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막간二 (1)
“회임은... 아니네요.”
“네? 정말요?”
“예, 태기가 느껴지진 않습니다.”
“하아.”
한숨을 흘린 백서희가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뭐, 다행이네요. 수련도 해야 하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애라도 덜컥 들어섰다간....”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긴 하지만 아쉬워하는 기색을 숨길 순 없었다. 그녀를 처음 보는 당문의 여의원도 알아볼 정도였으니까.
진맥을 본 중년의 여의원이 쓰게 웃었다.
“정신적으로 압박감을 받으면 달거리가 좀 늦게 찾아오기도 한답니다. 아니면....”
“...?”
“음, 이건 무인에게는 실례되는 질문이 될 수 있는데... 혹시 무공에 큰 변화가 있었나요?”
“...그건 왜요?”
“심신이 큰 변화를 겪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거든요. 어지간한 변화로는 일어나지 않지만....”
그 말에 백서희는 물론 강엽도 입을 다물었다.
삼화취정에 올라서 기파를 안정시킬 정도로 심신에 큰 변화를 겪지 않았던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물어보진 않을게요. 조금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음....”
“괜찮다면 탕약을 처방해줄까요?”
“탕약이요?”
“예, 혹시 아이를 원하신다면....”
“....”
백서희가 입을 다물고 강엽을 돌아봤지만, 강엽이라고 따로 해줄 말은 없었다.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지지하겠다고 넌지시 알려줄 뿐.
“음,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요?”
“할 일이 많으니까요. 저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야....”
당문의 여의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엽을 향해 예를 표한 뒤에 방을 나갔다.
기척이 멀어지자 백서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괜히 설레발을 쳤네. 다행이야.”
“난 많이 아쉬운데.”
“...응?”
“혹시나 싶었거든. 초음으로 살펴봐서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이번만은 내가 틀리길 바랐어.”
“한창 바쁜데 애를 어떻게 낳아?”
“떠나면 되지.”
“진심이야? 네가 없어지면 무림은....”
“무림에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둘 없다고 망하면 어차피 망할 운명이야.”
“말이라도 못하면.”
곱게 눈을 흘긴 백서희가 비식비식 웃었다.
“생각해보니 웃기긴 하다. 우리 혼인도 안 했는데.”
혼인도 안 한 젊은 남녀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상식적이진 못했다. 두 사람 모두 양친이 없는 처지라서 제대로 관례를 지키기도 힘들지만....
“할까?”
“뭐?”
“네 뒤엔 점창파의 장문인이 계시잖냐. 나는 낭왕이 있고. 정 안 되면 고향에 가서 스승님께 부탁하자. 그럼 납채(納采)는 될 거야.”
“그래도 돼?”
“안 될 건 뭐야?”
백서희가 눈을 껌뻑거렸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으음, 그래도 지금은... 전전대 장문인께서 운명하신지 얼마 안 됐는데 혼인을 하기는 그렇잖아.”
“그럼 올해가 가기 전에 하자.”
“청혼 참 재미없게 한다?”
“...기대하라는 말이었는데.”
강엽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지자 백서희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좋아. 그 말 기억해둘게, 낭군님.”
“나참.”
결국 강엽도 풀썩 웃었다.
* * *
“난 바로 떠나봐야 할 것 같네.”
현운 도장이 다소 굳은 안색으로 찾아오자마자 꺼낸 말이었다.
강엽과 백서희도 조금 놀랐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사천삼패의 분들한테서 들었네. 호광에서 괴변이 벌어지고 있다는구만.”
“괴변이라면...?”
“죽은 자가 일어서고 있다는군.”
“...!”
강엽과 백서희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이번에 모산혈조가 죽은 자를 일으키는 걸 보지 않았던가.
현운 도장도 그 점이 못내 걸리는 기색이었다.
“모산혈조와 같은 술법을 썼을 수도 있겠지. 그만한 술법을 부릴 만한 자가 모산혈조 말고 또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모산혈조의 제자는 전멸했습니다.”
모산혈조의 기억을 흡수한 덕에 강엽은 모산파의 술사가 한 명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산혈조가 혈교 본단에 있는 술사들까지 싹싹 긁어온 것이다.
‘죽은 자를 일으키는 술법이라....’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를 강시로 만드는 술법이라고 해야 하리라.
“의외로 모산혈조와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쾌검을 익히는 무맥이 하나만 있지 않듯, 술법 역시 여러 계통으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 모산파의 술법과 흑룡교의 술법은 다르지요. 백도 제일의 술가(術家)인 제갈세가의 술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뜻 비슷한 효과를 지닌 술법이라 하더라도 결과에 이르는 길은 전혀 다르다는 의미.
강엽의 말뜻을 헤아린 현운 도장의 이맛살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하면 다른 술사일 수도 있다는 뜻인가?”
“광명마교일 수도 있습니다.”
“혈교가 아니라?”
“아무리 혈교의 덩치가 커도 양면전선을 넘은 삼면전선은 자살행위니까요.”
