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91화 (376/450)
  • 56화. 은원 (1)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뒷짐을 진 자세로 구부정한 노파를 오시하는 앳된 소년.

    엄격한 눈으로 상대를 오시한 완안극이 물었다.

    “어찌하여 죽을 각오로 덤비는 건가?”

    “으으....”

    그런 완안극의 맞은편엔 산발이 된 노파가 죽장을 짚은 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한쪽 손은 녹아버리다시피 뚝 끊어졌고, 오장육부가 진탕되어서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태.

    삼화취정에 오른 절세고수라면 진기를 엮어 육신의 손상을 대체할 수 있으나, 그것도 정도가 있다.

    심장이나 뇌 등 목숨과 직결된 장기만 무사할 뿐, 이미 한 발을 황천의 문턱에 걸친 것과 진배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투지를 내려놓기는커녕 힘겨운 노구를 억지로 추스르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콜록, 콜록... 흐으, 설마 독곡주가 부활할 줄이야....”

    “항복하라, 여금선.”

    완안극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권고했다.

    “내가 이런 몸이 되기 전에도 그대는 내 상대가 아니었어. 지금은 말할 것도 없지.”

    독공으로 운남을 대표하는 종사들.

    이 땅에 맹월림이 들어서기 전부터 교류했기에 그들은 서로의 기량을 잘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엔 엇비슷했지만, 나이를 먹고 나선 완안극이 언제나 압도했다.

    부족의 비술을 기반으로 독자적으로 수련한 그녀에 비해 완안극은 독곡에서도 귀한 신분을 타고난 몸.

    출발점이 다르다 보니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흐흐, 그대를 능가하기 위해서, 몹쓸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크흡, 이제 와서 포기하겠는가?”

    맹월림, 나아가 혈교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다른 부족들을 짓밟고, 포로들을 독술을 수련하기 위한 실험체로 쓰며, 죄없는 사람들을 죽였다.

    “쿨룩! 내가 뭘 위해 그런 짓을 했는데...!”

    이제 와서 포기하면 손에 피를 묻혀가며 저지른 일들이 아무 의미도 없어지지 않겠는가.

    “차라리 악녀로 몰릴지언정!”

    화아아아악-!

    피를 토하며 진기를 끌어올리자 썩는 악취가 사위를 가득 에워쌌다.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적아를 막론하고 꺽꺽거리는 극독.

    그 정체를 짐작한 완안극의 낯빛이 차갑게 식었다.

    “시독(屍毒)인가...!”

    시체가 부패하면서 고이는 독. 간혹 도굴꾼들이 남의 무덤을 파헤치다가 시독으로 죽기도 하는데, 독주사의 시독은 몇 배로 지독했다.

    내공 화후가 깊은 고수도 저만한 독을 쐬면 몇 호흡 만에 삼도천을 건너고 말 터.

    “미쳤구나, 여금선. 이기지 못할 바엔 모두를 길동무로 데려가겠다는 건가!”

    “히히, 같이 죽자꾸나아아!”

    진원(眞元)을 불태우며 일으킨 독기. 숙주 자신의 몸도 버티지 못하고 안구가 터지고 피부가 녹는다.

    숙주의 육신을 녹인 시독이 홍수처럼 범람하자 완안극은 두 손을 뻗어 흡자결의 공력으로 시독을 빨아들였다.

    같은 독이라도 독주사의 의념이 묻어난 만큼 이종진기를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행위.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들기 딱 좋았다.

    독주사도 그걸 알고 있으니 제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진원을 폭발시켰을 테지.

    “이런 썅...! 쿨럭! 크으으읍...!”

    완안극 역시 독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내상을 입고 칠공에서 피를 게워냈다.

    만일 실패하면 점창파는 생명이 살 수 없는 절대사지로 전락할 터.

    하나 완안극은 흡혈귀였고, 지금은 흡혈귀의 능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만월의 밤이다.

    상당히 고생하긴 했지만 독주사의 진원이 녹아든 독을 어떻게든 억누르는 데 성공했다.

