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28화 (322/450)
  • 63화. 성수 (3)

    “다짜고짜 거절해서 미안하지만 생사단은 안 돼.”

    강엽을 따로 호출한 약선은 단단히 못 박았다.

    설령 억만금을 준다 한들 생사단은 내어줄 수 없다고.

    “물욕이 없으신 겁니까?”

    “천만에. 나 돈 좋아해. 이만한 의원을 운영하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깨지는지 알아?”

    성수장이 천하제일의 의원이라 불리는 것은 약선을 비롯한 의원들의 실력이 훌륭해서인 것도 있지만, 천하 만민을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

    하나 빈자들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만큼 돈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듣자하니 자네는 금패급 낭인이라며? 돈이야 억수로 많겠지. 만약 자네가 다른 약을 요구했다면, 돈이야 좀 받았겠지만 기쁜 마음으로 줬을 거야.”

    하지만 생사단은 아니라는 뜻.

    “수량이 얼마 없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생사단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건 아니군.”

    “저는 어디까지나 의뢰를 하는 입장이니까요.”

    그전엔 생사단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같은 이름을 쓴 비약이야 어딘가에 또 있을지 모르지만....

    “누가 사경을 헤매나 보군. 어떤 증상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중상을 입고 가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가사 상태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귀식대법 같은 걸 써서 가사 상태에 빠지기도 하지만, 중상을 입은 상태로는 쓸 수 없지. 자네가 말한 사람은 아마 빙관(氷棺) 같은 데 들어갔을 거야.”

    “가능한 겁니까?”

    “공기만 통한다면. 하지만 십중팔구는 동사해. 어지간히 내공이 깊지 않으면 못 버텨.”

    “그럼 그 사람은 버틸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낭왕이다.

    근자에 천하팔존이라 불리는 이들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감이 없잖아 않지만, 호락호락하게 죽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만한 고수라면 잘 먹고 잘 쉬면서 운기하면 웬만한 내상은 금방 나아. 그런데도 생사단이 필요할 만큼 부상이 심각하다면....”

    약선의 아미가 굽이친 계곡처럼 찌푸려졌다.

    “설마 심흔인가?”

    “.......”

    강엽이 듣기에도 그럴듯한 소리였다.

    일찍이 광명마교주와 염왕의 싸움에 휘말린 그 역시 심흔을 입고 사경을 헤매지 않았던가?

    흡혈귀의 재생력조차 통하지 않아서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다.

    흑룡교의 이 노사를 비롯한 이들의 헌신이 아니었으면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았을 터.

    ‘문제는 낭왕이 북해에 있다는 거지.’

    심흔의 치료법을 아는 이 노사는 무림맹에 머물면서 나름대로 대우받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장성 너머 수만 리나 떨어진 북해에 연로한 이 노사를 보내는 건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은 일.

    애초에 낭왕이 가사 상태에 이른 게 심흔 때문인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그렇기에 하오문주 역시 다각도로 고민하고 무리인 줄 알면서도 생사단을 구해달라는 의뢰를 한 것이겠지.

    “그나저나 심흔에 대해 잘 아시나 봅니다.”

    “...옛날에 본 적 있지.”

    궁금하긴 했지만 약선의 성향상 자신이 치료한 이에 대한 사항을 흘릴 것 같진 않았다.

    지금으로선 아무래도 좋은 일.

    “생사단이 심흔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알아서 뭐하려고. 몇 번을 말했지만 내어줄 수 없어. 그건 써서는 안 되는 약이야.”

    “그냥 두면 죽는다고 해도 말입니까?”

    약선이 눈썹을 치켜떴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강엽의 눈은 겨울날 호수처럼 고요했다.

    “약의 효능이 확실한데 내주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겠군요. 약이 화를 부를 만큼 뛰어나거나, 혹은 어떤 이유로 인해 더 이상 만들 수 없거나.”

    “자네....”

    “장주님의 표정을 보니 후자 같습니다.”

    삼화취정을 이룬 약선이 외부의 위협이 두려워서 생사단을 숨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럼에도 숨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단순히 재료가 부족해서는 아닐 겁니다. 그런 이유라면 굳이 존재를 감출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만 말하게.”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약, 조직적인 은폐, 심흔에 당한 사람조차 살릴 만큼 기적적인 공능... 앞뒤가 안 맞는 상황에서 나오는 대답은 하나군요.”

    “그만-!”

    “인신공양으로 만든 약입니까?”

    “......!”

    생사단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안 했는데, 정황만으로 저간의 상황을 꿰뚫었다.

