰직! 빠악!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뭉개졌다.
땅에서 올라온 붉은 줄기가 산적들의 온몸을 속박하여 찢어발긴다.
억눌린 신음과 요란한 비명, 그리고 울부짖는 소리가 한데 섞여 비참한 화음을 이루고,
강엽은 그들이 고통 속에서 죽도록 내버려둔 채 무심히 걸었다.
엉거주춤 서 있는 녹림채주를 향해 비틀거리듯 걸어간다. 숲의 어둠에 반쯤 파묻힌 얼굴에서 시뻘건 안광이 번뜩였다.
“뭐, 뭐냐... 너, 너 뭐야...!?”
먼젓번과 같은 질문이었으나, 이번엔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렸다. 웬 괴물이 튀어나와서 부하들을 학살했으니 그럴 수밖에.
“씹, 오지 마라! 이 계집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당묘정의 머리채를 잡고 칼을 들이대는 녹림채주.
하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최대한 의연함을 가장하면서 외쳤다.
“강 무사, 저는...!”
퍼억!
고막을 때리는 둔탁한 소성.
깨달았을 땐 머리카락에 뜨거운 게 닿은 뒤였다.
“아...?”
멍하니 고개를 돌린 당묘정은 뒤에 있던 녹림채주의 골통이 박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리에서 피를 쏟은 녹림채주가 허물어지는 것과 동시에 강엽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쿨럭! 웨엑!”
엎드린 채 피만 게워내는 모습에 당묘정이 깜짝 놀라서 달려오자 강엽이 일장을 내쳤다.
“오지 마!”
“강 무사....”
강엽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박살나는 고통과 치솟는 흡혈 충동, 이 자리에 없는 일행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요동쳤다.
마음이 불안정해지니 진기도 통제를 벗어났다.
‘최악이다.’
일월성신의 영성을 각성한 이후로 혈공진기와 일월신마기는 공존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혈공진기 안에서 어정쩡한 균형을 이루었던 것.
한데 심흔으로 기파가 흔들리면서 두 신공진기가 부딪치고 있었다.
‘양극의 균형이 깨졌다. 심흔 때문에 재생력도 듣지 않아. 활명술도 소용없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데 녹림도들과 싸우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이대로라면 내부에서 충돌한 두 진기로 인해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터.
“피, 하시....”
“말하지 마세요! 무리하면...!”
“도망치라고!”
최악을 대비해야 한다. 만약 당묘정이 이 자리에 있는다면 그녀 또한 휘말릴 테니까.
하지만 당묘정은 요지부동이었다.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억지로 강엽의 어깨를 잡아챘다.
“안 가요!”
“...뭐?”
“백 소저가 말했어요! 어떻게든 강 무사를 성수장에 데려가달라고! 잘 부탁한다고!”
“...!”
“거기서 도망친 지 며칠이 지났어요. 제갈 소가주도 망자들을 유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고요. 지금 강 무사가 죽으면 그분들은 뭐가 돼요?”
당장 일행의 생사도 모르는 판국.
강엽 못지않게 그녀도 답답하고 두려웠다.
“...내 몸을 얼릴 거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짠 강엽이 한숨을 쉬었다.
전날 낭왕의 생사를 논할 때 약선이 말하지 않았던가. 절세고수라면 자신의 몸을 동결한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목숨을 연명할 수 있다고.
경맥과 신경을 얼린 채 귀식대법을 펼치면 진기의 폭주를 잠시 늦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위험하면... 소저도 휘말릴 테니... 그땐 날 버려서라도....”
“말하지 마세요.”
울음을 삼키면서 강엽을 업은 당묘정은 등 뒤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강엽의 피부에 서리가 끼면서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산적의 목줄기를 뜯고 피를 마신 강엽의 모습이 잠시 눈가에 아른거렸지만 잊으려고 했다.
“강 무사, 당신이 사마외도라고 해도... 지금은 당신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요.”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듯 뇌까린 그녀는 건장한 사내를 업고 피내음을 풍기는 학살의 현장을 떠났다.
어느덧 차갑게 굳어진 산적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산길에서, 만족스럽게 피를 빨아들인 혈목 다발이 땅을 파고들며 주인을 따랐다.
* * *
약선은 엽초를 물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허연 연기가 입김처럼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건장한 사내를 업고 성수장까지 달려왔던 당묘정의 모습.
성문의 관병들까지 때려눕히고 달려온 그녀는 기진맥진해서 쓰러졌다.
강엽을 살려달라는 말만 남기고.
“망할 녀석, 그런 걸 살리라고 하다니....”
얼음을 일일이 녹인 다음 치료를 행해야 했다.
침이 피부를 뚫지 못해서 격산타우의 수법으로 경혈을 다스렸고, 육신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간 심흔을 다스리기 위해 비밀리에 보관해두었던 생사단을 썼다.
이제는 세 알밖에 없는 영약을 모조리 강엽의 목구멍에 때려부은 것.
다행히 약에 깃든 정순한 기운이 심흔을 비롯한 몸의 독소를 조금씩 밀어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심흔이 아니라 폭주하는 진기였다.
한 사람의 몸에 그토록 다양한 진기가 있을 거라고는 약선이라 추앙받는 그녀도 생각하지 못했다.
생사단의 약효로도 미쳐 날뛰는 기운들을 전부 잡을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안에 깃든 선천지기를 잡아먹고 덩치를 불리는 마당이었다.
