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소요 (4)
구사도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흐, 죽다 살아났군요.”
잠시 교주의 원영신을 받아들인 것만으로 송장처럼 창백해진 낯짝.
뒤늦게 두 사람의 눈치를 본 그가 슬며시 물었다.
“...그럼 전 가도 되겠지요?”
“교주와 대화한 걸 들었나?”
“아뇨. 듣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교주님께서 가시기 전에 제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
“으음... 지키실 거죠?”
“가라.”
강엽이 혀를 차고 말했다.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준다는 투였다.
“흠, 그럼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맙시다!”
구사도가 정상에서 내려가자 백서희가 물었다.
“정말 약속을 지키려고?”
“그만한 대가를 받았으니... 할 수 없지.”
광명마교주의 조건은 혈교의 정보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본좌가 가진 심상의 조각을 주마.
일전에 백서희가 낙일신검에게 심상의 조각을 받았던 것처럼 광명마교주가 심상의 조각을 넘겨준 것이다.
‘똑같은 조각은 아니야. 이걸 쓴다고 광명마교주의 무공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이었다.
-단 한 번이지만, 네 역량이 받쳐준다면 본좌의 심상절예를 흉내낼 수 있을 것이다.
영롱한 빛무리를 내뿜는 조각.
광명마교주가 준 심상의 조각을 움켜쥔 강엽이 헛웃음을 흘렸다.
‘진원의 손상을 각오하고 줬다....’
아무리 아끼는 수하라지만 진원지기를 깎아내면서까지 구하려고 할 줄이야. 비록 사마외도일지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배포였다.
“가자. 아래 있는 두 명에게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줘야지.”
운남의 일은 이걸로 끝났다.
아래로 내려간 두 사람은 일행과 합류했고, 정상에서 일어났던 일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광명마교주가 나타났다는 말에 완안극과 금사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해졌다.
먼저 정신을 차린 완안극이 혀를 내둘렀다.
“사도의 몸에 원영신으로 강림하다니....”
하지만 광명마교주라면 그만한 존재감을 드러낸 것도 이해가 됐다.
“광명마교는 나중일이다. 지금은 당문주의 의뢰를 처리하는 게 먼저지.”
“바로 태화문으로 갑니까?”
“아니, 노주부터 간다.”
강엽은 금사하를 힐끔거렸다.
‘이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건 무리야.’
금사하의 심신이 정상이 아닌 건 둘째치고, 그녀는 일행의 싸움에 끼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일단 숙정방에 들러 그녀를 맡기는 게 나으리라.
* * *
여강에서 노주까지는 이천 리가 훌쩍 넘는다.
일행 전부가 경공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만만히 볼 수 없는 거리다. 험준한 산세와 가파른 협곡을 넘어야 하니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옥룡설산과 합파설산의 중간인 호도협(虎跳峽)의 잔도에서 야영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잠깐 모여봐라.”
“왜 그래?”
다들 야영 준비를 하다 말고 모였다.
강엽이 씩 웃으며 말했다.
“노주까지 한 번에 갈 수 있게 됐다.”
“예?”
“아니,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영문 모를 말에 완안극과 금사하는 물론, 백서희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었지.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보는 게 빠를 거다.”
강엽이 말한 순간 야영지 주변에 혈목이 올라오면서 붉은 강선을 치기 시작했다.
“혈라지망이잖아. 이게 뭐 어쨌다고?”
“보면 알아.”
어지간한 술법은 수인이나 진언을 외울 필요 없이 바로 쓸 수 있는 강엽이지만 이번엔 시간이 걸렸다.
혈라지망을 치고도 무려 반 시진이 넘는 동안 준비를 하며 중얼중얼 진언을 외웠던 것이다.
하도 준비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일행도 기대감을 내려놓고 지루함을 느꼈을 때였다.
“됐다.”
길게 숨을 고른 강엽이 한 자쯤 되는 금색 철봉을 꺼내 바닥을 찍었다.
쩌저저저저적!
“헉.”
“이, 이게 뭡니까!?”
건장한 장정이 간신히 통과할 것 같은 작은 틈새.
잔도 뒤편에 둔 암벽을 매개로 삼아 시커먼 공간이 열리자 일행은 마른침을 삼켰다.
“축지의 술법이다.”
“이거 혹시 모산혈조가 썼던 술법?”
백서희가 점창파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아는 척을 하자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지. 입도공월이라고 하는데... 제한된 거리만 갈 수 있고 인원수도 한정되긴 하지만, 그냥 무작정 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그 외에도 몇 가지 제약이 붙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시간을 획기적으로 아낄 수 있었다.
