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17화 (312/450)

61화. 요선 (4)

“신녀시여, 저건....”

바깥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이들.

일월신교의 무리는 태화문 한복판에서 태동한 거대한 기운에 저도 모르게 경직되었다.

“호교사천이 나타난 모양이군요.”

“혈마를 추종했던 악귀들... 말씀입니까?”

“모산혈조가 죽은 지금 혈교에 이만한 심법진을 구현할 자는 없으니까요. 그건 혈교의 신녀나 팔대교왕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부활했다면....”

“누군지 알 것 같네요.”

호교사천을 만나본 적은 없으나, 그들에 대한 기록은 역대 신녀들을 통해 대대손손 전해졌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어떤 행보를 걸었는지.

“경국지색.”

빼어난 미녀를 뜻하는 격언. 본래는 군주를 꾀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끄는 요녀를 뜻함이었다.

“초대 교주께서 남기신 기록에 따르면 요선은 수많은 이름으로 세상을 망친 악녀였습니다.”

“악녀라면...?”

“말희(妺喜), 달기(妲己), 포사(褒姒)... 한 시대의 끝에 나타나서 나라를 기울게 한 요물.”

수성좌를 비롯한 일당의 안색이 급변했다.

달기와 포사라면 모두 상고시대에 나타나 왕을 꾀어낸 희대의 요부들이 아닌가?

“맙소사! 그 여자들이 모두 한 사람이었단 말입니까?”

“사람이 아니에요. 무공과 술법에 통달한 대요괴. 그녀가 어째서 혈마에게 충성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혈마가 살아있던 시절 혈교가 그토록 성세를 떨친 것엔 요선의 역할이 컸다고 하지요.”

“그럼 큰일 아닙니까? 아무리 그분이라도 그런 악녀에게 걸리면...!”

“가만히 있으세요.”

싸늘한 거절에 수성좌는 말문이 막혔다.

분명히 강엽의 무위는 놀랍다 못해 경악스러웠지만, 요선의 정체가 정체인 만큼 난국을 헤쳐나올 거라 섣불리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신녀는 단호했다.

“언젠가 우리가 그분을 도와드릴 날이 올 터.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태화문의 경내를 향해 시선을 던진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분이 이 난관조차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기를 기원해야지요.”

그러다 때를 놓치는 건 아닌가?

수성좌는 그리 물으려다 참았다.

설마 신녀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일월신교의 신녀는 별자리를 보고 앞날을 내다보는 존재.

그녀가 이리 단언한다면 강엽이 호교사천조차 물리친다는 뜻이리라.

정말로 그리 된다면....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신인이란 뜻이겠지.’

* * *

“한 방 먹었군.”

강엽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태화문의 경내에 술법진을 쳐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런 효과를 지녔을 줄이야.

[말했잖니.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는 법이야.]

“쯧.”

이번엔 강엽이 한 방 먹었다.

술법진의 존재를 잊은 적도 없었고, 언제 발동되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유념해두었건만.

대비책이랍시고 준비한 게 다 쓸모없어졌다.

“심법진을 이런 식으로 발동시키다니....”

그의 시선이 태화문의 경내를, 정확히는 바닥에 널린 시체들의 모습을 훑었다.

요선이 섭혼술로 태화문도들을 지배했던 이유.

처음엔 그들로 하여금 혈안사군과 대공자 등이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것은 극히 일부일 뿐.

“문도들을 심법진을 쓰기 위해 인신공양할 셈이었나?”

강엽을 제외하면 살아있는 사람은 전무하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금사하나 지하감옥에서 풀려난 조영옥의 세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미 이곳은 장소만 태화문일 뿐, 실제로는 요선이 일으킨 심법진의 내부인 것이다.

[정답이야.]

요선이 입술에 손가락을 올린 채 미소 지었다.

심법진을 발동한 지금, 그녀는 이전에 강엽이 봤던 모습이 아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름다운 백발의 소녀가 금안을 반짝이며 배시시 웃었다.

성별을 불문하고 타인을 유혹하는 교태.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녀의 한숨에 애달파하고, 미소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겠지.

하물며 나신을 그대로 드러난 상태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특이하네. 진조의 후예라서 그런가?]

그녀는 강엽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옥용을 살짝 찌푸렸다.

자연스레 시선이 강엽의 특정 부위로 향했다.

[혹시 너 고자니?]

“뭐?”

이번엔 강엽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요선이 객쩍게 손사래를 쳤다.

[하하, 미안미안. 혹시나 해서 말이야. 예민한 걸 보면 고자는 아니네. 하긴 고자라도 본녀에게 걸리면 정신 못 차리지.]

말은 그렇게 해도 요선의 아미는 살짝 찌푸려졌다.

아무리 허상으로 나타났다지만 강엽이 유혹에 걸리지 않는 게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백무량과 유익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긴, 생각해보면 진조도 잘 안 통하긴 했군.]

