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장례 (2)
휘우우우우웅.......
점창산을 뒤덮는 심상의 물결.
저물어가는 황혼처럼 덧없고도 애잔한 노검객의 마음이 점창산의 초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강엽은 직감적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장문인....”
“주인님!”
멀리서 달려오는 완안극의 모습. 함께 온 현운 도장이 강엽을 살펴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해서 다행일세. 그나저나 방금 그건 대체....”
조금 전까지 적과 싸웠던 두 사람이었다.
밀리진 않았으나, 망자가 된 적들이 몇 번이고 되살아났기에 싸움이 길어졌다.
한데 심상이 점창산을 휩쓸고 지나가자 적들이 허물어졌다.
“주인님께서 모산혈조를 쓰러트렸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글쎄....”
“예?”
“모산혈조를 죽이긴 했지만, 고위 술법은 술사가 죽는다고 바로 무너지지 않아. 어떤 술법은 술사가 죽어도 수십 년간 유지된다.”
“그렇다면....”
“점창파 장문인께서 심상절예를 쓰신 거다.”
“...!”
“음, 역시....”
완안극은 입술만 꼭 깨물었고, 현운 도장은 과연 그 말이 맞다는 듯이 탄식했다.
두 사람을 일별한 강엽은 점창파의 경내가 보이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물론 모산혈조가 살아 있었다면 술법이 쉽게 깨지지 않았겠지만....’
모산혈조의 죽음으로 술법을 유지할 근간이 사라진 상태에서 낙일신검이 결정타를 가한 것이다.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언젠가는 깨졌겠지만, 낙일신검이 마무리를 지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근데 기척이 좀 많군. 기파로 봐서 맹월림은 아닌 것 같은데...?”
“아, 예. 실은....”
완안극이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사천삼패와 진멸신권이 이끄는 낭인들이 합류했다는 말에 강엽은 조금 놀랐다.
태화문이 혈교의 손에 넘어간 만큼 점창파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는데, 그래도 지원군을 보내준 것이다.
‘그것도 최정예를.’
전투를 치른 직후라서 그런지 내로라하는 고수들도 기파를 갈무리하지 못했다.
이만하면 사천삼패 입장에서도 상당한 전력이었을 텐데....
“사실 저희도 방금까지 싸우다 온 거라서 아래쪽의 상황이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
“그럼 얼른 내려가봐야겠군.”
* * *
“강엽!”
전력으로 달려온 백서희가 와락 안겨왔다.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를 본 강엽은 내심 쓰게 웃으면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동굴에 있을 줄 알았는데.”
“느낌이 안 좋아서 왔어.”
“다친 데는 없고?”
“나는 괜찮아. 하지만....”
머뭇거리면서 사람들이 모인 곳을 곁눈질한다.
백서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강엽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낙일신검을 발견했다.
강엽을 비롯한 절세고수들이 오자 자연히 길이 열리면서 땅에 드러누운 낙일신검의 모습이 드러난 것.
핏기 하나 없이 허옇게 질린 낙일신검이 흐릿한 눈으로 강엽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왔는가....”
“장문인.”
낙일신검의 전신을 훑은 강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주먹이 들어갈 만큼 크게 뚫린 복부의 상처도 심각했지만, 진정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선천지기가 한 줌도 남지 않았어. 정기신의 균형도 무너졌고. 이건... 대라신선이 와도 못 살린다.’
잠력을 격발시키거나 선천지기인 진원을 소모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
그나마 경맥에 남은 공력이 복부의 출혈을 막고 심맥을 잇고 있지만, 그조차 한계에 다다랐다.
그럼에도 낙일신검은 기력을 쥐어짜며 강엽을 축하했다.
“대공(大功)을 이루셨는가?”
“...운이 좋았습니다.”
“허허, 그게 운으로 될 리가....”
말하는 것도 힘겨운지 급속도로 창백해지는 안색.
보다못한 점창육로가 눈물로 읍소했다.
“장문인, 말씀을 아껴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이리 가시면 안 됩니다!”
“허, 이 사람들아....”
쓴웃음을 흘린 낙일신검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당문의 의원들도 고개를 젓지 않나.... 화타나 편작이 돌아와도 글렀음이야.”
“장문인...!”
참담해진 점창육로와 제자들이 당문의 의원들을 돌아보았지만, 그들 역시 난색을 표할 따름.
심상절예를 펼치기 위해 진원을 끌어다 쓴 시점에서 낙일신검이 살아날 여지는 없었다.
그렇게 점창파의 제자들, 점창파와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먹먹한 감정에 사로잡혀 말문이 막혔을 때였다.
“조금은 도움이 될 겁니다.”
“...자네?”
강엽의 손을 잡은 낙일신검의 노안에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자 중인들은 깜짝 놀랐다.
“가, 강 무사! 이게 어찌된...? 정녕 장문인께서...?”
“오오!”
