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반격 (1)
“선공을 해야 합니다!”
두 주먹으로 탁자를 쾅 치며 외치는 소리.
벌떡 일어선 이만세가 상석에 앉은 낙일신검을 향해 강력하게 주장했다.
“병법에서도 수성이 공성보다 쉽다고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린 적들보다 숫자가 적고, 식량 사정도 막바지에 달했습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해보고 패할 게 자명합니다!”
점창육로 중 한 사람이 제지했다.
“진정하게, 대광추. 적들의 천라지망은 아직 건재해. 섣불리 나섰다간....”
“맹월림의 본대가 합류하면 지금보다 몇 배로 공고해집니다. 또한 적들이 이틀이나 사흘만 늦게 공격하면, 저희는 굶주린 채로 싸우게 될 겁니다.”
“....”
“농성이 능사가 아닙니다, 원로님들. 귀영이 며칠간 적들의 천라지망을 들쑤셨다고 하지만, 사방에서 부족 전사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천인장이 죽어 지휘체계가 무너진 지금이야말로 유일한 기회입니다!”
공격을 주장하는 이만세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금 점창파에 노인과 아녀자, 아이들을 비롯해 싸우기 힘든 피난민들도 많다는 것.
“우리가 먼저 공격하다 자칫 고립되면?”
조사들의 혼과 피땀이 어린 사문을 적들에게 내주는 건 둘째치고, 자칫하면 피난민들의 목숨도 위험해진다.
적들이 다소 흔들린다고 하나 한 번의 공격을 대가로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크지 않나.
점창육로가 난색을 표하면서 낙일신검을 바라보는데, 정작 낙일신검은 강엽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점창파와 인근의 지리를 표시한 지도를 뚫어질 듯 들여다보고 있던 강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사 적들에게 타격을 준다 해도 대단한 수준은 아닐 겁니다. 졸자들 몇을 죽인다고 끝날 전쟁이 아니니까요. 감수해야 할 위험에 비해 보상이 적습니다.”
그 말에 이만세의 얼굴은 구겨졌고, 점창육로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나 강엽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점창산의 산세가 워낙 험해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개중 대군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십팔계(十八溪) 중에서도 두 곳.”
점창산엔 구름을 뚫고 하늘 꼭대기까지 닿을 듯한 높은 봉우리가 열아홉 개나 있는데, 운남의 사람들은 이를 일컫어 점창십구봉이라 하였다.
그리고 십구봉 사이엔 총 열여덟 개의 물줄기가 흘렀는데 이를 십팔계라고 불렀다.
자연히 점창파에 오르는 산길은 지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십팔계를 끼고 다듬어졌고, 그중 대군이 지날 만큼 넓은 길은 두 가지로 한정되었다.
“무림 고수들은 지형을 가리지 않고 험한 산길도 한달음에 오르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을 겁니다.”
“고수들 간의 싸움을 염두에 두었겠지.”
낙일신검의 대답에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괜히 공력을 소모할 리가 없었다.
“물론 제 예상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해서 요소요소에 함정을 깔아두었습니다.”
“함정?”
“샛길, 혹은 길이 아닌 곳으로 오는 놈들은 뼈저리게 후회하겠죠.”
강엽이 지난 며칠간 적들의 천라지망을 들쑤시고 다녔던 건 단지 혼란을 안겨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적들을 심문하는 것은 덤이었고, 진짜 목적은 점창산의 지세를 파악하고 함정을 깔아두기 위함.
거기까지 말한 강엽은 잠시 사이를 두고 진입로에 흑백의 바둑알을 두며 설명을 이어갔다.
“맹월림주가 피해를 줄이고자 초장부터 본인을 비롯한 주요 고수들을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그가 병법에 능통하거나 옆에 유능한 책사를 두었다면 먼저 우리의 진력부터 빼놓으려고 할 겁니다.”
“파상공세를 퍼부을 것이다?”
“아무리 절세고수라도 수백이 넘는 적들과 싸우면 피로가 쌓이는 법이니까요. 호랑이도 지치면 늑대 떼에게 덜미를 잡히지 않습니까?”
강엽은 한 발 더 나아가 적들이 어떤방식으로 공격할지도 내다보았다.
“적들은 낮에 공격하고, 밤에도 공격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쳤다고 판단할 때 들어오겠지요. 낮엔 숫자로 밀어붙이고, 밤엔 살수나 흡혈괴마를 앞세우는 식으로 말입니다.”
“싸움이 길어지면 우리가 불리해지겠군.”
“하지만 적들도 시일을 과하게 잡아먹진 않을 겁니다. 궁지에 몰아넣었는데도 점창파를 점령하지 못해 시간을 질질 끈다면 맹월림주의 체면이 말이 아닐 테니까요.”
이쪽의 식량 사정과는 상관없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 맹월림의 위세를 만방에 떨치려고 할 터.
“우리가 지쳤다고 판단하면 놈들의 수뇌부가 올 겁니다.”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선을 물려야지요.”
“놈들을 경내로 들이자고?”
“점창파 전부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합니다.”
“으음....”
