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수습 (3)
신유는 힘겹게 눈을 떴다.
“으음....”
“어엇!”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리는데 웬 뾰족한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가물가물한 시야 사이로 언뜻 묘령의 여인이 보였다.
“소, 소저는...?”
메마른 목구멍 사이로 나오는 갈라진 목소리.
여인이 물잔을 내밀자 신유는 앞섶이 적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꿀꺽꿀꺽 받아마셨다.
그렇게 조금 지나니 의식이 명료해졌다.
“여긴... 음, 태화문인가?”
“네, 신유 어르신.”
“...살려줘서 고맙네.”
염천혈(廉泉穴)에 내공을 돌려서 목소리를 되찾은 신유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사실 태화문 입장에서 그는 목을 쳐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었다. 비록 이지를 제압당했다고는 하나 혈교의 편에서 그들과 싸우지 않았던가?
그를 간병한 여인, 금사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괘념치 마세요. 어르신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잘 알고 있는 걸요.”
한때 맹월림에 의해 꼭두각시로 지냈던 그녀는 신유의 심정을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희가 아는 한 어르신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없어요.”
“그게... 참말인가?”
“예.”
신유는 요선의 곁을 지켰을 뿐.
태화문에 오기 전의 상황까진 모르지만, 적어도 일행이 파악한 바로는 그랬다.
“후, 다행이구만. 참으로 다행이야....”
신유가 눈을 감고 안도했다.
“이럴 게 아니라 태화문주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네. 연통을 넣어줄 수 있겠는가?”
“아하하, 그게 제가 태화문의 사람이 아니라서 당장은... 일단 말씀은 드려볼게요.”
“태화문의 사람이... 아, 그렇군.”
그를 쓰러트리기 위해 합공한 이들.
금사하를 본 기억은 없지만, 신유는 그녀가 그들의 일행임을 알고 고개를 주억였다.
“소저의 동료들은 무사한가?”
“괜찮아요. 좀 다치신 분들도 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거든요. 다들 훌훌 털고 일어나셨답니다.”
삼화취정에 이른 초고수 특유의 회복력과 완안극의 의술이 더해진 결과 일행은 금세 회복됐다.
그때 신유의 배가 꾸르릉거리며 아우성을 쳤다.
“험험.”
“풋, 식사부터 하셔야겠네요.”
금사하가 키득거리며 일어나자 신유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내가 며칠이나 굶은 건가?”
“엿새나 굶으셨죠.”
일행과의 싸움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다시 졸도했고, 지금까지 쭉 잠들었다.
“저희 일행 중에 한 분이 고명한 의원이신데, 그분의 말씀으로는 건강의 이상은 없다고 하셨어요. 잘 먹고 잘 쉬면 괜찮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렇군. 알겠네.”
실은 신유도 알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본능적으로 진기를 일주천했던 것이다.
“아무튼 정신을 차리셨으니 식사 가져올게요. 오래 굶으셨으니 당분간은 미음만 드셔야 할 거예요.”
“쩝, 술도 못 마시는 건가?”
“꿈도 꾸지 말라고 하시던데요.”
아마 완안극이 저 말을 들으면 술병으로 신유의 골통을 후려치지 않을까.
금사하는 왠지 머릿속을 스치는 상상에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방을 나왔다.
* * *
신유가 회복했다는 소식은 금세 전해졌다.
강엽이 백서희와 조영옥을 데리고 찾아오자 신유가 싱글벙글 웃었다.
“허허, 깨어나자마자 이렇게 많은 미인들을 만나다니 복락이 따로 없네그려.”
천하팔존이라서 강호인들의 존경을 받긴 하지만, 신유는 칠순이 넘는 나이에도 여인들과 풍류를 즐기는 한량.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른 내공 덕에 본래 나이보다 젊어 보여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 늙은 주제에 주색에 빠졌다고 욕먹었을 것이다.
능글맞게 웃던 신유가 강엽을 돌아봤다.
“한데 자네는 누군가?”
