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요선 (7)
광명마교주의 심상절예 천단.
이름 그대로 하늘마저 베어버리겠다는 광오한 심상은, 요선의 혼백을 통째로 지워버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크읏...!’
손 안에 쥔 심검이 반발한다.
자신을 쥔 자가 주인이 아님을 알고서 거칠게 저항하면서 강엽마저 파멸시키고자 한다.
이대로라면 요선이 바랐던 대로 사이 좋게 공멸하고 말 터.
-단 한 번이지만, 네 역량이 받쳐준다면 본좌의 심상절예를 흉내낼 수 있을 것이다.
전날 광명마교주의 충고는 빈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강엽은 비록 불완전한 위력일지언정 광명마교주의 심상절예를 흉내냈으니까.
문제는 그가 언급한 역량이, 단지 심상절예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역량만이 아니라는 것.
심상절예를 발휘하고도 심검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다면 결국 그 격류에 휩쓸릴 뿐이었다.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당연하지만 강엽은 광명마교주가 심상 조각을 넘겨준 것이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심상절예를 쓸 수 있다는 건 그 자신의 통찰로 짚었고, 진조의 조언을 얻어 확인하기까지 했지만.
막상 쓰고 나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마지막까지 최후의 보루로 남겨뒀다.
“강 무사...!”
조영옥이 달려오려고 하자 강엽은 고개를 저어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안색이 백짓장처럼 질리고 식은땀이 흘러나왔지만 그녀가 함부로 끼어들면 더 위험했다.
“버틸 만하오.”
“그래도....”
조영옥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흐음, 결국 이렇게 되는군.]
불현듯 강엽의 그림자에서 나온 진조의 거구가 두 사람을 굽어봤다.
아무리 봐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형상에 조영옥이 반사적으로 공력을 끌어올렸으나, 진조의 손짓에 그 시도는 단숨에 분쇄되었다.
“이게 무슨...!”
[여긴 현실이 아니라 심상세계다. 심상세계에서 힘을 휘두르는 건 심상의 강함에 달렸지. 계집, 네가 애송이치고 제법 강하긴 하나 짐과 비교할 순 없느니라.]
말문이 막힌 그녀를 뒤로한 진조는 진땀을 빼고 있는 강엽을 한심하게 내려다봤다.
[정녕 방법이 없을 때나 쓰라고 하지 않았더냐? 친절히 충고까지 해줬건만 괘씸한 놈이로고.]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천만에. 저 계집이 죽도록 놔뒀어야 했다. 네놈은 저 계집을 살리겠다고 위험을 자초한 게야.]
강엽이 정마안을 걸었던 시점에서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요선이 동귀어진을 마음먹은 순간 멀찍이 떨어졌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강엽은 조영옥을 구하겠다고 굳이 광명마교주의 심상절예를 쓰는 위험을 감수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
조영옥의 물음에도 강엽은 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살리고자 심상절예를 쓴 건 맞지만, 단지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으니까.
“만약 요선이 조영옥과 함께 동귀어진을 하게 뒀다면, 요선의 혼백은 혈교에 갔을 거다.”
[그래서?]
“요선이 부활하진 않더라도, 그녀의 혼백이 혈마의 부활을 앞당길 수도 있었겠지.”
[.......]
광명마교주도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혈교가 혈겁을 일으킨 것은 모두 혈마와 호교사천의 부활을 위해서였다고.
왜 혈마가 아니라 호교사천부터 부활시키는 걸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혈마를 부활시키는 데 더 많은 혼백이 필요해서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강엽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만에 하나 호교사천이 죽으면, 그들의 혼백마저 혈마 자신의 부활을 위해 쓰일 가능성이 있어.”
[해서 심상절예를 썼다? 그 여우년의 혼백을 없애기 위해?]
“확신은 없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선택이 맞았던 것 같다.”
심상절예에 베인 요선의 혼백은 티끝 하나 남지 않고 사라졌다.
이제 그녀의 혼백이 혈마의 부활을 위한 초석으로 쓰일 일은 없겠지.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진조가 혀를 찼다.
[...그래, 듣고 보니 후계자 네놈의 말이 마냥 틀린 건 아니구나.]
물론 요선의 혼백을 먼지 하나 안 남기고 소멸시켰어도 혈마의 부활을 완전히 막을 순 없으리라.
그러나 진조는 강엽의 논리를 파훼하는 대신 눈을 빛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말해.”