먼 옛날의 악연을 떠올린 요선이 이를 뿌득거리다가, 강엽의 시선을 의식하고 빙그레 웃었다.

[봐둘 수 있을 때 실컷 봐두렴. 조만간 다른 몸으로 네 앞에 나타날 테니까.]

“그게 심법진의 효과냐?”

[응?]

“본래의 육신을 구현하는 것. 하지만 그 몸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인신공양으로 편법으로 쓴 거고.”

[계속 말해봐.]

“심법진이 오래 가진 않겠지. 그래서 최소 삼화취정에 오른 육신이 필요한 것 아닌가?”

[....]

“조영옥을 원한 이유도 그래서였나? 만약에 가능하면 서희를 생포하려고 한 이유도....”

[이래서 눈치 빠른 애들이 싫어.]

그러나 살살 눈웃음을 치는 게 진짜로 기분이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인정할게. 넌 똑똑해. 근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한참 늦었다는 생각 안 들어?]

이미 심법진은 펼쳐졌고, 그녀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으니 강엽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이 자리는 강엽을 조롱하기 위해 마련했을 뿐.

[지금 와서 서둘러도 소용없어. 네가 암만 발악해도 이 싸움은 본녀의 승리야.]

섬뜩한 미소를 남기고 사라지는 요선의 환영.

강엽은 시체만 남은 정경을 가만히 돌아보다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면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보이는 문주전을 향해서.

* * *

문주전에 도착하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공간에 발을 내딛자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리면서 시비들이 나왔다.

다만 살아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강시?”

얼굴에 부적이 달린 강시 시비들.

강엽을 향해 공손히 예를 갖춘 그녀들이 천천히 몸을 돌려 안쪽으로 사라졌다.

따라갈지 말지 고민할 때였다.

[클클, 재밌구나.]

돌연 발아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면서 진조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심법진 안이라서 나올 수 있었군.”

[그 여우년이 살아있다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예전부터 명줄 하나는 질긴 계집이었는데....]

“확실하게 끝장내지 그랬나?”

그랬다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을.

진조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는 확실하게 끝장냈다. 놈들이 자신이 부활할 준비를 해놨을 줄 몰랐을 뿐이지.]

“이번엔 기회를 주면 안 되겠군.”

적당히 대꾸하면서 시비들을 따라간 강엽은, 깊숙한 심처에서 온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문제는 온기와 함께 짙은 꽃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

강엽의 그림자에 숨어 함께 온 진조가 어이없어했다.

[...이 계집 설마 목욕 중인가?]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욕탕.

그곳으로 강엽을 안내한 시비들이 문을 열고 안에 있는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와, 진조의 후예. 그리고....”

붉은 꽃잎을 동동 띄운 대리석 욕탕에서 씻고 있던 요선이 강엽의 발밑을 향해 싱긋 웃었다.

“진조도 있었군. 후계자를 정했다길래 죽은 줄 알았는데 용케 그 꼴로 살아있었네?”

[아무렴 네년만 하겠느냐?]

그림자에서 나온 진조가 콧방귀를 뀌었다.

[수많은 왕조를 몰락시킨 천박한 여우년. 그토록 오래 산 주제에 아직도 삶에 집착하는구나.]

“오래 살아도 질리지 않거든.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참 아까웠어. 만약 당신이 천하에 군림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면 당신을 선택했을 거야.”

[일없다.]

“흥, 매정하긴.”

요선이 입술을 삐죽였다.

삐진 얼굴조차 뭇 사내들의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칠 만큼 매혹적이었지만, 진조는 팔짱만 꼈다.

그런 진조를 외면한 요선이 강엽을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넌 어때, 진조의 후예?”

“지인의 얼굴로 그런 말을 들으니 어색한데.”

“아까도 말했지만 이제 이 몸은 내 거야.”

백발의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강엽에게 익숙한 조영옥의 얼굴로 쿡쿡거렸다.

“이렇게 몸을 차지하고 보니 성향이 참 잘 맞는 것 같아. 이 아이도 욕심이 참 많았거든. 가지고 싶은 건 무슨 수를 쓰든 가져야 성에 찼지.”

“암만 조영옥이 욕심이 많아도 너만 할까.”

“어머, 그건 모르는 거야.”

요선이 입술을 핥았다.

“이 아이는 너를 갖고 싶어했거든. 네 옆에 있는 백가 아이를 치우고 널 소유하고 싶어 했어.”

“....”

“넌 어때?”

촤아악!

백옥의 나신이 욕탕에서 나왔다.

가느다란 어깨선과 풍만한 가슴, 늘씬한 허리를 지나 은밀한 곳까지 가감없이 드러낸 자태.

뜨거운 물을 뚝뚝 흘리며 홍조가 깃든 얼굴로 강엽의 앞에 온 요선이 강엽의 뺨을 매만졌다.

