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96화 (292/450)

57화. 장례 (1)

지독하게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노예상인의 눈에 띄어 모산혈조에게 팔리고, 진조의 시험을 통과해 흡혈귀가 되고.

살아남기 위해 무림에 투신해서 낭인전에 들고, 수많은 싸움을 겪으면서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

한데 그게 누군가의 설계였다면....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미래가 정해졌다면 이제껏 행했던 일들에 자신의 의지가 깃들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마저 먼 옛날의 사람들이 짠 설계였다면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가?

[심각한 표정이구나. 자신이 일월신교주의 환생이라는 말이 그리 놀랍더냐?]

“말장난할 기분 아니야.”

[짐도 말장난할 기분 아니다.]

“그 짐이라는 호칭도 집어치워. 언제부터 당신이 군주였다고 스스로 왕을 참칭하나?”

흡혈귀의 왕이니 뭐니 해도 제 스스로 모든 흡혈귀를 죽이고 추하게 살아남은 괴물일 뿐.

강엽은 혐오스럽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진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미안하다고 하길 바라느냐?]

“뭐?”

[착각하는 것 같은데, 널 환생시킨 건 짐이 아니다. 유익이지. 억울하면 그놈에게 따져라. 아, 그놈 혼백은 이미 남아있지도 않군. 제 스스로를 갈아서 네놈에게 영성, 재능, 가능성... 그 모든 걸 남겨줬으니까.]

“....”

[어차피 이 세상 모든 이는 누군가의 환생이다. 본인만 그걸 기억하지 못할 뿐.]

“윤회가 정말 존재한다고 믿나?”

[존재한다. 네놈은 좀 괴악한 경우지만 말이지.]

진조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유익이 살아있을 적과 지금은 천 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넌 일개 인간이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조율하며 자신의 환생이 어떤 인생을 살지 미리 설계했다고, 진심으로 그리 믿는 게냐?]

“그건....”

[그렇다면 네놈은 천하의 바보 멍청이다. 유익도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다고 믿진 않았다.]

“하지만 난 당신을 만났다. 그리고 당신이 유익과 약속한 대로 흡혈귀가 됐고.”

[큭큭, 그건 사과해야겠구나. 네놈을 속였으니 말이다. 실은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널 납치했던 노예상인에게는 몰래 마안의 환술을 걸었지.]

강엽은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않았다. 보나마나 그 잘난 술법으로 찾아냈을 테니까.

“...그 말대로라면 나도, 모산혈조도 당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던 셈이군.”

[흐, 짐을 죽이고 싶다는 눈빛이군. 부탁이니 제발 짐을 죽여 편안한 안식을 안겨다오.]

“그게 당신이 바라는 거라면 순순히 죽여줄 순 없지.”

무광암의 심상절예라면 진조의 잔재를 없앨 수 있다.

그런 확신이 섰지만, 강엽은 분노를 쏟는 게 스스로에게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인생을 망가뜨린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죽여달란 말이 나올 때까지 쥐어짜내주마.”

[어떻게 말이냐?]

“모산혈조의 지식을 해석해라.”

[음?]

“솔직히 나 혼자서는 정리도 못하겠군. 해석은 엄두도 못 내겠고.”

무광암의 어둠에 모산혈조를 녹여내고 그의 지식을 갈취했지만, 그 양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강엽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래선 너무 오래 걸려.’

진조의 영성으로 발달한 머리로도 족히 몇 달,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지도 모르는 양.

모산혈조가 수십 년간 천하를 떠돌며 쌓은 지식은 그토록 깊고 방대했다.

‘쓸 만한 술법들이 많아. 특히 입도공월은 무슨 수를 쓰든 터득해야 해.’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축지의 술법.

그 요체는 술법을 파훼하는 정안의 능력으로도 해석하기 힘들 만큼 복잡하지만, 다른 술법들을 차치해도 이것만은 손에 넣어야 한다.

비록 몇 가지 제약이 있긴 하나, 입도공월을 터득한다면 전술적 선택지가 대폭 늘어날 터.

당장 입도공월이 없었다면 모산혈조와 휘하의 떨거지들이 전장에 난입하는 일도 없었겠지.

진조의 면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강엽은 참을 인 자를 애써 마음속에 새기며 허공에 손을 집어넣었다.

쩌저저저적......!

여기저기 균열이 벌어진 모산혈조의 심법진.

대라무극정토의 풍경이 산산이 박살나면서 바깥의 전황이 드러났다.

그리고....

* * *

[우오오오오오!]

전장을 강타하는 광기 어린 포효.

신령스러운 은빛 털가죽이 피로 물들고, 그 입에선 걸쭉한 피와 살점이 점점이 떨어져내린다.

