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성수 (1)
사천을 떠난 일행은 입도공월을 통해 목적지인 성수장 근처의 야산에 도착했다.
“...마을에 아무도 없어. 다 떠났나 봐.”
목적지에 가깝다는 건 알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그렇기에 하룻밤 묵을 겸 길을 묻기 위해 산 아래의 민가로 내려왔지만 허탕을 쳤다.
마을 주민들이 집단탈주라도 한 것처럼 텅텅 비었던 것이다.
“칠월이면 한창 농번기 아닙니까? 전쟁이 난 게 아니고서야 고향을 떠날 리가 없을 텐데....”
완안극도 떫은 얼굴로 마을을 돌아봤다.
그때 강엽이 말했다.
“좀 이상한 일이지.”
두 사람이 돌아보자 강엽은 담벼락 아래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을 꺾었다. 마치 비 한 방울 못 쐰 것처럼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형상.
백서희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풀이며 나무며 죄다 시들었네. 마을 바깥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가뭄이 든 것도 아닌데 왜 시들었을까.
그때 완안극이 얼굴을 구기며 코를 킁킁거렸다.
“사방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군요.”
가까운 축사로 가자 말라비틀어진 가축들의 시체가 있었다.
소와 돼지, 닭 등 가리지 않고 집단 폐사한 참상.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는 악취가 진동했다.
“쓰읍, 입맛 뚝 떨어지게....”
마을만 찾으면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이런 꼬락서니를 보니 밥생각이 싹 달아났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마을을 떠난 건 아니군요. 귀한 가축들을 이리 두고 갈 리가 없으니....”
백번 양보해 돼지나 닭은 그렇다 쳐도 가장 귀한 소까지 두고 가는 건 이상하지 않나.
하다못해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더라도 달구지를 이끌 소는 반드시 필요했다.
“요즘 퍼지는 소문 기억하지?”
“죽은 자가 일어선다는?”
“그래, 이 마을만 보고 속단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상관 관계는 있겠지.”
산적이나 비적이 마을을 덮쳤다면 곳간과 축사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어딘가에 망자가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
“...왜 하나도 안 무섭냐?”
일행이 서로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이 정도 일로 오싹함을 느끼기엔 그동안 거친 경험들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암만 망자들이 무서워도 불괴강시나 흡혈괴마보다 무서울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썩은내 나는 곳에서 자긴 찝찝하네. 차라리 야숙을 하는 게 낫겠어.”
“저도 주모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게 마을을 떠나려고 할 때였다.
돌연 세 사람의 발길이 우뚝 멈춰섰다.
캉-! 채앵-!
절세고수의 감각으로도 희미하게 들리는 소성.
그 안에 간간이 이어지는 비명이나 악다구니가 먼 곳에서 싸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백서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쩔래?”
홍가려가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호광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무림맹의 전력도 파견되었다.
개중엔 이전 동료들이 모인 척마대도 있는 바.
“가봐야지.”
강엽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즉답했다.
* * *
야산을 낀 관도에선 격전이 한창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성수장인데...!”
하얀 무복 위로 청죽색 괘자(掛子)를 걸친 무인들.
찢기고 헤진 넝마주이를 입은 게 영락없는 거지꼴이었지만, 피와 살이 들러붙은 날붙이는 그 나름대로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짜증스럽게 휘두르는 바람에 거칠긴 해도 그들을 에워싼 적들을 상대하는 덴 문제가 없었던 것.
쐐애애애애애액!
-키에엑!
검에 잘려나갔는데도 한동안 흉성을 토하는 아가리.
머리와 분리된 새카만 몸뚱이는 몇 걸음 걷다 철푸덕 쓰러진다.
선두에서 길을 열던 피투성이 여인이 성대가 찢어져라 소리쳤다.
“이쪽 관도만 넘으면 악양은 금방이에요! 거기까지만 가면 이 괴물들도 따라오지...!”
그때 땅에 널브러졌던 괴물이 튕기듯이 뛰어올라 여인을 덮쳤다.
여인이 몸을 돌리려고 했으나 앞에서도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는 상황.
다른 때 같았으면 이깟 놈들은 금방 해치웠겠지만....
“큭, 공력이...!”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을뿐더러 간간이 하는 운기조식도 소주천에 그쳤다.
어떻게든 공력을 끌어올렸지만, 흉년의 논두렁처럼 텅 빈 단전에선 찢어지는 고통만 올라온다.
