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13화 (308/450)
  • 60화. 태화 (7)

    “와아아아아아-!”

    우레처럼 울려 퍼지는 환호성.

    조마조마하게 지켜봤던 태화문의 문도들은 대공자가 우세를 점하자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일부는 안색이 어두워졌는데, 강엽은 그들의 면면을 뇌리 한켠에 새겨두었다.

    ‘원래 조영옥의 편이었던 자들인가.’

    대공자가 전권을 잡자 대세를 따라 굴복한 자들.

    하나 살기 위해 항복한 이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리는 없을 터.

    목숨은 건졌다 해도 좌천되거나 쫓겨나는 미래가 기다릴 테니, 내심으로는 조영옥이 대공자를 꺾고 그들을 복권시켜주길 바랐던 게 아닐까.

    강엽이 그렇게 추측하며 다시 오누이의 싸움으로 주의를 돌렸다.

    쩌어어어엉!

    거센 파찰음을 일으킨 충돌. 한 번 부딪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미친 듯이 공력을 퍼부으며 사투를 벌인다.

    전체적인 주도권은 유리한 고지를 점한 대공자가 잡고 있었다.

    ‘검속이 빠른데 검력도 무거워. 조영옥의 도격을 힘으로 버티고 있군.’

    크고 넓적한 대도를 독문병기로 삼은 조영옥의 도법은 상대를 일격으로 부숴버리는 패공(覇功).

    가녀린 여인이 익히기는 까다로운 도법이지만 조영옥은 능란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녀가 익힌 신공절학의 호흡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럼에도 대공자와의 경합에서 우위를 못 쥔다.

    ‘흡성대법이라고 했었나.’

    혈안사군이 작게 중얼거렸던 말.

    거리도 멀고, 격전의 굉음에 파묻혔기 때문에 평범한 이들은 못 들었겠지만 강엽은 똑똑이 들었다.

    전강 역시 마찬가지인지 말을 걸어왔다.

    “강 무사, 태화문주가 흡성대법을 익혔다면 내공에선 조영옥 공녀를 한참 웃돌 것이오.”

    “흡성대법은 저도 기록을 보긴 했습니다만... 혹시 자세히 아십니까?”

    “석년에 흡성대법을 익힌 마인과 싸워봤소.”

    “...!”

    그 말에 일행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전강의 말이 이어졌다.

    “흡성대법을 익힌 자는 타인의 내공을 갈취할 수 있소. 시체는 안 되고, 살아있는 사람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진기의 성질을 가리지 않소.”

    “그거 까딱하면 주화입마 아닌가?”

    하후진이 인상을 쓰자 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흡성대법의 최대 문제점이지.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소. 실제로 싸워보기 전까지는.”

    “답답하네. 변죽만 울리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보쇼. 그 마공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수?”

    그때 강엽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물었다.

    “혈교가 보완점을 찾은 겁니까?”

    “...그렇소.”

    진기를 마구잡이로 빨아들이고도 주화입마를 피할 수 있다는 말.

    일행의 안색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강엽은 초음의 파동으로 대공자가 어떤 식으로 진기를 운용하고 있는지 살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은 건 아닌 것 같고... 타인의 진기를 낙맥과 세맥에 고루 퍼뜨린 뒤에 한 번에 모아서 소진시키는군.”

    “그, 그게 가능한 겁니까?”

    조영빈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누이의 목숨이 걸린 만큼 사색이 된 상태.

    “실제로 그러고 있으니 가능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원래 흡성대법이 저런 무공은 아닌 걸로 아는데... 개량을 거쳤나 보군.”

    하긴 아무리 내공 증진의 효과가 뛰어나도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파멸이 예정된 마공을 익히려들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진기를 함부로 취하면 주화입마에 빠진다는 것은 경험 일천한 수련생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

    “물론 저건 주화입마를 피할 수 있는 방편일 뿐이야. 세맥과 낙맥에 쌓은 진기를 소진하면... 원래 무위로 돌아올 뿐이지.”

    백서희가 고개를 설설 가로저으며 말했다.

    “장기전이 답이겠네.”

    “지금은 그것도 쉽지 않아 보이지만.”

    “으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강엽의 말마따나 조영옥은 수세에 몰려 있었고, 호신강기도 찢겨나간 채 위태로운 지경이었으니까.

    “대공자는 본신의 내공을 쓰지 않았다. 지금까진 타인의 내공만으로 싸우고 있어. 지금 이대로라면 조영옥이 패배를 뒤집을 수 없겠지.”

    “정녕 방법이 없겠습니까!?”

    조영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강엽이 조언을 한다면, 혹시 그게 조영옥의 귀에 들어간다면 활로가 열릴지도 모르지 않나.

    강엽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건 조영옥이 어찌 싸우느냐에 따라 달렸지.”

    “예...?”

    “꼭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니야.”

    만약 강엽 자신이라면 재생력이 있으니 작정하고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조영옥은 그런 방법을 쓰지 못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이 저 상태라면 어떻게 싸울지 토론해볼까? 하후진이 그나마 조영옥과 비슷한 무공을 익혔으니 건설적인 의견을 낼 수 있겠군.”