[나는 죽지 않는다! 만월의 광기가 가호하는 한 몇 번을 쓰러져도 부활한단 말이다!]

상처가 벌어져도, 사지가 떨어져나가도 씻은 듯이 아물어간다.

“뭐 이런 새끼가 있어? 이렇게 싸웠는데도 안 지친다고?”

백서희가 질린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모산파의 제자들을 쓰러트린 뒤, 그녀는 낙일신검을 도와 맹월림주를 몰아치고 있었다.

사천삼패와 함께 온 진멸신권 정무악 역시 가세하여 맹월림주를 구석으로 몰았다.

하지만 맹월림주는 죽을 부상을 입어도 멀쩡하게 일어났고, 공력 역시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암만 재생력이 있어도 그렇지, 삼화취정의 초고수 세 명이 덤비는데도 이토록 끈질긴 게 말이 되나.

정무악도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빌어먹을 심극이군. 안 그래도 죽지 않는 놈이 장기전에 특화된 심극을 갖고 있다니....”

-광랑찬월가.

강엽과의 싸움에선 어이없을만치 쉽게 막혔던 심극이 지금 이 순간엔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만월이 뜨는 동안엔 가히 불사신이나 다름없는 공능.

기파의 규모는 물론 밀도마저 세 사람을 압도했다. 재생력도, 공력도 평상시의 몇 배에 달한다.

고통마저 느끼지 않는지 옆구리가 둥그스름하게 파이는 중상에도 움직임이 멎지 않았다.

그 상처마저 눈 한 번 깜빡일 순간에 재생시키면서 정무악의 측면을 파고들고, 사각에서 다섯 줄기의 조풍을 쏘아낸다.

정무악은 무게중심을 잔뜩 낮춘 채 상체를 흔드는 경신술로 권격을 흘렸지만, 손가락에 담긴 풍압만으로도 호신강기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콰아아아아앙!

아슬아슬하게 스친 경파가 도관 세 채를 부수고 그 너머에 있던 나무들까지 부숴버린다.

등줄기가 섬찟해지는 파괴력에 이맛살에 주름을 잡는 그때, 돌연 늑대 아가리가 머리를 물어왔다.

[카핫!]

콱!

“누가 짐승 아니랄까 봐...!”

어렵사리 피하면서 반격을 꽂아넣으려는 순간.

채찍처럼 휘어진 꼬리에 몸통째 후려맞은 정무악은 막강한 암경을 느끼고 미간에 힘을 주었다.

호신강기로 어찌어찌 막긴 했으나 중량에서 밀리는 바람에 몸이 붕 뜬 상황. 천근추로 무게중심을 낮췄는데도 꼬리 한 방에 맥없이 떠올랐다.

전신을 내던진 늑대가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온다.

“아뿔싸...!”

피하기엔 늦은 외통수.

어쩔 수 없이 이대도강(李代桃僵)의 한 수로 주고받으려는데, 돌연 구원의 손길이 날아왔다.

빛살처럼 뻗어온 어검의 한 수. 맹월림주의 아가리를 노렸으나 호신강기에 막혔다. 이빨은 강인하지만, 목구멍은 연약하기에 호신강기를 덧씌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에 불과했다.

[카아악!]

“호신강기로 후예사일(后羿射日)을 막진 못한다네.”

사일검법의 마지막 절초가 호신강기의 면을 뚫고 맹월림주의 목구멍을 관통했다.

고통에 면역이 된 맹월림주도 이번만은 괴로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비명을 토했다.

백서희와 정무악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움직였다.

월하가인의 쌍검이 푸른 눈동자를 베고, 높이 뛰어오르며 달을 등진 사내가 두꺼운 팔근육을 불끈거린다.

떨어지는 힘에 공력을 더한 일권.

허점투성이 공격이었지만 고통에 시달리고 있던 맹월림주는 무방비하게 얻어맞았다.

투아아아아아앙......!

맹월림주가 서 있었던 지반.

마치 거인이 내려친 것마냥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점창파의 경내를 흔드는 무지막지한 흔들림.

사방으로 뻗어나간 균열이 뼈대만 남은 전각들을 허물어뜨렸다.

“...이랬는데도 안 죽나?”

[크르르르...!]

거대한 덩치를 일으킨 맹월림주가 깨진 파편들을 툭툭 털어내면서 으르렁거렸다.

백서희가 인상을 썼다.

“썅, 설마 날이 밝을 때까지 싸워야 해?”

무심코 쌍욕을 내뱉은 그녀가 퍼뜩 실수를 깨닫고 낙일신검의 눈치를 봤지만, 낙일신검은 나무라지 않았다.

외려 수염을 쓸며 허허 웃는 게 아닌가?