‘열심히 쪼아댄 보람이 있단 말이지.’
지난 며칠간 그가 일월신마공에 집중하는 동안, 진조는 심상세계에서 입도공월을 연구했다.
진조도 입도공월의 유용성을 알았기에 겉으로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일단은 협조해주었고.
‘그렇다 해도 모산혈조를 따라잡으려면 멀었지만....’
비록 악인이라 할지언정 술법에 대한 재능은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모산혈조였다.
진조 역시 술법의 대가인 만큼 입도공월을 낱낱이 뜯어봐서 요체를 알아냈지만, 모산혈조처럼 능숙하게 쓰려면 숙달될 시간이 필요하리라.
“근데 이거 어디로 통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 보이니 알 수가 있나.
백서희가 나뭇가지로 균열을 툭툭 쳐보며 묻는 말에 강엽이 대답했다.
“안에 들어가면 갈림길이 있을 거다. 엉뚱한 곳으로 가면 안 되니 잘 따라와야 해.”
강엽이 냉큼 균열 안쪽으로 들어가버리자 일행은 당황하면서도 행낭을 챙겨서 들어갔다.
* * *
그곳에 있는 건 수십 개의 갈림길이었다.
빨래줄에 걸린 옷감처럼, 혹은 물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수초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길.
하나의 갈림길도 고정되지 않고 쉼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다른 길과 연결되기도 하는가 하면 두 쪽으로 나뉘면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도 했다.
다만 강엽과 달리 일행은 갈림길을 인식하지 못했다. 절세고수들의 안력으로도 어둠 속을 꿰뚫어볼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어두워?”
“잠깐만 기다려 봐.”
강엽이 한 손에 창백한 불꽃을 피워올리자 그제야 일행도 어둠 속의 정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수없이 나뉜 갈림길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거 제대로 길 찾을 수 있는 거 맞지?”
오죽하면 백서희는 물론 강엽을 철통처럼 믿는 완안극도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힐끔거리겠는가?
강엽이 입도공월을 여는 데 썼던 철봉을 똑바로 세우자, 철봉이 앞으로 툭 떨어졌다.
철봉이 쓰러진 방향을 확인한 강엽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저편을 가리켰다.
“저쪽이다.”
“.......”
모두가 불신 어린 표정을 짓는 가운데 강엽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진짜야.”
“야, 이건 좀 그렇잖아.”
“그, 강 무사님.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백서희와 금사하가 뜨악했다. 아무리 그래도 철봉이 쓰러진 방향으로 길을 잡다니?
일행의 볼멘소리에도 불구하고 강엽은 당당했다.
“철봉을 잘 봐라. 뭔가 익숙하지 않나?”
“음, 그러고 보니...?”
“모산혈조가 썼던 석장이지. 모산파의 장문령부인데, 술법을 뒷받침해주는 법구다.”
모산파의 장문령부인 금시환령.
심상절예로 모산혈조를 죽였을 때, 그가 죽은 자리에 사리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절반만 남았기에 원본의 공능을 기대할 순 없지만, 술법을 보조하는 도구로는 쓸 만하다.
아무리 진조의 도움을 받아 입도공월을 상당 부분 해석했다고 해도, 금시환령의 보조를 받지 못했다면 이만한 고위 술법을 구사하진 못했을 터.
강엽은 그러한 사정을 설명하면서 말을 이었다.
“금시환령은 내 소망을 반영하지. 모산혈조가 생전에 만들어둔 거점에 한정되긴 하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안내할 거야.”
“크흠, 전 주인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닥치고 있었던 완안극이 그제야 입을 털자 두 여인이 어이없다는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에 들어왔을 땐 완안극도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지 않았던가?
물론 강엽도 완안극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음, 그래. 잊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넙죽 고개를 숙인다. 이 순간 완안극이 세상 다시 없을 간신으로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내심 쓴웃음을 지은 강엽이 말했다.
“그럼 가보자.”
그렇게 금시환령이 이끄는 대로 방향을 잡아서 일 각쯤 걸었을 때.
저편에서 출구가 열렸다.
그리고....
* * *
그곳에선 싸움이 한창이었다.
눈알이 시뻘게진 혈교도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병장기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귀영의 본거지다! 무조건 부숴라! 방주의 목을 따는 자에겐 큰 상을 내리겠다!”
“와아아아아아아!”
큰 상이라는 말에 혈교도들이 게거품을 물 기세로 달려든다.
내원에서 함성을 들은 단목정이 짓씹듯 내뱉었다.
