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11화 (306/450)
  • 60화. 태화 (5)

    강엽과 백서희가 위지세가를 공격하고 열흘 뒤.

    일행은 약속 장소에서 합류했다.

    “어떻게 됐냐?”

    “성공. 그러는 너희는... 뭐 물어볼 것도 없나?”

    상처 하나 없는 강엽과 백서희를 본 하후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하자 전강이 불쑥 나섰다.

    “오면서 다른 일도 하나 처리했소.”

    “다른 일?”

    “당문이 사천 곳곳에 의원을 둔 것 알지? 혈귀 새끼들이 당문의 의원을 치려고 하더라고.”

    하후진이 콧잔등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혈라분에 중독된 양민들이 눈이 회까닥 뒤집혀 달려들었는데, 일일이 제압하느라 고생한 것 같았다.

    하후진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선동한 혈귀 새끼는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는데, 혈라분에 중독된 놈들은... 좀 애매하잖냐.”

    중독자라고 무조건 선량하겠냐만, 뭣도 모르고 혈라분을 복용한 이도 있을 터.

    “아마 우리가 박살낸 흑도 방파에서 뿌린 거겠지. 그 새끼들 곳간에 뻘건 약을 가마니째로 쌓아놨더라. 암시장은 아작났는데 그 많은 양이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어.”

    “암시장을 부수기 전에 유통한 게 아닐까 싶은데. 그래도 근절되지 않으면 다른 데서 제조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봐야겠어.”

    혈라분을 제조하는 건 어렵다. 약초뿐만 아니라 사람의 피와 술법까지 필요하기에.

    그러나 혈교가 작정하고 시간과 돈을 쏟아붓는다면 다시 만들어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당장은 눈앞의 일부터 처리해야지. 태화문의 일이 우선이야.”

    일행은 조영옥이 준 정보를 기반으로 본래부터 대공자를 따른 흑도 방파를 기습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혈라분은 불태우고, 미곡은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문득 건장한 중년인이 들어왔다.

    하오문의 사천 당주인 오광우.

    그는 일행이 흑도 방파에서 빼앗은 재물을 세탁하는 장물아비와, 일행과 사천삼패의 소통을 중개하는 창구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당문이 소식을 보냈습니다.”

    “뭐라고 했소?”

    “어떻게든 붙들고 있겠다고 합니다.”

    무엇을 붙들겠다고 하는지가 빠졌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문을 공격하는 적들을 붙들겠다는 뜻.

    “아미와 청성도 혈풍신군을 잡을 계획을 세웠다고 알렸습니다. 참, 휘하의 교성을 제거해준 것에 대해선 사의를 보내왔습니다.”

    일전에 숙정방을 습격했던 혈교의 군세를 이끌던 교성은 혈풍신군의 수족이었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교왕의 아래에 세 명의 교성이 배치되니 이제 혈풍신군에겐 두 명의 교성만 남은 셈.

    “그리고 위지세가주와 혈안사군의 사이가 심상치 않습니다. 잠입한 문도가 보고하기를 타강이 뒤집힐 정도로 크게 부딪쳤다더군요.”

    “가주가 소식을 들은 거군.”

    가문이 함락당한 사실은 지급으로 전해졌을 테니 늦어도 하루나 이틀 뒤엔 알았을 터.

    하지만 혈안사군이 전장에서 이탈하는 것을 불허하면서 크게 갈등한 것이겠지.

    백서희도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위지세가주가 굴복했다고 합니다.”

    위지세가의 가주인 혁풍진검(赫風進劍) 위지극은 사천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절세고수.

    하나 혈안사군에 맞설 정도는 아니었다.

    ‘자성검호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강엽에게 진전이 이어진 자성검법의 원 주인, 자성검호와 줄곧 비교되었던 검객.

    위지세가라는 대가문의 주인이기도 했으나, 결국 팔대교왕의 권위를 넘지는 못했다.

    “당연하지만 적진의 분위기는 좋지 못합니다.”

    보급을 담당한 흑도 방파들이 우후죽순 무너지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지금 당장은 수뇌부가 억누르고 있지만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으리라.

    문득 전강이 물었다.

    “한데 배후 교란은 언제까지 할 것이오?”

    방문에 명시한 칠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도착하려면 슬슬 조영옥과 합류해야 하리라.

    “안 그래도 한두 건만 하고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근처에 혈교의 거점이 있으니 그쪽만 치지요.”

    일행은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뒤에 하오문의 분타를 나가 혈교도들이 모인 낡은 관제묘로 향했다.

    그리고 관제묘에 있던 혈교도들을 모두 격살하고, 그들이 인신공양을 위해 사로잡은 사람들을 구해 하오문에 인도했다.

    * * *

    쾅!

