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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88화 (285/450)
  • 55화. 반격 (4)

    점창파 장문인의 전언.

    강엽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에 맹월림의 분위기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팽해졌다.

    입가를 늘어뜨린 맹월림주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말 그대로. 서찰이 아니라 구두지만, 어쨌든 점창파 장문인의 전언을 가져왔다.”

    맹월림주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제자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할 말이라... 궁금하긴 하군. 어디 읊어봐라.”

    “생사결.”

    강엽의 말이 이어졌다.

    “공연히 애꿎은 목숨들을 죽일 이유가 있냐고 하셨다. 깔끔하게 양측의 수장이 싸우자는 거지. 운남 무림의 미래를 판돈으로 걸고.”

    밤하늘에 나직이 깔리는 말. 일부 전사들이 욕설을 내뱉었지만, 대부분은 맹월림주만 바라보았다.

    “교왕이시여, 허락하시면 제가 대신 발언하겠습니다.”

    “허한다.”

    맹월림주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등에 붉은 단창을 패용한 장년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맹월림의 군사이자 혈교의 교성인 적룡마창이오. 귀하의 제안은 어폐가 있어서 부득이 나섰소.”

    “어폐?”

    “이건 개인의 비무가 아니오. 어느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 방파대전이지. 한데 어찌 비무로 지금까지의 핏값을 청산하겠소이까?”

    “그래서 피로 피를 씻겠다는 건가? 한쪽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처음부터 그런 싸움이었소. 그걸 비무 따위로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했소? 만약 교왕께서 점창파 장문인과 싸우신다면, 그건 점창파를 함락하고 난 이후일 거요.”

    마지막은 맹월림의 전사들에게 향하는 말이었다.

    비무가 두려워서 싸우지 않는 게 아니라, 순서를 뒤로 미루어두었을 뿐이라는 의미.

    식견이 있는 이들이 과연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적룡마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 피를 보지 않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점창파 장문인께서 백기를 들고 오면 되오. 전장의 관례를 지켜 항장으로 예우해주겠소이다.”

    “대신 혈교에 귀의해야겠지.”

    “당연한 말씀. 말뿐인 항복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여기 계신 맹월림주께선 팔대교왕이시기도 하니, 입교식을 주관하실 자격은 충분하오.”

    적룡마창이 짐짓 너스레를 떨자 맹월림주도 어깨를 으쓱였다.

    “약식이 되겠지만 세례쯤은 얼마든지 베풀어주지.”

    물론 말뿐인 충성은 신뢰하지 못할 테니 배신하지 못하도록 만반의 조치를 가할 것이다. 금제를 걸거나 점창파 제자들을 볼모로 잡아갈 터.

    “점창파 장문인께서 들으시면 개소리라면서 귀를 씻으시겠군.”

    “굳이 벌주를 택한다면 어쩔 수 없지.”

    적룡마창이 한숨을 흘리면서 맹월림주에게 은밀한 시선을 보냈다.

    맹월림주가 마뜩치 않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자 강대한 존재감이 일어난다.

    좌우에서 자신을 둘러싸는 고수들의 모습에 강엽이 피식 웃었다.

    “사절을 죽이는 게 맹월림의 관습인가?”

    “이해해주시오. 그냥 보내기엔 귀하가 너무 위험한 존재거든. 귀하로 인해 본교가 얼마나 큰 피해를 봤는지 헤아리기도 힘든 판국이외다.”

    단혼마백의 죽음이나 암시장의 패배, 또한 혈음마군과 금마의 사망으로 천문학적인 피해를 봤다.

    적룡마창 역시 등에 멨던 단창을 꺼내 강엽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호위병력도 없이 범의 아가리로 들어온 용기는 가상하다만, 그 자만심이 네놈을 죽일 거다.”

    최소한의 예의조차 집어치운 언사. 온몸의 혈관이 싸늘히 얼어붙는 살기가 사방에서 옥죄어온다.

    강엽과 눈이 마주친 맹월림주가 뻔뻔하게 지껄였다.

    “사제의 복수를 할 기회가 이토록 빨리 찾아올 줄이야. 혈신께서 가련한 중생을 보우하시는군. 네놈의 목을 점창파에 보내면 그 늙은 장문인이 어떻게 반응할까?”

    강엽은 대꾸하는 대신 자신을 포위한 고수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역발산과 월야살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독기를 줄줄이 흘리는 노파 역시 범상치 않았다.

    “노인장은 맹월림의 천인장이시오?”

    “그렇단다. 너, 중원에서 온 아가야, 독주사 여금선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느냐?”

    “처음 듣는군. 점창파의 제자들 중 누구 한 명도 당신에 대해 말해주지 않던데.”

    “흘흘, 그럴 게다. 이 할미는 전면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하지만 그녀의 흉명은 운남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널리 퍼졌다.

    독곡주와 비견되는 독공의 대가.

    ‘삼화취정의 고수만 네 명이라....’

    맹월림주는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교성급 고수만 네 명이 덤비는 것이다. 한 마음으로 힘을 합친다면 천하팔존조차 도모할 수 있는 전력.

