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98화 (294/450)

57화. 장례 (3)

전전대 장문인, 낙일신검의 노구는 점창산의 소나무로 만든 관에 모셔졌다.

죽은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여정. 긴 상여가 줄을 이었다. 척무경을 비롯한 배분 높은 제자들이 상여꾼을 자처했다.

싸움에 참가했던 무인들과 점창파를 흠모하는 부족들은 장지(葬地)로 향하는 노검객과 제자들을 배웅했다.

뒤늦게 부고를 접한 부족들은 상여의 여정에 꽃을 뿌려 그들이 가는 길에 경의를 표했다.

강엽과 백서희는 맨 뒤에서 상여를 따랐다.

“장문인께선 백족(白足) 출신이셨대. 백족의 풍습대로 장례를 치를 건가 봐.”

낙일신검은 본인이 원했던 대로 제자의 옆에 묻혀서 영면을 취했다.

백서희는 무덤 앞에서 구배지례를 올렸다.

제자가 사부에게 올리는 예법.

점창파의 누구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점창육로는 그녀의 월하검무를 봤다. 낙일신검이 어떠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심상을 전해준 건지 짐작하고 있었다.

새로이 장문직에 오른 종현이 말했다.

“사백께서 마지막으로 소망하신 게지. 이 세상에 자신의 제자를 남기고 싶다는....”

살아생전 제자로 받은 게 아니기에 백서희가 점창의 제자를 자처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종현과 점창육로는 백서희를 속가제자로 인정하며 자신들과 같은 배분에 올려두었다.

그녀가 쓰는 쌍검술에선 그만큼 사일검법의 향취가 짙게 묻어났다.

“이제 자네는 한 식구일세. 우린 자네를 사매로 대할 것이고, 제자들은 자네를 사고로 예우할 걸세.”

“저는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한때 살수로 살았던 백서희였다.

살수 노릇을 때려치웠다고 하나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훗날 이 일이 알려진다면 점창파에 누를 끼칠 수도 있지 않겠나.

종현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난 사백의 안목을 믿네. 사백께서 자네를 택하셨다면, 필시 이유가 있었을 게야. 사백은 재능이나 출신이 아닌 성품을 보시는 분일세.”

“.......”

백서희는 가슴에서 뭔지 모를 감정이 울컥 치솟는 것을 느끼면서 입술을 꽉 다물었다.

“...감사합니다.”

“장문 사형이라 부르게나.”

“네, 장문 사형.”

백서희가 낙일신검의 제자가 됐다는 소식에 젊은 제자들은 깜짝 놀랐지만, 반발은 거의 없었다.

점창육로가 그녀를 인정했고, 백서희가 점창파를 위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 * *

강엽과 완안극은 점창육로 중 한 사람인 숙군백을 따라 으슥한 동굴로 향했다.

일전에 모산혈조의 제자인 매소봉을 마안으로 취조할 때 썼던 동굴.

-크르륵...!

어둠 속에 숨은 누군가.

침입자의 기척에 안쪽에 있던 인영이 벼락처럼 달려들며 손가락을 할퀴었다.

“어허!”

눈썹을 치켜뜬 완안극이 반탄력으로 튕겨내자 인영은 단단한 벽에 부딪쳐서 피를 뿌렸다.

내상을 입고 쓰러진 인영을 지켜본 강엽이 숙군백을 돌아봤다.

“정말 안 죽이실 겁니까?”

설산검호의 제자인 금사하.

이지를 잃고 조종당했다곤 하나, 점창의 입장에선 장문인에게 위해를 끼친 원수였다. 숙군백은 그런 금사하를 치료해달라고 한 것이다.

숙군백의 목울대가 꼴깍 움직였다.

“진멸신권에게 들었네. 자네가... 여기 계신 독곡주를 치료했다고 말일세.”

완안극이 불괴강시에서 흡혈귀로 돌아왔을 때 정무악도 현장에 있지 않았던가.

한데 금사하의 얘기를 전해듣고 알려준 모양.

완안극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긴 것답지 않게 입이 싼 놈이군요. 허락해주시면 당장 가서 족치겠습니다, 주인님.”

“아, 아니...?”

완안극이 허락만 떨어지면 정무악의 멱을 딸 것처럼 굴자 당혹스러워진 것은 숙군백이었다.

강엽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함구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니... 이건 내 실책이다. 남탓을 할 게 못 돼.”

함구해달라고 했다면 오히려 수상쩍은 인상을 심어주었겠지.

그렇다 해도 뭔가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하게 굴었나?’

