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27화 (321/450)
  • 63화. 성수 (2)

    ‘악양은 두 번째인가.’

    동정호와 군산 등 수많은 명승지를 둔 악양.

    과거 낭왕을 만나기 위해 황산으로 가는 여정에서, 백서희와 함께 악양루를 보기 위해 들른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열 달 가량이 흐른 지금, 악양으로 가는 관도의 분위기는 그때하곤 천지차이였다.

    백서희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 낯빛을 흐렸다.

    “사람들 얼굴이 어둡네.”

    “피난민들이에요.”

    남궁상아가 끼어들었다.

    척마대 삼조장이기도 한 그녀는 일행에게 호광성에서 일어난 일들을 요목조목 설명해주었다.

    “아무래도 호북보다는 호남의 피해가 더 심한 편이에요. 그나마 호북엔 무당과 제갈세가가 있지만, 호남엔 모용세가밖에 없으니까요. 무림 문파들도 호북에 더 많고요.”

    장강을 기점으로 호북과 호남으로 나뉘는 호광성의 영역. 호북엔 무당과 제갈세가가 영향을 떨치고, 호남엔 모용세가의 영향력이 큰 편이었다.

    “그래도 옛날엔 형산파가 있었지만....”

    한때 구파에 버금가는 성세를 누렸던 남악 형산의 대문파.

    지금은 이름만 남은 형산파의 처지를 뇌까린 남궁상아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

    극소수만 살아남은 남궁세가는 형산파보다 더 초라했으면 초라했지 낫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검선께서 실종되셨다는 거예요.”

    “마의와 함께 사라지셨다고요?”

    “....”

    남궁상아의 입술이 꼭 다물렸다.

    일전의 전투에서 마의를 잡으려다 외려 함정에 빠지는 바람에 아군이 궤멸에 준하는 피해를 입은 것이다.

    “마의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대악인이라 강한 건 알았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자기 목숨 건사하기도 급급한지라 마의와 검선이 어떻게 싸우는지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거대한 존재감이 전장을 뒤덮은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저승사자의 손이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섬뜩하게 다가왔던 악의.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일단 만약의 사태엔 성수장으로 모이기로 했으니... 아군이 최대한 온전하길 바라야지요.”

    연가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보탰다.

    시절이 하수상한지라 악양성의 관병들은 피로에 찌든 몰골로 피난민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워낙 피난민들이 많은지라 병사 수십 명이 있어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일.

    완안극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허, 저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다 하나?”

    “악양의 관리들이 예민해져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빨리 통과될 겁니다.”

    연가휘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완안극의 정체에 대해 귀띔을 받긴 했지만, 앳된 소년이 독곡주라고 하니 어색하게 느껴졌다.

    다만 강엽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데다, 완안극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은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가서 말해보겠습니다.”

    척마대원 몇 명을 데리고 떠난 연가휘의 모습.

    피와 땟국물로 꾀죄죄한 몰골에 관병들이 경계하자 그는 웬 둥그런 철패를 꺼냈다.

    “척마대 소속임을 증명하는 신분패예요. 이것만 있으면 별다른 검문 없이 들어갈 수....”

    돌연 잦아드는 남궁상아의 목소리.

    신분을 증명했는데도 관병들이 역정을 내면서 창검으로 척마대 무인들을 겨누는 게 아닌가?

    “부상을 입은 자들은 들어갈 수 없다!”

    척마대 무인들만이 아니었다.

    피난민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부상을 입은 자들은 성문 바깥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문이 잘못 퍼진 모양이군.”

    강엽의 말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엽이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죽어야 망자가 되지.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상처만 입어도 망자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거요.”

    “고작 그런 이유로 말인가요?”

    “일리 없는 걱정은 아니오. 결과적으로 망자의 사기가 죽음에 이르게 하니까. 성 안에서 망자가 일어나면 혼란이 일겠지.”

    검문에 시간이 걸린 이유가 있었다. 단지 피난민들의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남녀 따로 데려가서 옷을 홀딱 벗겨 몸수색을 했던 것이다.

    뒤늦게 몸수색을 받고 온 이들의 불만을 들은 일행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나마 여인들은 여무인에게 몸수색을 받고 있었지만, 그들 대다수가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마당.

    연가휘도 그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지만, 관병들은 도통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부대인의 명령인가. 무림맹과 충돌하는 걸 개의치 않을 정도로 겁먹었다는 뜻이겠지.’