강엽이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시간이 갈수록 심검을 제어하는 게 부담스러웠기에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땀도 비오듯 쏟아졌고....
[두 가지가 있다.]
혈공진기로 만든 손가락을 두 개 펴든 진조가 하나씩 접었다.
[하나는 짐이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왜 검지를 접고 중지만 남겨두지?”
보통은 반대가 아닌가?
강엽이 게슴츠레하게 쳐다보자 진조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아니지. 그래서 얼마나 걸리지?”
[며칠은 걸릴 게다.]
달리 말하면 그때까지 심검이 폭주하지 않도록 계속 쥐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강엽이 한숨을 쉬자 그가 남은 손가락까지 접으면서 말을 이었다.
[다른 하나는 저 계집을 이용하는 거다.]
“음?”
“...저 말인가요?”
강엽은 미간을 찌푸렸고, 조영옥은 혼란이 극에 달한 것처럼 어지러운 표정이었다.
[이곳은 요선의 심상세계가 아니다. 저 계집의 심상세계지. 엄밀히 말해 우리는 침입자란 말이다.]
“그게 뭐 어쨌다... 아, 그렇군.”
강엽이 따지다 말고 뭔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답답해진 것은 조영옥이었다.
그녀가 곱게 눈을 흘겼다.
“지금 뭐 암어라도 주고받나요? 저도 좀 이해되게 설명해주셨으면 하는데요?”
[간단하다. 네 백회혈로 저놈의 수중에 있는 심검을 내보내자는 거지.]
전혀 간단한 게 아닌데.
그러나 그녀가 기가 막히든 말든 이미 진조는 멋대로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아니면 짐이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든가. 한데 그러다 저놈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걸 바라느냐?]
“...천만에요.”
그녀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둘 만큼 뻔뻔하지 않았다.
둘 다 살아남으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진조의 말에 담긴 맥락을 파악한 그녀가 결연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말씀해주세요. 제가 뭘 하면 되지요?”
* * *
가부좌를 튼 조영옥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긴장감이 역력한 그녀를 보며 진조가 말했다.
[이제부터 넌 통로가 될 것이다. 심검의 남은 기운을 모조리 밖으로 배출하기 위한 통로가.]
“준비됐소?”
“...네.”
강엽의 손이 등에 닿자 그녀가 움찔 흔들렸다.
강엽은 한 손으로 심검을 억누르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명문혈에 기운을 주입하려는 것이다.
“위험한 짓이오. 진조가 해법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차라리 진조가 회복할 때까지 강엽이 어떻게든 억누르고 있는 게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영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도 간신히 버티잖아요. 그런데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겠어요?”
“실패하면 공녀가 죽을 거요.”
“강 무사는 저를 위해 목숨을 걸었지요. 그게 오롯이 저를 위해서만은 아니라지만, 은혜를 입었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어요.”
“...그럼 사양 않고 가겠소.”
“읏...!”
무릇 명문혈은 생명의 문이라고 불리는 요혈.
그런 명문혈을 타인에게 내준다는 것은 목숨을 맡긴다는 뜻이었다.
하나 지금 강엽이 쏟아붓는 것은 평범한 진기가 아니라, 절대고수의 심상이 담긴 필멸의 기운.
심상지경에 오른 강엽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기운을 그녀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흉폭한 기운이 흘러들어오자 그녀가 목구멍에서 치밀어오른 피를 웩하고 토해냈다.
‘현실의 육신도 내상을 입었겠지.’
몸과 정신은 연동되는 법.
심상세계에서 입은 피해는 육신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니 현실의 조영옥 또한 피를 토했으리라.
“끄으윽...!”
[입 열지 마라.]
격체전력으로 심검의 기운을 전하는 이 상황에서 입을 열면 두 사람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입을 비롯해 칠공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붉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역시 무리였나...?’
하나 이미 시작된 격체전력을 끝낼 수는 없는 노릇.
이렇게 된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우우우우우웅......!
독맥을 통해 조금씩 뇌호혈(腦戶穴)로 올라가던 심검의 기운이 마침내 정수리까지 치달았다.
실수하면 조영옥은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될 터.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건지더라도, 주화입마에 빠져 폐인이 되는 꼴을 면치 못하겠지.
그렇기에 강엽도 전에 없이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심검의 기운을 백회로 밀어올렸다.
퍼석!
“음...!”
문득 돌무리에 걸린 것처럼 돌연 진로를 방해하는 의지를 느낀 강엽이 눈매를 좁혔다.