작심하면 안 될 것도 없겠지만, 그럴 바엔 운남과 사천에 더 강한 전력을 투사하는 것이 낫다.
“혈교는 운남을 먹어치우고, 사천의 태화문을 집어삼켜 앞뒤로 포위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광까지 노리는 건 실익보다 손해가 큽니다.”
호광은 사천만큼 커다란 성. 심지어 무당파와 모용세가, 제갈세가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어떤 의미에선 사천 무림보다도 공략하기 까다롭다.
“사천 무림엔 천하팔존이 없습니다. 반면 호광 무림엔 천하팔존이 있지요.”
“사부님을 말하는 것이군.”
“검선께서 두문불출하신다고 해도 호광 전역이 난리통이 나면 내려오시지 않겠습니까?”
“자네 말대로일세. 사부님께선 속세의 일에 관심을 안 두시는 게 아닐세. 그저 지켜만 보시는 게야.”
그 점에선 검성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사마외도 척결에 국한되긴 했지만 검성은 섬서 무림에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했으니까.
“물론 제 예상과 달리 혈교의 소행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 된다면 다행이겠군요.”
맹월림이 참혹하게 몰락했으니 대계의 첫 바퀴가 어그러진 셈. 만약 괴변을 일으킨 자들이 혈교라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터.
현운 도장의 안색이 흐려졌다.
“최악을 가정해야겠군.”
“네, 아마도....”
뭔가 말하려던 강엽은 문득 낯선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좁혔다.
‘이건....’
모산혈조의 기억이다. 평소엔 잠잠한데 불쑥불쑥 떠오르곤 했다.
‘심해지면 내 기억인지 타인의 기억인지 헷갈리겠군. 이건 나중에 따로 조치를 취해놔야겠어.’
무광암으로 모산혈조의 모든 것을 강탈한 건 좋은데, 기억도 딸려오다 보니 부작용이 있는 것.
하지만 이번엔 도움이 되었다.
“혹시 마의라는 자를 아십니까?”
“마의라면... 사대악인 중의 한 명이 아닌가?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고 알고 있네만.”
“왠지 그자가 관련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근거가 있는가?”
강엽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모산혈조의 기억을 떠올리자 진조의 영성이 경종을 울렸다.
지금 떠올린 예감이 맞다고.
“...마의는 모산혈조와도 교류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마의가 모산혈조의 술법에 관심을 가졌다면 비슷한 술법을 창안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교류를 했는지는 강엽도 몰랐다. 스쳐지나간 기억이 그것까지 보여주진 않은 탓에.
억지로 보고자 한다면 못 볼 것도 없겠지만....
‘그럴수록 모산혈조의 기억에 강하게 영향을 받겠지. 이게 나한테 별로 좋을 것 같진 않은데.’
필요할 때는 모산혈조의 기억을 뒤적거려야겠지만, 가급적 그 횟수를 줄이는 게 좋겠지.
설령 들여다보더라도 너무 깊이 봐선 안 된다.
“이미 괴뢰마가 광명마교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마의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을 겁니다.”
“음, 알겠네. 자네 말대로 그런 괴변을 벌일 자들은 마교나 사대악인 정도밖에 없겠지.”
현운 도장은 강엽에게 어떻게 모산혈조와 마의가 만난 걸 알았냐고 묻지 않았다. 모산혈조와의 싸움에서 들었을 거라 지레짐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고마웠네. 사형에 대한 것도 그렇고....”
“같이 못 가서 유감입니다.”
“뭘. 자네도 바쁜 몸이 아닌가. 사천에서 일어난 일도 못지않게 중할 걸세.”
천천히 두 손을 모아 포권하는 두 사람의 모습.
기존의 인연이 떠나고, 새로운 사건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 * *
현운 도장이 떠난 뒤 이번엔 사천삼패의 고수들과 진멸신권 정무악이 찾아왔다.
강엽은 정무악을 빤히 바라보았다.
“입이 좀 가볍더군.”
“으음? 호, 혹시 말해선 안 됐나?”
“함구하라고 하진 않았으니 당신 탓을 할 순 없겠지. 하지만 양해는 구했어야 하지 않나?”
“...확실히. 이 건은 내가 실수했군.”
정무악이 딱딱해진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미안하네. 내 생각이 짧았어. 내 명예를 걸고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
명예까지 걸었는데 무시하기도 뭐한 노릇. 걸고 넘어진다면 정무악의 명예를 모욕하는 일이 되겠지.
“이 문제는 여기서 넘어가지. 다른 손님들도 있으니까.”
대강 합의를 본 강엽이 세 사람을 돌아봤다.
“손님들이 오셨는데 저희 얘기만 했군요.”
“허허, 아닙니다. 두 분이 뭔가 풀었어야 할 일이 있었던 것 같군요. 얘기가 잘 되어서 다행입니다.”
회색 승복을 입은 중년의 비구니가 인지하게 웃으며 불호를 읊조렸다.
복호승들을 인솔하여 싸움에 참전한 그녀는 정선(淨善) 신니로, 아미파 장문인과 같은 배분의 원로였다.