몸을 가누지 못한 여인은 사방에서 덮치는 괴물들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가슴 깊이 탄식하는 바로 그 순간.
퍼퍼퍼퍽-!
그녀를 덮친 괴물들이 터지듯 튕겨나갔다.
“소가주, 다치진 않았소?”
“...연 공자.”
“후욱, 그러게 무턱대고 나가지 말라니까.”
검무화 남궁상아.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그녀가 구명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마땅히 체면을 내려놓고 감사 인사를 표해야 하나, 유감스럽게도 그럴 틈새가 없었다.
“조심해요!”
콰직!
청년, 연가휘가 방천화극을 휘돌리면서 뒤에서 짓쳐든 괴물을 쳤다.
공력을 한계까지 쥐어짠 건 그 역시 매한가지였지만, 신병의 공능으로 괴물의 허리를 분질렀다.
남궁상아도 억지로 힘을 내서 주둥이를 들이미는 괴물을 피해 늑골 사이에 검을 찔러넣었다.
“하아! 하아!”
내가기공을 익힌 고수답지 않은 거친 숨소리.
두 사람 모두 한계까지 쥐어짰기에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아아아아악!”
“지 소협!”
그런 와중에도 아군은 서서히 줄면서 최악으로 치닫는다.
남궁상아가 냉소적으로 푸념했다.
“하, 아무래도... 여기서 죽을 팔자인가 보네요.”
“그런 말 마시오. 대 남궁세가의 소가주께서 객사하면 누가 가문을 재건하겠소?”
“...동생이 잘할 거라 믿어요.”
그녀의 동생은 무림맹에 있었다.
지금은 어리고 연약해서 가문을 재건하는 대업을 맡길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훌륭한 무인이 될 터.
반쯤 체념한 그녀의 뒷모습을 힐끔 바라본 연가휘가 준엄하게 꾸짖었다.
“죽어서 동생에게 맡길 생각 말고! 살아서 동생을 이끌 생각을 하시오!”
“...!”
“젠장, 말하는 것도 힘들군....”
마른침을 삼킨 연가휘는 사방을 둘러싼 괴물들을 눈빛으로 견제하며 방천화극을 내밀었다.
-그르르르륵...!
새카만 괴물들이 낮게 울었다.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돋아난 이빨들 사이로 악취가 풍기며, 입가엔 죽은 피가 흘러내린다.
두 눈의 안구마저 터지고 짓눌렸기에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몰골.
“...내가 할 얘기는 아니지만, 저 꼴을 보니 왜 강호인들이 마교를 증오하는지 알겠소.”
선조들이 강호 무림과 전쟁을 한 걸 자랑스럽게 여기지는 않았으나, 잘못되었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세력과 세력의 충돌. 패권을 위해 부딪치는 싸움에 선과 악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직접 당하는 입장이 되니 진저리가 났다.
묘하게 자학적인 말에 남궁상아가 쓴웃음을 흘렸다.
-카아아아아앗!
“으아아아압!”
위기에 처한 두 사람은 피가 나도록 이를 꽉 물었다.
몸의 일부처럼 여겨졌던 병장기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얌전히 죽어줄 생각은 결코 없었다.
그렇게 힘겹게 병장기를 휘두른 찰나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돌연 귓가를 때리는 둔중한 굉음. 심지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이어 메아리쳤다.
시야를 가른 하얀 벼락이 두 사람을 감싼 괴물들을 짓씹고, 연약한 육신을 일거에 태워버린다.
이제 괴물들은 피부만 검은 게 아니라 진짜로 새카만 숯이 되어 허연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바로 앞을 스쳐지나가는 벼락에 두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벼락은 그들을 무시하고 괴물들을 향해서만 꺾이고 구부러졌다.
“저, 저게 대체...?”
“마을 주민들이 어디 갔나 했더니만.”
아연실색하는 두 사람의 귀로 무심한 목소리가 꽂히는 것과 동시에 벼락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괴물들을 관통하고 태워버리면서 그때까지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동료들을 구해준 것.
저편에서 오는 일행을 발견한 두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가, 강 무사님!?”
“연가휘, 남궁 소가주. 얼추 세 달 만인가?”
석고처럼 굳어진 두 사람을 알아본 강엽이 전장을 두루 살폈다.
