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14화 (309/450)
  • 61화. 요선 (1)

    강엽과 혈안사군의 대치.

    양측에 팽팽한 긴장감이 나돌았을 때, 먹구름 사이에서 떨어진 벼락이 강엽에게 꽂혔다.

    빠지지지지직...!

    눈부신 뇌광이 명멸하는 순간.

    콰아아아아앙-!

    대기를 밀어낸 충격파가 동심처럼 터지고, 경로상의 지반이 박살나며 깊고 비대한 고랑을 만들었다.

    “커...!”

    새우등처럼 꺾인 혈안사군의 육신이 석벽에 처박혔다. 격중된 석벽의 사방에 거미줄이 일고, 깨진 기왓장이 우수수 떨어지는 정경.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뭐야?”

    “방금 대체 뭐가....”

    고수들의 안력으로도 쫓지 못할 무언가.

    삼화취정에 이른 일행도 뭔가가 날아간 것만 어렴풋이 봤을 뿐, 그 정체를 모르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백서희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설마 암기?”

    “저게 암기라고?”

    하후진의 반문에 백서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쓸 데가 있을지 모른다면서 암기를 달라고 했거든. 설마 이렇게 쓸 줄은 몰랐는데....”

    한창 싸우고 있던 조영옥과 대공자도 멍청한 표정이 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팔대교왕이 일격에 당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호신강기를 깨부술 정도는 되는군.’

    칠초식 천뢰는 투로도 뭣도 없는 단순무식한 비검(飛劍).

    하지만 수삼음경과 수삼양경의 경맥으로 진기를 정밀 운용해야 하며, 그렇게 모은 진기를 손바닥의 경혈을 통해 투사체에 담아야 한다.

    방대한 뇌기가 필요하기에 단전의 진기만으로는 구현하기 어렵고, 하늘의 벼락을 이용해야만 겨우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까다로운 초식.

    뇌기를 받아내지 못한다면 도리어 전신의 경맥이 타서 죽겠지만,

    강엽은 무사히 천뢰를 구현, 혈안사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쿨럭! 카하악...!”

    “...그걸 맞고 살아있나?”

    금강불괴라도 오장육부가 진탕됐을 텐데.

    작게 중얼거린 강엽은 석벽에 처박힌 혈안사군의 복부가 아무는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불괴강시도 아닌데 재생의 공능을 쓰는군.”

    혈안사군이 불괴강시라면 한눈에 알아봤겠지만, 혈안사군에게서 비슷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원래 그런 무공을 익힌 것처럼 부상 부위를 빠르게 회복시키고 있을 뿐.

    굳이 부활하게 놔둘 이유도 없는 만큼 마무리를 짓기 위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었다.

    “문주님을 지켜라! 전원 돌겨어어어억!”

    소한방주를 비롯한 태화문 간부들의 선동에, 태화문의 문도들이 함성으로 응수하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혈안사군이 날아가는 광경을 봤을 텐데도 그들의 얼굴엔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본래 조영옥의 세력으로 추정되었던 자들도 적극 가담한 상황.

    그 기괴한 광경에서 위화감을 느낀 강엽은 곧 그들의 눈이 하얗게 까뒤집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섭혼술...?’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익숙한 영성이 느껴지는걸. 그것도 무려 세 가지나.]

    돌연 귓가를 파고드는 간드러지는 목소리.

    급작스레 주변이 어두워진 가운데, 묘령의 여인이 환영처럼 나타나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조와 용혈, 일월성신이라.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나타났네. 어떻게 너 같은 존재가 나왔지?]

    혼잣말처럼 묻는 여인의 눈빛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강엽이 뚱하게 물었다.

    “넌 뭐냐?”

    [나?]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어딘지 순수하면서도 사람을 홀릴 듯한 마성이 느껴지는 미소.

    그러나 강엽은 여인의 마성을 무심하게 흘렸다. 심상지경에 이른 그의 정신력은 고작 여인의 염기 따위에 흔들릴 정도로 얕지 않았다.

    여인이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흐응, 재미없네. 이 몸이 문제인가? 좀 더 어여쁜 몸으로 유혹하면 통할까?]

    “호교사천이냐?”

    [응?]

    “광명마교주가 말하던데. 혈교에 호교사천이라는 괴물들이 있다고 말이야.”

    [...아하, 광명마교주. 가루라의 화신을 말하는 거지? 제 후손들을 통해 영성과 기억을 계승했다고 들었는데. 제법 귀여운 맛이 있었던 녀석인데 괴물이 됐어.]