“강엽. 강호에선 귀영이라 불립니다.”
“...허험, 미안하네. 내 십 년간 혈교에 붙잡혀 있어서 요즘 강호 사정을 잘 모르겠구먼.”
신유가 강호를 활보하고 다녔을 때 강엽은 지학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다.
백서희가 대신 소개했다.
“이이는 요즘 사도십대고수로 불려요. 낭인전의 금패급 낭인이고요.”
“...사도십대고수?”
“네, 뭐 못 믿으실 수도 있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 이런 무공을 지녔는데 겨우 사도십대고수라고? 내가 잠시 떠난 사이에 무림의 수준이 이렇게 높아졌나?”
신유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자네가 요선을 죽였지?”
백서희와 조영옥도 삼화취정의 경지에 올랐지만 그녀들의 경지는 대충 가늠이 된다.
하지만 강엽은 밑바닥을 헤아리지 못하겠다. 강하다는 것만 어렴풋이 직감할 수 있을 뿐.
“알고 계시니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제가 요선을 죽인 게 맞습니다.”
“...짐작은 했지만 믿기지 않는군.”
신유는 호교사천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무림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개개인이 천하팔존을 능가하는 초강자들.
백도제일인이라 불리는 불권, 혹은 무당의 검선 정도만이 상대할 수 있을 터.
요선이 불완전한 상태였다고 하나 신유가 그랬듯 어지간한 천하팔존은 제압할 수 있다.
그런 요선을 쓰러트렸다는 것은....
“운이 좋았습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진조가 요선의 기세를 꺾지 않았다면, 또 조영옥의 의식이 내부에서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내가 졌을지도 모르지.’
아홉 개의 꼬리로 심극의 고수들을 불러내고, 그 자신은 심상절예를 쓰는 요선의 무공은 위험했다.
신유가 헛웃음을 흘렸다.
“운도 실력이네. 하늘이 돕는다고 해도 실력 없는 이가 어찌 운을 잡겠나?”
“그럼 제가 잘난 걸로 하겠습니다.”
“....”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자네도 생각보다 뻔뻔하다 싶어서....”
뭔가 이건 아닌데 싶은데 반박할 말이 없다.
한동안 입을 달싹거린 신유는 포기했다는 듯이 혀를 내두르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 친구는 뭐 그렇다 치고. 자네는 누군가?”
“조영옥이라고 합니다. 곧 태화문의 문주로 취임할 예정이지요. 강호인들은 흑호선이라 불러줍니다.”
조영옥이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예를 갖추자 신유도 똑같이 포권을 쥐며 화답했다.
“귀하가 태화문의 주인이었구려. 신세를 졌소이다.”
강엽이야 무림의 선배된 신분으로 말을 놨지만 조영옥은 일문의 문주가 될 신분.
아직 문주가 되지 않았다고 해도 주인이나 다름없는 만큼 그에 걸맞는 예우를 해야 했다.
“내 비록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아다닌 한량이라 하나 은혜를 모르는 무뢰배는 아니오. 문주께 진 빚은 어떻게든 갚겠소이다.”
“갈 곳은 있으신가요?”
“혹시 무림맹이 혈교에 맞서고 있소?”
혈교가 난리를 쳤으니 무림맹에서도 뭔가 대책을 마련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강엽이 말했다.
“상황이 복잡합니다, 노선배.”
강엽은 천하가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 이야기했고, 신유는 가만히 그 말을 경청했다. 가끔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을 때만 질문할 뿐이었다.
이윽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는 마음 깊이 탄식했다.
“개판이구만.”
“지금은 온 천하가 혼란스럽습니다.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지요.”
“으음, 그렇다면 난 사천에 있겠네.”
광명마교의 문제도 심각하나 그는 혈교와 은원을 맺은 몸. 혈교를 두고 다른 곳과 싸울 순 없었다.
조영옥이 물었다.
“선배님, 본문에 머무르시는 건 어떠실까요?”