희망을 품는 얼굴들.
하나 뒤이은 말이 그들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다.
“시간만 조금 벌었습니다. 장문인께 남은 시간은 여전히 짧습니다.”
“아....”
중인들이 안타까운 한숨을 터뜨릴 때 낙일신검이 수염을 쓸며 물었다.
“하면 남은 시간이 얼마인가?”
조금 전보다는 선명해진 목소리.
강엽이 대답했다.
“하루가 좀 안 됩니다.”
이미 낙일신검의 육신은 밑 빠진 독이었다. 아무리 많은 선천지기를 퍼부어도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낙일신검은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 종 사질.”
점창육로의 맏이격인 종현은 침울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하명하십시오... 장문인.”
“동굴에 있는 단 사질과 피난민들을 데려오게. 단 사질에게는 잘 설명해주고.”
“명을 받듭니다.”
“죽은 이들을 잘 수습해주게. 본산과 함께 싸운 협사들을 정중히 모셔야 하네.”
“이를 말씀입니까. 분부하신 대로 행하겠습니다.”
“부상자들도 부탁하네. 외람되지만 이 건에 대해선 당문의 의원들께서 수고해주셨으면 하오.”
“의원으로서 사명을 다할 뿐입니다.”
당문의 의원들이 양손을 모아 공손히 예를 올리자 낙일신검이 마주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 그렇군. 산밑에 맹월림의 전사들이 있지 않던가?”
“그들은 항복했습니다, 장문인.”
정무악이 대표격으로 말했다.
사천삼패와 낭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독에 당해 앓아누웠던 맹월림의 전사들은 격하게 저항했던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사로잡혔다.
“사로잡은 자들은 포로로 대우하게. 가혹하게 대하지 말란 소리야.”
“하오나...!”
“저들이 인면수심이라 하여 우리까지 똑같이 될 필요는 없네. 그래서도 안 되고.”
“...알겠습니다.”
양측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만큼 전쟁에서 이겼다고 악감정이 사라지진 않을 터.
하나 점창육로와 제자들은 죽음을 목전에 둔 장문인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문득 낙일신검이 강엽을 돌아보았다.
“생각해보니 자네에겐 사과해야겠구먼. 맹월림주를 생포해달라는 당부를 지키지 못하지 않았는가.”
“...어쩔 수 없지요.”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맹월림주의 심극이 어떤 공능을 지녔는지 짐작한 강엽은 낙일신검이 그를 죽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하나 맹월림주가 죽었으니 그를 따랐던 자들은 반기를 들지 않겠나?”
“애초에 충성을 받을 만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들도 알 겁니다.”
“이 땅의 분노는 하루 이틀 만에 쌓인 게 아닐세.”
“....”
“부족 간의 앙금,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분노, 오랑캐 취급당하고 있는 억울함... 복잡하게 얽혀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를 지경일세. 맹월림은 그 점을 파고든 게야.”
맹월림이 분노를 주입한 게 아니라, 예전부터 이어졌던 분노를 이용했을 뿐이라는 주장.
강엽도 어렴풋이 이해했기에, 맹월림주를 잡아달라는 어려운 부탁을 한 게 아니던가.
“맹월림은... 패도를 통해 그간의 앙금을 한 번에 해결하려고 했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네.”
“방법이 있겠습니까?”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시도해볼 방법이 있네. 그게 이 늙은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겠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몰라도 낙일신검의 눈은 죽음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형형했다.
‘오히려 죽음을 앞뒀기에 생애 마지막 불꽃을 찬란하게 터뜨리고자 하는 걸지도....’
강엽도 낙일신검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으리라.
* * *
만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유예.
하나 낙일신검은 살아생전 가장 소중한 시간을 그 누구보다 정력적으로 보냈다.
“전쟁은 끝났소. 승자도, 패자도 아무런 영광도 갖지 못한 상처뿐인 전쟁이었소이다.”
그는 가장 먼저 인근의 부족들을 초대했다.
맹월림에게 충성하든, 반기를 들든 가리지 않고 점창파의 경내로 들였으며, 앞서 포로로 잡힌 자들 중에서도 일부를 그들과 함께 앉혔다.
모두가 불편한 심기를 띠는 곳에서 그는 시시각각 창백해지면서도 끝까지 할 말을 마쳤다.
“맹월림의 대의가 그르다고 하진 않겠소. 이 땅은 대륙과 다르오. 생각하는 게 다르고 살아가는 게 다르며, 심지어 생김새도 다르지.”
심상절예의 대가로 먼지가 된 애검 대신 평범한 명아주 지팡이를 짚으며 부족들을 둘러본다.
가슴이 답답해서 마른 기침을 토하면서도,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좌중을 오시했다.
“하나 대의가 옳다고 방식마저 옳다고 할 순 없소. 여기 계신 분들도 동의하시리라 생각하오.”
“크흠, 장문인! 그건....”