    여인은 광명마교주, 아니 시조인 가루라의 화신을 아는 기색이었다. 하긴 가루라의 화신 역시 한때는 혈교에 몸담았으니 안면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눈앞의 여인이 강엽이 찔러본 대로 호교사천의 일원이라는 것을 뜻했다.

    여인의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숨기는 건 소용없겠어. 정식으로 소개하지. 요선이라고 한다.]

    “요선....”

    광명마교주가 경고했던 이름이었다.

    [아무튼, 가벼운 마실이었는데 뜻밖의 거물을 발견했네. 예상치 못한 발견도 있고 말이야. 원래는 여기 문주의 누이만 노렸는데, 저기 있는 하얀 옷의 여아도 마음에 드는걸. 누굴 골라야 할지 고민될 정도야. 내게 좋은 선물을 가져다주었구나, 진조의 후예.]

    강엽은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그전에 등 뒤에서 백서희의 목소리가 터졌다.

    “강엽, 뭐 하고 있는 거야!?”

    “음?”

    “앞 좀 봐!”

    강엽은 앞을 돌아보자 여인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태화문의 문도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너희들 눈엔 안 보였나?”

    “뭐 헛거라도 봤냐?”

    옆에 온 하후진이 핀잔을 주며 도를 들었고, 전강이 우묵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육안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거대한 주력을 느꼈소. 혹시 적들이 무슨 짓을 한 거요?”

    “적의 수괴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수괴?”

    “호교사천. 팔대교왕보다 강한 괴물이라 하더군요.”

    팔대교왕보다 강한 괴물이라는 말에 일행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강엽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동생의 부축을 받은 조영옥에게 물었다.

    “대공자는?”

    “...적이 채갔어요.”

    그 말에 강엽은 문주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발을 기른 뚜렷한 이목구비의 청년이 피투성이인 대공자와 혈안사군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 옆엔 말끔한 중년인이 서 있었는데, 눈에 초점이 없는 게 왠지 섬뜩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둘 다 삼화취정이군. 게다가 축기량도 엄청나게 많다. 조심하는 게 좋겠어.”

    “그전에 적들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냐?”

    밀물처럼 달려오는 적들.

    물론 일행은 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지만 저들이 태화문의 문도라는 게 문제였다.

    강엽이 조영옥을 돌아봤다.

    “괜찮겠소? 저들을 죽이면 장차 태화문을 장악하는 데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데.”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하니까요.”

    단호한 대답에 그녀를 부축한 조영빈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누님....”

    “됐어. 지금은 이기는 것만 생각하자.”

    조영빈은 우물쭈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장내 가득 전성이 울렸다.

    [혈룡검군, 혈안사군과 함께 진조의 후예를 상대해라. 그리고 신유는 떨거지들을 상대하고. 저 하얀 옷을 입은 여아는 절대 죽이지 말도록.]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염기에 일행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강엽, 설마 좀 전에 말한 수괴가....”

    “저 목소리다.”

    “잠깐, 그보다 방금 신유라고 하지 않았냐?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천하팔존...!”

    “그전엔 혈룡검군이라 했소. 저 청년이 혈룡검군 같은데... 팔대교왕만 두 명이구려.”

    천하팔존에 팔대교왕. 쳐들어오기 전엔 일행의 전력이 과하다고 여겼건만, 이제 상황은 반대가 되어버렸다.

    “뭐... 모든 작전은 시작 반 각 만에 휴짓조각이 되는 거지. 변수 생기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껏 치른 싸움 중 순탄했던 싸움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던가.

    이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서희와 하후진, 전강이 신유를 맡는다. 보아하니 이지를 잃은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심극은 주의하고.”

    “그럼 너는 어쩌려고?”

    백서희가 물었다.

    세 사람이 신유를 담당한다고 해도 팔대교왕 두 명이 남는다. 모습을 숨긴 호교사천과 태화문의 문도들도 골칫거리였다.

    “조 소저는 부상을 입었잖아.”

    “...싸울 수 있어요.”

    조영옥이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조영빈의 손을 놓고 자신의 발로 몸을 지탱하면서 적들을 노려본다.

    “아직 오라버니와 승부를 내지 못했어요. 외부의 방해가 있다 해도 어떻게든 결착을 볼 겁니다.”

    강엽은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미간에 손을 뻗어, 활명술로 선천지기를 북돋웠다.

    “강 무사, 이럴 필요는...!”

    “받으시오. 적들이 대공자를 빼낸 시점에서 정정당당한 승부를 바랄 수는 없을 테니까.”

