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25화 (319/450)
  • 62화. 수습 (5)

    일월성신의 영성을 각성할 무렵 손등에 나타난 문양.

    그러나 일월의 문양만 새겨졌을 뿐, 마지막 별의 문양은 없었다.

    진조도 이유를 모른다고 했던 일.

    여인을 만난 지금, 강엽은 어째서 일월성신의 화신인 자신에게 별의 문양이 없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쩌면 이 여자의 정체는....’

    창졸간에 어떤 가능성이 뇌리를 스쳐지나갔을 때, 여인이 조영옥과 홍가려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외따른 곳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쪽을 어떻게 믿지요?”

    조영옥과 홍가려는 물론, 백서희와 완안극도 불신 어린 눈으로 일월신교의 무리를 노려보았다.

    수성좌를 비롯한 일월신교의 무인들도 바짝 곤두선 경계심을 숨기지 않은 눈초리.

    그렇게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팽팽히 당겨질 때였다.

    “그러지.”

    맥이 빠질 정도로 흔쾌히 수락하는 태도.

    일행은 말할 것도 없고, 일월신교의 무리들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강엽을 돌아보았다.

    “대신 당신하고만 얘기하겠다.”

    “안 됩니다!”

    수성좌가 반대를 표했지만, 여인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올리며 강엽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일월신교의 무리들이 충격으로 가늘게 떨 때 여인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한 사람을 더 데려가도 될까요?”

    수성좌가 화색을 띠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가 가리킨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저기 계신 소저를 데려가고 싶군요.”

    “...저요?”

    당혹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백서희는 거절하지 않았다.

    강엽을 믿는 것과 별개로 일월신교의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대화를 하려는데, 여인이 돌연 면사를 벗었다.

    “...!”

    “...!”

    눈가에 잔주름이 진 중년 미부. 나이가 든 지금도 고아한 용모는 화폭에서 나온 미인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두 사람이 놀란 이유는 걸출한 용모 때문이 아니었다. 기이하리만치 속을 꿰뚫어볼 수 없는 면사 속에 숨어있던 얼굴.

    강엽은 비로소 왜 그녀가 백서희를 지목했는지 깨달았다.

    ‘닮았군.’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백서희가 훗날 나이를 먹으면 여인과 비슷한 인상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닮은 구석이 많았다.

    백서희 역시 충격을 받고 눈매를 잘게 떨었다.

    “당신....”

    가족끼리도 이토록 닮은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백서희는 일월신교주의 딸이자 흑룡교의 신녀였던 조모를 빼다박은 것처럼 닮은꼴.

    여인이 우아하게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정식으로 소개드리겠습니다. 일월신교의 신녀인 유소향입니다.”

    “교주의 핏줄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손녀딸을 대하는 것마냥 자애로운 눈길.

    자신의 핏줄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백서희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으나, 여인의 말을 막지는 못했다.

    “사적으로는 저 소저의 종고모(從姑母)가 되지요.”

    “이해가 안 되는데.”

    강엽의 고개가 모로 꼬였다.

    ‘흑룡교는 멸망했다. 백서희도 흑접에서 자랐고. 외부인이 진실을 알기는 힘들 텐데....’

    단지 용모가 닮았다는 것만으로 핏줄을 알아보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하물며 백서희와의 혈연 관계를 정확히 짚어내는 것까지.

    “일월신교 신녀의 능력인가?”

    “예. 일월신교의 신녀는 대대로 교주의 일맥에서 나왔는데, 같은 핏줄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

    “신녀는 별자리로 앞날을 내다봅니다.”

    “천기를 엿본다?”

    “그와는 조금 다릅니다. 소위 신인의 경지에 오른 절대자들은 천리(天理)를 깨닫고 그 흐름을 엿보지만, 신녀들이 타고난 예지력은 신통력에 가깝거든요.”

    “어쨌든 미래를 보긴 한다는 거군.”

    “원한다고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마음대로 앞날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나, 일단 예지로 본 결과는 거의 다 들어맞는 말일까.

    ‘하긴 그래야 신녀의 권위가 서겠지.’

    안 그래도 쓰기 까다로운 예지가 결과마저 신통치 못하다면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질 터.

    어느 시점에서 신녀가 예지로 강엽과 그 옆에 있는 백서희를 통찰했다면 앞뒤 맥락은 맞는다.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것 말고 숨긴 게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앞서 얘기한 대흉도 흘려들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강엽은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이제 와서 정체를 숨기는 건 의미가 없겠군.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강엽이 일월성신의 영성을 깨우친 지금, 일월신교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은 두 가지다.

    교주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여겨 제거하거나, 초대 교주의 전생으로 여기고 받들거나.

    신녀쯤 되는 고위 인사가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강호행을 나선 이유가 무엇이겠나.