“강 시주께는 감사드려야겠군요. 노주의 숙정방 덕분에 빨리 올 수 있었습니다.”
강엽이 떠나고 며칠 뒤에 도착한 단목정이 지시를 듣고 배편을 수배한 것이다.
일대 물길을 장악한 조운방이 꺼렸기에 그녀는 중경의 조천방에 직접 가서 방주와 담판을 지었다.
“조천방이라....”
“강 시주께서 조천방과 거룡방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지요. 덕분에 조천방주께서도 흔쾌히 배와 선원들을 내주셨습니다. 육로로 오는 길도 편했지요.”
금사강을 지나 육로에 닿았을 땐 하오문의 도움을 받았다. 운남성을 총괄하는 하오문 당주, 오남희가 남몰래 수백 필의 말을 구한 것이다.
말이 지치면 역참에 가서 말을 바꾸고, 그렇게 쉴 새 없이 달리면서 점창산에 도착한 것.
청성 장문인의 사제인 도유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강 도우가 지금껏 한 일들 덕분일세. 강 시주의 설득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여기 있는 일도 없었을 테지.”
강엽이 무림맹에서 당천경을 비롯한 사천삼패의 중진들을 설득한 덕분에 그들은 출혈을 감수하고 점창파에 원군을 보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두 분이 제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그러면서도 강엽은 자기 공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천삼패의 참전은 시운이 따르긴 했지만, 어느 정도 안배를 해둔 결과였으니까.
그때 당문의 대표가 나섰다.
“당문주님의 사촌 아우인 당표경이오.”
“강엽입니다.”
“힘든 싸움을 치른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문주님께서 강 무사를 고용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셨소.”
“...내용을 알 수 있겠습니까?”
“문주님의 서찰이오.”
강엽은 서찰을 받자마자 바로 봉투를 찢고 그 자리에서 읽어봤다.
당표경을 비롯한 네 사람은 어느 정도 내용을 아는 듯 그리 궁금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서찰을 쭉 읽어내려간 강엽의 표정이 굳었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군요. 사천 정세가 이런데도 원군을 보냈단 말입니까?”
“문주님께선 운남의 정세가 더 심각하다고 보시더구려. 직접 와보니 과연 그분의 선견지명대로였소.”
현운 도장이 떠나기 전에 운남 무림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직접 설명했던 것이다.
팔대교왕 둘에 사대악인 둘, 죽지도 않는 불사의 강시들과 수천에 달하는 전사들.
그들이 점창파를 무너뜨리고 사천으로 진격했다면 사천 무림은 최악의 위기를 맞닥뜨렸을 게 뻔했다.
“물론 맹월림이 무너졌다고 사천 무림이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오. 사천 무림은 사천 무림대로 심각하지.”
“태화문의 이공녀는 실종됐고, 세력은 지리멸렬했다....”
“대공자가 문주의 위에 오르고 전쟁을 일으켰소. 대공자의 외가인 위지세가도 참전했고 말이오.”
위지세가는 사천 북부의 대가문으로, 비록 팔대세가만큼 위세를 떨치진 못하나 강맹한 가문이었다.
“현재 사천 무림의 정세는 대충 이렇소. 사천삼패와 천금상단이 한 편을 먹고, 태화문과 위지세가, 혈교가 한 편을 먹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소이다.”
“예. 당문주님께서도 서찰에 그렇게 쓰셨군요.”
천금상단은 조영옥의 외가다. 태화문주가 된 대공자가 자신들을 놔둘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재빨리 사천삼패에 의탁한 것이리라.
‘돈 많은 우군을 둬서 나쁠 건 없지. 큰 전쟁일수록 무력보다는 금력이 중요해지는 법이니까.’
전쟁은 돈 먹는 괴물이다. 병사들의 식량과 병장기, 갑옷, 말... 그 모든 것이 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림의 전쟁이라고 특별히 다르진 않을 테니 천금상단이 돈줄이 되어준다면 든든하지 않겠나.
“천금상단의 처지도 좋지 않소이다. 혈귀들이 그들의 사업체를 부수고 있는 데다, 태화문이 뭘 어쩐 건지 관부도 수수방관하고 있소.”
“괜히 끼어들었다가 피를 보고 싶진 않겠지요.”
천금상단쯤 되는 대상단이 관부와 연줄이 없을 리 만무했다. 엄청난 재물로 고위 관리들을 매수했을 터.
한데 관부가 몸을 사리고 있다?
‘누가 이길지 가늠한 뒤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건가?’
만약 한쪽을 도왔다가 다른 한쪽이 덜컥 승리하면 곤란해질 테니까.
고위 관리들도 제 목을 걱정할 만큼 사천의 정세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는 의미.
“한데 서찰엔 정세만 나와있고, 어떤 일을 맡기실지는 나와있지 않군요. 의뢰가 뭡니까?”
“어찌 보면 당문주님보다는 천금상단주의 의뢰라고 할 수 있겠구려. 태화문의 이공녀 조영옥을 찾아주시오. 만약 죽었다면 그녀의 시체라도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