    만약 대공자가 회복하고 나온다면 부상을 입은 그녀가 한없이 불리하리라.

    멍하니 있던 조영옥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웃었다.

    “...고마워요.”

    “조 소저.”

    백서희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꼭 이겨요. 지면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강엽은 귀중한 선천지기를 내준 것이다. 흡혈로 인해 선천지기가 넘친다고 해도 보통 사람의 몇 년분 수명에 해당하는 양을 넘겨준 것이다.

    조영옥도 사이를 두고 결연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경고하지 않아도 이길 거예요.”

    “이보쇼, 다 좋은데 슬슬 집중해.”

    하후진이 미간을 찡그렸다. 일행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적들이 코앞까지 달려온 것이다.

    강엽이 한 걸음 내딛으며 말했다.

    “내가 길을 뚫을 테니까 신유를 맡아라. 조 공녀와 그 동생은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말고.”

    파지지지직...!

    잠시 가라앉았던 뇌기가 피부를 타고 튀어올랐다.

    주변에 쇠붙이를 무장한 일행에게는 일절 튀지 않고 온전히 강엽의 전권에서 수렴하는 기운.

    소맷자락을 걷으며 일수를 뻗은 순간, 다섯 손가락을 따라 새하얀 뇌기가 질주했다.

    * * *

    “신녀시여.”

    하얀 면사를 쓴 중년의 여인.

    이마에 별의 문양을 새긴 중년 여인은 자신을 부르는 노인의 음성에 엷게 웃으며 화답했다.

    “말씀하세요, 수성좌(水星座).”

    만약 무림의 역사에 해박한 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일월신교를 대표하는 일곱 명의 성좌. 천산의 사신으로 군림하는 절세고수가 강호에 출두한 것이다.

    그것도 일월신교의 최고위 인사인 일월신녀와 함께.

    “저자... 아니, 저분이 정말 저희가 기다렸던 신인이라면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팔대교왕 두 명과 천하팔존, 게다가 저력을 가늠할 수 없는 흑막이 뒤에 있지 않은가.

    비록 강엽이 혈안사군을 제압하긴 했지만, 그것은 혈안사군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

    만약 그녀가 그 저주받을 ‘동술(瞳術)’을 쓴다면 이전처럼 일격에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혈안사군도 까다롭지만, 혈룡검군은 혈천성군의 제자라고 소문이 난 인물입니다. 그 검귀가 제자로 들였다면 필시 가공할 무재를 지녔을 터. 혈안과 혈룡이 합공한다면 고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성좌께선 저분을 얕보시는군요.”

    약간 싸늘해진 음색에 수성좌가 멈칫하는 찰나, 신녀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이어졌다.

    “아까 그게 저분의 전부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전력을 드러내지 않은 건 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분 일행의 전력이 떨어집니다. 속하가 교왕 하나를 맡는다면, 저분도 그만큼....”

    칠성좌인 그가 개입한다면 이는 일월신교가 혈교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진배없다.

    하지만 예언이 점지한 신인을 잃을 순 없는 노릇.

    ‘신녀께서도 예지하지 않으셨던가. 귀영이 정말로 시조께서 예언하신 안배라면....’

    절대로 여기서 잃을 수는 없다. 설사 강엽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개입해야 할 터.

    그러나 신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켜보기만 하세요.”

    “하오나....”

    “좀 전에도 말했지만 아직 저분은 모든 패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섣불리 개입하면 저분이 이 싸움을 준비한 의미가 퇴색하는 꼴이지요.”

    조영옥이 대로에서 하는 말을 듣지 않았던가.

    대공자가 혈교의 도움을 받았다며 비난한 그녀가 일월신교의 도움을 받는다면 명분이 사라지리라.

    “그리고 우리가 아니어도 저분을 도울 아군이 있는 것 같군요. 우리 예상보다도 훨씬 강한 아군이.”

    “그게 누구입....”

    수성좌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와아아아아아!

    태화문의 뒤편에서 달려오는 무리들.

    죄인처럼 허름한 행색에 피와 오물이 묻어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태화문의 뒤를 친 이들은 실로 소름끼치는 살기를 발하고 있었다.

    선두에서 달리는 앳된 소년의 존재감을 느낀 수성좌가 미간에 깊은 골을 그려냈다.

    “설마 저 어린 놈입니까?”

    “예, 아무래도 그분의 종복인 것 같네요.”

    전직 독곡주로서 강엽의 충복을 자처하는 흡혈귀.

    만독자 완안극이 지하감옥에 갇혀있던 조영옥의 부하들을 구하고 지원을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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