점창육로는 마뜩치 않은 눈초리였지만 현재 점창파의 전력으로 전부 지키는 건 불가능했다.
강엽은 그에 그치지 않고 낙일신검을 바라보았다.
“주제 넘은 참견이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조사들의 위패와 비급들을 챙겨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점창파의 전각이 적들의 발에 짓밟히는 것을 상정하고 내뱉은 발언.
점창육로 몇 사람이 무어라 항변하려고 했으나 낙일신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지.”
“...!”
“장문인?”
“강 무사의 말이 맞네. 본산은 조사님들의 혼과 정기가 녹아든 성지이지만, 전각 따위를 지키는 것보다 미래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지.”
“으음....”
“경공술이 날랜 아이들을 뽑아 비급을 쥐어주게. 그리고 조사님들의 위패는 진야 자네가 맡게.”
점창육로 중의 한 명인 단진야가 개탄했다.
“정녕 그 수밖에 없겠습니까?”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함일세. 나를 포함해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제자들을 가르치는 실력으로 줄을 세운다면 자네가 맨앞에 있을 걸세. 미래를 남기려면 자네가 살아야 해.”
“하오나 장문인...!”
“장문인의 명일세. 장문령부를 들이밀어야 고집을 꺾을 텐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정리를 한 낙일신검이 강엽을 돌아보았다.
“정리된 것 같으니 다시 얘기해보게. 적들을 경내로 끌어들인 다음에는 어찌할 생각인가. 자칫하면 피난민들 또한 다칠 수 있을 텐데.”
“그 뒤엔....”
강엽의 말은 한참이나 이어졌고, 이야기를 들은 좌중은 하나같이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 * *
‘이거 정말 흥미진진하군요. 일이 예상했던 것보다 재밌게 돌아가고 있어요.’
피난민들 속에 숨은 그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상전인 일사도의 명령으로 운남에 오긴 했으나, 어차피 다 끝난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림맹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사천삼패도 오지 않는다면 점창파의 멸문은 기정사실이었으니까.
한데 요 근래 운남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놈들이 제법 쏠쏠하게 활약해주고 있지 않은가.
‘듣자하니 당랑산군이라는 천인장도 객사했다고 하고... 아쉽군요. 본교의 비선이 운남에도 자릴 잡았다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텐데.’
광명마교의 비선은 대륙 동부에 치중되어 있었고, 근래에야 대륙 중부에 진출했기 때문에 운남의 비선은 일개 하오문 분타만도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직접 발로 뛰며 알아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피난민을 가장하여 점창파에 잠입한 것.
‘무당제일검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귀영이겠지요. 오사도를 죽인 놈이라면 맹월림주와 싸워도 그리 밀리지 않을 테고.’
하지만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한 손으로 열 손을 감당할 수 없는 법. 개개인의 힘이 아무리 특출나도 수천이 넘는 군세를 감당할 순 없다.
그렇게 내심 어느 쪽이 이길까 저울질하고 있는데 별안간 한 사람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사....”
“거기서 한 마디라도 더 내뱉는다면 난 당신의 목을 벨 겁니다.”
겁을 먹고 자라목을 하는 사내의 모습에 그는 내심 혀를 찼다.
‘하여튼 쓸 만한 놈이 없다니까.’
운남의 지리를 잘 몰라서 어쩔 수 없이 동행시킨 비선의 인원인데 하는 짓이 영 못미더웠다.
광명마교에 귀의한 교도들 중에 운남 출신이 조금 있어 비선의 역할을 맡겼는데, 비선인 주제에 전음도 못 쓰고 눈치는 더럽게 없었다.
[점창이 궁지에 몰렸어도 여기가 복마전임을 잊지 마세요. 사도급 고수만 최소 세 명이 있습니다.]
귀영과 낙일신검, 그리고 무당제일검.
며칠 전 낭인들이 당문의 혈족일지도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소년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갔으나, 그는 설마 하는 의혹을 떨쳐냈다.
기도가 비범하기는 했지만 그런 소년이 사도와 맞설 고수일 리가 없지 않나.
“그래서 무슨 일이지요?”
“예, 점창파에서 피난민들을 소집했습니다.”
“이유는?”
“저도 잘....”
한마디로 이유도 모르고 그냥 소식을 전하러 왔다는 것 아닌가. 그의 눈빛이 차갑게 식자 비선이 안색이 새파래져선 고개를 떨구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가보지요.”
비선은 이유를 모른다고 했지만 짐작되는 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맹월림이 지척에 온 거군요.’
점창파 제자들이 대놓고 떠들진 않았으나 전운이 다가왔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하는 사실.
천진난만한 아이들도 어른들의 얼굴에 어린 두려움을 느끼고 덩달아 불안해할 정도였다.
“...싸울 수 있는 사람들과 싸울 수 없는 사람들로 나눌 것이오. 훈련을 받았던 분들은 병장기를 들고 전달드리는 위치로, 그리고....”
노인과 아녀자, 아이들처럼 싸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따로 어디론가 데려갔다.
한 남자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어디로 데려가려는 겁니까?”