    “예, 강 무사님은....”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줄인 그녀가 굳게 결심한 얼굴로 결연하게 말했다.

    “본교의 신인으로 점지된 분입니다.”

    * * *

    일월신교는 일월신마공을 잃었다.

    신공을 익혔던 최후의 교주는 갑작스런 마병(魔病)으로 인해 상단전에 광기가 들었다.

    교를 지켜야 할 교주가 주화입마에 빠져 교인들을 학살한 것이다.

    “당시에 칠성좌 중 네 분이 목숨을 잃었지요. 수많은 교인들이 죽거나 폐인이 됐습니다.”

    심상지경에 든 고수가 주화입마에 빠지는 건 불가능한 일.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교주는 폭주를 거듭하면서 일월신교를 나가 혈겁을 자행했다.

    “북쪽으로 향했지요. 거기서 소식이 끊겼습니다.”

    교주의 독문무공을 잃은 것은 막대한 손실.

    하지만 당시의 일월신교는 너무 피해가 커서 일월신마공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문 뒤에야 교주를 찾기 위해 사람을 보냈지만,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

    “수없이 사람을 보낸 끝에 교주의 흔적이 북해로 이어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조사단의 누구도 교주를 찾지 못했습니다.”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건져야 한다.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교주의 시신을 객지에 둘 순 없는 법.

    하나 하얀 설원과 얼어붙은 바다만 존재하는 북해에서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북해빙궁이었지요. 그들에게 수차례 협조를 요청했지만 그들은 묵살했습니다.”

    만약 일월신교가 성세를 누렸다면 즉시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교세는 예전만 못했고, 북해빙궁은 지나치게 멀리 있었다.

    “일월신마공을 찾지 못한 교의 후인들은 권력다툼에 빠졌습니다. 누가 교주의 적통을 이을 것인지를 두고 십수 년이 넘게 다퉜지요.”

    혼란 속에서 누군가는 교주에 오르기도 했으나, 치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반란과 암살, 그리고 교주 자신이 무리하게 일월신마공을 복원하려다 주화입마에 빠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

    ‘북해빙궁이라....’

    낭왕이 북해빙궁에 가서 내상을 입은 것이 신녀가 말한 것과 관련이 있을까?

    ‘주화입마에 빠졌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는 없고... 다른 문제 때문일 공산이 크긴 한데.’

    이건 북해로 가야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신녀의 말이 이어졌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도 본교는 두 쪽으로 갈라져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주화파와 주전파로 갈라졌지만 실은 교주의 권좌를 놓고 대립하는 중이지요.”

    “당신은 어느 진영에 속하지?”

    “전 중립입니다.”

    “정치에 중립이란 게 있던가?”

    “신녀라면 가능하지요.”

    교인들의 존경을 받는 신녀가 한쪽을 편든다면 대세가 기운다. 그렇기에 양측 모두 신녀가 상대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이해관계 속에 지어진 사상누각이군.”

    “맞습니다.”

    한쪽의 세력이 강성해지거나, 훗날 교주가 정해진다면 그녀의 권위는 예전만 못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양 세력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는 지금에 와서 칼자루가 쥐어진 셈.

    “저는 예지로 강 무사님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당신은 약했지요. 고작 혈교의 교성에게도 쩔쩔매며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흑룡교의 비밀 분타에서 단혼마백과 싸울 때인가.

    아니, 예지로 내다봤다고 했으니 실제로는 그보다도 이른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강해질 때까지 기다렸다는 거군.”

    “예. 불안한 때가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강 무사님은 위기를 넘기셨지요. 예지로 엿본 저조차 믿기지 않을 만큼 눈부신 성장세였습니다.”

    일월신교의 역대 교주들 중에 이토록 빠른 시간에 완성된 교주는 전무하다. 가장 빠른 교주조차도 불혹이 넘어서야 심상지경에 발을 들였다.

    백서희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따졌다.

    “그래서 이제 와서 강엽을 데려가겠다고요? 가봤자 환영받지 못할 텐데요?”

    주화파와 주전파 모두 강엽을 반기지 않을 터. 일월신교에 가면 콩가루 싸움에 끼어들어야 한다.

    “교주가 되면 세력을 얻을 수 있어요. 장차 광명마교와 혈교를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쪽은 집안 싸움을 치렀다면서요. 칠성좌도 둘로 갈라져서 대립하는 거 아니에요?”

    까딱하면 양쪽의 협공을 받을 수도 있는 일.

    백서희가 그러한 가능성을 상기시켰는데도 일월신교의 신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월신마공의 권위는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입니다.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을 교인은 없어요.”

    “인간의 권력욕은 사람들의 상상 이상으로 지독하고요. 바로 앞에 권좌가 있는데, 일월신마공이 나타났다고 야심을 꺾겠어요? 강엽은 교주의 핏줄도 아니잖아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언쟁. 손녀딸을 바라보는 듯했던 신녀의 눈에 무형의 기백이 어렸다.