“...끝장을 보자는 건가?”
강엽의 아래에서 전에 없이 강해진 숙정방이지만, 그 대가로 혈교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몇 번이나 어깃장을 놓은 강엽에게 물 먹이기 위해서 과한 전력을 쏟아부으며 짓밟으려고 한 것.
“방주님! 주월이 당했습니다!”
“뭐!?”
주월. 도끼를 독문병기로 쓰는 홍예칠위였다.
비록 강시이긴 해도 절정고수인 그가 당했다는 소식에 단목정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청도, 남궁과 황곤에 이어...!’
이제 남은 것은 적검과 녹창, 자권이었다.
하지만 조금 있자 또다른 비보가 날아왔다.
“녹창이 쓰러졌습니다, 방주님! 고 당주도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
홍예칠위 중 두 명밖에 없는 상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섭풍도 중상을 입고 들것에 실려서 간신히 후퇴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화르르르르륵......!
푸른 화염이 장원 외곽을 질풍처럼 내달리며 혈교도들을 몰아쳤다.
멀리서도 보일 만큼 큼지막한 불의 폭풍에 방도들이 환호하고, 단목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주님, 하후 소협이...!”
“안심하기엔 일러.”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막기엔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홍예일위 중 가장 강한 자권과 적검이 막고 있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짜악!
‘정신 차려! 이렇게 포기할 거야?’
간신히 얻은 보금자리였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쟁취하진 못했을지언정 빼앗기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모자란 것 많은 방주를 따르는 방도들을 위해서, 그리고....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랫배를 어루만진 그녀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방주가 검을 들고 일어나자 방도들이 화들짝 놀랐다.
“바, 방주님!”
“서쪽을 막겠다. 방도들은 날 따라와라!”
“하오나 방주님은...!”
“어서!”
방도들은 쩔쩔맸지만 방주를 말리지는 못했다. 어차피 내원에 있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외원이 뚫리면 적들이 물밀 듯이 몰려오리라.
하지만 그들이 서쪽에 갔을 때, 그곳에 있는 것은 살기에 휩싸인 적들이 아니었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줘....”
온몸에 핏줄이 불거지고 전신이 녹는 고통에 뒹굴거리는 적들의 모습.
콰직! 으적으적!
고통을 호소하는 혈교도들 위에서 시커먼 안개가 꿈틀거리며 혈교도들을 삼켜버린다.
이윽고 흑포를 입은 혈사교령을 퉤하고 토해낸 검은 안개 속에서 벌레 씹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 영양가가 영 별로구만. 평소에 야채 안 먹나?”
창백하게 질린 시체를 굳이 보고 싶지 않았던 숙정방도들은 검은 안개를 두렵게 바라보았다.
다만 단목정은 검은 안개에서 익숙함을 느끼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주군?”
“음?”
검은 안개가 갈라지며 낯선 인영이 나왔다.
이제 막 열다섯이 됐을까 싶을 만큼 앳된 소년의 외양. 단목정은 자신의 추측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대가 숙정방주인가?”
“그렇습니다만... 고인께선 뉘신지요?”
눈앞에 있는 소년은 마냥 어린 아이가 아니다.
풍기는 기도에서 묘한 관록과 여유를 느낀 단목정이 당혹스러워하면서 묻자 소년이 입가를 들어올렸다.
“완안극. 주인님의 충복이다.”
“주인님?”
“그대의 주군이신 강 무사님 말이다. 우린 같은 분을 모시고 있으니 안심하도록. 난 그대를 도우러 온 사람이다.”
“아!”
강엽이 사람을 보낸 것이다.
단목정이 안도하면서 숨을 고르자 완안극이 묘한 얼굴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데 그 몸으로 싸우려는 건가?”
“...전력이 부족하니까요.”
“아서라. 괜히 무리하다간 둘 다 탈난다. 내가 있으니 여긴 아무도 지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다른 곳은....”
“마찬가지다.”
숙정방이 싸움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자마자 일행은 뿔뿔이 흩어졌다.
“주인님께서도 오셨다. 그분께서 오신 이상 이 정도 군세는 금방 정리될 터.”
그 말에 단목정은 긴장감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부축하려는 방도들에게 고개를 내젓고는, 두 발로 똑바로 서서 공손히 포권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완 공(公).”
“노사라고 불러라.”
“예, 완 노사님.”
“한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아이의 아비가 주인님은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단목정이 얼굴을 붉히며 먼 곳을 향해 아련한 눈길을 보냈다.
푸른 불길이 휘몰아치는 장원의 대문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