    “잘 됐군.”

    그러나 강엽은 물러서지 않았다.

    “한 놈은 확실하게 죽여주지.”

    그렇게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콰아아아앙......!

    충격파를 맞은 지면이 둥그스름하게 주저앉고, 밤의 어둠조차 섬광과 뇌격에 갈가리 찢겨나간다.

    최소한의 탐색전도 없이 바로 전력으로 들이친 네 명의 절세고수들은 곤혹스러워졌다.

    “이 새끼 뭐가 이렇게 빨라?”

    쿠아아앙!

    골타를 휘둘러 가까스로 뇌격을 쳐낸 역발산이 이마에 난 식은땀을 털어내며 구시렁거렸다.

    삼화취정에 오른 네 명의 절세고수들이 합공하는데도 단 한 명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절세고수의 기감으로도 따라가기 힘든 뇌광. 가만히 육안으로 관찰하고 있노라면 하얀 벼락이 빗발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아아아아아아......!

    수분을 얼린 냉기가 바닥을 타고 위로 치솟으며 석순처럼 굳어진다.

    찰나 핏빛의 강선이 얼음 기둥들을 통과, 온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하나의 술법진으로 엮이고,

    -혈라지망.

    적진 한복판에 오롯이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다.

    기감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헤아린 네 명의 절세고수들은 눈알이 찢어지도록 경악했다.

    영역 안에서 농밀해진 주력의 기운이 그들의 종아리 비복근을 물귀신처럼 붙잡은 것이다.

    “하, 이까짓 사술 따위로...!”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뀐 월야살이 주력을 뿌리치며 강엽을 향해 훌쩍 뛰어올랐다.

    한 쌍의 자모원앙월을 독문병기로 삼은 그가 양손 가득 시퍼런 강기를 휘두르는 찰나.

    -의사반전(意思反轉).

    미리 깔아둔 술법의 함정에 발을 들이민 그의 육신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뒤집혔다.

    높이 뛰어올랐던 신형이 당장이라도 추락할 듯이 뒤집히는 광경에 고수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교성쯤 되는 고수가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고 죽을 리는 없겠지만, 문제는 그 앞에 강엽이 있다는 것.

    한순간 거대한 뇌기의 기둥이 월야살을 삼켜버릴 듯이 떨어지자 역발산이 골타를 내던졌다.

    “크억!”

    골타를 맞고 날아간 월야살이 침음을 흘렸지만, 덕분에 뇌기의 기둥에 직격하는 꼴은 면했다.

    월야살의 무사를 확인한 적룡마창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맙네. 하마터면 교성을 또 잃을 뻔했어.”

    “신경 쓰지 마라. 네놈들이 좋아서 구해준 건 아니니까. 아무리 얄미운 놈이라도 죽는다면 본림의 손해로 이어지지 않겠냐?”

    “...그렇지.”

    쓰게 웃은 적룡마창이 하늘 높은 곳에 있는 강엽을 올려다보았다.

    높낮이가 다른 얼음기둥을 강사로 잇고, 그 위에 가뿐히 선 모습.

    교성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놓쳤음에도 그 얼굴엔 일말의 아쉬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금마를 죽였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군. 저런 놈이 본교의 적이라니 끔찍한데....”

    적룡마창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맹월림주는 태사의에 앉은 채 시큰둥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전장의 관례를 깬 것도 모자라서 수치스럽게 합공을 하는데 맹월림주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

    독주사가 핀잔을 주었다.

    “자네가 시작한 싸움일세. 악으로 깡으로 버티게.”

    “알고 있소.”

    강엽이 무사히 돌아가면 죽이는 건 몇 배로 어려워질 테니 무슨 수를 쓰든 여기서 죽여야 했다.

    네 명의 절세고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골타를 회수한 역발산이 얼음기둥을 내려치고, 적룡마창과 월야살이 강엽을 좌우에서 합공했다.

    투앙! 콰아아아아아앙!

    얼음기둥이 깨지면서 혈라지망이 일순 흔들리는 순간, 적룡마창이 빈틈을 포착하고 창격을 퍼부었다.

    시뻘건 옥염을 두른 창격이 핏빛 강선을 끊어버리고, 그 너머에 있던 강엽의 몸통을 향해 쇄도한다.

    월야살 역시 운신을 제약하는 주력의 흐름을 격공으로 갈라버리며 강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강엽은 빗발치는 강기와 경파를 간발의 차로 돌파했지만, 그 앞엔 시커먼 독장이 매복하고 있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독주사의 쌍장을 얻어맞고 떨어지는 강엽의 신형.

    “와아아아아아아!”

    절세고수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멀리 물러났던 전사들의 함성이 밤하늘 가득 울려 퍼진다.

    정작 독주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런 괴력난신이...!”

    독장에 격중된 순간 오장육부가 짓이겨지고 칠공에서 피를 뿜어야 하거늘 강엽은 멀쩡하게 일어났다.

    내장이 진탕된 기미도 없고, 독에 중독되지도 않은 멀쩡한 신색.