    “끄응, 흡혈귀가 안 됐으면 골백번은 죽었겠구먼....”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노인처럼 앓는 소리를 구시렁거린 그는 털썩 주저앉아 전장을 살폈다.

    * * *

    적아를 막론하고 수많은 시체가 굴러다니는 전장엔 소수만 남아서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아, 젠장! 항복! 항복할 테니까 살려주쇼!”

    현운 도장의 검세를 이기지 못한 월야살이 자모원앙월을 버리고 두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무슨 짓이냐, 월야살! 당장...!”

    동료의 추태에 분개한 적룡마창이 무어라 외치려는 찰나,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든 낙일신검의 검격이 그의 창을 튕겨냈다.

    전신에 두른 호신강기가 일시에 찢겨나가면서 혈화가 피어났다.

    “크윽......!”

    억눌린 신음과 함께 일그러진 면상. 사일검법의 절초는 창대를 멀리 내던지는 데 그치지 않고, 적룡마창의 오른팔을 통째로 가져갔다.

    무인이 팔을 잃었는데 어찌 제대로 싸울까.

    혈라분의 효능으로 고통을 억누르며 반격했지만, 낙일신검은 어렵지 않게 흘려내며 무릎 관절을 그었다.

    다시 한번 핏물이 튀며 비틀거린 적룡마창이 핏발이 선 눈으로 격공을 발했지만 통할 리가 만무.

    쐐기에 박히듯 무위로 돌아가자 적룡마창이 선지피를 왈칵 쏟아냈다.

    “항복하게. 그럼 항장으로 예우해주지.”

    “크흐흐, 어차피 난 이미 늦었다.”

    혈라분을 복용한 얼굴이 갈변하며 폭주할 조짐을 보이자 낙일신검이 씁쓸한 기색으로 검을 겨누었다.

    “하면 내 무인된 도리로 더 이상 자네를 모욕하지 않고 단칼에....”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나 불타는 전의와 충성심은 팔 하나 자른다고 없어질 게 아니었다.

    설령 억지로 무릎 꿇린다 한들 협조를 받아내진 못하겠지.

    그렇게 적룡마창의 심장을 찔러가는 그때였다.

    “카하아앗!”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뾰족한 포효와 함께 늘씬한 교구의 인영이 배후를 노렸다.

    찰나 날카로운 파찰음이 울리고 긴 머리를 흩날리는 여인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음, 너는...!”

    낙일신검이 쓰러진 여인을 보고 침음했다.

    강엽으로부터 맹월림주의 곁에 있었던 불괴강시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한눈에 여인의 정체를 알아본 것.

    “장문인!”

    “...주의하게. 상대는 재생의 공능을 갖고 있네.”

    평범한 무인이었으면 검격에 담긴 경력을 못 이기고 심맥이 파열됐을 텐데, 여인은 멀쩡하게 일어났다.

    낙일신검을 돕기 위해 달려온 점창육로 중 한 사람이 여인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넌 사하가 아니냐?”

    “아는 여인인가, 숙 사제?”

    “종 사형은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설산검호의 문하에 있던 금사하가 아닙니까?”

    “...!”

    그제서야 여인의 정체를 깨달은 나머지 점창육로들과 낙일신검이 아연실색했다.

    “큭큭, 놀랐나 보군. 하긴 그럴 만하지. 설산검문이 멸문한 것도 모자라 그 제자가 괴물로 전락했으니....”

    “이놈, 닥치지 못하겠느냐!”

    점창육로 중 한 사람이 질타해도 적룡마창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더 비참한 게 뭔지 알려주랴? 저 여인은 교왕의 노리개였다. 그리고 설산검문의 대제자는....”

    “그만.”

    낙일신검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자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알고 있네. 그러니 그만 닥치게. 더는 그 더러운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강엽이 찾아와서 말했던 것이다.

    -다른 놈들은 다 죽여도 맹월림주만은 살려야 합니다.