그렇기에 특단의 조취를 취해야만 했다.
“준비됐느냐?”
“...예.”
등 뒤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음성.
얼마 전 강엽을 데려오느라 탈진했던 당묘정이 말끔해진 얼굴로 나와 있었다.
“일단 진정시켜두긴 했지만, 음양의 균형이 단단히 어긋났다. 어지간해선 진정되지 않겠지.”
“알고 있어요.”
“이딴 걸 치료라고 하기도 민망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달리 방법이 없어서 말이다.”
“....”
“부탁한다.”
당묘정이 고개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강엽의 방으로 가는 걸 보면서 약선은 입을 쩝 다셨다.
“거참, 관상에 도화살이 있는 놈이다 싶긴 했는데....”
한편 처소에 들어온 당묘정은 전신에 붕대를 감싼 강엽을 보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생사단 덕분에 심흔은 대강 치료됐지만, 내부는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붕대로 감싼 몸을 어루만진 그녀는 이제부터 할 일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처연한 미소를 흘렸다.
약선이 부탁하긴 했지만, 치료법을 들었을 때 자원한 것은 그녀 자신의 의지였다.
-양기를 빼내면서 음기를 주입해야 한다. 돌팔이 같은 방사놈들이 만든 수법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구나.
귓가에 맴도는 약선의 말. 어둠 속에서 옷가지가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가문의 어른들이 알았다면 반대했을 치료법.
강엽의 뺨을 매만진 그녀는 언젠가부터 마음속에 들어찼던 사내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이렇게 했는데도 죽어버리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홍조가 깃든 얼굴로 작게 속삭인 그녀는 강엽이 덮은 이불을 치우고, 약선이 알려준 대로 혈도를 짚어 치료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 * *
한편 두 사람이 있는 처소를 지키고 있던 약선은 갑자기 출현한 그림자에 표정을 굳혔다.
썩은 악취를 풍기며 다가오는 인영.
“망자...?”
관병들과 무인들이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있는 만큼 망자가 들어올 구석은 없었다.
망자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면 검사가 끝나는 대로 죄다 성수장에 보내고 있었고.
한데 기억에 없는 자가 망자가 되어 나타나다니?
“내가 없을 때 들어온 자였나? 아니, 그렇다 해도 경비는 어떻게 한 거지?”
눈가를 가늘게 좁힌 그녀는 곧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망자인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자는 살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네가 당대의 장주인가?]
“너...?”
입은 굳게 다물렸는데도 흘러나오는 전성. 전음처럼 입을 다물고 입술만 달싹인 것도 아니었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지만, 약선은 본능적으로 상대가 누군지 알고 벌떡 일어났다.
“마의! 어떻게...?”
[망자는 내 수족이지. 술법을 걸어서 전언을 전할 도구로 쓰는 건 일도 아니다. 성문을 넘는 게 좀 까다롭긴 했지만, 세상에 완벽한 난공불락은 없는 법이지.]
망자의 몸에 의념을 덧씌운 건가.
약선이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볼 때 마의는 어깨를 으쓱이며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하군. 전각의 생김새와 위치... 하나같이 내가 장주로 있던 시절과 똑같아.]
“닥쳐라! 인면수심 같은 놈이 감히-!”
한때 성수장의 장주였으나 사람을 잡아 인신공양을 벌이는 바람에 쫓겨난 자. 무림 문파로 치면 기사멸조의 죄를 짓고 파문당한 격이었다.
[그렇게 지껄이는 것치고 내가 만든 비약은 잘만 쓰지 않았나?]
“그건...!”
바로 전에 생사단을 썼던 만큼 약선이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마의가 나직하게 웃었다.
[공과를 따지는 건 의미 없겠지. 애초에 그러려고 온 것도 아니니까. 귀영이 여기 있다는 걸 안다. 아마 저 안에 있는 것 같은데....]
마의가 어깨 너머를 바라보자 흠칫 놀란 약선이 재빨리 앞을 막으며 으르렁거렸다.
“그 녀석에겐 손끝 하나 댈 수 없어.”
[걱정 마라. 이런 몸으로는 싸울 수도 없으니까. 그저 전언을 전하러 온 거다.]
“전언?”
[닷새를 주지. 그 안에 모용세가로 와라. 오지 않으면 네 동료들은 망자로 변할 거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심흔을 입은 데다 경혈이 폭주했다. 족히 몇 달, 어쩌면 몇 년을 정양해야 하는 중상.
하지만 마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귀영을 진맥했다면 알 텐데. 그놈이 인간 같나?]
“....”
[어떤 의미에선 내가 추구한 비원과 맞닿아 있는 놈이다. 진조의 후예라면 쉽게 죽을 리가 없지. 그놈이라면 며칠 안에 훌훌 털고 일어날 터.]
“무슨 속셈이냐?”
[오래된 비원을 이룰 때가 왔다.]
짐짓 과장된 태도로 하늘을 떠받치듯 두 팔을 벌리는 마의의 모습.
약선이 노려보는 가운데 그가 광오하게 선언했다.
[백 년의 세월 동안 추구한 염원. 나는 천리를 능멸하고 삼라만상의 이치를 초월할 것이다.]
“미친, 사람 목숨을 뭘로 보고...!”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지.]
마의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증손녀야, 너도 같이 오너라. 이 증조부가 죽음마저 정복하는 극한의 의술을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