잿더미가 되다시피한 괴물들은 움직이지 못했으나, 그 안에 깃든 사악한 기운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외려 칠공을 비롯한 온몸의 모공에서 꿀렁꿀렁 흘러나오면서 주변 일대를 말라죽이고 있는 게 아닌가?
완안극이 콧잔등을 슥 훔치면서 눈가를 구겼다.
“끄응, 죽은 자의 기운이군요. 고명한 고수의 무덤에서 드물게 흘러나오는 기운인데....”
생전에 비대한 내공을 품었던 고수가 삶을 다하면 대부분의 진기는 자연지기로 흩어진다.
하지만 일부는 목내이가 되는데, 그땐 단전의 내공이 음기와 만나서 사기로 변모한다.
“이만하면 어지간한 시독보다 훨씬 지독합니다. 왜 마을이 그 꼴이 되었는지 알겠군요.”
“더 지독한 건 이들에게 죽은 이들도 똑같은 꼴이 된다는 거지. 역병처럼 퍼지는 강시술이군.”
점창파에서 모산혈조가 일으킨 망자들도 치가 떨렸지만 호광의 망자들은 그조차 상회한다.
오른쪽 눈을 파랗게 물들인 채 괴물들의 시신을 관찰한 강엽이 혀를 내두르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곤 경악한 기색이 역력한 남궁상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군과 괴물들의 시체 모두 태워야 할 것 같소만.”
시간이 걸려도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매장하면 똑같이 망자로 전락하고 말 테니까.
퍼뜩 정신을 차린 남궁상아가 씁쓸해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강엽처럼 술법을 통찰하는 능력은 없어도 호광의 망자들과 수없이 싸워본 그녀였다.
죽은 이들의 시신을 태우지 않으면 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했다.
백서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혹시 상처만 나도 변하는 거야?”
“아뇨.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상처만 나도 괴물로 변한다면 지금쯤 남궁상아를 비롯한 무인들 역시 저들과 같은 신세가 됐을 터.
강엽도 정안으로 파악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상을 입은 자들을 한 군데에 몰았다.
눈치 빠르게 강엽의 뜻을 파악한 완안극이 무인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부러진 뼈를 맞추거나 어혈이 뭉친 곳을 쳐서 기를 뚫어주는 게 전부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으리라.
등 뒤에서 들리는 비명을 적당히 흘려들은 강엽과 백서희는 허공섭물로 시체들을 모았다.
그때 등 뒤로 기척이 다가왔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 무사님, 그리고 백 소저.”
“인사는 치료받은 뒤에 하는 게 낫지 않나?”
연가휘가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심하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그보단 제대로 못 쉬어서 좀 피곤하지요.”
“그래 보이는군. 어디로 가는 길이지?”
“성수장입니다. 척마대의 임시 거점이지요. 이쪽 관도로 쭉 가면 성수장이 있는 악양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도 거기 있고?”
청수와 당묘정, 야차마곤 등 이전의 동료들. 그들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연가휘의 안색이 흐릿해졌다.
“청수 도장과 당 소저, 혜심 스님은 저희와 함께 왔습니다. 하지만 적습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는 말일까.
강엽과 백서희의 얼굴이 살짝 경직됐지만, 연가휘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야차마곤 선배는 입적하셨습니다.”
“뭐?”
야차마곤. 낭인전의 금패급 무인이자 전강의 사형.
무림맹에서 헤어질 때 다음에 만나면 술을 마시자고 했던 약속이 아직도 선연하다.
“...어쩌다?”
“마의. 호광성을 이 지경으로 만든 광명마교의 삼사도에게 기습을 받았습니다.”
“.......”
아주 친하다고 할 순 없어도, 함께 싸우면서 제법 정이 들었던 야차마곤이었다.
그런 사람의 부고를 들으니 마음에 묵직한 돌이 얹힌 기분.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백서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전강에게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지. 장사는 지냈나?”
“화장했습니다. 선배는 돌아가시기 전에 흑곤을 남기셨습니다.”
연가휘가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치껏 알아들은 사람이 주섬주섬 두 쪽이 난 흑곤을 꺼내들었다.
“지금은 저 친구가 쓰고 있습니다만....”
“돈은 내가 줄 테니까 악양에서 더 좋은 걸로 맞추라고 해. 저건 내가 가져간다.”
“안 그래도 대장간에 가면 하나 맞추기로 했습니다.”
이후 마을 주민들과 죽은 척마대 무인들을 태운 뒤, 일행은 성수장이 있는 악양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