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은원 (5)
삼화취정의 절세고수를 격살하기 위해 만든 술법무공.
모산파의 혈독과 혈공진기를 섞어 뼈대를 세운 무공은 어느덧 원전을 아득하게 초월했다.
강엽의 경지가 높아지고, 견문이 넓어질수록 기존의 무공들 역시 고찰을 거듭하면서 발전한 바.
특별히 무언가를 더한다기보다는, 기존의 것을 재해석하고 낱낱이 해체하여 구결을 재차 정립했다.
-외세의 환란을 절대적으로 막는 난공불락의 성벽도 내부의 근심에 무너지기 마련이니.
-크고 단단한 둑도 작은 구멍 하나에 사상누각이 된다.
-억겁의 세월과 함께한 물방울은 능히 바위도 뚫으니, 나의 피로 세월을 갈음하겠다.
-그로써 나의 피가 적을 붕괴시키리라.
고절한 경지에 오른 이후부터는 거의 쓰지 않은 무공이나, 흡혈귀의 능력이 봉인되고 궁지에 몰린 지금은 혈공독수만이 유일한 활로였다.
투아아아아아아......!
심장이 뚫린 모산혈조가 눈을 부릅뜨는 것과 동시에 막대한 한기 폭풍이 폭사했다.
주변을 날려버리는 것도 모자라 호수를 얼리고, 산봉우리까지 하얀 서리로 덮어버리는 개세적인 위력.
모산혈조의 심장에 관수를 꽂았던 강엽은 충격파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흙더미 위를 볼썽사납게 나뒹굴고 나서 가늘게 경련한다.
“쿨럭! 크읍...!”
한순간 덮친 음한지기로 인해 몸과 얼굴에 성에가 낀 것은 물론 흘러내리던 피까지 얼어붙었다.
안쪽까지 동상을 입은 몸은 시뻘게지다 못해 거멓게 죽은 상태.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무릎을 꿇고 마른 기침만 할 뿐.
폐까지 얼어붙는 고통에 숨까지 막힐 것 같다.
“하아! 하아! 이...노옴!”
그런 강엽을 향해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딛는 모산혈조 역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런, 수를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군!”
흡혈귀의 능력과 모산파의 술법을 완벽히 봉인하지 않았던가.
설마 강엽이 자신을 죽이는 혈독을 오히려 무기로 이용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모든 것을 걸고 내던진 절초답게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모산혈조의 육신은 재생과 괴사를 반복하면서 안쪽에서부터 붕괴하고 있었으니까.
재생력이 결손된 부위를 메꾸면 혈공독수가 파괴하고, 다시 재생력이 그 부위를 메꾸고....
그런 식으로 무한히 반복하다 보니 육신이 본래의 형상을 잃고 이형이 되고 있었다.
일전에 강엽이 본 적이 있는 현상. 완안극이 불괴강시였던 시절 거듭된 재생과 파괴를 이기지 못하고 괴물이 된 것과 비슷했다.
한없이 흡혈귀에 가까운 모산혈조였지만, 그 근본은 어디까지나 불괴강시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시작된 변이는 재생력으로도 바로잡을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재생력이 더 급속도로 그의 육신을 변이시키고 있었다.
매끈한 피부가 우둘투둘해지면서 투명한 비늘이 돋아나고, 눈의 동공은 뱀의 그것처럼 쭉 갈라진다.
“빌어먹을, 이대로라면...!”
자신이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 예상한 모산혈조는 진저리를 쳤다.
이미 변이는 그의 육신 절반을 좀먹고 하체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혈공독수와 재생력, 내단의 기운이 폭주하면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것.
그럼에도 모산혈조의 눈에 어린 탐욕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 네놈만 먹어치우면, 진조만 되면!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변이는 점점 극심해져서, 턱뼈가 길쭉하게 튀어나오면서 구강 구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인간의 육성 대신 뜻 모를 괴성이 나오기 시작한다.
[결국 이리 되는구나.]
샤아아아아아!
귓가에 꽂히는 목소리에 모산혈조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자 진조가 쯧쯧 혀를 찼다.
[네 꼬라지를 보거라. 그 몸뚱이 어디에 인간의 흔적이 있단 말이냐?]
비늘이 달린 얼굴엔 여덟 개의 눈알이 달렸고, 찢어진 입술은 길쭉한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날카로운 전성이 대기를 흔들었다.
[진조오오-!]
[호오, 이성은 남았더냐?]
진조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하나 그게 얼마나 갈까? 짐이 보기엔 반의 반 각도 안 갈 것 같다만.]