“현진궁을 비롯한 내각으로 모실 것이오.”
“현진궁?”
점창파의 장문인이 원로들과 함께 온갖 대소사를 처리하는 곳이 현진궁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점창파 제자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모두의 손에 가족들의 안위가 달려 있소. 여러분께서 한 명을 베면 우리 가족이 한 명이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임해주시오.”
“...아, 알겠습니다!”
점창파 제자의 연설에 새삼 비장해지는 분위기.
광명마교의 그는 내심 피식 웃었다.
‘뭐, 가진 게 없으면 사기라도 높여야죠.’
흔히들 잃을 게 없는 자들은 무서울 게 없다지만, 도망칠 구석이 없는 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무서운 법.
배수진의 각오로 임한 이들이 맹월림과 싸워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사뭇 기대되었다.
그런데....
“부탁드립니다, 소저.”
점창파 제자들이 피난민들 뒤에 따라붙은 아리따운 여인에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광명마교의 그가 이채를 띠었다.
‘저건 귀영과 함께 다니는 계집?’
젊은 나이치고 상당한 기량을 지니긴 했어도 눈여겨보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뭔가 꺼림칙했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싶어서 은밀히 다가가는데 돌연 백서희가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홱 틀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지만 시기적절하게 다른 사람의 뒤로 숨은 그는 백서희의 시선을 능숙하게 피했다.
‘생각보다 기감이 뛰어나군요. 하지만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습니다. 설마 벽을 넘어섰을 줄이야.’
며칠 사이에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른 것은 분명히 놀라운 일이었다. 평생을 고련해도 마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이가 수두룩하거늘.
‘한데 왜 피난민 쪽에 붙여둔 걸까요? 어차피 현진궁으로 갈 거라면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고수 하나가 아쉬운 판국에 삼화취정에 오른 고수를 어째서 피난민들 쪽에 붙여두었는가.
그는 뒤를 밟아보고 싶었지만 백서희의 감각이 너무 예민하기에 입맛을 다시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얼굴도 얼굴인데 몸매가 진짜....’
그 역시 피난민들과 어울렸기에 강엽과 백서희가 한 방에 묵는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평생 남들을 부러워한 적이 없는데 지금은 강엽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머나먼 외지까지 와서 세작질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와 너무 비교되지 않는가.
광명마교의 구사도는 자신의 팔자를 저주하며 세상 처량한 한숨을 내쉬었다.
* * *
뿌우우우우우......!
산세를 떨치는 듯한 나팔 소리.
어마어마한 군세의 등장에 깜짝 놀란 산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면서 밤하늘을 까맣게 물들인다.
산길을 오른 맹월림의 전사들은 산새들을 무시하고 저 멀리 있는 산문을 향해 진격했다.
“경계 병력은 보이지 않는구먼.”
“우리가 온다는 건 진즉에 알았을 거요. 문제는 저들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냐는 건데....”
큼지막한 지네를 목걸이처럼 두르고 화려한 치장을 한 마사족(摩梭族) 노파와 등 뒤에 붉은 단창을 패용한 장년인.
맹월림의 천인장인 독주사(毒呪師)와 적룡마창이 얘길 나누면서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정찰조의 보고에 따르면 산문 너머까지 적의 매복은 없습니다. 일단 작전대로 전사들을 투입해서 적들이 어떤 준비를 했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한 번 실패를 겪긴 했으나 적룡마창은 맹월림주가 누구보다 신임하는 지낭. 따라서 점창파 공략 역시 그가 주도적으로 계책을 짜고 있었다.
“희생이 제법 많이 나겠군.”
“....”
적룡마창은 침묵했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무언의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맹월림주가 담담하게 내뱉었다.
“모산혈조 그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겠지. 그대로 해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적룡마창이 눈짓을 보내자 기수가 나타나서 깃발이 달린 장대를 좌우로 흔들며 외쳤다.
전원 진격이라는 고함과 동시에 이전보다 더욱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는 전사들의 모습.
산문을 지나서 좁은 협곡 사이로 들어갔을 때였다.
쿵! 쿠웅......!
연달아 울려 퍼지는 충돌음.
급격히 가까워지는 둔중한 소리를 포착한 독주사가 황당해하는 얼굴로 적룡마창을 돌아보았다.
“매복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매복이 아니오.”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적룡마창의 표정이 하얗게 뜬 채로 경직되었다.
“피하라고 전해라! 그대로 가다간 압사...!”
하지만 그가 말을 끝내는 것보다 빨리 협곡의 모퉁이에 쾅 부딪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처럼 둥근 바위가 계단을 따라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맹월림의 전사들이 공황에 빠져서 도망치려 했으나, 뒤를 따라온 자들과 엉키면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쿠구구궁! 쿠콰콰콰콰콰쾅......!
“점창파 말코들이 단체로 미쳤나....”
적룡마창을 비롯한 맹월림의 수뇌부는 아연해졌다.
내리막길에 있던 전사들을 피떡으로 만들어버린 끔찍한 바위 석상.
그것은 도가의 시조인 태상노군의 머리였다.
“...저게 왜 여기서 나와?”