    가장 강한 데다 죽이기도 힘든 자를 살려놔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를 분노케 해서 맹월림주를 죽이려는 심산인가? 맹월림주의 성품이 어찌 됐든 그가 죽으면 그에게 충성하는 부족들은 계속 적대감을 품을 테지. 두 번째 맹월림주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야.”

    운남의 왕으로 군림했던 맹월림주였다. 그가 죽는다면 이 땅은 오랫동안 전쟁의 수렁에 빠질 터.

    만약 맹월림주를 죽여야 한다면 그건 운남 부족들의 총의를 받들어서일 것이다.

    “물론 자네는 그 이후까지 알 수 없겠지. 맹월림이나 혈교에 대해선 자네 말고 다른 교성이 알려줄 테니 굳이 포로로 살려둘 이유도 없고.”

    그렇게 적룡마창의 목을 치려는 순간.

    위우우우우우웅-!

    이변은 한순간에 찾아왔고, 그 영향은 점창파의 전역을 뒤흔들었다.

    지진이나 고강한 고수들의 경파처럼 물리적인 흔들림 따위가 아닌, 심령을 자극하는 흔들림.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오싹함에 낙일신검의 검극마저 멈추었다.

    * * *

    “하하하하하하하!”

    “월야살?”

    일찌감치 항복을 선언했던 월야살이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서 낄낄거리는 모습.

    같은 편인 적룡마창까지 당혹스러워하는데 그가 누군가를 경배하듯 두 팔을 벌렸다.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사부님! 다행히 제때 와주셨군요!”

    [...흥.]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쩍 갈라지며 희끄무레한 연기들이 나타났다.

    -끼아아아아아아!

    “망령인가!”

    낙일신검과 점창육로가 경계심을 곤두세우는 그때 월야살이 자모원앙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와서 다시 싸우겠다고?”

    주인에게 돌아가는 자모원앙월을 송문고검으로 쳐낸 현운 도장이 월야살을 향해 짓쳐들어가는 찰나.

    불현듯 두 사람의 공간에 칠흑의 벽이 솟아오르면서 현운 도장의 전진을 막아섰다.

    그 틈을 이용해 빠르게 접근한 월야살이 히죽 웃자 적룡마창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뭐냐?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미안하다, 적룡. 본의 아니게 너와 패군을 속였구만. 사실 난 모산혈조의 적전제자였다.”

    “뭣이?”

    수 년간 함께했던 적룡마창도 몰랐던 사실.

    이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적룡마창이 하나 남은 손을 뻗어 월야살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 자식... 설마 첩자 노릇을 했던 거냐!”

    “흐흐,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고. 어쨌든 내 덕분에 산 거 아니냐. 나 아니었으면 다 뒈졌을 텐데.”

    “그게 무슨...!?”

    “봐라.”

    벌어진 문 틈에서 수백에 달하는 희끄무레한 망령들이 나와 적들을 향해 쏟아지는 광경.

    할 말을 잃은 적룡마창은 멍하니 입을 벌렸고, 낙일신검은 웅혼한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제자들은 구천사일검진(九泉射日劍陣)을 전개! 낭인들과 피난민들을 엄호하라!”

    아직 싸울 수 있는 점창파의 제자들이 당황한 낭인들과 피난민들을 검진 한가운데의 방원에 몰아넣고, 바깥으로 검을 뻗으면서 빠르게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뭐지? 낭인들과 피난민들은 안 싸우나?”

    “지친 것도 있지만, 망령은 날붙이로 상대하지 못하는 거니까. 불가나 도가의 공력이 깃든 검이나 부적을 써야 하는데... 저놈들이 쓸 수 있겠나?”

    검은 틈새에서 나온 것은 망령들만이 아니었다. 차례대로 줄줄이 나오는 붉은 도복의 술사들.

    월야살이 적룡마창의 뒷덜미를 쥐고 술사들이 있는 곳으로 힘껏 뛰어올랐다.

    “오셨군요, 흑... 사형!”