[닥쳐! 영락한 잔재 주제에! 감히 내게 훈계 따위를 늘어놔!?]
[흐흐, 짐이 영락했다면 네놈은 타락하지 않았느냐. 짐이야 짐의 의지였으니 그렇다 치지만, 네놈은 뭐냐? 탐욕을 부린 끝이 그 꼴이라니.]
[아직, 아직이다! 난 아직...!]
말싸움할 시간도 없음을 깨달은 모산혈조가 급히 몸을 돌렸다.
쓰러진 강엽을 향해 억지로 몸을 끈다. 한쪽 다리는 짐승의 관절처럼 역으로 꺾였고, 반대쪽 다리는 퇴화되면서 점점 짧아지고 있는 상황.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를 몰골로 강엽을 향한 집착을 불태운다.
[흐흐흐하하하하하! 내 승리다. 내 승리란 말이다, 강엽! 진조의 후예! 원래부터 이리 될 운명이었어!]
먼 거리를 돌아서 여기까지 왔다.
진조는 그릇이 안 된다는 핑계로 그를 거부했지만, 결국 운명은 그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이 애송이도, 혈마도 아니다! 나야말로 시대의 승자다! 이 모산혈조야말로...!]
희열감에 몸을 부르르 떠는 바로 그때.
모산혈조는 불신감에 가득한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뭐냐? 어떻게?]
뚜두두둑!
강엽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혈독과 동상으로 인해 당장 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
설사 의식이 남아있어도 꼼짝도 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화르르르륵!
오른팔의 손길을 타고 퍼지는 불길. 수양명대장경에서 발출된 새하얀 불길이 얼음을 녹이기 시작한다.
특이하게도 강엽의 몸이나 옷은 전혀 불타지 않은 채 얼음만 녹았으며, 검게 굳은 혈독도 불길에 닿자 말끔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새하얀 불꽃이라고?]
백염(白炎). 흡혈귀의 천적인 열양지기가 강엽의 전신에서 타오르며 주변의 얼음까지 녹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쩌저저저적...!
전신의 얼음이 떨어지자 이번엔 왼손에서 차가운 음한지기가 뿜어져나오는 게 아닌가?
이종진기를 다루는 거야 이전에도 봤지만, 지금 강엽의 기세는 이전과는 격이 달랐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
이 상황에서도 진조는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흥미롭게 보기만 할 뿐.
문득 찢겨나간 수투 사이로 뭔가를 발견한 모산혈조가 눈매를 좁혔다.
언뜻 드러난 손등에 새겨진 문양.
[해와 달(日月).]
진조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에 모산혈조가 시선을 돌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짐이 저 녀석을 선택한 이유를.]
[...사실이라고? 수천 명이나 갈아넣은 시험이 단지 요식행위에 불과했단 말이냐?]
[그 정도로 어찌 짐의 후계자를 고를까. 단지 녀석이 정말 ....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느니라.]
[하...!]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린 모산혈조가 어느새 똑바로 선 강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의식을 차리지 못한 듯 눈에 초점이 흐릿했지만, 진기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주인을 보호했다.
[일월신마공! 일월신교주의 무공이...! 오래전에 명맥이 끊긴 무공이거늘!]
[그게 가장 확실한 증거지.]
진조가 히죽 웃었다.
[강엽, 짐의 후계자는....]
콰아아아아앙-!
오른손의 백염과 왼손의 빙백이 부딪치며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일월합신(日月合身).
마찬가지로 일월신교의 독문무공. 강엽은 배운 적도 없는 일월신교주의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변이한 몸으로 인해 보신경을 쓸 수 없는 모산혈조는 코앞에서 터진 기파를 피하지 못했다.
급하게나마 빙벽을 세우고 억지로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커억!]
그러나 빙벽은 순식간에 증발되었다. 온몸의 비늘이 박살나고 근육이 터지면서 형편없이 날아가는 몸.
“.......”
말없이 그 꼴을 보고 있던 강엽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허공섭물로 인해 두둥실 떠오른 모산혈조의 육신이 맥없이 날아와서 강엽의 손아귀에 잡힌다.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고개를 든 모산혈조는 심연처럼 우묵한 눈동자를 보고 흠칫했다.
[너, 너...!]
-심상절예....
[......!]
강엽의 전신에서 뻗어나가는 의념.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공력 파동보다도 빨리 퍼진 의념을 느낀 모산혈조는 절망감에 몸부림쳤다.
[아, 안 돼! 난 아직 죽을 수...!]
-무광암.