“제안은 고마우나 타고난 성정 탓에 힘들 것 같구려. 어딘가에 매여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
평생 동안 강호를 주유했던 신유였다. 타의에 의해 십 년간 감금되었던 걸 빼면, 그는 평생 한 곳에 오래 머무른 적이 없었다.
“당분간은 사천을 떠돌며 혈귀들을 발견하는 족족 골통을 깨줄 생각이오. 대신 문주께서 부르시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오겠소.”
조영옥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그윽하게 웃으며 포권을 쥐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허허, 웃으니 참으로 아름답구려. 내 문주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도 자주 들려야겠소이다.”
신유가 은근슬쩍 다가오자 기가 막히게 몸을 빼는 조영옥이었다. 그러다 보니 강엽에게 살짝 밀착하게 됐는데, 그 꼴을 본 백서희가 가자미눈을 치켜떴다.
두 여자 사이에 낀 강엽만 난감해져서 한숨을 쉬고 있는데, 신유가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자네도 제법이구만. 생긴 건 목석 같은데 훌륭한 화화공자의 기질이 보여.”
“....”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에 강엽은 떨떠름해졌다.
* * *
대공자의 장례는 화장으로 치러졌다.
오누이의 부친이자 전대 문주인 번천광야 조광해가 매년 시주했던 사찰이 다비식을 거행했다.
가루가 된 유골을 석탑에 모신 뒤, 상복을 입은 전대 방주들과 간부들은 그 자리에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뒷방으로 물러나겠지만 자식들과 제자들의 안위를 보장받았다. 물론 조영옥에게 충성하는 이들만이 후사를 이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난 뒤 조영옥은 정식으로 문주에 취임했고 그 자리에서 논공행상을 끝냈다.
“급한 일들은 얼추 끝났어요. 아직도 할 일이 산처럼 쌓였다는 게 문제지만요.”
“적당히 쉬면서 일하시오.”
“지금은 바쁜 게 좋아요.”
강엽은 반박하지 않았다.
연일 격무에 치인다고 하소연하는 것과 달리 실은 누구보다 일거리를 찾고 있는 조영옥이었다.
‘지금은 일에 파묻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이라고 해도 혈육의 피를 손에 묻힌 것은 큰 상처였을 것이다. 계략이나 정쟁으로 숙청시킨 것과는 다른 무게로 다가왔을 터.
불길에 휩싸인 대공자의 관을 공허한 눈으로 바라봤던 그녀의 얼굴이 아직도 선연했다.
“이런 말이 위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대공자는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소.”
“네?”
“달리는 호랑이에 올라타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지. 그 자신은 멈출 수 없었지만, 누군가는 자신을 멈춰주길 바랐을지도 모르오.”
“....”
조영옥은 아는 대공자는 자신이 결정한 일을 후회할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후회하더라도 죽은 사람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이건 그녀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하는 배려이리라.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있던 그녀가 문득 표정을 풀고 옅게 웃었다.
“...고마워요.”
“뭐가 말이오?”
“그냥 이것저것 다요. 바로 떠나지 않은 것도....”
“도의상 취임식까진 봐야 한다고 생각했소. 일이 끝났으니 이젠 떠나야지.”
“호광에 갈 건가요?”
“아마도.”
“큰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언제나 강 무사부터 찾는 것 같네요. 강 무사야말로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
“...뭐, 어쩔 수 있나.”
그래도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조영옥이 쿡쿡 웃었다.
“힘들면 찾아오세요. 언제든 환영할 테니까. 마침 ‘그것’도 있잖아요?”
“조 문주가 허락해준 덕이오.”
“다른 사람이라면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강 무사니까 특별히 허락해준 거죠.”
특별히란 말을 유난히 강조하면서 묘한 눈웃음을 보내는 그녀였다.
“사실 기억하고 있어요.”
“...?”
“입맞춤한 거요.”
“쿨럭! 컥!”
강엽이 사레 들린 것처럼 마른 기침을 하자 조영옥의 웃음이 더 커졌다. 눈물을 찔끔할 정도로 폭소하다가 눈가를 훔칠 정도였다.