“힘으로 다른 부족을 압제한다면 이 땅의 지배자들이 했던 방식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남은 게 무엇이오?”
“.......”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던 자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대화를 합시다. 본산이 창구가 되겠소. 본산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니 아무 때나 찾아와주시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쳐도 모두가 찬동하진 않을 것이다. 낙일신검도 알고 있는 바.
하나 괘념치 않고 말을 이어간다.
“피로 피를 씻는 악순환을 끊읍시다. 과거를 잊지 못해도, 후손들에게 비극을 물려주면 안 되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보다 더 많은 피를 뿌려봤자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인의 제언에,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했다.
* * *
“종 사질, 자네가 다음 장문인일세.”
전쟁을 마무리했으니 후사를 정해야 할 때였다.
점창육로의 대형이자 낙일신검 다음가는 고수인 종현이 장문령부를 계승했다.
“장문인, 소질은 아직 부족합니다.”
“자네도 예순이 넘었네. 내 오래 해먹으라고 하진 않겠네. 이십 년. 딱 이십 년만 하게. 그때가 되면 젊은 아이들 중에서도 장문지재(掌門之材)가 나오지 않겠는가?”
“사백...!”
장문인이 아니라 사백이라 부른다.
끝내 터지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자 마루바닥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 늙은 노인네가 울기는....”
“늙으면 눈물샘이 마른답니까. 눈물 흘릴 날도 많지 않으니 실컷 울어야지요.”
그렇게 말하는 점창육로 단진야는 웃고 있었다.
눈시울을 붉힌 채 힘겹게 미소 짓는 얼굴.
“웃게나, 사질들. 웃을 날이 많지 않아도 힘껏 웃으며 살다 가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점창육로가 큰절을 올렸다. 함께한 세월은 차이가 있을지언정 수십 년을 동고동락한 사이.
정좌한 자세로 사질들의 인사를 받은 낙일신검이,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여러분께는 고마운 마음뿐이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현운 도장이 고개를 숙이자 낙일신검이 고개를 저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의 얼굴엔 눈밑까지 시커먼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반대로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점창은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오. 무당, 아미, 청성, 당문, 그리고... 낭인전.”
장내의 이들을 한차례씩 눈에 담은 그는 마지막으로 강엽과 백서희를 불렀다.
“자네들에겐 빚을 졌네. 특히 강 무사, 자네가 없었다면 본산은 무너졌을 게야.”
“세상사 흥망성쇠라 했습니다. 제가 없었어도 점창은 위기를 겪었을지언정 다시 일어났을 겁니다.”
“하나 그동안 수많은 이들의 피가 흘렀을 테지.”
“그건....”
“과례는 비례라고 하지 않나. 받아두게.”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을 잘게 떨면서도 기어이 품 안에 있는 것을 꺼내 앞에 내려놓는다.
물건의 정체를 알아본 강엽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호패가 아닙니까?”
“앞으로 자네가 어떤 곤경에 처하든 그걸 가지고 저기 있는 장문 사질에게 부탁하면 무조건 들어줄 걸세. 그게 설령 백도 정파의 기치에 반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문인이 남겨주는 표식이었다. 증인들이 많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강엽이 종현을 돌아봤지만, 사전에 언질을 받은 듯 동요하는 기색이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걸 받아도 될지....”
“점창은 은혜를 잊지 않네.”
낙일신검이 뜻을 물리지 않을 것을 깨달은 강엽은 포권을 올렸다.
“그리고 백가 아이야.”
“...네.”
백서희는 간신히 대답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는 신색이었다.
“다행히 네게도 줄 선물이 하나 남았더구나.”
“...이미 큰 선물을 주신 걸요.”
그녀의 검무를 보고 말을 걸어주지 않았던가.
삼화취정에 오른 기연이야말로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큰 선물이었다.
“아니다. 이 선물이야말로 큰 의미가 있을 테지. 강 무사에게는 앞으로도 고난이 따를 터. 부디 이 늙은이가 주는 것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구나.”
그러면서 백서희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건넸다.
백서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이 늙은이의 심상 한 조각이란다.”
불완전한 심상절예를 펼친 대가로 죽어가는 몸. 그러나 깨진 유리조각처럼 작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아가, 검무를 춰보지 않으련?”
“지금... 말인가요?”
백서희가 망설이면서 묻자 낙일신검은 작게 웃었다.
강엽도, 장문직을 계승한 종현도 굳은 표정으로 고갯짓을 해보였다.
그렇게 문이 활짝 열린 가운데 백서희가 달밤 아래에서 쌍검의 검무를 추기 시작하고,
빠르면서 자유로운 검무에 사일검법의 흔적이 깃들었음을 깨달은 점창육로가 깜짝 놀라서 일어났을 때.
“좋구나. 훌륭한 검무로다.”
진전을 전해준 이의 검무를 흐릿한 눈으로나마 감상한 낙일신검은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평온한 입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