구명절초의 한계에 갇힌 심극을 넘어, 자신의 ‘법(法)’을 강요하는 심상절예의 권능.
쩌저저저저적!
허공이 갈라지고, 길게 이어진 균열의 칼날이 모산혈조의 심장을 단칼에 쪼개버린다.
한 번 갈라버리고 끝나는 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키기 시작하는 균열. 모산혈조의 몸뚱이는 물론 그의 심법진까지 빨려들어간다.
[아, 안 돼! 내가 쌓은 모든 게...!]
단지 적을 죽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생전에 이룩한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심상절예.
피뿐만 아니라 육신과 혼백, 그 안에 담긴 마지막 한 톨의 기억까지 빨아들이는 이적.
이윽고 숨이 끊긴 모산혈조는 시체 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그가 이룬 심법진도 시커먼 균열에 빨려들어가며 공간째 왜곡된다.
“...진조.”
[정신을 차렸느냐?]
어느새 옆에 다가온 진조의 물음에 강엽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의식은 없었지만 기억까지 날아간 건 아니다. 심상절예를 구현해서 모산혈조를 죽인 기억은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종진기를 다룬 기억까지.
지금도 각각 다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양손을 번갈아바라본 강엽이 나직이 물었다.
“나는, 뭐지?”
누구냐고 묻지 않고 뭐냐고 묻는다.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진조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어쩌면, 하고 떠올렸던 의심.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하면서도 진조의 영성이 남몰래 속삭였던 불길한 예감.
[초대 일월신교주 유익의 환생이다.]
그 예감이 진조를 통해 사실이 되는 순간, 강엽은 이를 꽉 문 채 양손을 움켜쥐었다.
백염과 빙백이 조용히 꺼지면서 몸에 갈무리된다.
[일월성신의 화신이자, 용혈의 계승자이며, 나 진조의 유일한 후계자.]
잠시 사이를 두고 진조가 입을 열었다.
[이 세상의 사마외도를 한 몸에 가둘 마의 종주... ‘천마(天魔)’다.]
* * *
그것은 먼 옛날의 약속이었다.
-진조, 예사란은 당신을 죽일 수 없소.
일월성문(日月星門)의 문주인 유익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그렇게 말했다.
-설령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어도 죽이지 않을 거요. 그녀가 바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유익이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은 괜찮아도 수백 년... 아니, 천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면 당신은 미쳐버리겠지. 영생을 사는 당신이라도 영겁의 시간엔 짓눌릴 거요.
-내가 그걸 모르리라 생각하나?
-알고 있을 테니 제안하는 거요. 환혼대법(還魂大法)이라고 아시오?
-그런 술법도 있던가?
-사실 내가 처음 만들었소.
-미친놈.
지가 만들었으면서 아냐고 묻는 건 뭔가?
진조가 어이가 없어서 뚱하게 쳐다보자 유익이 어깨를 으쓱였다.
-천기가 이상해서 내 수명을 바쳐 먼 앞날을 내다봤소. 본 것은 흐릿하나, 한 가지는 확실하더구려. 혈마가 부활할 것이오.
-네놈...?
-내 수명은 삼 년도 남지 않았소. 하나 우리의 후손들이 훗날 부활할 혈마를 막는다는 보장이 없소. 그때도 당신이 괜찮을 거라 장담할 수도 없고 말이오.
-...그래서?
-환혼대법으로 나 자신을 전생시키겠소. 비록 기억은 깡그리 날아갈지언정 일월성신의 화신으로서의 재능은 그대로일 것이오. 그를 후계자로 삼아주시오.
-하, 결국 네놈이 영생을 탐하는 것 아니냐?
-아니오. 그는 나의 전생(轉生)이되, 나와는 다른 자아를 확립할 것이오. 그때까지 당신은 잠들어 있어주시오.
-네놈의 말을 어떻게 믿지?
-믿든 안 믿든 상관없소. 하나 백무량도 동의했소.
-백무량도?
-우린 문파를 만들 거요. 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 명맥을 이어갈 문파. 그 문파가 멸문하거나 마도로 바뀔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그자에게 우리의 힘을 물려줄 거요.
-.......
-아, 미리 그자의 별호도 지어봤소. 천마 어떻소? 내가 생각했지만 정말 멋진 별호 같소.
-...태어나지도 않은 놈 별호를 왜 지어?
진조는 떨떠름해했지만 유익은 진지했다.
-그자가 나타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요.
-어떻게?
-나랑 닮았을 테니까.
-...그건 좀 징그럽겠군.
진심이 담긴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