“강 무사가 이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 보네요. 혼자 보기 아까운데요?”
“...아까 그 말 정말이오?”
“기억 안 나면 다시 해줄까요?”
정말로 입을 맞출 기세로 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강엽이 뜨악하자 조영옥이 새침한 표정으로 삐죽거렸다.
“싫어요? 그때는 잘만 했으면서?”
“아니, 그게....”
요선을 속이려면 섭혼술에 넘어간 시늉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데서는 묘하게 쑥맥 같네요. 신유 선배 같았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넙죽 받았을 텐데.”
“그 인간은 여자들 끼고 노는 게 삶의 낙이니 그런 거고. 자타공인 천하에서 가장 강한 한량 아니오?”
“백 소저가 신경 쓰이는 거죠?”
“....”
“제가 싫은 건 아니군요. 다행이에요.”
“그건 절대 아니오.”
조영옥의 입가에 호선이 떠올랐다.
그녀는 큰 용기를 낸 것처럼 대담하게 거리를 좁혀왔고, 강엽이 피하기 전에 까치발을 들어올렸다.
부드러운 입맞춤 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는 듯 강엽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후우, 참으려고 했는데... 결국 못 참았네요.”
“....”
“요선의 말이 하나는 맞았어요. 전 천생 욕심 많은 여자라서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사족을 못 쓰거든요.”
“문주.”
“백 소저와 싸우긴 싫어요. 오히려 잘 지내고 싶은 걸요. 그러니까 첫 번째는 양보할게요.”
강엽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느새 뒤편의 나무에 삐딱하게 기대고 선 여인에게 건네는 말.
백서희는 돌처럼 굳어진 강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흥, 좋아서 기감 둔해진 것 좀 보라지.”
강엽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요선과 한 번 더 싸우는 게 낫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모습에 코웃음을 친 백서희가 조영옥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이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아요?”
“...진조라는 분을 만났어요.”
“강엽의 정체를 안다? 그러고도 마음이 변치 않았어요?”
강엽은 흡혈귀다. 연명하기 위해 피를 마셔야 하는 족속. 백서희는 그걸 안 뒤에 강엽과 맺어졌지만, 조영옥도 그럴진 두고볼 일이었다.
조영옥이 굳게 주억였다.
“언니라고 불러드릴까요?”
“...아니, 조 소저가 나보다 나이 많잖아요? 그리고 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당신쯤 되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까지 해요?”
조영옥의 용모와 능력, 그리고 배경까지. 그녀의 환심을 살 수만 있다면 간이라도 빼줄 남자가 태화문의 바깥 십 리까지 진을 칠 것이다.
“그저 그런 남자는 관심 없거든요. 그리고 전 이래봬도 인연을 중시하는지라.”
“그게 뭔....”
어처구니가 없어서 얼이 빠진 백서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게슴츠레하게 조영옥을 바라봤다.
“설마 이제 와서 지고지순한 애정을 깨우친 것처럼 굴면 속아넘어갈 거라 생각했어요?”
“...쳇.”
방금 혀 차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하지만 조영옥은 그런 적 없다는 것처럼 오리발을 내밀었다.
부글부글 끓지만 애써 참는다는 듯이 길게 심호흡을 한 백서희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좋아요. 아까 두 번째라고 했죠?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약속 하나 해요.”
“말씀하세요.”
“정실은 나예요.”
“대신 태화문의 후계자는 제 소생인 걸로.”
“그건 마음대로 하시고. 단, 이제부터 언니라고 불러요.”
“아까는 싫다면서요?”
“싫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그럴게요, 언니.”
“오냐, 동생아.”
갈수록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대화. 넋을 잃은 채 듣고 있던 강엽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나한테는 왜 안 묻는데?”
“시끄러워. 넌 이따 죽을 줄 알아.”
대체 어떻게 죽이겠다는 말일까.
강엽은 떫은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질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