    진조에게 받은 일곱 번째 능력, 불괴의 공능이 절세고수의 독장에서 완벽히 보호해준 것이다.

    “이야아아아아아아!”

    그 뒤에서 멧돼지처럼 돌격한 역발산의 골타 일격.

    굳건하기로 유명한 점창산의 대리석 거암도 가루로 만드는 무지막지한 절초가 떨어지는 차에 강엽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멍청한 새끼! 호신강기를 둘러도 못 막는다!”

    콰아아아아아앙!

    둔중한 충격파가 대지를 깎아내렸다. 격한 흔들림과 함께 방원 오 장의 공간이 푹 꺼지고, 그걸로도 부족해서 사방 수십 장의 땅을 뒤집고 균열을 일으킨다.

    항우의 재림으로 불리는 괴물이 십이성 공력으로 내려친 일격.

    강엽의 손이 박살나는 것은 물론, 그 아래 있는 몸통까지 산산조각 짓이겨지리라.

    역발산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믿었지만, 결과는 그들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익, 이익...!”

    지면조차 주저앉힌 일격이건만, 정작 그 위에 선 사람은 지극히 멀쩡한 모습으로 골타를 잡고 있었다.

    역발산은 시뻘게지다 못해 김이 날 것 같은 안색으로 공력을 쏟아부었으나, 강엽의 무릎은 조금도 굽혀지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앙!

    오히려 두 절세고수의 공력을 버티지 못한 골타가 안쪽에서부터 터지면서 파편을 뿌린다.

    호신강기 덕분에 부상을 입는 꼴은 면했지만,

    “일단 한 놈.”

    푸욱!

    뇌기를 머금은 검날이 호신강기를 뚫고 역발산의 복부를 관통해서 옆구리로 빠져나왔다.

    “망할! 역발산!”

    안면을 일그러뜨린 월야살이 강엽의 뒤를 노리고 짓쳐들고, 적룡마창과 독주사가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그 순간, 강엽이 어둠 속에 녹아들면서 세 사람의 뒤에서 나타나자 그들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렇게 강엽이 세 사람을 한꺼번에 베어버리려는 찰나.

    콰아앙!

    막강한 반탄력이 검날을 밀어냈다.

    “맙소사! 주군께서...!”

    수수방관하던 맹월림주가 강엽의 검격을 받아낸 것이다.

    호신강기가 베이고 손에 길쭉한 자상이 남았지만, 상처는 피가 떨어지기도 전에 급속도로 아물었다.

    “네 명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오판했군. 설마 만독불침에 금강불괴마저 이뤘을 줄은 몰랐다.”

    독주사의 장력을 맞고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역발산의 전력을 맨손으로 막아낸 신위를 보고 강엽이 무엇을 이뤘는지 알아챈 것이다.

    “금강불괴는 소림 방장과 금마 말고는 이룬 자가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군?”

    “하하, 어쩔 수 없지. 남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 게 관례라지만 부하들을 다 죽일 순 없지 않나? 저 녀석들이 죽으면 혼자 일해야 하는데.”

    두 주먹을 맞부딪친 맹월림주가 호승심을 드러냈다.

    “사죄라고 하긴 뭣하지만, 이제부턴 내가 상대해주마. 네놈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적수다.”

    “거절하지.”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나?”

    “슬슬 시간이 다 됐거든.”

    “뭐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맹월림주가 미간을 굽히는 순간, 저편에서 작은 인영이 툭 떨어져내렸다.

    강엽의 옆에 착지한 완안극이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맡기신 임무 모두 처리했습니다.”

    “고생했다. 모산파의 술사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죽였습니다.”

    “......!”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말에 맹월림주를 비롯한 모두의 눈이 부릅뜨였다.

    적룡마창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너희들, 당장 술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라!”

    당황한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갔지만, 삼화취정에 이른 고수들은 기감으로 헤아렸다.

    이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했던 모산파의 술사들이 한 명도 남지 않고 전멸했다.

    완안극은 낮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적들의 진영에 잠입해서 기회를 엿봤던 것이다.

    그리고....

    [시키신 대로 적들의 식량에 독을 풀었습니다.]

    [전부?]

    [일부는 빼돌려서 퇴로에 가져다두었습니다.]

    빼돌린 것들 외에는 전부 독을 풀었다는 소리였다.

    강엽이 작게 웃었다.

    “볼일 끝났으니 이만 가보지.”

    “이놈...!”

    설마 자신을 미끼로 삼을 줄이야. 비로소 강엽의 노림수를 깨달은 맹월림의 고수들이 격분했다.

    그러나 강엽과 완안극은 이미 어둠 속에 녹아들어 그들의 기감을 따돌리며 멀리 사라진 뒤였다.

    뒤통수를 맞은 맹월림주가 조용히 이를 갈았다.

    “전쟁 좆같이 하는 새끼....”

    그리고 날이 밝았을 때, 그는 독이 든 식량을 먹은 전사들이 구토와 설사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온갖 물건을 집어던지며 격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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