    무심결에 월야살의 본명을 말하려던 사내가 차가워진 눈빛을 보고 황급히 정정했다.

    “얼굴 맞대는 건 오랜만이군, 진평 사제. 사부님께서는 언제 오시지?”

    “곧 오실 겁니다.”

    좁은 틈새를 통해 차례대로 나온 술사들이 좌우로 시립하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얼떨결에 틈새의 맞은편에 선 적룡마창은 마지막으로 나온 자를 보고 석상처럼 뻣뻣해졌다.

    “.......”

    전장 전체를 내리누르는 불길한 존재감.

    요란하게 울부짖으며 점창파를 괴롭혔던 망령들도 이 순간만은 침묵으로 그들의 주인을 맞이았다.

    피로 물든 땅을 즈려밟은 가죽신. 그 위에 눈처럼 새하얀 장포를 걸친 수려한 청년이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다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깔린 짙은 흑무를 발견하고 눈썹을 까딱였다.

    “흑무암쇄진이군. 한데 그 주변에 있는 것들은....”

    검은 안개를 감싼 붉은 줄기들. 청년이 차갑게 웃으며 소매를 털자 그것들이 일거에 쓸려나갔다.

    청년이 입술을 달싹이며 진언을 외우자 흑무암쇄진의 진법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리며 피투성이가 된 고깃덩어리 하나가 구르다시피 튀어나왔다.

    털가죽은 피로 범벅이 됐고, 두 팔은 잘려나간 데다, 길쭉한 주둥이도 처참히 뭉개진 몰골.

    맹월림주를 알아본 적룡마창이 비명처럼 소리치려는 찰나 청년이 먼저 말했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혈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맹월림주. 재생력 덕분에 간신히 숨만 간신히 붙어있는 신세였다.

    그런 맹월림주를 굽어보면서 빙긋 웃은 청년이 이내 낙일신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낙일신검... 구순은 진작 넘기고 백 세를 바라볼 텐데, 그렇게 늙고도 아직 정정하군. 애석하게도 난 그렇지 못했지. 살짝 질투가 나는걸.”

    “귀하는 뉘시오?”

    수백의 망령들을 거느리고 모산파의 술사들의 충성을 받는 자가 무명소졸일 리가 만무.

    청년의 얇은 입술 사이로 사이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모산혈조다.”

    “...!”

    일순 눈이 커진 낙일신검이 깊어진 눈빛으로 모산혈조를 살펴봤다.

    그때 점창육로 중 금사하를 알아봤던 자가 입술을 달싹이며 전음을 보했고, 그 말이 끝날 무렵 낙일신검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사질이 말하길 그 몸은 설산검호의 대제자인 설우현이라고 하는구려. 사악한 술법으로 남의 몸을 빼앗은 거요?”

    “비슷하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전부가 아니다?”

    “당신에게 대답하는 건 의미가 없군. 내 상대는 당신이 아니거든.”

    모산혈조가 고개를 돌리는 찰나.

    투아아아아앙!

    저 스스로 무너져내린 어둠 사이로 핏빛의 안광이 폭사되었다.

    마치 살기가 칼날처럼 유형화되어 심중을 할퀴고 가는 듯한 기세.

    모산파의 제자들마저 얼어붙었을 때, 뒷짐을 진 모산혈조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너였구나! 너일 줄 알았다! 진조의 후예!”

    “...모산혈조.”

    어둠 속에서 나온 흡혈귀가 싸늘한 표정으로 옛 원수를 노려보았다.

    모산혈조가 손뼉을 짝짝 쳤다.

    “대단하군. 네놈이 그런 꼴이 된 지 일 년하고 여섯 달이 지났던가? 이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팔대교왕을 꺾을 만큼 강해졌어.”

    맛 좋은 먹잇감을 보는 것마냥 모산혈조가 얇은 입술을 핥았다.

    “그 힘은 네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이지. 널 먹어치워 마땅히 내 것이어야 할 힘을 돌려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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