    “아니, 그게 무슨....”

    조영빈이 어이없어할 때 하후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음, 나라면 창룡갑 입고 너 뒈지고 나 살자는 심정으로 돌격할 것 같은데...?”

    “도움이 안 되는구만.”

    “짜식아, 그럼 너라면 어떻게 할 건데?”

    “파탄을 일으킨다.”

    “음?”

    “결국 타인의 진기다. 낙맥과 세맥에 고루 분산해서 위험도를 줄였지만, 타인의 진기를 다루는 게 익숙하진 않을 거야. 나라면 그 엇박자를 찌른다.”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잖아? 가뜩이나 삼화취정을 이뤄서 빈틈 자체가 거의 없다고.”

    조영빈을 제외한 세 사람은 삼화취정을 이뤘기에 강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했다고 해서 따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거의 없다는 게 완전히 없다는 말은 아니잖냐. 빈틈이 없다면 만들어야지.”

    * * *

    조영옥은 강엽의 말을 듣지 못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대공자의 검식에 대응하기도 바쁜지라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

    하지만 그녀도 어렴풋이 이대로 싸운다면 자신이 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대일 대결이라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게 너의 패착이다. 너는 날 이기지 못해.”

    츠아아아아악!

    마치 독사가 송곳니를 내려찍는 듯한 독랄한 검초. 도중에 궤적이 꺾여서 요혈을 찌르고 들어온다.

    그것을 넓은 도신으로 막아내면서 힘으로 밀어냈지만, 대공자의 검은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불현듯 눈앞에서 그의 신형이 사라지자 조영옥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큭...!”

    어깻죽지에 화끈한 불맛이 일었다.

    은밀한 보법으로 전권을 빠져나온 대공자가 누더기처럼 헤진 호신강기를 뚫고 긴 자상을 남긴 것.

    무감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번에 싸우지 않은 것은 감각을 다듬기 위해서였지. 혈안사군이 부득이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정기신을 합일하여 천지와 소통하는 경지에 이르면 필연적으로 겪는 감각의 혼선.

    흡성대법으로 타인의 내공을 갈취한 대공자는 그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혈안사군이 나서지 않았다면 네 승리였겠지. 하지만 너는 남은 시운을 다 쓴 듯하구나.”

    쾅! 투앙!

    내뱉는 목소리에도 마공의 구결이 담겨 있다. 한순간 끌어올린 강대한 내공이 면면부절 이어졌다.

    “대문에서 한 말은 진심이었다. 너는 돌아와선 안 되었어. 돌아온 시점에서 남은 것은 내 손에 죽거나, 요녀(妖女)에게 몸을 빼앗기는 것밖에 없다.”

    “무슨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하나 네가 그 요녀에게 몸을 빼앗기는 건 보고 싶지 않군.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게 덜 고통스러운 일이겠지....”

    검격에 실린 힘이 더욱 거세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조영옥의 몸에 남은 상처는 늘어갔다.

    검은 장삼이 찢기고, 새하얀 속살 사이로 핏물이 튀면서 만신창이가 된 몰골. 가지런했던 머리카락도 풀어지면서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끝이다.”

    “...!”

    완벽히 허점을 잡혔다.

    대공자의 검이 훤히 빈 옆구리를 노리자 조영옥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그녀의 눈에 결연한 각오가 떠올랐다.

    그 변화를 놓치지 않은 강엽이 이채를 띠었다.

    ‘결심했군.’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이대도강.

    방어하거나 피하는 대신 대도를 높게 치켜들어 천지를 가를 듯이 발경 도격을 내려찍는 순간.

    대공자의 검이 급격히 위로 치솟았다.

    꽈아아앙!

    급격히 몸을 비틀며 도격을 쳐냈으나, 자세가 불안정한 탓에 도격을 받아낸 손목에 일순 저릿한 충격이 갔다.

    기껏 모은 진기가 흔들리자 대공자의 잘생긴 얼굴이 구겨졌다.

    “빌어먹을...!”

    퍼벅!

    바로 그 순간의 틈을 노리고 짓쳐든 조영옥의 격공.

    상시로 펼쳐둔 호신강기로 막았음에도 대공자의 표정은 전에 없이 딱딱해졌다.

    되는 대로 장력을 격발해서 조영옥을 뒤로 밀고 진기를 가라앉혔으나, 조영옥은 도리어 눈을 빛내며 매섭게 달려들었다.

    호기를 놓치면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쾅! 쾅! 쿠아아아앙!

    여파를 떨쳐낸 듯한 대공자의 검격은 곧 본래 속도를 회복했지만, 조영옥은 탄자결의 발경 묘리로 검격을 쳐내며 상승세를 탔다.

    눈이 돌아갈 만큼 빠른 공방 속에서 조금씩 파탄을 드러난다.