    눈을 부릅뜨는 약선의 모습에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군요.”

    “너, 너....”

    “약선께서 만드실 약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혈라분이라는 예시를 봤기 때문에 인신공양이라는 수단에 바로 생각이 닿았다.

    그만한 효능을 지닌 약을 만들려면 한두 명 희생시키는 걸로는 어림도 없을 터.

    최소 수십 명, 어쩌면 백 명 이상을 희생시켰을지도 모른다.

    “제가 잘못 알았다면 죄송합니다. 의뢰는 없던 걸로 하고 물러나지요.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진실을 알아야겠습니다.”

    생사단이 심흔을 치유할 수 있다면 목숨을 여벌로 들고 다니는 셈.

    강엽이 지긋이 응시하자 약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렇게 무도한 놈일 줄이야. 다른 놈 같았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 내쫓았을 텐데....”

    하지만 그러기엔 강엽이 너무 강하다. 약선이 힘으로 내쫓는다고 내쫓길 강엽이 아니었다.

    “그래, 생사단의 진실을 알면 어쩔 거지? 내가 주지 않으면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려고?”

    “그랬다간 역효과만 나겠지요. 괜한 억측으로 장주님을 음해한다고 분노만 살 겁니다.”

    뭇 사람들의 존경심을 받는 성수장이다. 설령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겠지.

    “잘 아는군. 자네가 진실을 말해도 믿을 사람들은 없어. 자네 동료들만 믿겠지.”

    천만에. 방법이야 차고 넘친다.

    강엽 개인의 힘이라면 어림도 없지만, 하오문을 부추기면 없는 소문도 만들어낼 수 있다.

    아니, 약선을 제압한 뒤에 마안으로 의식을 파고들면 굳이 소문을 낼 것도 없이 생사단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부작용이 많아. 원한을 지는 건 삼가야 한다.’

    멸구를 한답시고 약선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생사단으로 낭왕을 살릴 수 있다고 십할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으로 구슬릴 수 없다면, 사실상 내가 꺼낼 수 있는 패는 하나밖에 없겠지.’

    일월신교 신녀의 예언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약선을 설득하려면 다른 수가 없다.

    작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호광성의 사태를 해결하겠습니다.”

    “자네가?”

    “열흘 안에.”

    “...이놈 봐라. 무림맹과 검선이 나서도 해결하지 못한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그것도 열흘 안에?”

    “모든 술법엔 한 가지 약점이 있지요. 바로 범위와 지속력이 반비례한다는 겁니다.”

    가령 무언가를 봉인하거나 일부 지역에 결계를 거는 술법은 술사가 죽어도 효과가 유지된다.

    그러나 한 성을 아우를 만큼 거대한 술법은 절대로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다.

    마의가 펼친 술법도 마찬가지.

    “마의가 죽으면 술법은 효능을 잃습니다.”

    “...확실한가?”

    “제 목을 걸겠습니다.”

    “으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생사단이 금단의 비약이라 하나 작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싼 값이겠지.

    문제는 생사단의 비밀인데, 이미 강엽은 막연한 추측일지라도 진실에 상당히 접근한 상태.

    “굳이 열흘을 건 이유가 뭐지? 자네가 구하려는 사람이 가사 상태라면 시간은 충분할 텐데?”

    “그 정도가 지인들이 버틸 수 있는 한계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인들? 척마대를 말함인가?”

    “오면서 들으니 뿔뿔이 흩어졌더군요. 만약 쫓기고 있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악양같은 대도시에 들어갔다면 그나마 낫다.

    하지만 심산유곡에 고립되었거나, 부상자가 많아서 도망치기도 여의치 않다면....

    ‘열흘도 못 버틸 공산이 크다.’

    기실 약선에게 말한 열흘도 넉넉하게 잡은 기간.

    일단 하오문을 통해 지인들의 소식을 알아봐야 한다. 백서희가 하오문의 향주를 만나러 갔으니 지금쯤 뭔가 알아냈을지도 모르지.

    약선이 허 하고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추진력은 알아줘야겠군. 좋아, 자네가 호광성 사태를 해결하면 생사단을 내주지.”

    그렇게 거래가 성립되었다.

    * * *

    백서희가 돌아온 건 반 시진이 지나서였다.

    “남궁 소가주의 말이 맞았어. 마의와 검선은 싸우다가 행방불명된 것 같아.”

    운 좋게 도망친 낭인들 중에 목격자가 있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전장 주변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는데, 두 절세고수가 싸우다 함께 떨어졌다.