    강엽이 나선 건 그때였다.

    “일월신교로 갈 생각은 없소.”

    처음보단 정중해진 테도였다.

    신녀가 적이 아니라면 굳이 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백서희는 만족스럽게 웃었고, 신녀는 아쉬움의 탄식을 쏟아냈다.

    “만인지상의 권력자가 될 수 있는데도 말인가요?”

    “권력이 필요하다면 욕심을 내겠지. 하지만 지금 교주의 권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소.”

    하물며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 마당이다. 그 일을 다 처리한 뒤라면 몰라도 당장은 시기상조였다.

    “...그 말씀은, 필요해지면 찾겠다는 뜻이군요.”

    “상황이 그렇게 극적으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상황은 이미 최악을 내달리고 있을 것이다. 내분에 휩싸인 콩가루 세력이 필요할 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니까.

    그쯤에서 강엽은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아까 한 말은 뭐요? 그냥 가면 대흉을 맞닥뜨릴 거란 말.”

    “...말씀드리기 송구하나, 강 무사님이 살해당하는 걸 봤습니다.”

    강엽은 침묵했고, 백서희는 그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졌다.

    “말도 안 돼요. 강엽은....”

    “재생력을 지니셨지요. 그러나 세상엔 불사의 공능조차 허물어뜨리는 수법이 있습니다.”

    심상절예.

    강엽이 가라앉은 어조로 물었다.

    “흉수도 봤소?”

    신녀가 고개를 저으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 부분은 흐릿해서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그녀가 소매에서 납작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보다 작은 금속패였다.

    “시조께서 만드신 호신부입니다. 이게 강 무사님을 지켜줄 겁니다.”

    * * *

    천재지변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황량한 거리.

    한때 번성했던 도시는 낡고 부서져서 외로운 바람만 불고 있었다.

    폐성의 어귀에 나직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장신의 사내.

    아무 장식도 없는 하얀 민무늬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을씨년스러운 전경을 둘러보다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흘러내리는 사기(死氣)가, 돌바닥을 뚫고 나온 잡초를 말라죽이고 있다.

    나무는 말라비틀어지고 풍성한 잎사귀는 단풍을 앞당긴 것처럼 누렇게 뜬다. 하늘을 날던 새들이 날개를 접고 추락하면서 피투성이가 된다.

    죽음을 흩뿌리던 가면의 사내는 이윽고 도시 바깥에 있는 얕은 구릉에 올라갔다.

    그 아래에 수라장이 있었다.

    “자리를 사수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뚫려선 아니 된다!”

    “어찌 이런 참람한 일이...!”

    일단의 무인들이 배수진의 각오로 싸우고 있었다.

    구파와 팔가, 무림맹, 낭인 등 온갖 군상이 섞인 무리.

    무인의 검은 응당 같은 무인에게 휘둘러져야 할 텐데, 그들이 싸우는 대상은 무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는 자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우는 자는 사술에 의해 부활한 망자들이었으니까.

    만부부당이라고 했다. 절세신공으로 호흡하는 무인들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며칠이나 쉬지도 못하고 피로가 쌓였다면 더더욱.

    콰직!

    “크악!”

    “사형! 안 돼애애애!”

    방어선의 일각이 무너졌다.

    무인들의 검이 망자들의 목을 추수했으나, 그보다 배로 많은 망자들이 밀려들어왔다.

    무당의 도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원시천존, 어찌 죄없는 양민들까지....”

    혼자 막기엔 역부족이었으나, 다 헤진 청죽색 장포를 입은 정예 무인들이 그를 도왔다.

    광명마교를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창설된 척마대.

    그들은 투지로 망자들을 몰아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가면의 사내는 물샐 틈 없는 호위를 받는 무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부좌를 앉은 선풍도골의 노인.

    전신에 허허로운 기운을 둘렀으나, 그 몸은 망부석처럼 굳어 있었다.

    가면의 사내가 그 이름을 불렀다.

    [검선.]

    찰나, 노인의 눈이 반쯤 열렸다.

    수백 장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명확히 인식하는 눈빛.

    무당 장문인, 검선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마의(魔醫).

    사대악인으로서 삼사도의 좌를 꿰찬 자.

    그가 이 땅을 망자의 군세로 뒤덮은 장본인이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고통은 한순간에 끝날 거다.]

    한 자쯤 되는 짧은 소검에서 무채색의 파동이 피어오른다.

    -심상절예 구현....

    백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악명을 떨쳤지만 그 정체가 일절 알려지지 않은 불가사의한 마인.

    그가 휘두른 심상이 전장에 광기를 불어넣었다.

    -생사역전(生死逆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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