진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 여우년이 쉽게 죽을 리가 없지.]
화아아아아악!
강엽의 손이 맞닿은 명문혈 아래, 둔부 위쪽에서 아홉 갈래의 검은 꼬리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빌어먹을 진조와 그 후예! 끝까지 방해하는구나!
육성으로 전해진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강엽은 요선이 목소리를 들은 기분에 휩싸였다.
[신경 쓰지 마라. 저건 잔류 사념이다. 네 안에 있는 짐처럼 요선이 남긴 흔적이지.]
심상절예에 당하기 전에 만약을 위해 조영옥의 안에 그녀의 심상을 남겨둔 것이리라.
그로써 언젠가 기회를 봐서 조영옥의 혼백을 지우고 그 육신을 집어삼킬 심산이었겠지.
새삼 요선의 명줄이 질기다고 한 진조의 말을 구구절절 실감하며 심상의 기운으로 그녀를 쳤다.
-아아아아악!
마지막까지 버텼던 요선이 사라지고, 그녀가 남긴 기운이 조영옥의 경맥에 흡수된다.
아홉 꼬리를 병풍처럼 두른 조영옥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금빛 광채가 사위를 밝히는 순간.
파아아아아아앗-!
백회를 빠져나온 심검이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현실의 두 사람을 가둔 심법진의 공간을 갈라버렸다.
* * *
“이건...?”
완안극이 이채를 발했다.
태화문의 경내를 가득 덮었던 심법진의 기운.
외부에서도 확연히 느낄 만큼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드리웠던 심법진에 구멍이 뚫렸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처럼 기감에 극도로 민감한 초고수라면 알아챌 수밖에 없는 기파.
다소 지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후우, 그분이 성공하셨군요.”
어깨까지 머리칼을 드리운 청년.
세 자루의 이기어검을 수족처럼 다루었던 혈룡검군이 코에서 흐르는 피를 슥 훔치며 일어섰다.
자랑처럼 여긴 이기어검 중 하나가 동강나며 그 반동이 그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혈안사군이나 혈산패군처럼 재생력을 갖추지 못한 그로서는 상당히 중한 내상이었다.
완안극 역시 적잖은 피해를 감수했지만, 혈룡검군과는 달리 재생력으로 상처를 치유했다.
이미 그 시점에서 서로의 격차는 명백한 상황. 그럼에도 혈룡검군의 얼굴에 패배감 따윈 없었다.
“무슨 헛소리냐?”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우리가 이긴 겁니다. 요선께서 이공녀의 육신을 차지하셨을 터. 필시 당신의 주군인 귀영도 목숨을 잃었겠지요.”
“하, 제 눈으로 본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자신하느냐?”
“당신도 느꼈을 텐데요. 심법진의 기운을 찢고 나온 게 누구의 것인지 말입니다.”
“....”
완안극은 눈살만 찌푸렸다.
그 역시 심법진의 기운을 찢고 나온 게 강엽의 기운이 아님을 일찌감치 알아차렸으니까.
입과 코로 피를 줄줄이 흘리면서도 혈룡검군은 짐짓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 호교사천의 완전한 부활이라! 이로써 본교는 천하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습니다! 무림맹도, 광명마교도 두렵지 않-!”
자신 있게 내뱉은 그때.
콰아아아아앙!
별안간 무지막지한 기파가 그를 후려쳤다.
“커억!?”
두 자루의 이기어검을 교차하고, 호신강기를 두른 끝에 간신히 막아선 그가 눈을 부릅떴다.
저편에 시커먼 장포를 걸친 여인이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귀신처럼 섬뜩한 인상.
등 뒤로 아홉 줄기의 기운을 꼬리처럼 두른 그녀가 금안을 번뜩이며 혈룡검군을 노려봤다.
“요, 요선님! 어찌 저를 공격하십...!”
“그야 네가 적이니까.”
귓전을 파고드는 싸늘한 목소리.
혈룡검군은 여인의 옆에서 태연하게 등장한 강엽을 발견하고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질렀다.
완안극만 환하게 웃었다.
“주인님! 믿고 있었습니다!”
“슬슬 끝내지.”
아무리 주군이라 하나 수하가 싸우던 상대를 함부로 빼앗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조영옥을 슬쩍 돌아본 완안극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맡겨주십시오. 저놈은 예쁘게 죽여서 주인님께 바치겠습니다.”
“.......”
졸지에 절세고수 세 명을 앞에 둔 혈룡검군의 낯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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