“이 몸을 갖고 싶지 않니?”

귓가를 간질거리는 촉촉한 목소리.

그녀가 강엽의 손을 잡아 풍만한 가슴으로 이끌면서 달콤한 숨을 흘려넣었다.

“고개만 끄덕여. 그럼 난 네 여자야.”

어쩐 일인지 진조는 그 꼴을 보면서도 이렇다 할 참견을 하지 않았다. 강엽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구경만 했다.

강엽이 뒤를 돌아보자 요선이 속삭였다.

“진조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고작 망령인걸. 심법진에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네가 날 품는다고 해도....”

“혈마를 버리고 나한테 오겠다고?”

“후후, 말했잖니. 진조가 야망을 품었다면 난 진작에 그를 따랐을 거라고.”

알몸이 흑포 위에 완전히 밀착했다. 홍채가 진한 황금빛으로 물든 요안이 강엽을 올려다보았다.

혈안사군은 상처를 치유하고 내공을 증폭하기 위해서 써먹었던 요안.

하나 진정한 공능은 따로 있었다.

[후계자놈의 내공을 봉인했군.]

“그게 내 능력이지. 당신도 알잖아?”

그녀의 요안은 범위 안에 들어온 사람의 내공을 돌처럼 굳힌다.

동술을 유지하는 동안엔 그녀도 내공을 못 쓰지만, 그쯤은 타고난 색기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일.

어느덧 눈에 초점이 사라진 강엽을 만족스럽게 올려다본 요선이 진조를 향해 조소했다.

“이건 당신의 책임이야, 진조. 최소한 내 능력에 대해선 알려줬어야지.”

금호요안 때문에 먼 옛날 그녀에게 맞섰던 자들도 일대일로는 싸우지 못했다.

백무량도, 유익도 마찬가지.

“당신은 내 유혹을 뿌리쳤지만, 이 남자도 그럴 수 있을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면....”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졌다.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그녀가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추는데도 강엽은 거부하지 않았다. 설육이 얽히면서 끈적한 타액이 오갔다.

강엽과 붙은 채 길게 입맞춤을 한 그녀는 무언가를 느끼고 애달픈 한숨을 흘렸다.

“봐, 진조. 당신 후계자가 완전히 넘어갔잖아.”

[....]

진조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요선은 쿡쿡 웃으면서 강엽의 옷 안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아, 이제 뜨거운 시간을....”

완전히 넘어온 이상 이 남자는 이제 그녀의 것이다.

‘날 원망하지는 말렴. 네가 못 이룬 욕망을 대신 이루어주는 거니까.’

조영옥이 이 꼴을 봤다면 땅을 치면서 분개했을지도 모르지만 알 바 아니었다.

단단한 근육을 어루만진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강엽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꽈악!

“흡...!”

갑자기 목을 조르는 악력에 요선이 굳어졌다.

설마 강엽에게 상대를 고문하면서 욕망을 채우는 성벽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을 때.

“찾았다.”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요선의 금안이 풍랑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정마...안?”

“네가 빼앗은 몸, 주인에게 돌려줘야겠다.”

각기 다른 광채로 격렬하게 회전하는 정마안이 금안을 파고든 순간, 요선은 비명을 질렀다.

“캬아아아악!”

아직 그녀의 혼은 새로운 몸에 안착되지 않았다.

한데 강엽의 정안이 요안의 공능을 흔들고, 마안이 그녀의 내부를 파고들어 그 안에 잠든 조영옥의 의식을 깨우려고 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금안의 공능을 거둔 그녀가 쌍장을 밀며 뿌리쳤다.

유혹이 먹히지 않는다면 억지로 동술을 유지할 필요도 없을 터.

화아아아악!

새카만 마기로 이루어진 아홉 갈래의 꼬리.

그중 셋이 뚝 떨어지더니 강엽이 익히 알고 있는 외양으로 변했다.

그가 이제껏 싸웠던 교왕들의 모습.

“놈을 죽여!”

객지에서 죽은 교도들의 혼백은 혈교의 성지로 돌아와, 혈마와 호교사천을 깨우는 자양분이 된다.

그녀는 검마에게 양해를 구해 혈음과 혈산의 혼백을 가져오고, 아까 전에 죽은 혈안의 혼백을 거두었다.

-끼이이이익!

각기 쌍륜과 대도, 대겸을 든 세 교왕이 강엽을 삼면에서 포위했다.

“아무리 강해도 교왕 세 명이라면...!”

-심상절예 구현.

찰나지간이었다.

지금까지 방관하는 듯했던 진조가 자신의 심상을 끄집어낸 것.

추악한 마귀들이 저승의 죄인들을 꼬챙이에 꿰매고 찢어버린다. 갖가지 고문으로 그들을 죽이고, 부활시키며, 그것을 무한히 반복한다.

영원히 이어질 지옥의 수레바퀴.

-지옥도(地獄圖).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