“괜찮네. 나도 욕 나오려는 참이니까. 웬 짐승 때문에 늘그막에 염병하는구만. 진멸신권의 말대로 정말 빌어먹을 심극일세.”

“아무리 심극이라도 저게 가능해요?”

“그만큼 제약이 큰 심극이니까. 범용적이진 않아도 저런 심극이 한번 물꼬를 틀기 시작하면 극히 위험하다네. 만전의 상황에서는 거의 심상절예나 다름없지.”

물론 진짜 심상절예였다면 세 사람은 옛날 옛적에 죽었으리라.

지금껏 공력을 있는 대로 쥐어짜서 한계에 다다른 낙일신검이 창백한 신색으로 검을 세웠다.

“백 소저, 정 무사. 이렇게 싸워선 이길 수 없을 것 같네. 특단의 수를 짜낼 테니 시간을 벌어주게.”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일 각만 부탁하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지만, 각자 상대에게 발목이 잡혀서 기대할 수 없는 상황.

두 주먹을 부딪친 정무악이 백서희를 돌아보았다.

“백 소저, 준비됐는가?”

“전위를 맡아주시죠.”

씨익 웃은 정무악이 몸을 날리고, 백서희가 은신술을 전개하며 배후를 파고들었다.

낙일신검은 두 사람이 싸우는 광경을 보면서 호흡을 가라앉혔다.

‘설마 이걸 쓸 줄이야....’

불완전한 기예. 구명절초로도 못 써먹을 수법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다른 수가 없다.

“.......”

잔잔한 겨울 호수처럼 고요한 명경지수.

노검객의 마음이 낡은 검파에 깃들기 시작했다.

스승님께 선물받아 수십 년간 함께한 분신. 이 검으로 적을 베었고, 무를 겨루었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마지막까지 함께 가자꾸나.’

후우우우우웅......!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한 검명(劍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펼치는 절초를 위해 오래된 보검은 기꺼이 주인의 마음을 받들었다.

“장문인! 아직 멀었습니까!?”

정무악이 소리쳤다. 간절한 외침엔 짙은 피비린내가 묻어났다. 맹월림주를 붙들다가 부상을 입은 것이다.

백서희 역시 팔뚝과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억지로 힘을 쥐어짜내고 있는 상태.

낙일신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 더 깊숙이.’

내면 깊숙이 빠진 감각이 우물처럼 고인 심상을 끌어올리고 있었기에.

그렇게 두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면서 가까스로 일 각에 좀 모자란 시간을 벌어주었을 때.

“장문인-!”

별안간 백서희가 급박한 표정으로 경고했고, 정무악은 고함인지 절규인지 모를 포효를 토해냈다.

맹월림주의 눈이 비열하게 휘어졌다.

푸학!

덜컥 흔들리는 육신. 돌연 느껴지는 격통에 낙일신검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핏줄이 비칠 만큼 창백한 손이 그의 복부를 뚫고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으하하하하! 잘했다, 금사하! 제아무리 괴물 같은 늙은이라도 무방비한 상황에선 어쩔 수 없군!]

-크르르륵...!

점창육로에게 협공을 당했던 금사하가 목숨을 잃는 것을 각오하고 낙일신검을 기습한 것.

금사하를 놓친 점창육로가 사달을 깨닫고 처절하게 외쳤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허허, 괜찮다. 괜찮아....”

입술 너머로 선혈을 흘리면서도 손주를 토닥이듯 복부를 뚫은 손을 잡는 낙일신검의 모습.

흐느끼듯 검명을 토하는 애검을 들어올린 그가 만면 가득 쓴웃음을 드리우며 중얼거렸다.

“네가 그러지 않았어도 어차피....”

힘없이 검을 휘두른다. 사람은커녕 닭의 목도 베지 못할 덧없는 검격.

그러나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율했다.

‘아.’

점창파를 넘어 온 점창산을 아우르는 심상.

오래전 장문인의 자리를 내려놓았던 노검객은, 수십 년의 수련 끝에 검에 마음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설사 찰나에 불과한 춘몽(春夢)이라 할지라도.

평생을 사랑한 점창산의 기상과 제자들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검에 담아 휘두를지니.

-이야말로 나의 일념(一念)이로다.

그야말로 찰나와 같은 의념.

-심상절예 구현....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달은 맹월림주가 괴성을 토하고, 점창육로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제발 하지 말라고. 그걸 쓰면 다음은 없다고.

낙일신검이 부드럽게 웃었다.

-창산무궁(蒼山無窮).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바친 단 한 번의 심상절예.

노검객의 마음이 담긴 심검이 맹월림주의 심극을 꿰뚫고, 그 육신을 통째로 녹여버렸다.

운남의 방파대전이 끝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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