    탁자를 내려친 대공자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

    문주의 분노에 태화문의 중진들은 눈치만 볼 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면양의 위지세가 궤멸.

    -태화문 산하의 방파 다수 멸문.

    -전장으로 향하는 보급품 강탈.

    -노주의 숙정방을 공격한 아군 전멸. 독공을 익힌 초고수 확인.

    방문이 붙고 나서 며칠간에 걸쳐 일어난 사건들.

    산하의 흑도 방파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추산조차 되지 않는다.

    기실 이공녀 조영옥이 선전포고를 했을 때만 해도 경계할지언정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 또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같잖은 도발로 대공자를 끌어내려 일대일 생사결을 유도하는 것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데 지난 며칠 동안 일어난 사건들에 그들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확인된 적들은 귀영과 섬무검예, 사자염도와 정체불명의 사내요.”

    “앞의 세 사람은 그렇다 치고... 정체불명의 사내? 조사 똑바로 못하나?”

    “무명이외다. 다만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소. 소림의 무공을 썼다고 하오.”

    “...뭐?”

    “소, 소림?”

    하남 숭산에 있는 태산북두가 왜 나온단 말인가?

    대공자도 형형한 안광을 내뿜었다.

    “사실인가?”

    “생존자 중에 하남 출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설마 소림이 개입한 게...?”

    강호가 난세에 접어들었음에도 소림은 산문을 열지 않았다. 하나 그들이 개입한다면 그건 구파 하나가 참전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지난 수십 년간 천하제일로 일컬어졌던 불권이 사천의 일에 관심을 가졌다는 뜻이니까.

    “어불성설이다. 설령 소림이 산문을 열어도 광명마교를 등한시하고 사천에 개입하진 않을 터.”

    대공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들은 소림 출신으로 여겨지는 적의 출현을 확대 해석하고 있었다. 소림의 위명이 최악의 가능성을 상기시킨 것이다.

    “설사 놈이 소림 출신이라도 단 한 명이다. 그런 걸로 겁먹을 건 없다.”

    문제는 조영옥의 옆에 그만한 고수들이 있다는 것.

    “문주님, 귀영은....”

    “마찬가지다. 놈이 사도십대고수라고 하나 본문의 아성을 넘을 정도는 아니다.”

    이후 비스듬히 자리한 간부에게 눈길을 돌렸다.

    “위지세가의 생존자들은?”

    “본문으로 오고 있습니다.”

    “가주께 전해라. 외가의 식구들은 외손주가 안전하게 보호할 테니 전선에 집중하시라고 말이야.”

    그 말에 간부들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말은 보호라고 하지만 사실상 볼모나 다름없지 않나.

    만약 위지세가의 가주가 가문을 핑계로 전선을 이탈한다면 직계의 목숨은 보장하지 못하리라.

    “혈안사군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전선을....”

    “그 아이는 부르는 게 좋겠다.”

    갑자기 회의실의 문이 덜컥 열리면서 일단의 무리가 들어오자 간부들이 노성을 토해냈다.

    “누군데 감히...!”

    기세 좋게 일어난 그들은 여인과 눈을 마주치자 심장이 멎는 충격에 옴짝달싹못했다.

    여인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미안. 너무 급해서 말이야.”

    “으으....”

    간부들이 인형처럼 질질 침을 흘리는 모습에 대공자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섭혼술...?”

    간부들 중에 고수 아닌 이가 없거늘, 단지 시선을 마주친 것만으로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 위용.

    하지만 대공자는 역정을 내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요선님의 존재는 기밀입니다. 이렇게 들어오시면....”

    “아하하, 괜찮아. 이들은 우리가 들어왔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거거든. 이 대화도 마찬가지지.”

    마뜩치 않지만 어쩌겠나.

    대공자가 쓴맛을 삼키면서 상석을 양보하려고 하자 요선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금방 갈 거니까 앉아있어.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건 경고를 하기 위해서다. 네가 상식에 입각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것 같았거든.”

    “상식에 입각하는 게 왜 잘못된 판단입니까?”

    “그야 적은 비상식적인 존재니까.”

    “....”

    “우리의 대적이 오고 있단다.”

    “대적...?”

    고개를 모로 기울인 대공자가 요선을 호종하는 혈룡검군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그도 모르는 눈치였다.

    “너희처럼 상단전이 덜 발달된 녀석들은 당연히 모르겠지. 하지만 본녀는 느껴진다. 진조의 후예... 본교의 생사대적이 오고 있느니라.”

    “그게 누구입니까?”

    “글쎄, 직접 본 게 아니라서 확언할 순 없구나. 아마 귀영이라는 아이로 추측되는데.”

    “....”

    그 말에 대공자는 입을 닫았다.