    혹은 지부대인보다 더 윗선의 명령일지도. 어찌 됐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강엽은 속으로 결단을 내리고 왼쪽 눈에 붉은색 광채를 띄웠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선 강행돌파를 하는 게 낫겠지.’

    마안으로 관병들을 포섭해서 길을 열 심산.

    하지만 막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성문 안쪽에서 커다란 호통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게 뭣들 하는 짓들이야!”

    곱슬머리를 아무렇게나 기른 여인.

    신경질적으로 관병들을 꾸짖은 그녀가 수문장의 면전에 다가와서 대뜸 무릎을 까버렸다.

    “크억! 자, 장주님...!”

    “미친 새끼들. 다친 사람들을 밖에 세워놔? 괴물들 오면 다 뒈지라는 거냐?”

    “하, 하지만 이는 지부대인 어르신의 명입니다!”

    “지랄도 풍년이다. 지부대인에게 똑똑이 전해. 그 돼지같은 몸뚱이로 무병장수하고 싶으면 내 심기 거스르지 말라고.”

    상처입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기세에 수문장은 쩔쩔맸다.

    그는 천 명의 병졸들을 이끄는 정오품 정천호의 위계를 꿰찼지만, 눈앞의 여인은 지부대인은 물론 그 위의 귄력자들도 어려워하는 존재.

    결국 그가 못 이긴 척 길을 터주자, 멀리서 지켜보던 백서희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저 언니 마음에 드는데?”

    “...언니요?”

    남궁상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냥 불러본 건데 왜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분이 누군지 모르세요?”

    백서희가 눈을 껌뻑였다.

    하지만 남궁상아가 뒷말을 잇기 전에 수문장을 굴복시킨 여인이 일행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입가에 엽초 같은 것을 물었는데, 손가락을 딱 튕기자 삼매진화가 일어나며 불이 붙었다.

    ‘고수로군. 그것도 삼화취정에 오른.’

    여인의 기도를 파악한 강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완안극과 백서희도 직감적으로 여인이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경계심을 곤두세우는 찰나.

    삐딱하게 선 여인이 엽초를 질겅거리면서 물었다.

    “남궁 소가주인가?”

    “아, 예. 장주님!”

    “거지꼴이라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군. 패전 소식은 들었다. 유감이야.”

    “....”

    “다행히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성문이 열렸으니 어서 들어가 봐.”

    “가, 감사합니다. 한데 지부대인이 역정을 내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볼 문제고. 근데 이쪽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군. 이만큼 특이한 조합이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강엽이 여인의 경지를 알아본 것처럼 여인도 뭔가 알아챈 것이겠지.

    남궁상아가 소개하기 전에 여인이 큭큭 웃었다.

    “뭐, 아까 저 동생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 나를 처음 보는 모양이던데.”

    백서희의 표정이 어색해지는 순간, 여인이 기습적으로 말을 이었다.

    “아, 기분 나쁜 건 아니니까 걱정 말고. 젊게 봐주는데 나야 기쁘지.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되니까. 보아하니 그쪽이 대장인 것 같은데 맞나?”

    “강엽. 무림에선 귀영이라 불립니다.”

    강엽이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여인의 언행과 관병들의 태도, 그리고 남궁상아와 구면인 점으로 여인의 정체를 추측한 것이다.

    여인이 강엽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오호라, 자네가 요즘 명성이 사해에 진동하는 귀영이란 말이지? 남궁 소가주와 함께 온 걸 보면 거짓부렁은 아닌 것 같고. 근데 온몸에서 피냄새가 진동하네.”

    얼마 전에 싸우긴 했지만 강엽의 행색은 말끔했다. 피는커녕 흙먼지도 거의 묻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인은 강엽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지 보기라도 한 듯 지껄이고 있었다.

    “원래 무림인이란 족속들이 그렇지. 자네 명성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을지 감도 안 와.”

    “지금 시비를 거는 건가?”

    참다 못한 완안극이 살기를 끌어올렸으나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는 거지. 그러는 그쪽도 만만치 않은데. 어마어마한 독기를 품었어. 독인인가?”

    “이 여자가 정녕...!”

    “다른 때 같았으면 상종도 안 했겠지만... 시국이 시국이니 본장에 들어오는 걸 허락해주지.”

    그녀가 연기를 들이키면서 말했다.

    “만나서 반갑다. 귀영과 그 동료들. 성수장의 장주인 고연화라고 한다.”

    천하에서 가장 고명한 신의.