    그만한 절세고수들이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죽을 리는 만무하지만, 어쨌든 행방이 묘연해진 건 사실.

    “마의가 이겼군.”

    검선이 이겼다면 술법도 진작 끝났을 테지.

    돌아가는 정황을 보면 마의가 검선을 꺾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후퇴해야 할 만큼 중상을 입었기에 검선만 데리고 급히 사라진 것이리라.

    “마의의 성향은 어떻지?”

    “음,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인물인가 봐. 정체도, 사문도 알려지지 않았거든. 백 년 전부터 활동했다고는 하는데....”

    내공 화후에 극에 달한 초고수들은 백 년 이상씩 살기도 하지만, 늙고 병들면 쇠약해지기 마련.

    마의처럼 백 년이 넘도록 전성기를 누리는 것은 상리를 거슬렀다.

    “척마대의 소식은?”

    “일부는 다른 도시로 간 모양이야. 성벽이 있는 도시면 망자들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니까. 간간이 도시에서 망자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부상자들이 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던 조치가 괜한 게 아니었다. 그런 궁여지책이라도 써야 할 만큼 모두가 궁지에 몰린 것이다.

    백서희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근데 우리가 아는 사람들은 소식이 없어. 무당파나 제갈세가에 간 것도 아닌가 봐.”

    격전은 호남에서 일어났다. 하나 도망친 자들이 장강을 넘은 징후는 없었다.

    “남은 건 모용세가인데, 그쪽에 갔다면 하오문이 알았을 거야. 인적이 드문 야산에 숨었을 가능성이 커.”

    “....”

    호광성은 어지간한 소국보다 훨씬 거대한 땅. 온 산천초목을 뒤져도 찾는다는 보장은 없다.

    문득 백서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말하면 참 이기적인 것 같은데.”

    “음?”

    “실종된 사람들이 걱정되긴 하거든. 당 소저도, 청수 도장도, 소창후도, 모두 우리 친구잖아. 근데....”

    잠시 머뭇거린 그녀가 힘없이 웃으며, 강엽의 품에 이마를 묻었다.

    “이번엔 네가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어.”

    “....”

    여지껏 얘기는 안 하고 있었지만, 백서희 역시 신녀의 예언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겠지.

    신녀가 예언을 비껴내기 위한 수단을 마련해주긴 했지만, 불길한 예언은 벗어나려고 발악할수록 예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네가 불사라고 해도, 엄청나게 강하다고 해도,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잖아.”

    만약 신녀가 예언으로 내다본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면? 며칠 뒤에 벌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아. 잠도 못 자겠어.”

    “...그래도 친구들이 걱정되긴 하지?”

    품 안에서 고갯짓을 하는 움직임에 강엽은 쓰게 웃으며 울금향이 나는 머리를 어루만졌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전에는 싫다면서.”

    “그때는 예언을 듣기 전이니까....”

    “하하하!”

    우물쭈물 투정부리듯이 말하는 모습에 강엽이 시원하게 웃자 백서희가 쌍심지를 켰다.

    “지금 웃음이 나와!?”

    “그야 언젠가는 나도 죽겠지.”

    흡혈귀는 영생을 살 수 있지만, 강엽은 천년만년 영원히 살아갈 마음은 없었다.

    진조가 그랬듯 언젠가는 기나긴 삶에 지쳐서 죽음을 바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난 적어도 증손자까지는 볼 생각이거든. 너랑 같이 말이야.”

    “...하여튼 말은 잘하지. 바람둥이 주제에.”

    “크흠!”

    백서희가 이죽거리자 말문이 막힌 강엽은 어색하게 헛기침만 흘렸다.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걱정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신경 쓰진 말자. 예언을 비트는 게 불가능하다면, 신녀가 우릴 순순히 보낼 리가 없지. 아니, 그전에 일월신교가 신녀를 두지 않았을 거다.”

    거스를 수 없는 예언은 안 듣는 것만 못하다.

    만약 예언이 불가역적이라면 역대 교주들이 신녀를 조언자로 뒀을까.

    “친구들에 대한 건... 소식이 들리면 움직이자.”

    “결국 가겠다는 거지?”

    “내가 안 가서 죽는다면 후회할 테니까.”

    야차마곤의 부고를 들은 걸로 충분하다. 다른 이들이 죽었다는 소식까지 듣고 싶진 않다.

    “내가 아니라 우리. 내 친구들이기도 하니까.”

    “...그렇지.”

    잠시 멈칫한 강엽은 이내 쓰게 웃으면서 그녀를 토닥였다.

    소식이 들려온 건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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