물론 강엽에게 위해를 끼치려고 그때의 일을 말한 것은 아니리라.

숙군백에게 금사하에 대한 얘기를 듣고 안타까워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한 것이겠지.

“부탁하네, 강 무사. 제발 저 아이를 구해주게!”

조부뻘인 노강호가 체면도 버리고 고개를 숙이면서 부탁하자 강엽도 곤혹스러워졌다.

완안극 역시 말은 안 하지만 금사하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눈치.

“설산검문은 이 땅의 유구한 무맥일세. 검문의 맥이 이리 끊기는 건 비극이 아니겠는가?”

수많은 문파가 몰락하고, 다시 그만큼의 문파가 일어서는 곳이 강호 무림이다. 특별히 설산검문만 예외적인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을 터.

‘하지만 구하지 않을 이유도 없긴 하지. 겸사겸사 빚도 지울 수 있고.’

이미 보은패(報恩牌)를 받긴 했지만 거기에 빚 하나 더 얹어둔다고 나쁠 것은 없었다.

그래야 보은패를 쓸 때 덜 미안하지 않겠는가?

‘완안극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충성심 같은 건 없다.

지금이야 강엽이 목숨을 살려주었고, 흡혈귀로서의 격이 높기에 충성심이 굳건하지만....

‘영원히 그러리란 보장은 없어. 이 관계를 유지하려면 나도 꾸준히 신경 써야 한다.’

하물며 완안극은 설산검호와 약속을 나누지 않았던가.

금사하가 이지를 되찾는다면 설산검문의 맥을 이어달라는 설산검호의 유지를 반은 들어준 셈.

결정을 내린 강엽이 숙군백을 돌아봤다.

“무조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확신하기엔 표본이 너무 부족합니다.”

“가능성이 있는 게 어디인가? 고맙네. 정말 고마워!”

“한 가지 더. 제가 불괴강시를 치유할 수 있다는 건 발설하지 말아주십시오.”

소문이 퍼진다면 혈교가 강엽의 정체를 의심할 것이다. 모산혈조를 죽인 것과는 별개로 괜히 혈교에 정체를 들켜서 좋을 게 없었다.

“으음, 알겠네. 내 사형제들에게도 말하겠네.”

“자리를 잠시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숙군백이 아쉬워하면서도 동굴을 빠져나가자 완안극이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비록 말은 안 했지만 강엽이 자신을 배려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강엽이 실소를 흘렸다.

“감사 인사를 받기는 좀 이른 것 같은데. 아까 전에 말한 대로 십할 장담하진 못해.”

“실패하면... 저 아이의 운명이 그런 거겠지요.”

어둠 속을 응시하는 완안극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어느새 내상을 재생한 금사하가 짐승처럼 사지를 땅에 붙인 채 이를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카하아앗...!

“짐승 꼴로 살 바엔 죽는 게 낫습니다. 저런 꼴로 연명하는 건 저 아이도 원치 않을 겁니다.”

“글쎄, 이지를 되찾는다고 행복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녀가 맹월림주의 밑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아는 강엽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금사하는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뒷걸음질을 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나왔다.

“주인님...!”

“호들갑 떨 것 없다.”

강엽은 그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엽초를 꺼내 허공에서 몸부림치는 금사하의 입에 물렸다.

일순 하얀 불꽃이 튀는가 싶더니 엽초 끝부분이 타오르면서 독한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독향이 느껴집니다. 감각을 무디게 해서 심신을 진정시키지만, 강력한 환각을 보여주는 독이군요.”

독의 종사답게 완안극은 냄새만 맡고 환마연이 어떤 성질을 지녔는지 파악했다.

“맹월림주가 갖고 있던 물건이지. 선물이라면서 주던데 이렇게 쓸 줄은 몰랐군.”

엽초의 연기는 두 사람의 코에도 스며들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평소에도 신공의 호흡으로 기운을 다스리는 고수에겐 통하지 않는 것.

호흡을 조절한다면 맹월림주가 그랬듯 약에 취할 수 있겠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크르르르르....

반면 허공섭물로 제압당해 옴짝달싹못하는 금사하는 환마연의 연기를 폐부 깊숙이 받아들였다.

그녀의 눈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알아본 강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을 그어 피를 냈다.

그 뜻을 헤아린 완안극이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막그릇을 가져왔다.

막그릇에 담긴 피를 금사하의 입에 가져간다.

-으으읍...!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에서도 완강히 거부하는 태도.