    대공자가 서로 다른 진기를 운용할 때마다 미세하게 호흡과 박자가 바뀌며 흐름이 변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기회를 찾는 것은 거센 폭포에서 바늘구멍 같은 틈을 찾는 것만큼 어려운 일.

    그러나 조영옥은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공자가 본래 익힌 내공 호흡과 흡성대법의 호흡이 불협을 낳는다.

    -아군을 가까이 두되, 적은 더 가까이 두거라.

    언젠가 들었던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이십칠 년 평생 동안 경쟁자로 자리했던 오라비를 언제나 가까이에서 관찰했기에 포착할 수 있는 틈새.

    “하아아아아압!”

    힘찬 기합성을 토하면서 절초를 쏟아부었다.

    푸르다 못해 검게 물든 묵청색의 강기가 내공 호흡을 엇박자로 찌르고 들어와 호신강기를 박살낸다.

    서걱.

    은색 장삼이 깊이 베이면서 핏물이 후두둑 쏟아지자 대공자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이제야 단전의 진기를 꺼내는 그의 검에도 강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조영옥의 것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시뻘건 기운.

    불타는 것처럼 넘실거리는 강기와 단단하게 정련된 묵청색의 강기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부딪치고,

    콰아아아아아앙!

    “......!”

    깨져나간 검조각 사이로 조영옥의 대도가 치고 들어와서 그 몸뚱이를 베어간다.

    “아아....”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걸까. 누이의 칼날을 담은 눈빛엔 오만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때, 조영옥은 뒷목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끼고 직감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방관했던 혈안사군이 약속을 어기고 생사결에 개입한 것.

    ‘설마 직접 대겸을 뽑고...!’

    격공이라면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절세고수가 필살의 의념을 담아 성명절기를 휘두른다면?

    [계속 공격하시오.]

    찰나에 스친 전음. 아니, 전음보다 빨리 뇌리를 파고든 의념에 조영옥은 느슨해졌던 도격을 다시 뻗었다.

    한 박자 늦게 그녀와 대겸 사이에 끼어든 인영을 발견한 혈안사군이 사나운 살기를 발했다.

    “귀영, 이 개 같은 새끼가...!”

    투학!

    조영옥의 등짝을 노렸던 대겸이 강엽의 일권과 부딪쳤다.

    쩌어엉!

    금속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성.

    혈안사군의 대겸이 맨주먹을 맞고 튕겨났다. 강엽 역시 불괴의 공능이 뚫려 뼈와 근육이 망가질 만큼 큰 상처를 입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상처는 눈 깜빡할 사이에 빠르게 아물었으니까.

    “재생의 공능! 역시 네놈!”

    “크헉!”

    혈안사군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조영옥의 도격은 대공자의 급소를 베지 못했으나, 옆구리를 길게 베어내면서 피를 흩뿌렸던 것이다.

    “무, 문주님께서...!”

    대공자를 추종하는 자들이 창백한 안색으로 아연해하는 그때, 혈안사군은 앞길을 막은 강엽의 모습에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비켜!”

    “승부에 개입하지 않기로 한 것 아닌가?”

    “닥치고 비키라고!”

    “...뭐, 이렇게 될 것도 생각 안 한 건 아니지.”

    만약 대공자가 위험에 처한다면 적들이 생사결에 끼어들 것도 염두에 둔 바.

    두 오누이가 있는 곳을 힐끔거린 강엽이 목뼈를 뚜둑 꺾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대공자를 구하고 싶으면 나부터 넘어야 할 거다.”

    “미친놈이!”

    팔대교왕답게 처음부터 강기를 쏟아부으며 압박하나, 강엽은 자성검을 뽑아 검막(劍幕)을 그리면서 겸강을 모조리 튕겨냈다.

    “숨어있는 것들도 나오라고 해.”

    “뭐?”

    혈안사군이 그 말에 담긴 진의를 깨닫고 눈썹을 치켜뜰 때, 공기가 무거워진 느낌과 함께 온몸에 축축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불현듯 그 정체를 깨달은 혈안사군의 척안이 크게 뜨였다.

    “...수분?”

    “마침 하늘이 흐려서 다행이지.”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은 먹구름. 저편에서 우레를 동반한 뇌우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흘깃한 혈안사군이 말없이 인상을 쓴 순간.

    콰아아아앙-!

    자성검의 금기(金氣)를 쫓아 하늘에서 내려친 벼락이 강엽과 합일, 뜨거운 열기를 흩뿌리며 창백하게 불타올랐다.

    “미친...!”

    인간이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과 결합한 괴사.

    혈안사군뿐 아니라 태화문의 문도들과 강엽 일행까지 돌처럼 굳어진 바로 그때, 강엽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확장되며 온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성검법의 마지막 칠초식이자 최후의 오의인 천뢰(天雷).

    너무 위험하고 난해하여 자성검법을 익힌 역대 조사들도 엄두를 못 냈던 비기.

    그 요체는 뇌기의 정화인 하늘의 벼락을 인간의 몸으로 받아들여 펼치는 수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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