    간부들 앞에선 자신 있게 말하긴 했으나, 그 또한 귀영을 가장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

    “방비를 굳히는 게 좋겠다. 칠석에 공격한다고 했지만, 그러다 기습적으로 들이닥칠 수도 있잖니?”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러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본녀도 이제부터 적들을 맞이할 준비를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렴.”

    “어떤 준비입니까?”

    “그건 비밀.”

    입술에 손가락을 올린 요선이 짓궂게 웃자 수많은 꽃이 만개한 것 같았다. 일부러 유혹하지 않아도 그녀의 미소엔 숨길 수 없는 마성이 있었다.

    * * *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난다는 칠석.

    서왕모가 한무제에게 선도의 복숭아를 건넨 전설이나, 당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 비익연리(比翼連理)의 구절에도 언급되는 날이다.

    본래는 북두칠성에게 무병장수를 기원하면서 고사를 지내는 길일이나, 작금의 사천은 달리 받아들였다.

    태화문이 있는 달주에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태화문의 반응은 어떤가요?”

    붉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질문에 하오문의 사천성 당주 오광우가 예를 갖춰 보고했다.

    “지극히 조용하다고 합니다.”

    “의외네요. 당한 게 있어서 이를 갈고 있을 텐데.”

    “대공자는 자존심이 강한 인물. 어쩌면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면사에 숨겨진 갸름한 턱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오 당주의 고견을 듣고 싶군요. 이 싸움의 양상이 어떻게 진행될지 말이에요.”

    “태화문의 후계 싸움은 골육상쟁으로 끝나되, 그 후의 싸움은 양측의 무력에 좌우될 겁니다.”

    “그 후의 싸움이라....”

    “혈안사군이 며칠째 전선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현재로선 행방이 묘연하지요.”

    “태화문에 갔을 공산이 크군요.”

    “한 가지가 더 걸립니다. 얼마 전부터 세작들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발각된 건가요?”

    “현재로선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낸 소식에 의하면 태화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목수들과 석공들, 장인들을 불러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싸움을 앞두고 장원을 보수할 리는 없을 텐데요.”

    “예. 감히 사견을 보태자면, 얼마 전 태화문을 방문한 귀빈들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근거는 없다. 그러나 하오문의 정보원으로서 연마한 감이 경종을 울렸다. 태화문의 안에서 무언가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강 무사에게 경고했나요?”

    “말씀드리긴 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요. 똑똑한 사람이니 대비책을 세울 겁니다.”

    “예. 한데... 그를 만나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

    “소문주님.”

    오광우의 우려 섞인 시선에 홍가려는 말없이 창문 넘어 먼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한 마차가 달주의 성문을 넘어 대로에 진입했다. 태화문이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난 대로.

    저잣거리에 모여든 군중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이공녀의 호위대주가 마차를 몰고 있었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저 안에 타고 있겠지.

    “...지금은 아니에요. 만나는 건 싸움이 끝난 뒤에.”

    걱정 말라는 듯이 생긋 웃었지만, 오광우는 그녀의 눈빛에 서린 근심을 놓치지 않았다.

    양 마교가 미쳐 날뛰고 있는 작금의 난세에서, 하오문 또한 곤경을 겪고 있었다.

    ‘지금은 태화문의 일이 먼저야. 여기만 무너뜨리면 혈교는 수세에 몰릴 테니....’

    아미와 청성의 영역에서 분탕질을 쳤던 혈풍신군이나, 검각의 험로에서 화산과 종남 두 구파를 막고 있는 또다른 교왕 역시 타격을 받을 터.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 식은 차를 홀짝거릴 때였다.

    “...응?”

    홍가려의 눈빛이 반짝였다.

    맞은편에 있는 누각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누구지?’

    처음 보는 무리였다. 그녀처럼 면사를 쓴 여인을 중심으로 무장한 무림인들이 마차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난 중년의 여인이 전음을 날려왔다.

    [여기서 하오문의 소문주를 뵐 줄은 몰랐네요.]

    “...!”

    설마 대화를 엿들었나?

    아니, 그걸 떠나서 하오문의 하 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낸 걸까?

    의문에 찬 홍가려의 눈빛에 중년 여인이 작게 웃었다.

    [당신과 그분 사이의 연이 느껴지는군요. 그분은 강호에서 많은 인연을 쌓으신 모양이에요.]

    [...누구시죠?]

    이젠 홍가려도 전음 정도는 쓸 줄 알았다.

    중년 여인은 대답하는 대신 이마를 살짝 들추었는데, 그곳엔 둥그런 별(星)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별 희한한 문신을... 아니, 잠깐.’

    언젠가 무림의 역사를 공부했을 때 읽었던 문헌.

    그 문헌에서 짧게 언급한 구절을 떠올린 홍가려는 경악했다.

    ‘일월...신교?’

    천하가 두려워하는 또다른 마교.

    혈교와 광명마교의 난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일월신교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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