마뜩찮은 기색을 드러낸 완안극이 그녀의 복부를 퍽 때렸다. 몸이 꺾인 금사하가 고통스럽게 기침하며 걸쭉한 침을 질질 흘렸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다. 먹어라.”

“...너무 폭력적인 거 아닌가?”

그냥 마혈을 짚는 방법도 있을 텐데...?

“아무리 제가 이 아이를 아껴도 주인님의 성혈(聖血)을 거부하는 걸 봐줄 수는 없지요.”

그러면서 턱을 잡고 억지로 먹게끔 하자 금사하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피를 다 마시고 콜록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제서야 완안극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러났다.

‘누가 보면 물고문하는 줄 알겠구만.’

내심 쓴웃음을 흘린 강엽은 허공섭물을 풀고 금사하가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관찰했다.

입을 떡 벌린 채 게거품을 무는 게 피가 아니라 독을 먹였다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완안극이 슬쩍 눈치를 봤다.

“...이거 괜찮은 거겠지요?”

“아까 말하지 않았나?”

금사하는 완안극과 경우가 다르다.

‘완안극은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에서 피를 마셨지. 비교하자면 그나마 신녀와 비슷한데....’

두 사람의 무력은 까마득한 차이가 있는 만큼 금사하가 순혈에 담긴 힘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끄르륵! 끄으윽!

멋대로 사지를 꺾고 경련하는 모습.

초음의 파동으로 체내의 변화를 관찰하는데, 진기와 피에 담긴 기운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었다.

마치 누가 금사하의 몸을 차지하는지를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모양새.

이윽고 승자가 정해졌다.

“학! 하악!”

시체처럼 축 늘어진 금사하가 번쩍 눈을 뜨며 헛바람을 삼켰다.

“여, 여긴 대체... 당신들은...?”

목소리가 쉬긴 했어도 이전처럼 이질적인 괴성은 아니다. 완안극이 가슴을 쓸어내리자 강엽이 물었다.

“우리가 누군지 알겠나?”

“모, 모르겠어요... 여긴 어디죠? 사부님은? 사형들은 어디 계세요!?”

“진정해. 마지막 기억이 뭐지?”

“...싸우고 있었어요. 본문에 적들이 쳐들어왔고... 부, 분명 방금까지 싸우고 있었는데!?”

강엽과 완안극이 은밀한 눈빛을 교환했다.

‘기억이 싹 다 날아간 것 같은데....’

괴로운 기억이 없는 건 다행이지만 숨기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설산검문이 멸문했다는 소식은 동굴을 나가면 자연히 들을 테니까.

금사하를 본 점창파 제자들도 많으니 그녀가 맹월림주의 편에 섰다는 사실도 알게 될 터.

불행한 과거를 아는 건 본인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정면 돌파를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강엽은 생각을 정리하면서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당신은....”

* * *

“어떻게 됐어?”

“한참 울고불고 난리치다 잠들었어.”

백서희가 어깨를 으쓱이자 강엽은 왠지 혀끝에 쓴 맛이 감도는 기분이었다.

“괜히 말했나?”

“받아들이긴 어렵겠지.”

일평생 겪지 말아야 비극을 한꺼번에 겪은 셈이다. 그 충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근데 금 소저는 흡혈귀가 된 거야?”

“억지로 피를 먹인다고 다 흡혈귀가 되는 게 아니야. 흡혈귀가 되려면 의식을 치러야 해.”

지금의 금사하는 혈교의 신녀와 비슷했다.

불괴강시이되 이지를 되찾은 상태.

“물론 의식을 한 번 더 치르면 흡혈귀가 되겠지. 하지만 그땐 태양을 못 버틴다.”

완안극은 이미 삼화취정에 오른 상태에서 흡혈귀가 됐기 때문에, 햇볕에 취약할지언정 죽진 않았다.

하지만 금사하는 다르다. 만약 그녀가 흡혈귀가 되어 햇볕에 노출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럴 바엔 불괴강시로 사는 게 나아. 재생력이 불안정하니 자칫 괴물이 될 수도 있지만....”

“끄응, 구해줘도 문제네.”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어.”

사문은 풍비박산이 난 데다, 가족처럼 여겼던 사부와 사형제들은 죽었다. 심지어 본인은 강시가 되고 원수에게 정조를 잃지 않았던가.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긴 너나 완 노사님보다는 같은 여자인 내가 곁에 있는 게 낫겠네.”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가여운 사람이잖아. 도와줘야지.”

낙일신검의 제자가 된 그녀가 비호한다면 점창파의 제자들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백서희가 머뭇거리면서 입술을 우물거렸다.

“강엽, 실은 나 있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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