    달리 천하제일의원이라 불리는 그녀는 세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 이렇게 불렸다.

    “약선(藥仙)...!”

    후우.

    하얀 연기를 뿜은 그녀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뭐, 그렇게도 불리지. 쓸데없는 허명이지만 말이야.”

    * * *

    천하에서 가장 이름난 의원인 성수장의 주인이자 그 명성에 걸맞은 의술을 쌓은 여인.

    다소 성격이 괄괄하긴 하나, 그녀 덕분에 부상을 입은 자들은 모두 성문을 무사 통과했다.

    “병들거나 부상을 입은 자들은 모두 성수장으로 가도록. 돈은 받지 않으니 걱정 붙들어 매고.”

    우물쭈물했던 사람들은 그 말에 화색이 되었다.

    먹고 살기 빠듯한 가난한 이들에게 있어 약값은 목숨값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약선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는 연기를 줄줄 뿜으며 앞길을 열었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고리 모양으로 연기를 빚어내는 모습에 완안극이 못마땅한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에잉, 약선이 저리도 괴팍한 인간이었을 줄이야.”

    약선과 만난 적은 없지만, 오래전부터 그 명성을 들어왔던 것이다.

    ‘댁도 충분히 괴팍한 것 같은데.’

    강엽과 백서희는 속마음을 밝히는 대신 뒤따르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마치 어미의 뒤를 졸졸 따르는 새끼 오리들처럼 줄을 잇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감당이 되나?”

    “성수장은 천하에서 가장 큰 의원이니까요. 장주님뿐만 아니라 많은 의원들이 상주하고 있어요.”

    남궁상아의 말대로 성수장은 고관대작과 대상인의 장원처럼 엄청난 부지를 자랑했다. 다만 대문 앞에도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린 상황.

    “장주님! 제발 저희를 살려주십쇼!”

    “줄을 서십시오, 여러분! 앞사람 밀치지 말고요!”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광경에 남궁상아 등 척마대원들도 말문이 막혔지만, 정작 약선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게 의원의 본분이지. 지금 같은 때엔 더더욱 바삐 움직여야 하고.”

    안 그래도 병자가 많은데, 망자들에게 상처만 입어도 똑같이 변한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온 것이다.

    “그래도 너희들은 치료보단 씻는 게 먼저인 것 같군. 급한 부상은 벌써 치료한 것 같고.”

    “아, 예. 저분이 치료해주셔서....”

    척마대원 한 명이 눈치 없이 완안극을 가리키자 약선이 호오 감탄사를 흘리며 눈을 반짝였다.

    뭔가를 느낀 완안극의 얼굴이 썩어문드러지는 가운데 그녀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독공의 고수들이 약도 잘 다루지. 혹시 괜찮다면 일행을 빌려도 되겠나? 일손이 부족하거든.”

    강엽에게 하는 말이었다. 완안극에게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직감적으로 파악한 걸까.

    강엽이 솔깃한 표정을 짓자 완안극이 식겁했다.

    “주, 주인님! 절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누가 들으면 잡아먹는 줄 알겠네.”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린 약선이 강엽을 돌아보았다.

    강엽이 쾌활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쓰십시오.”

    “...!”

    자신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시선을 보내는 완안극의 표정에 강엽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다. 조금만 희생해줘라.’

    하오문주가 의뢰한 대로 낭왕을 치료하려면 약선에게서 꼭 비약을 받아야 한다. 그것도 성수장에도 몇 개 없는 금단의 비약을.

    “대신 생사단(生死丹)을 받았으면 합니다만.”

    “...뭐?”

    허를 찔린 것처럼 눈을 부릅뜬 약선이 곧 정신을 차리고 납처럼 굳은 표정이 되었다.

    “자네들, 우연히 온 게 아니었군. 원래 본장에 올 생각이었나?”

    “그래서 주실 수 있습니까?”

    “...이따 다시 얘기하지.”

    두 사람의 대화에 척마대원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던 것.

    그러한 반응만 봐도 약선이 생사단에 대해 말하기 싫어하는 것은 명확했다.

    하오문주의 서신에도 적혀 있었다.

    -북해빙궁의 서신에 따르면 부군은 가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를 살리려면 생사단이 필요해요. 하지만 약선은 약을 주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저도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설에 의하면 약선은 생사단을 언급하는 것도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조건 얻어야 하는 약.

    완안극을 잠시 빌려주는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할 터.

    강엽은 약선이 생사단을 내어주도록 거래를 유도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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